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민족의 뿌리

우리나라 성씨의 탄생

야촌(1) 2005. 9. 13. 16:59

[성씨순위]

1.李씨,

2.崔氏

3.孫氏,

4.鄭氏,

5.裵氏,

6.薛氏, 朴氏

 

위 여섯 성인을 통합해 육대인 이라 칭하였습니다.

단 [朴氏]는 육 대인에 포함 되지 않습니다.

 

●아래 배열된 가로 순위는 성씨, 조상, 왕작를 배열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씨를 처음으로 부여받은 유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배열된 여섯 분의성씨를 일커러 육대인 즉 육촌장이라 불렀다.

●육 대인과 혁 거세 박씨의 시조의 공생관계 유래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표1 신라6부장

구분(區分) 성씨(姓氏) 시조명(始祖名) 자(字) 시호(諡號) 왕작(王爵)
양산부(楊山部) 이씨(李氏) 알평(謁平) 천서(天瑞) 문선(文宣) 은렬왕(恩烈王)
고허부(高墟部) 최씨(崔氏) 소벌도리(蘇伐道理) 당운(當雲) 충선(忠宣) 문렬왕(文烈王)
대수부(大樹部) 손씨(孫氏) 구례마(俱禮馬) 경운(景雲) 충렬(忠烈) 문의왕(文義王)
진지부(珍地部) 정씨(鄭氏) 지백호(智伯虎) 인세(仁世) 문화(文和) 감문왕(甘文王)
가리부(加利部) 배씨(裵氏) 지타(祗沱) 즙문(葺文) 문양(文讓) 장렬왕(壯烈王)
명활부(明活部) 설씨(薛氏) 호진(虎珍) 백양(白楊) 무신(武信) 장무왕(壯武王)

 

[시조의 탄강=시조의 출생]

전한 무제 원수 6년 갑자년[단기 2217년]에 하늘에서 유대인[덕이 높은 여섯분]을 경주 땅에 탕강[임금이나 성인등이 출생 하는것]시켜 육촌의 장을 삼았다,

 

●첫째는>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니 촌장을 알평으로 처음 표암봉(瓢巖峰)에 강림 하였고

●둘째는>돌산(突山) 고허촌(高墟忖)이니 촌장을 소벌도리로 처음 형산(兄山)에 강림 하였고

●셋째는>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니 촌장을 구례마로 처음 이산(伊山)에 강림 하였다,

●넷째는>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니 촌장을 지백호로 처음 화산[花山=경주시 동북쪽 20리 지점]에 강

 

림하였다.

●다섯째는>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이니 촌장은 지타로 처음 명활산(明活山)에 강림 하였고

●여섯째는>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니 촌장은 호진으로 처음 금강산(金剛山)에 강림 하였다..

 

[입군왕=임금을 세움]

 

전한 선제 지절 원년 임자[단기2260년] 3월 1일에 여섯 분의 촌장과 더불어 양산기슭의 나정에 모였다가 숲 사이에 흰 말이 구부려 절하는 모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보니 흰 말은 보이지 않고 박[표주박]같이 생긴 큰 알이 있어 깨어 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이 점을 이상이 여긴 육촌장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이 아이가 13세가 됨에 모든 것이 우뚝하였다.

그 아이의 태어남이 신기하여 육대인은 그 아이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하니 즉 혁거세이다.

 

육촌장이 모두 좌명공신[佐命功臣=천명을 받아 임금이 될 사람을 도운공로가 있는 사람]이 되니 이때가 전한 선제 오봉 원년 갑자[단기2277년]여름 4월이다,

 

[사성=나라에서 성을 내려주는 것]

 

유리왕[儒理王=신라의 제3대 임금] 9년 임진[壬辰=서기 32)] 봄에 부명을 고칠 때에 육 대인의 후손에게 성을 내리니,

 

●양산부(楊山村)를 급양(及梁)으로 하고, 성을 이씨(李氏)로 주고

●고허부((高墟部)를 사양(沙梁)으로 하고, 성을 최씨(崔氏)로 주고

●대수부(大樹部)를 점양(漸梁)으로 하고, 성을 손씨(孫氏)로 주고

●우진부(于珍部)를 본피(本彼)로 하고, 성을 정씨(鄭氏)로 주고

●가리부(加利部)를 한지(漢祇)로 하고, 성을 배씨(裵氏)로 주고

●명활부(明活部)를 습비(習比)로 하고, 성을 설씨(薛氏)로 주었다.

 

[증시 맟 추봉]

법흥왕[신라22대 임금] 3년 병신[丙申=서기 516)]년에 육부장에게 시호을 추증하였고, 태종무열왕[신라의29대 임금] 3년 병진[丙辰=서기 6546)]년에 육부장을 왕으로 추봉 하였다,

 

●알평(閼平)의 자는 천서(天瑞)니 시호는 문선(文宣)이고 은열왕(恩烈王)으로 봉하였다.

●소벌도리(蘇伐道利)의 자는 당운(當雲)이니 시호는 충선(忠宣)이고 문열왕(文烈王)으로 봉 하였다.

