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최북(崔北)

야촌(1) 2013. 10. 3. 11:55

■ 최북(崔北)

 

1712(숙종 38)~ 1786(정조 10).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거기재(居基齋)·성재(星齋)·삼기재(三奇齋)·기암(箕庵)·기옹(奇翁)·좌은(坐隱)·반월(半月)·호생관(毫生館). 아버지는 계사(計士) 상여(尙餘)이다.

 

1747년(영조 23)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가로 일본에 다녀왔다. 서울의 여항(閭巷) 출신으로 이익(李瀷)·이용휴(李用休)·신광수(申光洙)·신광하(申光河)·정범조(丁範祖)·이광사(李匡師)·강세황(姜世晃) 등 당시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소론계 지식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문사지식의 표방에 따른 초세적(超世的) 친자연주의의 실천과 함께 사의적(寫意的)인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하는 등 시·서·화를 겸비한 조선 후기의 본격적인 직업화가로서 활약했다.

 

만년에는 박지원(朴趾源)·유련(柳漣)·남공철(南公轍) 등 북학적(北學的) 성향을 띤 지식인들 및 여항시인 이단전(李亶佃), 화원 김홍도(金弘道) 등과도 교유했다. 키가 몹시 작았던 그는 매섭고 괴팍한 성격과 오만하고 기이한 행동 때문에 광생(狂生)으로까지 지목을 받으며 많은 일화를 남긴 화가로도 유명하다.

 

〈서상기 西廂記〉·〈수호전 水滸傳〉 등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하며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존경했다고 한다. 강세황과 더불어 심사정(沈師正)·정선(鄭歚) 다음의 대가로 손꼽혔던 그의 유작들은 산수·화조·초충(草蟲)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당시 사람들은 '최메추라기'라고 불렀다고도 하나 산수화에 가장 능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심사정과 강세황의 남종화풍을 토대로 보다 치졸한 듯하면서 소박하고 정감어린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만년에는 거칠고 분방한 기질과 상통되는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개성을 이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미법산수도 米法山水圖〉와 〈사시팔경도화첩 四時八景圖畵帖〉, 개인 소장의 〈한강조어도 寒江釣魚圖〉와 〈공산무인도 空山無人圖〉·〈풍설야귀도 風雪夜歸圖〉 등이 있다.

 

 

최북 초상(1712~미상) - 이한철 작/개인소장 품

 

메추라기를 잘 그렸고 산수화에 뛰어났다. 영조23년(1747)에서 24년 사이에 일본통신사를 따라 다녀왔다. 조선의 고흐란 별칭이 따라 다녔다.권력자 한 사람이 그림을 그려 주지 않는다고 협박하자 문갑위 필통에서 송곳을 거내 한쪽 눈을 멀게한뒤 "차라리 내 자신을 자해할 망정 남에게 구속받지 안겠다"고 했다.

 

최북.김명국 장승업을 조선 3대 기인화가로 일컬엄. 

 

 

↑이한철이 그린 최북(崔北)의 초상화

 

 최북(崔北)의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아래 글은 KBS “명작스페셜” 최북(崔北)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을 정리한 내용이다.

 

최북(崔北)

君不見崔北雪中死(군불견최북설중사) / 그대는 못 보았는가,

최북이 눈 속에 죽은 것을 초구백마수가자(貂裘白馬誰家子) / 초구 입고 백마를 탄 사람은 뉘 집 자제인가

 

汝曹飛揚不憐死(여조비양불련사) / 너희들 마음대로 비아냥거리다 죽는 것은 안타깝지 않지만

北也卑微眞可哀(북야비미진가애) / 최북은 비천하나 정말로 애달프구나.

 

北也爲人甚精悍(북야위인심정한) / 최북은 사람됨이 심히 날카롭고 사나와

自稱畵師毫生館(자칭화사호생관) / 스스로 화사 호생관이라 일컬었다.

 

軀幹短小眇一目(구간단소묘일목) / 작은 몸집에 한 눈은 멀어

酒過三酌無忌憚(주과삼작무기탄) / 술이 석 잔이 넘으면 거리낌이 없었다.

