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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부부인 홍씨묘역(양절공 한확선생 배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에는 청주한씨 한확(韓確/1403~1456) 선생의 부인 묘가 있다. 한확선생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목단반개형(牧丹半開形) 명당에 있고, 부인은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다. 이는 부부지간이라도 명당을 찾아 일인 일묘(一人一墓)로 쓰겠다는 당시 청주한씨 가풍에 연유한다. 홍씨부인은 조선 초기 양촌 권근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인 한확의 부인이며 세조와는 사돈지간으로 인수대비(성종 어머니)의 어머니다. 인수대비는 세조대왕의 장남 훗날 덕종으로 추존되는 의경세자의 배위이다 의경세자가 20살에 요절하자 아우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예종도 19세로 요절하자 예종의 아들(인성대군, 제안대군)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제9대 성종으로 등극하게 한다. 그리고 의경세..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1.유방과 항우의 등장 유방(劉邦)/한나라 초대 황제 (BC256~BC195, 재위 BC206~BC195)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봉기는 일시적으로 좌절 되었지만, 그로부터 반년 후에는 다시 열화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이 투쟁의 지도권은 이미 농민의 지도자로 부터 지주 계급과 6국의 옛 귀족 세력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이다. 유방의 자는 계(季)이고, 패(沛, 지금의 강소성 패현) 출신으로 진나라때 사수(泗水)의 정장(치안 담당하는 하급 관리)을 지냈다. 그는 패에서 군사를 일으켜 점차 병력을 집결시킨 후 망탕산에 웅거하였다. 유방이 봉기 한것은 진승이 7월에 대택향에서 봉기한 두달 후인 9월이었다. 유방의 인상은 높은코에..

후예(后羿)

■ 후예(后羿)/ 전욱의 후예로 활을 잘 쏘았다 한다. ▲하나라의 후예(后羿) 운(妘) 성(姓)으로 전설은 전욱(顓頊)의 후예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하왕조는 우(禹)가 제후들을 거느리고 통치기반을 확립하였으나 향락을 즐기고 지나치게 수렵에 탐닉하는 등 황음무도한 생활로 나라는 그야말로 만백성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啓)가 죽은 후 그의 다섯 아들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동이족의 후예가 정권을 빼앗아 버렸다. 전설에 따르면 요시대에 10개의 태양과 알유(징승이름),착치(이빨을 뚫음),구영, 대풍, 구영, 봉희(큰 돼지)등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들이 있었다 한다. 추남자에는 구영을 죽여 흉수위에 놓고, 대풍을 말아 푸른 언덕 못에 앉 치고, 활로 10개의 태양을..

경주이씨 실전세계고찰.

■ 경주이씨 실전세계 고찰(失傳世系 考察) 1.실전세계란? 우리 경주이씨의 시조는 양산 촌장이고, 휘는 알평(謁平)이요, 신라건국 당시 육촌장 회의를 주재하셨고, 유리왕 9년(서기32년)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은 사실은 삼국사기(三國 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및 기타 여러 문헌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시조이후 원대손(遠代孫)의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까지, 대수(代數)는 물론 선대조(先代祖)의 휘자 (諱字)도 알 길이 없으니 이를 실전세계(失傳世系)라고 말한다. 2.오문(吾問)의 족보(族譜) 조선 중엽에 이르러 각 성씨들이 족보를 간행 하였는데, 우리 경주이씨도 1613 년경 광양현감 종언(宗彦) 선생께서 동종계(同宗契)를 창설하였는데, 백사(白沙)선생이 쓰신 서문만 전해 올 뿐이..

고육지책(苦肉之策)

■ 고육지책(苦肉之策) 苦(괴로울고), 肉(고기육), 之(어조사지), 策(꾀책)자로 제몸을 상해가면서 까지 꾸며내는 방책 이라는 뜻으로 후한말(後漢末)에 오(吳)나라의 손권과 형주의 유비가 연합하여 위(魏)나라 조조의 대군을 맞아 싸우는 적벽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을 목전에둔 연합군의 총 사령관 주유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당해 낼수가 없게되있었다. 바야흐로 기상 천외한 방책이 필요했었다. 그의 진영에는 채중, 채화, 형제가 있었다. 조조가 주유의 계략에 빠져 그들의 형 채모를 참살하고 크게 후회한 나므지두 사람을 달래어 거짓으로 항복 시킨후 오나라로 밀파한 자들이었다. 물론주유가 그것을 모를리 없었지만 역이용하기 위하여 일부러 모른척 하고 있었다..

