■ 보학/선현들의 묘.

전주류씨 5대 봉군 묘역 - 남양주시

야촌(1) 2012. 5. 19. 14:26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10호(2009. 10. 14지정)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548-1(별내동 산 210-1)에 있는 전주유씨(全州柳氏) 문중묘역이다.

 

 

 

전주류씨 묘역 입구의 홍살문

 

전주류씨 묘역(全州柳氏墓域) /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10호)

 

이 묘역은 전주류씨 오대봉군 묘역(全州柳氏 五代封君 墓域)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류영경(柳永慶, 1550~1608)과 그의 아버지인 문소전 참봉, 증영의정 전릉부원군(全陵府院君) 류의(柳儀, 1518~1576), 장자인 통진현감, 증영의정 전원군(全原君) 류열(柳悅, 1571~1612), 손자인 오위도총부도총관, 전창군(全昌君) 류정양(柳廷亮, 1591~1663)과 배위인 선조의 6녀 정휘옹주(貞徽翁主, 1593~1653), 증손 예조참판으로 증이조판서 전평군(全平君) 류심(柳?, 1608~1667)의 오대봉군 합장묘로 선대로부터 순서대로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있다.

 

류영경은 명종(明宗) 5(1550)년에 태어나 광해 즉위년(1608)년에 별세하였는데 1572년 춘당대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요직을 거친 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호성2등 공신으로 전양부원군에 봉군되고, 선조 37(1604)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배위는 창원황씨(昌原黃氏)로 동돈녕 응규(應奎)의 딸이다.

 

봉분은 원형으로 병풍석을 결구하였고, 봉분 앞에 상석, 향로석, 묘비, 석인, 망주석 등이 사대부가의 무덤 격에 어울리도록 정연하다. 일부 석물을 제외하고는 묘역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17세기 묘제의 시기적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류의의 묘표는 당대의 명필인 김현성(金玄成)의 글씨로, 형태적으로도 우수한 조각을 하여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전주류씨 묘역

 

팔약조

 

2008년 소북동일회에서 세운 팔약조. “조선 중기 당파 싸움으로 참화를 겪은 뒤 관련 집안 선비들이 모여 만든 게 팔약조(八約條)입니다. 정쟁을 멀리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지혜롭게 살 것을 다짐하면서 후손들에게 제시한 삶의 여덟 가지 지침이지요. ‘벼슬 하고 있을 때는 땅이나 밭을 사지 않는다’ ‘사사로운 곳에서 공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는 항목은 3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공직자들의 수칙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전주 류씨 전양부원군 종중’의 류양석(82·의학박사·사진) 회장은 대대로 내려온 팔약조를 돌에 새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류 회장은 14일 낮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의 전주 류씨 오대봉군 묘역에 있는 전양부원군 류영경의 묘소 앞에 팔약조비를 세웠다.

 

소북동일회는 선조 32년(1599년)에 생겨 지금까지 맥을 잇고 있다. 소북 후손인 28성(姓)·69가(家)가 혼인으로 혈연관계를 맺으며 칡넝쿨처럼 얽혀 있다. 그래서 모임의 결속력이 남다르다. 팔약조 정신은 소북 영수의 후손인 전주 류씨 집안은 물론 동일회 회원가 전체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북동일회는 지금도 매달 둘째 화요일에 모임을 열어 조상의 정신을 계승해 나가고 있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남규희 등 37명은 동일회를 현대적 모임으로 재결성, 민족의식 고취의 장으로도 활용했다.

 

광해군과 함께 대북세력이 저지른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위 등에 대해 북인에 뿌리를 둔 정파로서 일부분이나마 책임감을 가졌던 소북인들은 이후 벼슬에 나아가기는 하되 정치권력의 핵심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사는 행보로 반성했다. 이들의 성향은 1657년 소북파의 결성 당시 만들어진 ‘북보(北譜)’에 실린 ‘팔약조(八約條)’에 잘 드러난다.

 

첫째, 벼슬하여 조정에 나가면 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

둘째, 노인이 되면 조용히 살면서 손자들을 가르친다.

셋째, 어릴 때는 문 닫고 독서에 전념한다.

넷째, 벼슬에 있을 때는 땅을 사서 재산을 늘리지 않는다.

다섯째, 자녀들을 장가들이거나 시집보낼 때 상대편의 영화로움과 쇠락함을 가리지 않는다.