 

北窮肅愼經黑朔(북궁숙신경흑삭) / 북쪽으로 숙신까지 갔었고 흑삭까지 거쳤고

東入日本過赤岸(동입일본과적안) / 동으로 일본에 들어가 적안도 지났었다.

 

貴家屛障山水圖(귀가병장산수도) / 귀한 집 병풍의 산수도

安堅李澄一掃無(안견이징일소무) / 안견과 이징을 모두 쓸어 없애 버렸도다.

 

索酒狂歌始放筆(색주광가시방필) / 술 찾아 미친 듯 노래하고서 붓을 놀리면

高堂白日生江湖(고당백일생강호) / 크고 높은 집에 밝은 해가 강과 호수에 떠오른다.

 

賣畵一幅十日飢(매화일폭십일기) / 열흘 동안 굶주리다 그림 한 폭을 팔고는

大醉夜歸臥城隅(대취야귀와성우) / 몹시 취해 밤길에 돌아가다 성 모퉁이에 쓰러졌도다.

 

借問北邙塵土萬人骨(차문북망진토만인골) / 묻노라, 북망산의 진토된 만인 사람들이여

何如北也埋却三丈雪(하여북야매각삼장설) / 어찌하여 최북이 세 길 눈 속에 묻혔야 하는가.

 

嗚呼北也身雖凍死名不滅(오호북야신수동사명불멸) / 아아, 최북은 비록 얼어 죽었지만, 이름은 사라지

지 않으리라

 

[신광하(申光河)]

● 미치광이 화가 최북(崔北)이 제눈을 찌르다.

 

최북(崔北)에 대한 미술사가들의 최근 연구를 보면 그는 1712년생으로 되어 있다.

숙종대에 태어나 정조대까지 살다가 겨울밤 홑적삼 입고 눈구덩이에서 동사했다는 말도 있고 여관에서 죽었다고도 전한다.

 

이름의 “北” 자를 반으로 쪼개면 “칠칠(七七)” 글자가 되므로 자(字)를 칠칠(七七)이라 했고 호(號)는 붓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가는털 호(毫), 날생(生) 여관관(館) 자를 사용하여 호생관(毫生館)으로 불렀다.

 

그리고 칠칠(七七)인 자(字)를 따라 “七×七=49이므로 사십 구세에 죽었다' 라는 소문이 전하고 있지만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아무튼 그의 삶과 죽음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최북은 한미(寒微)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양반부자집의 회계를 담당하였다.

최북 같은 하층민은 양반사회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이 가슴속에 꽉 차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일수록 술을 좋아했다.

최북의 주량은 평균 하루에 막걸리 대여섯 되었다.

술을 7되를 사서 다 먹고 난후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언제나 취해 비틀거렸으며, 오두막에서 종일 산수화를 그려야 추운 겨울에 아침저녁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대신 가난한 이에게는 백동전 몇 닢에도 선뜻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러나 양반이나 세도가가 최북에게 그림을 부탁할 때 최북(崔北)이 거절하자,

그의 그림솜씨를 트집 잡자“세상이 나를 알아 안주니 내가 나를 버리겠다” 하며 제 손으로 한쪽 눈을 찔러버려 애꾸눈이 되었다.

 

최북은 뛰어 넘을 수 없었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울분과 좌절로 정신 분열증을 일으키기도 했다.

최북은 담홍색과 청색 그리고 짙고 옅은 먹색의 꾸밈없는 붓놀림을 즐겼다.

 

농(弄) 삼아 부른 별호가 최메추라기 일 마큼 그는 중국산 꿩 보다는 메추라기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또 “중국과 조선이 다른데도 조선인은 중국의 산수만 좋아한다. 조선인이라면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비판하기고 했다.

 

최북의 그림은 조선 땅 어느 화가 못지않게 허허로웠고 발가벗고 솔직했다.

자잘한 세상의 법도나 일체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최북이 이 시대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오기뿐이었다.

최북의 그림은 많이 움직이는 것이 특이하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그림에 표현한 것이 역동으로 나타난 것 같다

최북의 그림은 산수화로 읽기 보다는 그 사람의 격정과 생각과 내면을 표현하였다.

 

최북은 자아의식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으로 전해진다.