과하지욕(袴下之辱)

■ 과하지욕(袴下之辱) 袴(사타구니과),下(아래하),之(어조사지),辱(욕되게할욕)字로 기어서 가랑이 밑을 빠져 나갔다는 말로서, 굴욕을 참는일, 큰 뜻을 품은 사람은 쓸데없는 일로 승강이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또는 인욕(忍辱),치욕(恥辱)을 참는다는 뜻으로 큰일을 위해서는 목전의 작은 이익에 현혹(眩惑)되어서도 아니 되지만 꿀욕(屈辱)또한 참고 견뎌낼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아들을 삶은국을 주왕(紂王)으로 부터 받아 마신것이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에서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스스로 부하되기를 자청하고 말똥을 치우고 심지어는 오왕(吳王)부차(夫差)의 대변을 찍어 맛보았던 것도 대사(大事)를 위해서는 인욕(忍辱)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

國士無雙(국사무쌍)

■ 國士無雙(국사무쌍) 國(나라국), 士(선비사), 無(없을무), 雙(쌍, 쌍)字로 나라안에 견줄만한 자가 없는 인재라는 뜻으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일컫는 말이다. 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한 한왕 원년의 일이다. 당시 한군(漢軍)에는 한신(韓信)이라는 군관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초군(楚軍)에 속해 있었으나 항우에게 실망하여 초군을 이탈, 한군에 투신한 자이다. 그 후 한신은 우연한 일로 재능을 인정받아 군량을 관리하는 치속 도위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직책상 승상인 소하(蔬何)와도 자주 만났다. 그래서 한신이 비범한 인물 이라는 것을 안 소하는 그에게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무렵, 고향을 멀리 떠나온 한군은 향수에 젖어 도망치는 장병이 날로 늘어나는 바람에 사..

허 난설헌 묘(許蘭雪軒墓)

■ 허난설헌 묘 경기 기념물 제90호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광주선영지 묘역 및 허난설헌지묘 입구 표석이다 ↑이장하기 이전의 허 난설헌의 묘지 모습이다/(2002. 8. 29. 영환(문) 제공)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인하여 부득히 현위치에서 좌측으로 약 500m 지점인 안동김씨 선산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허난설헌 묘(許蘭雪軒 墓)의 측경(側景) ↑허난설헌 묘(許蘭雪軒 墓) ↑건너 중부고속도로가 보인다.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의 중부고속도로 옆 경수산 기슭에 있다. 처음 그녀의 묘는 지금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현 위치인 안동김씨 선산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녀의 묘소 ..

어려운 남편노릇.

옛말에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말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요즘 많은 젊은이들은 처가살이를 마치 재테크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처가댁 주변에 살면서 도움 받는 부부들이 늘 어 나는 추세다. 아마 장가가서 남편이 되긴 했지만 경제적으로 남편노릇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꺼다. 하기야 딸도, 자식인데 능력 있는 처가댁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그게 무슨 허물이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행여 시댁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살고 싶어 하는, 며느리들의 얄팍한 이기심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 아니겠는가!? 아뭍은 오늘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 지면서 출산 및 육아 등의 문제로, 시댁이 아닌, 일시적 처가살이가 아주 자연스런 현실로 변해 버린게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여성들이 각 사회분야에서 세심..

■ 기타/칼 럼 2007.03.03

교토 ''야사카신사''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신라 신의 제사 터 교토 ''야사카신사'' 세계일보 | 입력 2007.02.21. 09:16 교토는 지금도 일본 왕실 문화의 중심 터전이다. 어머니가 백제인인 50대 간무천황이 794년 처음 왕도를 개창한 곳이 교토(헤이안경) 땅이다. 그의 부왕인 49대 고닌 왕(770∼781 재위)도 백제인('대초자' 1158)이다. 이곳에는 현재도 고대 왕궁인 '교토어소'가 자리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금도 교토를 '부조(父祖)의 땅'이라며 도쿄에서 서쪽 부조의 땅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아사히신문' 1999년 11월7일). 그는 2001년 12월23일 기자회견에서 "간무 왕의 어머니 고야신립(高野新笠, 和新笠) 태후는 백제 무녕왕(501∼523 재위)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