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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겸 선생 묘.

■ 추탄 오윤겸선생 묘(楸灘 吳允謙先生 墓) 오윤겸선생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산5번지 양촌 해주오씨(海州吳氏) 선영 서남향에 위치해 있다. 근래에 후손들이 묘역을 새로 단장하였다. 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청호공 희(暿)의 현손인 26世 첨사공(僉使公) 응화(應華)의 장녀(長女)]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에 호석 (護石)을 둘렀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져 있고, 상석 전방에는 동자석이 좌우에 갖추어져 있다. 동자석 전방에는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좌우에 비치되 있다. 묘비는 화강암으로서 풍우에 의하여 비문의 마모가 심하다. 비좌는 축면에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 모서리에는 복련 (覆蓮)이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총높이 292cm, 비높이 226..

신숙주선생 묘(申叔舟 先生墓)

↑소재지>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산53-7 ↑신숙주선생 영정 ●신숙주(申叔舟)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덕린(德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포시(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2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

21世 之帶 漢城 判尹公 遺墟碑銘.

■ 한성 판윤공 유허비 명(漢城 判尹公 遺墟碑 銘) / 二十一世 본종 종형 지음(本宗 鍾瀅 撰) /벽오공(碧梧公 九代 嗣孫) 경주읍(慶州邑)에서 남쪽으로 약 육십리(六十里)에 아늑한 마을이 있으니 중리(中里)라고 한다. 옛날 죽은 이공(竹隱 李公)이 살았는데, 그 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위, 아래 오백년(五百年) 사이에 풍우(風雨)와 성상(星霜)이 여러번 변천되고 산천(山川)과 능곡(陵谷) 옮기었으니 지난일이 아득하여 찾아볼 흔적이 없었다. 어느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모공(某公)이 일찍이 이 마을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부노(父老)들이 모두 공경 할줄을 알고, 지나는 자 까지도 돌아보고 바라보며 발걸음을 멈추었으니, 대개 공을 사모하여 잊지 않았고 땅도 공을 얻어 소중하게 된것이다. 공(公)..

개성 선죽교엔 언제쯤 자유로이 다닐수....^^

● 달라진 개성시내. 개성 시내는 지난해 5월 방문 때보다 더화사한 모습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북쪽이 본 격적으로 개성 관광을 준비하고 있는것 아니냐는 관측을 하기도 했다. 아스팔트는 피치를 다시 깔은듯 깔끔했다. 상당수 상점의 간판들은 아크릴로 장식한 ‘반짝이 간판으로 갈았으며, 살림집의 깨진 유리들도 새 유리로 바뀌어 있었다. 개성상점 등을 비롯해 몇몇 건물은 분홍빛 페이트로 단장돼 있었다. 상점들도 몇개 늘어났다. 고려민속박물관 앞에는 남쪽 손님을 겨냥한 것처럼 보이는, ‘우표수집가상점’이라는 새 건물이 들어섰다. 북쪽 판매원은 “오늘 문을 열었다”며 우표책을 사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또 시내에는 개성고려인삼판매소도 들어섰다. ‘군밤· 고구마 상점’이란 간판을 단 빨간색 간이건물도 새롭게 눈에 띄었..

김상용선생 묘(金尙容先生 墓)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선생 묘 경기도 기념물 제99호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좌측에 김상용(金尙容) 선생의 묘역이 있으나 잘 눈에 띄지 않아서 지나치기 쉽습니다. 좌측의 작은 언덕에 비각이 보입니다. 비각을 올라서 뒷편을 보면 10여기 정도의 묘가 있습니다. 묘역 우측 하단에는 신도비가 서 있으며, 신도비 머릿돌의 조각이 정교합니다. 김상용 선생의 묘는 묘역 중앙 상단에 있으며, 봉분에 호석은 최근에 보수하면서 두른것 같습니다. 묘역 앞에는 묘지와 상석이,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서 있습니다. 묘역에 별 다른 특징은 없습니다. ↑김상용선생 묘 ↑김상용선생 신도비 조선 선조·인조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국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선생의 묘소이다. 선조 23년(..

김상용과 김상헌 선생 형제 묘.

■ 문충공 김상용과 문정공 김상헌 석실서원(石室書院)은 문충공 김상용(1561∼1636)과 문정공 김상헌(1570∼1652)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656(효종4) 지방유림의 뜻을 모아 창건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원중의 하나이다. 형제 간인 두 사람은 모두 병자호란 때 충절을 지킨 인물들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ㅣ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상헌은 병자호란때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다가 중국 심양까지 볼모로 잡혀갔는데 그곳에 서도 결코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남양주시 수석동에 '석실서원지'라고 새긴 화강암 비석만 남아 있는 석실서원은 창건된 이후 양주를 비롯한 경기 일원 유림의 근거지이자 조선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