최북은 성격이 칼끝 같았고 무협지인 수호지를 좋아하고 내기 바둑을 좋아하다고 전한다.

 

최북은 키가 작고 성격은 괴팍했으며 눈은 고양이 눈과 메추리 눈을 닮아서 그의 어머니가 “최메추리”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다는 말도 전한다. 어느 때는 산수(山水)를 그려달라고 청한 사람이 최북이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어찌 물은 없고 산만 그려주냐고 이의를 제기하자.

 

최북은 “종이 바깥은 모두 물이다”라고 했다.

최북의 그림세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가 저술한 농업정책과 자급자족의 실학적 경제론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최북이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수묵화가 묘한 경지에 들었다고 했다.

 

조선화가들은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가 유행하였다.

지두화(指頭畵)는 화가들이 한번씩 하고 싶은 미술 기법이다.

 

손가락 손톱 손바닥 등 손의 모든 부분을 사용해서 그린다.

서양화에서는 손가락으로 그린 것이 많다,

 

손가락으로 그리면 종이와 몸이 직접 만난다.

머리와 얼굴에 먹물을 칠하여 머리로 그리는 것은 당(唐)나라 때 이미 있었다.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는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 화다

최북은 중국의 지두화법을 답습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자신만의 개성을 살렸다.

 

최북이 붓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그린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

"양배추와 셀러리만을 그리더라도 나는 그림으로 살아간다"고 한 빈센트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최북 역시 고흐처럼 붓 하나만 붙잡고 살았다.

 

반 고흐도 광기로서 스스로의 귀를 자르고 결국에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권총자살한 반고흐는 지금도 명화의 전시회를 통하여 우리 곁에 살아 있지만, 최북은 열흘을 굶다가 그림 한 폭 팔아 술을 사 마신 날 겨울 성곽의 삼장설에 쓰러져 죽었다. 그러고는 교과서에서조차 찾기 어렵다.

 

이것이 이 나라 위대한 예술가들이 후세에 받는 대접이다.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은 당나라 시인 유장경(劉長卿709~785)의 오언절구(五言絶句)인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눈을 만나 부용산에서 유숙하며)에 나오는 한 구절(句節)인 “바람 불고 눈 오는 이 밤 그 누가 돌아오는고”라는 시구(詩句)를 중심으로 한 그림이다.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

日暮蒼山遠(일모창산원) / 날이 저물어 푸른 산은 먼데

天寒白屋貧(천한백옥빈) / 차가운 하늘밑 시골집이 쓸쓸하다

柴門聞犬吠(시문문견폐) / 사립문에 개짖는소리 들리더니

風雪夜歸人(풍설야귀인) / 눈보라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

 

[유장경(劉長卿)]

화제(畵題)가 말해 주듯 매우 거친 필치(筆致)로 단숨에 그린듯하여 천재성(天才性)이 없다면 그리기가 불가능한 그림이자 낭만적인 서정(抒情)이 붓 끝에 흠씬 배어 있어 호생관(毫生館)의 고집 세고 비극적인 광기(狂氣)어린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호방(豪放)한 작품이다.

 

“한국미술 5천년전”에 출품되기도 한 호생관(毫生館)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붓질이 대단히 거칠면서 힘이 넘쳐 한마디로 호쾌(豪快)하고 거침없는 호생관(毫生館)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는 이 그림은 마치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라도 들리것 같은 생생한 분위기가 전해오고 있다.

 

특히 살을 에는 듯 한 겨울바람에 나무가 한쪽으로 쓰러지는 느낌과 흰 눈에 덮인 먼 산의 풍경, 얼어붙은 개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상하게도 고요하고 따사롭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동자와 아이 같은 인생을 살다간 최북 !

300주년이 지난 지금에도 최북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별로 없다고 한다.

 

그의 유작만 130점 남아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전북 무주에 최북 미술관을 건립 중이다.

 

 

↑최북(崔北), <풍설야귀인>,종이에 연한 색, 66.3×42.9cm, 개인소장

 

↑최북(崔北)의 '나무 아래 인물'

 

초옥산수도.(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최북(崔北)의 표훈사도(表訓寺圖), 지본담채. 38.5× 57.3cm,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