여섯째, 사사로이 있을 때는 국사(國事) 등 공적 발언을 삼간다.

일곱째, 이사할 때는 벌열(閥閱)들과 척신(戚臣)들이 사는 안국동 같은 곳으로는 가지 않는다.

여덟째, 비록 낙향할지라도 임금이 계신 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충청도 이남으로는 가지 않는다.

 

 

 

 

전주류씨 묘역 전경

 

 

 

묘비

 

"예조참판전평군류공심지묘"

묘갈명이 받침돌에 쓰여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선조의 서6녀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남편 전창위 류정량(柳廷亮)의 묘역 전경

 

선조의 여섯째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그 남편 전창위 류정량(柳廷亮)의 묘는 원래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3동 산 82번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이곳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로 이장됐다. 유정량은 영의정 유영경의 손자로 14세에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고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

 

전창군 류정량(柳廷亮,/전양부원군의 종손)과 정휘옹주(貞徽翁主, 1593년 ~ 1653년 음력 윤7월 15일/선조의 여섰째 딸)는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선조와 인빈 김씨의 막내딸이다.

 

이 묘는 부부 합장묘로 묘비는 홍문관부제학지제교 이민구『李敏求,1589년(선조 22) ~1670년(현종 11)』 가 짓고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 1616년(광해군 8)~1671년(현종 12)』 이 쓰고 1663년에 세워졌다.

 

 

근년에 세운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이 있다.

 

전창군 묘비

 

전창군 묘비 후면

 

전원군(全原君) 류열(柳 悅)과 정경부인 전의이씨 합장묘.

 

전원군 묘비

 

전원군 묘비 후면

 

 

 

전양부원군 류영경과 정경부인 창원황씨 합장묘

 

전양부원군 류영경 묘 천장시 부장품(副葬品) /사진 : 류병훈

1979년 의정부시에 있는 전양부원군(류영경) 묘를 남양주시 별내면에 있는 오대봉군묘역으로 이장(移葬)할 때 출토(出土)된 부장품(副葬品)으로 호리병형 2개, 발형 4개, 대접형 5개, 쟁반접시형 7개, 잔 3개 총 21개로서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전양부원군은 1550년(명종 5)에 태어나 1608년(광해군 원년)까지 살았던 문신이다. 소북(小北)파의 영수(領袖)였던 그는 선조 말에 영의정에 올랐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大北)파의 탄핵으로 경흥에 유배됐다가 사사(賜死: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남)됐다.

 

그 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됐다. 그의 400주기인 이날 후손들이 추념식을 열면서 팔약조비를 세운 것이다. 팔약조는 전양부원군이 세상을 떠난 지 49년 뒤인 효종 8년(1657년) 만들어졌다.

 

소북 후손 34명이 모여 정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얻었던 교훈을 바탕으로 선비 집안의 철학을 명문화한 것이다. 이 집안은 팔약조의 교훈을 잘 실천한 덕분인지 그 뒤 수많은 학자와 문장가를 배출했다.

 

동일회는 선조 32년(1599년)에 생겨 지금까지 맥을 잇고 있다. 소북 후손인 28성(姓)·69가(家)가 혼인으로 혈연관계를 맺으며 칡넝쿨처럼 얽혀 있다. 그래서 모임의 결속력이 남다르다. 팔약조 정신은 소북 영수의 후손인 전주 류씨 집안은 물론 동일회 회원가 전체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일회는 지금도 매달 둘째 화요일에 모임을 열어 조상의 정신을 계승해 나가고 있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남규희 등 37명은 동일회를 현대적 모임으로 재결성, 민족의식 고취의 장으로도 활용했다.

 

소북은 1600년대 초 북인으로부터 분파된 28개 성, 69개 가문으로 구성된 정파다. 1608년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했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1550∼1608)이 사사(賜死)한 무신옥(戊申獄) 이후 광해군을 지원한 대북과 유영경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뉘었다.

 

광해군과 함께 대북세력이 저지른 영창대군 살해, 인목대비 폐위 등에 대해 북인에 뿌리를 둔 정파로서 일부분이나마 책임감을 가졌던 소북인들은 이후 벼슬에 나아가기는 하되 정치권력의 핵심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사는 행보로 반성했다. 이들의 성향은 1657년 소북파의 결성 당시 만들어진 ‘북보(北譜)’에 실린 ‘팔약조(八約條)’에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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