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허 난설헌 묘(許蘭雪軒墓)

야촌(1) 2007. 3. 5. 12:58

■ 허난설헌 묘

 

경기 기념물 제90호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광주선영지 묘역 및 허난설헌지묘 입구 표석이다

↑이장하기 이전의 허 난설헌의 묘지 모습이다/(2002. 8. 29. 영환(문) 제공)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인하여 부득히 현위치에서 좌측으로 약 500m 지점인 안동김씨 선산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허난설헌 묘(許蘭雪軒 墓)의 측경(側景) 

 

↑허난설헌 묘(許蘭雪軒 墓) 

 

↑건너 중부고속도로가 보인다.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의 중부고속도로 옆 경수산 기슭에 있다. 처음 그녀의 묘는 지금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현 위치인 안동김씨 선산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녀의 묘소 왼쪽에는 어린 나이에 돌림병으로 죽은 딸과 아들의 무덤이 나란히 있으며, 바로 위에는 남편 김성립의 묘가 있다. 그녀의 묘소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상석과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는데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근래에 만든 것이다.

 

또한 ‘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라 새긴 묘비도 최근 묘역을 단장할 때 문인들이 만들어 세웠다고 하니 정부인(貞夫人)이라는 품계도 그녀의 사후 400년 뒤에 받은 셈이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허난설헌 묘비(許蘭雪軒墓碑) 

 

난설헌((蘭雪軒)의 묘비에서 보듯 증 정부인양천허씨지묘(贈 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고 외줄로 써져 있으니, 혼자 외롭게 누워있다. 허지만 뒤쪽 계단으로 한 번 더 올라가면 남편 김성립(金誠立)의 묘가 있다, 난설헌 사후에 새로 맞이한 남양홍씨(南陽洪氏) 부인과 합장으로 모셔저 있다.

 

원래 이장전의 묘소에서 부터 난설헌묘는 따로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살아서 남편과 살가운 정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듯!

죽어서도 남편 곁에 눕지 못하고 외로이 홀로 누워 있으니 그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 없다.

 

 

↑난설헌 자녀 묘

 

그 외로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난설헌의 묘 앞에는 작은 봉분 둘이 나란히 있으니, 어린나이에 세상을 등진 어린 두 자매의 무덤이다. 딸아이를 먼저 앞세우고, 다음 해에 또 아들을 앞세웠으니 가슴을 도려낼 그 애통함은 어느 누가 짐작할 수 있으랴. 자식 잃은 어미의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조카들을 잃은 외삼촌도 그 슬픔의 무게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다.

 

이에 손아래 누이인 난설헌 에게 직접 시를 가르쳤던 오라버니 하곡(荷谷) 허봉[許篈-1551년(명종 6)∼1588년(선조 21)]은 조카의 무덤에 넣을 묘지에 애통한 자신의 마음을 글로 남겼다. 

 

 

↑난설헌 자녀 묘비

 

희윤(喜胤)의 묘지(墓誌).

 

지은이 : 외숙 허봉(許篈)

 

태어나서 이삭도 피워보지 못한 아이 희윤아!

아버지는 성립(誠立)이라 하니 나의 매부(妹夫)이고,

할아버지는 瞻(첨)이라 하니 나의 벗이다.

 

눈믈을 흘리며 희윤(喜胤)이를 위하여 명(銘)을 짓나니

밝고 밝은 그 얼굴

맑고 맑은 그 눈

만고의 슬픔을

한줄기 울음에 부친다.

 

 

 [原文]

喜胤墓誌(희윤묘지)

 

苗而不秀者喜胤(묘이불수자희윤)

父曰誠立余之妹壻也(부왈성립여지매서야)

祖曰瞻余之友也(조왈첨여지우야)

 

涕出而爲之銘曰(체출이위지명왈)

皎皎其容 晳晳其目(교교기용 석석기목)

萬古之哀 寄一哭(만고지애 기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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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자(哭子)

 

지은이 : 허난설헌

 

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거년상애녀 금년상애자)

哀哀廣陵土 雙墳相對起(애애광능토 쌍분상대기)

蕭蕭白楊風 鬼火明松楸(소소백양풍 귀화명송추)

紙錢招汝魄 玄酒尊汝丘(지전초여백 현주존여구)

應知弟兄魂 夜夜相追遊(응지제형혼 야야상추유)

縱有腹中孩 安可冀長成(종유복중해 안가기장성)

浪吟黃臺詞 血泣悲呑聲(랑음황대사 혈읍비탄성)

 

아들의 죽음에 곡하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 테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킨다.

