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일본사(日本史)

교토 ''야사카신사''

야촌(1) 2007. 2. 28. 01:00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27>신라 신의 제사 터 교토 ''야사카신사''

 

세계일보 | 입력 2007.02.21. 09:16

 

교토는 지금도 일본 왕실 문화의 중심 터전이다. 어머니가 백제인인 50대 간무천황이 794년 처음 왕도를 개창한 곳이 교토(헤이안경) 땅이다. 그의 부왕인 49대 고닌 왕(770∼781 재위)도 백제인('대초자' 1158)이다. 이곳에는 현재도 고대 왕궁인 '교토어소'가 자리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지금도 교토를 '부조(父祖)의 땅'이라며 도쿄에서 서쪽 부조의 땅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아사히신문' 1999년 11월7일). 그는 2001년 12월23일 기자회견에서 "간무 왕의 어머니 고야신립(高野新笠, 和新笠) 태후는 백제 무녕왕(501∼523 재위)의 왕자 순타태자의 직계라는 것이 '속일본기'(797년 일본왕실 편찬 역사서)에 알려져 있으므로 내게도 한국과의 혈연이 있다"고 밝혔다.

 

 

↑가까이서 본 야사카 신사(八板神社) 정문

 

교토에서 가장 오랜 신사는 '야사카신사(八坂神社)'이다. 교토 동쪽 산으로 이름난 '히가시야마'(東山) 산기슭 '기온 거리'를 끼고 있는 명소다. 이 사당의 신은 신라신 소잔오존(素盞烏尊·스사노오노미코도)이다. 소잔오존의 다른 칭호는 우두천왕(牛頭天王·고즈텐노).

 

 

↑교토의 동쪽 기온(祇園) 지역의 상징인 야사카신사(八坂神社) 전경

 

'일본서기'는 머리가 여덟 개 달린 못된 뱀을 퇴치하고 예쁜 구시이나다히메를 구출해 부인으로 삼았다는 소잔오존을 신라 우두산(牛頭山)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 이즈모(出雲) 땅으로 온 영웅적인 개국신으로 부르고 있다.

 

소잔오존의 신주(神主)를 일본으로 옮긴 사람은 고구려 사신 이리지(伊利之·이리시)다. 야사카신사의 옛 기록 '유서기략(由緖記略)'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사이메이 왕(齊明 655∼661 재위·백제계 여왕) 2년 고구려사신(調進副使) 이리지가 신라국의 우두산에 계신 소잔오존을 교토 땅(山城國八坂鄕)에 모시고 와서 제사지내게 됐다. 이리지는 왕실로부터 팔판조(八坂造·야사카노미야쓰코)라는 성을 받았다".

 

'일본서기'는 "사이메이천황 2년 8월8일에 고구려에서 대사 달사(達沙)와 부사 이리지 등 모두 81명이 왔다"고 간략하게 전한다. 많은 인원이 일본에 건너간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는 제29대 무열왕(654∼661 재위), 고구려는 제28대 보장왕(642∼668 재위), 백제는 제31대 의자왕(641∼660 재위) 시대였다. 다음은 야사카신사에 예로부터 전해 오는 고문서 '야사카어진대신지기'의 기록이다.

 

"사이메이 왕 2년에 한국의 조진부사 이리지사주(伊利之使主·이리시노오미)가 다시 일본에 왔을 때 신라국 우두산의 신 소잔오존을 모셔와서 제사드렸다."

 

 

↑신라신 소잔오존과 아내 구시이나다히메. 신라인 화가 '거세금강'이 그린 벽화

(마쓰에, 야에가키신사 경내)다.

 

이리지의 두 번째 방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소잔오존의 신위(神位)를 야마시로(山城·현 쿄토시 야사카신사) 터전으로 모셔 왔다.

일본 NHK TV가 1996년 5월20일 "야사카신사를 고구려대사로도 부른다"고 보도한 속사정이다.

 

교토 야사카신사에서 매년 7월17∼24일(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음력 6월7∼14일) 열리는 '기온마쓰리'(祇園祭)는 소잔오존의 신주를 받드는 행사로, 일본 최대의 제사 축제다. 수십만 인파로 교토 거리가 출렁댄다.

 

신라신 신주를 고구려 사신이 옮겨온 이유는 무엇일까. 야사카신사의 마유미 쓰네타다(眞弓常忠) 궁사(宮司·최고 신관)는 "그 배경을 기록한 사료가 없어 아직 규명이 불가능하다"면서 "다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리지의 장남 마테(眞手)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왔다"고 2002년 7월12일 필자에게 밝혔다.

 

본래 교토의 기온사라는 사당 터였던 야사카신사는 전국에 7만8965사(2006년 통계)를 지역 신사로 거느리고 있다.

이들 지역 신사도 해마다 마쓰리를 거행한다.

 

일본 신도대학인 고가쿠칸대 신도과 교수를 역임한 마유미 쓰네타다 궁사는 지난해 필자에게 소잔오존의 본 터전인 강원도 춘천과 고령 등을 답사한 기행문('일본 건국신·백제 신라에서 건너온 흔적 확인')을 보냈고, 필자는 이를 번역해 월간지('신동아' 2006년 2월호)에 발표했다.

