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장계향 - 정부인 안동장씨

야촌(1) 2013. 10. 29. 22:02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이 때 이름은 명명이라기보다는 명성에 가깝다. 명명이든 명성이든 간에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사람은 너무나 많다.

 

명명은 있되 명성이 없다면 그 이름이 역사의 기록에 남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명성이 있어도 명명이 불분명한 사례도 많다.

우리 역사 속의 여인들은 대부분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아버지의 딸로, 남편의 아내로, 아들의 어머니로 일컬어졌다.

부계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울타리 속에서 그 존재가 명명되어 왔다.

그래서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에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이 없었다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변별적 존재로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의 이름이 없던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남성들에 종속된 듯이 여겼기 때문이고, 출가 후에는 택호(宅號)를 부여받아서 사용한 탓이다.

 

단아한 서체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음식디미방』(일명 『규곤시의방: 閨壼是議方』)은 최초의 한글조리서다.

나는 이 조리서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에 의한 실학적 저술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자신의 경험을 주축으로 하여 한글로 썼기 때문에 눈에 보이듯이, 손에 잡힐 듯이 표현할 수 있었고, 그래서 다수의 여인들이 쉽게 읽고 따라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실학정신이다.

 

이 책의 필사본이 1960년에 경북대학교 김사엽 교수에 의해 학계에 소개된 이래, 오랫동안 그 저자는 갈암 이현일의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安東張氏: 1598~1680)로만 알려져 왔다. 정부인은 안동 서후면 금계마을 출신으로 성리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외동딸이었다.

 

그런데 2002년도에 나는 학술조사를 통하여 정부인의 이름이 ‘장계향’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고증하였다. 당시에 경북 북부권 종가의 사당을 통하여 ‘조상관(祖上觀)’에 대해 연구하던 중이었다.

 

사당에 대한 학술적 조사를 승낙해주신 종가에 가서 살림집과 사당의 관계, 사당의 배치원리, 사당에 모셔진 불천위(不遷位) 조상의 신주, 사당에서 올리는 의례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조사하였다.

 

그러다가 2002년 4월 1일에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석계 이시명(1590~1674) 종택에서 정부인의 이름을 발견하였다. 그 전에 『음식디미방』에 대해서 연구한 적이 있었기에, 이 조리서를 지은 옛 여인의 이름을 발견하였을 때는 정말 가슴이 벅찼다.

 

당시 이름을 문중 관계자께 곧바로 알려드렸고, 이어 영양군청에도 알렸다.

2004년에는 사당에 대한 연구결과를 다룬 논문에서 처음으로 장계향이라는 이름을 공식화하였고, 2012년에는 그 이름이 실명이라는 고증을 하여 다시 학계에 제출하였다.

 

 

장계향이란 이름은 부군 석계 이시명이 불천위였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었다.

불천위란 길이길이 추앙하기 위하여 4대 봉사가 아니라 자손만대로 모시는 훌륭한 조상이다.

 

부계사회다보니 부군이 불천위로 추대되면 부인도 동시에 불천위가 된다.

그래서 신주가 지금까지 사당에 모셔져 왔고, 정부인의 이름을 신주에서 찾을 수 있었다.

 

조상을 상징하는 신주는 전신(前身)과 후신(後身)의 이중구조로 만들어졌다.

전신의 표면은 희게 분칠이 되어 있다. 바로 이 전신 분면에는 조상의 신상정보를 세로 한 줄로 적고 그 왼쪽 옆에 봉사자(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

 

그러니 봉사자가 바뀔 때마다 전신 분면의 기록은 고쳐서 적어야 한다.

후신 앞쪽으로는 함중(陷中)이라 하여 직사각형의 커다란 홈이 파져 있고, 여기에 또 조상의 신상정보를 적는다. 함중에 적은 기록은 봉사자가 바뀌어도 고쳐 적을 것이 없다.

 

세월이 흘러도 함중에 적은 기록은 장례 당시 그대로다.

전신의 기록이 공식적인 형식에 가깝다면, 후신의 기록은 비공식적인 느낌이 든다. 족보에서조차 밝히지 않는 여성의 이름을 적는다는 사실도 그러하다.

정부인 신주의 경우, 전신 분면에는 “顯先祖妣 贈貞夫人安東張氏神主” 그리고 그 왼쪽 옆줄에 작은 글씨로 “十三代孫燉奉 祀”라고 적혀 있다. 함중에 기록된 내용은 “朝鮮故宜人安東張氏諱桂香神主”였다. “조선의 사망한 의인 품계의 안동장씨로 이름 계향의 신주”라는 뜻이다. 정부인이 돌아가실 때까지만 해도 품계가 의인이었다.

 

사후에 아들 이현일이 높은 관직에 올랐기 때문에 “증정부인(贈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물론 정부인의 이름을 발견할 때 석계 이시명의 선배위 광산김씨의 이름도 함께 발견하였으니, 김사안(金思安)이었다. 임진왜란 때 안동의병장을 지낸 근시재 김해의 따님이다.

 

장계향이라는 이름이 실명이라는 근거는, 이름 앞에 적힌 ‘휘(諱)’라는 글자에 있다.

사람의 이름은 ‘아명’이라는 아이 적 이름, ‘초명’이라 하여 변경하기 이전의 이름, ‘보명’이라 하여 족보에 기록된 이름, ‘실명’이라 하여 실제로 사용된 이름 등으로 구분된다. 남성들의 비문, 행장 등을 봐도 실명 앞에 ‘휘’자를 붙이는 것이 관례다.

 

조선 중기의 다른 여성들의 이름도 불천위 신주 속에서 찾아진다.

퇴계 이황의 선배위 이름은 신주에 없지만 후배위는 권숙정(權淑貞)이고, 퇴계의 제자였던 임연재 배삼익의 배위는 남난방(南蘭芳)이고, 서애 류성룡의 배위는 이순향(李舜香)이었다.

 

그리고 서애의 제자였던 상주 출신의 사서 전식의 배위는 최옥란(崔玉蘭)이었다.

불천위 신주라고 하더라도 부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신주에서 여성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이름의 기록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더불어 존재의 개별성에 대한 인식에 따른 것 같다. 정부인 안동장씨라는 칭호로는 개별성이 부족하다. 복수의 인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아무리 세월이 지내도 조상을 개별적으로 인식한다. 개개인의 이름을 따로 밝힐 때 조상을 개별적으로 인식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제 『음식디미방』의 저자를 개별성이 살아있는 정부인 장계향이라 하면, 조리법도 훨씬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이다.

 

글쓴이 배영동 교수는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문화인류학) 학위를 받았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및 박물관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현재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 BK21 플러스 사업팀장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