 

[주]

-지전(紙錢): 무당이 비손할 때에 쓰는 돈 모양으로 잇대어 둥글게 오려 만든 긴 종이 오리(비손: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신에게 소원을 비는 일)

 

-무술: 제사 때 술 대신으로 쓰는 찬물. 현주(玄酒)

 

-황대사: 당의 장회태자(章懷太子) 현(賢)이 지은 노래. 황대과사(黃臺瓜辭)라고도 한다.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

  꿈속에 광상산에 노닐다.                   

 

碧海漫瑤海(벽해만요해)

푸른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찬 달 아래에......(雨田 辛鎬烈 譯)



현실에서 남편인 김성립(金誠立)과의 불화, 고부 갈등, 어린 자식들의 죽음과 유산 등, 그야말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들로 가득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위와 같은 시로 승화시켰다.

 

넓고 넓은 세상 천지에 하필이면 조선이라는 좁은 곳에 태어나고, 조선에서도 하필이면 여인으로 태어나고, 많고 많은 남자들 중에 하필이면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게 된 세 가지의 한을 품은 난설헌 허씨.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 "부용꽃 스물이라 일곱 송이 차디찬 달 빛 아래 붉은 빛 떨어뜨린다."는 시를 남기고 스물 일곱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옛말이 생각난다. 

불운의 여인 허난설헌!

 

 

●비운의 친정 가족들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년(중종 12)∼1580년(선조 13)]은 강릉부사(江陵府使-從三品),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正三品). 오늘날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 만든다는 '초당두부(草堂豆腐)' 로 유명한 곳으로 이 동네 이름이 바로 허엽(許曄)의 호(號)인데, 허엽의 재취(再娶) 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난설헌(삼남매중 허균은 막내), 천재소리를 듣던 그들의 생애는 한결같이 굴곡지고 험난했다.

 

 

●허봉(許篈)

허엽(許曄)의 둘째아들 허봉[許篈-1551년(명종 6)∼1588년(선조  21)]은 유배와 유랑의 삶 끝에 30대의 나이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막내 아들 허균[許筠-1569년(선조 2)∼1618년(광해군 10)]은 세상을 바꾸고자 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역모로 잡혀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연인(기생 매창을 말함)과 함께 서시에서 무참하게 참형을 당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허엽(許曄) 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은 다섯살에 한시를 지었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스물일곱에 의문의 죽음을 맞아야 했던 한결같이 시대와 불화하며, 숙명적인 이단아의 삶을 살다 비극적 생애를 마친 이들의 자매들이다.

 

특히 한 여인으로 태어나 스물일곱으로 요절하기 까지 난설헌(蘭雪軒)이 겪은 쓰라린 세월은 절절히 가슴이 아파오고, 똑 같은 강릉에서 태어나 똑같이 출중한 재능을 타고났으나, 신사임당과 난설헌(蘭雪軒)의 생애는 너무나도 다르다.

 

알다시피 사임당(師任堂-1504(연산군 10)~1551(명종 6)은 조선조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훌륭한 내조와 성공적인 자녀 교육으로 남편과 아들을 다 출세시킨 현모양처의 표상이어서 시대를 뛰어넘어 우러름을 받는다.

 

그러 당대 최고의 명망가요 문한가 였던 초당 허엽(許曄)의 딸로 태어난 허초희(許楚姬), 난설헌(蘭雪軒)은 대 시인이며 고귀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빛나는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 고독과 한의 짧은 스물일곱 해를 살고 요절한 난설헌은 아버지와 오빠들 모두 짧은 삶을 살다간 비운의 가족사이다.

 

허난설헌은 동생들의 글 읽는 소리 낭랑하던 친정집을 떠나 열네살의 출가(결혼)와 함께 그의 비극은 시작 되었는데, 아무리 정신연령이 조숙하던 시대였다 해도, 열 네다섯의 나이는 부인이기 보다는 아직 소녀가 아니던가!?

 

더욱이 그녀는 시인이었고 아직은 시 짓고 책 읽고 싶은 꿈 많은 소녀였다. 그러나 조선조의 움직일 수 없는 조혼 제도속에서, 그녀는 발걸음 하나에서 예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하는 반가의 며느리여야 했고, 시부모 공양하고 남편 받드는 부덕에 한 치의 오차가 없어야만 했다,

 

그리고 남편과 대화가 통하고 서로 각별히 사랑 했다면, 그런것은 문제가 될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한 여인으로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더욱이 남편과 문학적 감성이나 예술세계의 교감은 더더욱 어려웠고, 남편 역시 선비이기는 하나 아내에게 늘 열등감을 가진데다, 술과 여자를 멀리하지 못한 문약한 사람이었으니, 그는 밖으로만 돌았고 시어머니와의 칼날 같은 갈등의 나날은 또 얼마나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을까!?