 

 

↑야사카신사 경내로 오르는 신자들 모습.

 

교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서울의 상징물이 '숭례문'이라고 한다면, 교토의 상징물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히가시야마 남쪽 기슭에 우뚝 솟은 오중탑(五重塔)이다. 교토의 사진·그림에는 5중탑이 어김없이 들어간다. 이 5중탑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역시 이리지였다.

 

이리지는 언덕 기슭에 호칸지(法觀寺)라는 사찰을 세웠다. 이 호칸지를 야사카지(八坂寺)라고도 부른다.

이 절터의 5중탑뿐 아니라, 바로 그 아래쪽의 야사칸신사도 이리지가 소잔오존의 신령을 모시느라 세웠던 '기온사'라는 사당 터전이다.

 

야사카신사라는 명칭은 뒷날 일제가 '기온사'의 사당 명칭을 개명한 데서 비롯됐다.

일본에서는 사당을 신사와 신궁 등으로 부른다. 신궁(神宮)이라는 말은 신라에서 생긴 큰 규모의 묘(廟)를 가리키는 말이다('삼국사기').

 

'마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을 맞이하는 '강신(降神) 맞으리'에서 생긴 말이다.

인간들은 거룩한 신을 맞이해 제사를 모시게 된다. 일본 각 지역에 있는 신사와 신궁도 해마다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신령을 모신 가마(神輿·미코시)를 메고, 가마꾼 수십명이 '왔쇼이, 왔쇼이' 하고 구령을 드높이 외치면서 큰거리를 누벼댄다. 그들이 소리지르는 '왔쇼이'는 다름아닌 신이 "오셨다"(お出になった)라는 의미의 한국어다."(重金碩之 '風習事典', 啓明書房 1981)

 

교토 야사카신사의 '기온마쓰리'는 구경꾼들로 성시를 이루는 가운데 가마꾼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가마꾼들은 '야마'(山車) 또는 호코(矛)라고 부르는 4개의 큰 나무바퀴가 달린 집채 같은 수레들을 끌고 밀고 뛰어달린다. 이 '야마'라는 대형 수레마다 소잔오존의 신주를 모셨다.

 

 

↑그 옛날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세운 교토의 상징탑인 호칸지 사찰 5중탑(왼쪽),

기온 마쓰리.

 

기온마쓰리에 참가하는 교토 각 지역 대표인 가마꾼들은 신령을 모신 큰 수레들을 정해진 차례대로 거세게 몰면서 거리를 행진한다. 민속학자 니시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1900∼71) 교수는 "기온마쓰리에 등장하는 야마와 호코는 오전 8시쯤 나타나기 시작한다. 야마는 모두 14대(본래는 13대), 호코는 6대이다. 야마의 지붕에다

 

양날 창을 세운 것을 호코라고 부른다. 호코를 행렬의 선두에 세우고, 제비 뽑은 순서대로 대로를 행진한 뒤에 각기 자기 고장으로 헤어진다. 행진하는 것은 첫날인 7월17일과 마지막날인 24일이다"('年中行事辭典' 1958)라고 기록했다. 일본의 3대 마쓰리는 교토의 기온마쓰리, 오사카의 덴만마쓰리(天滿祭)와 도쿄의 칸다마쓰리(神田祭)이다.

 

기온마쓰리가 일본에서 가장 큰 제례 축제인 까닭은 기온사가 마쓰리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오사카의 텐만마쓰리나 도쿄의 칸다마쓰리는 바로 기온사의 기온어령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고 보면 기온마쓰리는 한국신 우두천왕제(祭)다.

 

이런 마쓰리 전통 문화는 한국인 왕들이 왜나라를 지배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명한 민속학자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雄 1875∼1962)는 기온마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토에서는 기온(祇園)이라는 보기 드문 이름의 신(神)이 음력 6월 마쓰리의 중심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천왕(天王)님이라고 했는데, 기온을 우두천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온 지 오래됐다.

천왕 또는 기온을 모신 사당이 없는 고장에서도 마쓰리만은 음력 6월 똑같은 날 거행해 오고 있다."

('日本の祭' 弘文堂書房 1946)

 

야나기타 구니오의 지적처럼, 야사카신사가 없는 조그만 고장에서도 기온마쓰리 때는 나름대로 소잔오존의 신주를 모시고 기온마쓰리를 거행한다. 야나기타 구니오는 소잔오존을 '기온이라는 보기 드문 이름의 신'이라고 했으나 그 뿌리는 고대 신라에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진흥왕 27년 2월 '기온사'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 사신 이리지는 일본 옛 문헌에 '야사카노 미야쓰코(八坂造) 이리좌'(伊利佐·이리사)로도 표기되나 이리좌는 이리지와 동일 인물이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815년 편찬)에도 "야사카노 미야쓰코는 고구려인 이리지"라고 적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