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경주 이씨 유래

야촌(1) 2005. 10. 29. 06:13

↑표암재((瓢巖齋) / 所在地 : 慶尙北道 慶州市 東川洞 산 16번지


西紀1917年丁巳 2月27日 創建發起하여 期成會를 結成하고 8年에 걸친 공사로 江原道 강릉
에서 大關嶺

白松을 水運하여 建立, 서기 1925년 乙丑에 竣工되었고 1971年에 重修하였다.

매년 3월 중정(中丁)에 시조 향사(享祀)를 모신다.

 

↑시조 탄생지 광림대(光臨臺)

 

↑시조 탄강지 표석비

 

↑광림대 석혈(光臨臺 石穴) > 시조(始祖)께서 강림(降臨)하시어 목욕(沐浴)하신 곳으로 전(傳)

    해 내려온다.

 

 

 

↑‘경주이씨 시조 발상지’ 라고 기록 하고 있다.

 

■ 경주이씨 유례

시 조 명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시조유래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박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 시켰고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 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의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李氏)라고 사성 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의 6부(六部) 중 알천양산촌(閼川陽山寸)을 다스렸다.
본관 창성유래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 이씨는 신라 말에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대체로 고려 초기(高麗初期)에서부터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여 벌족(閥族)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명현(名賢)과 학자를 배출시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혔다.
지명유래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 · 사로(斯盧)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道)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 (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