 

그리고 모든 희망을 다 걸었던 두 자녀를 잇달아 잃었는데다  

뱃속에 있던 아이마저 그만 잃고 말았다 하니,

 

문학의 스승으로 마음에 의지했던 오빠 '허봉[許篈-1551년(명종 6)∼1588년(선조 21)]' 마저 요절하게 되면서

그녀의 좌절과 시름은 깊어만 갔을것이다,

하여 그녀의 유일한 삶의 의지는 詩 였고, 유일한 벗 또한 詩였으니,

 

그녀는 아마도 시로서 세상을 벗어나 천상으로 갈수 있었고

시로서 꿈결같이 이상적 남성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詩는 시일뿐,

아무리 체온을 불어 넣어도

문자에는 온기가 없고 생명이 없었던 게지......

 

그래서 시인들은 시로서 위안을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로 인해 절망을 일삼기도 하는 거다.

마침내 어느 날에 그녀는

 

"내 모든 작품을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누구보다 누이의 죽음으로 슬픔에 찬 허균은 

마치 전설의 고향에서나 만나볼 것 같은 애절한 이야기인지라

널리 보급하여 그님을 높이 기리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가족들이 마지막 망자의 원대로 시를 불태우고 난 뒤에야

홀연 정신을 수습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주옥같은 글들이 다 불태워버려진 뒤,

허균(許筠)은 본가와 친정에 흩어져 잇던 누이의 시편들을 수집하고

 

암송하고 있던 누이의 시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여

누이의 시집을 꾸미게 되었다는데,

 

자신의 스승 유성룡[柳成龍-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의 발문(跋文)을 받아 처음 '난설헌고(蘭雪軒稿)'를 편집 하면서 비로소 비운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이 되살아 난 것 인데, 허균(許筠)은 때때로 누이 난설헌(蘭雪軒)으로 부터 시작훈도를 받으면서 누이의 재능에 놀라곤 했다는데 그녀가 여자의 몸으로만 나지 않았던들 조선의 예원 백사로 추앙받을 인물임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 존경하던 누이가 지아비를 잘못 만나 한을 남기고 간 사실에

애통하고 슬프했다는 난설헌의 시를 읽다보면 그녀의 시는,

아픈 현실을 잊고 꿈의 세계를 쫓는 낭만성과 함께

 

어쩔 수 없이 그 아픈 세월을 토해 내는 경향의 두 가지를 느낄 수 있다.

일 예로, 

두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잃은 모정의 자괴[自壞 : 외부의 힘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무너짐]와 오열을 그녀는 " 곡자라는 시에서 일기처럼 쓰고 있다.

 

 

●여류시인 허난설헌

 

본명 허초희(許楚姬, 1563∼1589). 호는 난설헌(蘭雪軒) , 자는 경번(景樊)이다.

난설헌 이란 호는 난초의 청순함과 눈의 깨끗한 이미지를 따서 지은것이며 경번이란 중국위

여신선 으로 알려진 번부인(樊夫人)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다

 

1563년(명종18)에 강릉에서 조선시대 선조때의 문신 초당 허엽의 3남 3녀중 셋째딸로 태어나 글재주가 뛰어나 8살때에 이미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천품으로 신동으로 알려진 것은 당대의 석학이던 아버지로부터 형제들과 똑같이 글을 익혔다.

 

큰 오라버니 허봉은 자신의 친구였으며 당대의 최고 시인이던 손곡 이달에게 여동생 설헌의

시 교육을 부탁하면서 그의 재능이 발굴되고 꿈 많은 소녀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15세에 일찍이 서당 김성립에게 출가 하였으나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치를 않았고 남편은 과거에 낙방을 거듭하며 아내를 멀리하게 되었고 며느리의 글재주가 뛰어난 것에 대한 시어머니의 불편한 심기로 고부간의 사이도 순탄치를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가 객사를 하게 되고 허난설헌 마저 두명의 아이를 잃고 난뒤 정신적 지주였던 오빠 허봉 마저 객사하기에 이르자 허난설헌은 1585년(선조17)에 26세때 자기의 죽음을 예언한 듯 시[몽유광산산]를 지었다

 

碧 海 浸 瑤 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 鸞 倚 彩 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 蓉 三 九 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 月 霜 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27세가 되던 3.19일 아무런 연유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오늘은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으며 집안 가득한 그의 유품집은 불교 의식에 따라 모두 불태워 졌으며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혔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가슴에 담은 꿈을 피워보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온

그는

1. 하필 조선에서 태어나게 되었는가?

