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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씨 유래

↑표암재((瓢巖齋) / 所在地 : 慶尙北道 慶州市 東川洞 산 16번지 西紀1917年丁巳 2月27日 創建發起하여 期成會를 結成하고 8年에 걸친 공사로 江原道 강릉에서 大關嶺 白松을 水運하여 建立, 서기 1925년 乙丑에 竣工되었고 1971年에 重修하였다. 매년 3월 중정(中丁)에 시조 향사(享祀)를 모신다. ↑시조 탄생지 광림대(光臨臺) ↑시조 탄강지 표석비 ↑광림대 석혈(光臨臺 石穴) > 시조(始祖)께서 강림(降臨)하시어 목욕(沐浴)하신 곳으로 전(傳) 해 내려온다. ↑‘경주이씨 시조 발상지’ 라고 기록 하고 있다. ■ 경주이씨 유례 시 조 명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시조유래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박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으로서 부족들을 ..

‘허리케인 카트리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허리케인 커드리나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일련의 사진들이 외국 네티즌들 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캐나다인이자 아마추어 사진가인 네티즌 ‘da5id’은 8일 ‘허리케 인 카트리나’라는 제목으로 모두 9장의 사진을 외국의 사진 전문 사이트에 올렸다. 모두 비슷한 장소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는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가린 채 거대한 소용돌이를 치는 모습이나 어마어마한 양의 수분을 머금어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하늘 등을 담고 있다. 사진을 본 ‘RcktManIL’이라는 네티즌은 사진에 깊이 감명을 받은 듯 “이사진들은 정말 대단하군요. 사람들이 모두 이 사진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이적인 자연현상입니다”라고 적었다. 안타깝게도 사진을 직접..

마석으로 가는 길< '공동선'에 화이부동 기고글>

마석으로 가는 길 13년 전 네팔에서 돈을 벌기 위하여 마석이라는 낯선 땅에 왔던 한 청년이 며칠 전 한국생활을 청산하고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당초 15일간만 있겠다고 받았던 비자 기한을 훌쩍 넘겨 지금까지 불법체류를 하는 동안 혹독한 고생을 했던 이 청년은 마침내 수술도 받을 수 없을 만큼 온 몸에 퍼진 담낭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한국의 꿈을 접은 것이다. 그가 견딜 수 없이 아팠던 것은 온몸의 고통보다는 아마도 이 땅에서 받은 온갖 수모의 추억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떠나기 전날 마석의 성생교회에서 모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참석자 모두는 환송을 하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인생을 마감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마석을 가려면 잠실대교를 ..

세계적인 명소 "서울 청계천"

세계적인 명소 "서울 청계천" 2005년 10월 01일(토) 준공식 ↑청계천 개통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복원된 청계천은 하천 주변의 온도를 내 리고 각종 환경오염물질 농도도 감소시키는 등 벌써부터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 내고 있다. 화려한 조명속에 물이 흐르고 있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 미디어 센터(동아일보사) 앞 청계광장 ↑서울 도심의 빌딩숲 한 가운데를 가르며 시민들의 가슴을 탁 틔워줄 청계천이 10월 1일 공식 개통된다. 사진은 헐리기 이전의 고가도로가 있는 청계천(오른쪽)과 개통을 3일 앞 두고 시원스럽게 뚫린 청계천 모습 ↑2005년 09월 26일 공개된 청계천 양쪽 옹벽의 ‘소망의 벽’. 성동구 청계8가의 황학교와 비우 당교 사이에 설치된 이 벽은 시민 2만여 명이 각자 자신의 희망을 적..

관직 비교표

■ 관직 비교표(官職比較表) 기관 계급 조선국 품 계 정 부 기 관 입법부 일반 행정부 지 방 행 정 사법부 외무부 문교부 대 학 군 인 경 찰 정부투 자기관 대통령 국 회 의 장 대 법 원 장 영의정 정1품 국 무 총 리 좌의정 우의정 좌찬성 종1품 부총리 우찬성 판 서 정2품 장 관 차 관 국 회 의 원 장 관 차 관 도지사 대법원 판 사 장 관 차 관 장 관 차 관 교육감 대 장 본부장 좌참찬 우참찬 참 판 종2품 차관보 차관보 법원장 검사장 차관보 학 장 중 장 관찰사 1급 참 의 당상관 정3품 관리관 관리관 2호이상 관리관 관리관 소 장 관리관 목 사 도호부사 2급 집 의 종3품 이사관 국 장 이사관 4호이상판검사 이사관 부교육감 교 수 준 장 치 안 정 감 이 사 사 관 3급 군 수 정4품 부..