●구레마(俱禮馬)의 자는 경운(景雲)이니 시호는 충렬(忠烈)이고 문의왕(文義王)으로 봉하였다,

●지백호(智伯虎)의 자는 인세(仁世)이니 시호는 문화(文和)이고 감문왕(甘文王)으로 봉하였다,

●지타(祇沱)의 자는 즙문(葺文)이니 시호는 문양(文讓)이고 장렬왕(壯烈王)으로 봉하였다,

●호진(虎珍)의 자는 백양(白楊)이니 시호는 무신(武信)이고 장무왕(壯武王)으로 봉하였다,

 

[철향(醊享)]

광복 후 24년 신해[서기1971년]에 경주의 관민이 육촌장의 개국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경주시 탑정동 나정리에 촌장각을 세워 묘는 입덕묘(立德廟)라고 하고 재(齋)는 양산재(楊山齋)라 하고 육촌장을 철향(醊享)하니 그 위차는

 

●첫째 알천양산 촌장이고,

●둘째는 돌산고어 촌장이고,

●셋째는 취산진지 촌자장이고,

●넷째는 무산대수 촌장이고,

●다섯째는 금산가리 촌장이고,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 촌장이다,

 

제사의 이름은 신라대제라 하고 향사일은 음력 8월 1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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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상고하건데 취산 진지촌이 육촌에 있어서 삼국사기에는 셋째로 기록 되였고 삼국유사에는 넷째로 기록 되였는데 이제 입덕묘의 철향[서원 사당] 위차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버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취하니 대개 유림의 중의를 쫓을 뿐이 아니라 또 삼국사기가 정사인 점을 중의 여긴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시조 혁거세 조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단기4377년 서기전57년] 4월 병진날[혹은 정월15일 이라고도함]에 즉위하여 와호를 거서간[귀인을 일커는뜻이다]이라 하고 그때 나이13세로 나라의 이름은 서나벌이라 하였다,

일찌기 조선의 유민[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간에 헤여저 여섯 촌락을이루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이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란 것이니 진한의 육부이었다,

 

고허촌장 소멸공이 하루는 양산 밑 나정 곁에 있는 숲사이를 바라본 즉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지라 가보니 말은 간데없고 다만 있는 것은 큰 알 뿐이었다,

 

알을 깨어 보니 한 어린아이가 거기서 나왔다, 곧 소멸공이 데려다가 길렀더니 나이10여세가 되매 유달리 솟아나게 일찍되었다, 육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이상하였던 까닭에 높이 받들더니 이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진인[진나라사람}은 박{표주박]을 박씨라 함에 처음 큰 알이 박과 같아 하여 박으로써 성을 삼았다, 거서간은 진인의 말에 왕이란 뜻이다,

 

●신라 본조 유리 마사 금조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양산부를 급양부로 하고 이씨를 주고

고허부를 사양부로 하고 최씨를 주고

대수부를 점양부로 하고 손씨를 주고

진지부를 본피부로 하고 정씨로 주고/

가리부를 한지부로 하고 배씨로 주고

명활부를 습비부로 하고 설씨를 주다,

때는 유리왕 9년 임진{단기2365년} 봄이다,

 

[삼국유사]

진한은 본래 진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들어오니 한에서 땅를 떼여 주었으니 이것을 진한이라 하고, 뒤에 신라의 서울이 되었으니 지금의 경주이다, 그리고 진한에 육촌이 있으니

 

첫째는 알천 양산촌장 알평이니 처음 표암봉에 내려와서 급양부 이씨의 조상이 되고,

둘째는 돌산고어촌장 소멸도리니 처음 형산에 내려와서 사양부 최씨의 조상이 되고,

셋째는 무산대수촌장 구례마이니 처음 이산에 내려와서 손씨의 조상이 되고,

넷째는 취산진지촌장 지백호니 처음 화산에 내려와서 정씨의 조상이 되고,

다섯째는 금산가리촌장 지타니 처음 명활산에 내려와서 배씨의 조상이 되고,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장 호진이니 처음 금강산에 내려와서 설씨의 조상 되었다,

 

[동국사]

조선 백성이 동해 가에 혜여저 육촌으로 나누어 살았으니 이것이 진한이다,

전한 선재 오동 원년 갑자[단기2277년, BC57년]에 육부의 장이 알천 언덕에 모여 의논하되 우리들이 임금이 없으니 덕이 있는 사람으로 임금을 세우자 하고 진지촌장 지백호공 등이 혁거세를 세워 임금을 삼고 진한[경주]땅에 서울을 정하였다,

 

유리왕 9년 임진[단기2365년, 서기32]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줄 때, 급양부를 이씨로, 사양부를 최씨로, 모양부를 손씨로, 진지부를 정씨로, 가리부를 배씨로, 명활부를 설씨로 주니 이것을 신라 육부대성 이라고 한다.

 

여기 까지가 육대인께서 처음으로 성씨을 부여받고 왕위를 진였던 기록입이다, 그리고 혁거세와의 동조상부 즉 육대인과 혁거세와의 두터운 친분관계가 형성 되어 있다는 기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