2. 왜 여자로 태어나게 되었는가?

3. 많은 남자들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라는 3가지의 한을 품고 살았으며 기구한 운명을 헤쳐나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 뒤 5년뒤에 남동생 이었던 허균이 누이의 시를 모아 [허난설헌] 초고를 만들었으나 허난설헌 의 남편 김성립은 1592년에 임진왜란때 전사하자 허균은 기회를 기다려 1598년 정유재란때 명나라에서 원정 온 문인 오명제에게 시200여편을 주었던 것이[조선시선]과 [열조시선]에 실리게 되었다.

 

1606년(선조39년) : 허균은 이 해 3월 27일 명나라 사신 으로 왔던 시인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모아서 전해주어 『난설헌집』은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간행되었으며 다음해 4월 허균은 난설헌 집을 목판본으로 출간하였으며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그의 작품이 명성을 떨치게 되자 다시 1711년에는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허난설헌 연보

 

1563년 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 8세 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

 

1577년 선조 10년, 15세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에게 출가를 하게 된다.

1580년 선조 13년,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객사했다.

 

1582년 선조 15년, 20세 때 전 해 1579년 딸을 잃고나서 또한 아들 희윤을 잃는다.

곡자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애닳게 그린 詩이다.

 

1583년 선조 16년, 21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1588년 선조 21년, 26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한다.

 

1589년 선조 22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히게 된다.

1589년 선조 22년, 남편 김성립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남양 홍씨와 재혼한다.

 

1590년 선조 23년, 동생 허균이 친정에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592년 선조 25년,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사한다.

 

1598년 선조 31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1606년 선조 39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 선조 40년,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간행.

 

현재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 언덕 안동김씨 묘역에 있다. 1986년 5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 90호로 지정되었다.

 

 

↑허난설헌 영정(1차 제작본)

 

◇ 작가 : 손연칠(동국대 미술과 교수)

◇제작 및 지정 년도 : 1997년

◇크기 : 110cm(가로)* 150cm(세로)

◇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  

 

 

↑허난설헌 영정(2차 제작본)

 

  작가 : 손연칠(동국대 미술과 교수)

◇ 제작 봉안일 : 2009. 9. 19

봉안 장소 : 강원도 강릉 초당 생가(模)

원본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

 

 

↑남편 김성립 묘(金誠立 墓)

 

↑남편 김성립의 묘비(金誠立墓碑)/증 이조참판 행 홍문관저작(正八品) 관직이다.

 

↑좌측이 김성립(金誠立)의 조부 김홍도 묘(金弘度 墓)이고 우측은 김성립(金誠立)의 아버지 김 첨(金 瞻)의 묘이다.

  지월리 묘역의 제일 상단에 위치함.

 

↑김성립(金誠立)의 조부 김홍도 묘(金弘度 墓)

 

↑증 영의증 홍문관전한김홍도묘비(贈 領議政弘文館典翰金弘度 墓碑)/

  ※홍문관전한벼슬은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의 종삼품(從三品) 관직이다.

 

●김홍도(金弘度)/허엽의 아버지

 

1524(중종 19)∼1557(명종 12). 조선 초기의 선비화가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원(重遠), 호는 남봉(南峯)·내봉(萊峯). 대사헌을 지낸 희수(希壽)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노(魯)의 아들이다.

 

1548년 문과에 장원하고 경연관을 거쳐 전한(典翰)으로 있을 때, 소윤이었던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글씨를 잘 썼고, 또 그림에도 능했다고 하지만 유작은 없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허엽

허엽(許曄, 1517. 12. 29 ~ 1580. 2. 4)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요 성리학자로,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나식(羅湜), 이여(李畬),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언적을 사숙하였으며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명종 때 관직에 올랐으며 동서 분당 때는 동인에 가담하였다.

 

문과급제 후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掌令) 때 재물을 탐하였다가 파면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 1560년 대사성, 1562년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었다.

1562년 경연관 재직 중 윤근수·구수담(具壽聃)·허자 등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다시 파직 당했고 1563년 초 복직되고 곧이어 삼척부사로 부임하였으나, 과격한 발언 때문에 문제가 되어 다시 파직되었다.

 

그 뒤 복직하여 1568년(선조 1)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에 올라 향약(鄕約)의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을해 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시작될 때 동인에 가담했다.

 

이후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나 재물 문제로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강릉 초당의 맑은 물로 두부를 만들어 초당두부의 기원이 되었다. 허균과 허봉, 허성, 허난설헌의 아버지이며 의성 허준에게는 8촌 형이 된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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