백기(白起)와. 왕전(王翦).

■백기(白起, BC ~ 257) : 진(秦)나라 장수. 조(趙)나라와 장평에서 싸워 대승(大勝)함. ▲백기(白起, BC~257) 초상화 조(趙)나라 장수 염파(廉頗)는 백전노장(百戰老將)이라 서두르지 않고, 방비(防備)를 튼튼히 하고 진나라가 지치기만을 기다리는데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군사비가 많이 들어 마냥 기다릴수만은 없다고 여겨 이간책을 쓰기로 한다. ‘염파(廉頗)는 늙고 겁이 많아 싸우려 하지 않는다. 진(秦)나라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조사의아들 조괄(趙括)이다.’라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리게 했다. 조왕은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믿고 조괄(趙括)을 장수로 하여 염파를 대신하게 하였다.조괄은 젊어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병법(兵法)을 배워 자기를 당 할 자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버지 ..

우리나라 성씨의 탄생

[성씨순위] 1.李씨, 2.崔氏 3.孫氏, 4.鄭氏, 5.裵氏, 6.薛氏, 朴氏 위 여섯 성인을 통합해 육대인 이라 칭하였습니다. 단 [朴氏]는 육 대인에 포함 되지 않습니다. ●아래 배열된 가로 순위는 성씨, 조상, 왕작를 배열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씨를 처음으로 부여받은 유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배열된 여섯 분의성씨를 일커러 육대인 즉 육촌장이라 불렀다. ●육 대인과 혁 거세 박씨의 시조의 공생관계 유래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표1 신라6부장 구분(區分) 성씨(姓氏) 시조명(始祖名) 자(字) 시호(諡號) 왕작(王爵) 양산부(楊山部) 이씨(李氏) 알평(謁平) 천서(天瑞) 문선(文宣) 은렬왕(恩烈王) 고허부(高墟部) 최씨(崔氏) 소벌도리(蘇伐道理) 당운(當雲) 충선(忠宣) 문렬왕(文..

도연명(陶淵明)과. 사안(謝安).

■ 도연명[陶淵明, 365~427, 東晉 말기부터 南朝의 宋때의 詩人 ▲도연명(陶淵明) 초상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淵明)은 자이다. 도연명(陶淵明)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官僚生活)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隱遁生活)에 들어간 시기(時期)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彭澤) 현령(縣令)이 된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退官)했다. 퇴관의 결정적(決定的)인 동기(動機)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해 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整齊)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進言하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 손가"라..

예양(豫襄)과 형가(荊軻)

■ 예양(豫襄)과 형가(荊軻) ●예양(豫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춘추전국시대 진(晋)나라 자객(刺客)으로. 처음에는 범(范)씨를 섬기다가 중행(仲行)씨를 섬겼는데 중용(重用)되지 못했다. 뒤에 지백(智伯)을 섬겼고 지백은 예양을 총애(寵愛)했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치려다가 조(趙), 한(韓), 위(魏)의 연합군(聯合軍)에 패망(敗亡)하여 죽고 지백의 땅은 조(趙), 한(韓). 위(魏)가 나누어가지고 지백의 해골은 조양자(趙襄子)가 옻칠을 해 요강으로 쓴다는 것을 알고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고 항상 비수를 품고 다녔다. 조양자(趙襄子)가 궁궐로 들어가 죽일 기회를 엿보았지만 들통이 났는데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당당하게 자기의 이름과 목적을 이야기 하니까 조양자(趙襄子)가..

왕희지(王羲之) - 중국의 첫째가는 서예가

■ 왕희지(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東晉)의 낭야(瑯邪) 린이[臨沂 :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縣)] 사람으로, 자는 일소(逸少). 동진(東晉)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그는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예가로서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書藝家)로 알려진 일곱 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 348~388)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