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04월. 05일 ~ 1950년(납북), 호(號)는 국사(菊史). 일명 하영(夏英).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와 미국인 남 감리교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서울의 신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목사로 취임하여, 경성종교교회(京城宗橋敎會)의 주임목사로 재직하였으며, 광성소학교(光成小學校) 부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정춘수(鄭春洙)· 박희도(朴熙道)· 이승훈(李昇薰) 등과 연락하여 고종의 국장을 기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의하였다. 개성 남성병원(南星病院)의 동생 은영(殷英)과 김지환(金智煥) 등의 도움으로 개성지방의 연락을 담당하는 등 3·1운동 때,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일제에 잡혀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인 1920년 부인 이명희(李明姬)가 의연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고 《독립신문》등을 배포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사건으로 역시 일제에 잡혔다. 1923년 2월 유진태(兪鎭泰)· 백관수(白寬洙)· 정노식(鄭魯湜) 등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회에 참여하여 물산장려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1926년 11월 비타협주의적 민족주의 진영의 단체인 조선민흥회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이러한 공개적 활동 외에도, 1929년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비밀결사 흥업구락부사건으로 6개월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조선민족당 당수로서 정당통합운동에 참여, 1945년 12월 22개 정치단체가 해소통합한 신한민족당의 정치국장 및 참의를 맡아 활동하였다.
1946년에는 정치대학기성회장, 신탁통치반대총동원회 위원, 대한독립촉성협의회 부회장, 독립전취전국대회 회장, 민족청년당 전국위원 등을 역임하고, 12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에 선임되었다.
1947년 12월 중간파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였으며,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 후 1956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지냈고, 1960년 9월 2일 병사하였다고 한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00년 11월 15일 준공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에 붙은 국사(菊史). 오화영(吳華英)선생의 편액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