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151

조비(曹丕).

■조비(曹丕, 187~226) - 조조의 장자 자(字)는 자환(子桓), 시호(諡號)는 문제(文帝)로 중국 삼국시대위(魏) 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씨(劉氏)씨가 낳은 조앙(曹昻)과 조삭(曹鑠)이 모두 일찍 죽고, 그의 어머니인 변씨(卞氏)가 황후(皇后)가 되어 조조의 적장자(嫡長子)가 되었다. 조조는 원소에 대항한 관도전투(官渡戰鬪: 중국 후한(後漢) 말기 화북(華北)의 2대 세력이던 원소(袁紹)와 조조(曹操)의 일대결전)에서 승리한 뒤 위공이 되었고, 216년에는 위왕으로 봉해져 사실상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하지만 조조는 220년 뤄양[洛陽]에서 사망했고, 조비가 그 뒤를 이어 후한(後漢)의 헌제(獻帝)에게서 양위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중국 한(漢: B..

조조(曹操).

■ 조조(曹操 : 155~220) ↑조조(曹操)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시조로, 자는 맹덕(孟德),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보저우[亳州]에 해당하는 패국(沛國) 초현(譙縣) 출신으로서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가 된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두각을 나타내었고, 동탁(董卓)이 죽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武略)을 휘두르게 되었다. 200년 군벌의 최대 세력이었던 관도군의 맹주 원소(袁紹, ?~202)를 관도(官渡)의 대전에서 격파하였다. 화북(華北)을 거의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하였으나 208년 손권(孫權)· 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대패하였고..

반고(班固) - 중국 후한시대의 문관·역사가(『漢書』를 著述 ).

■반고(班固, 32년~92년) - 중국 후한시대의 문관·역사가(『漢書』를 著述) ▲반표(班彪) ▲반고(班固) 아버지 "반표(班彪)"가 시작하여 아들 "반고(班固)"가 집필하고 여동생 "반소(班昭)"의 마무리로 한(漢)나라의 역사서 "한서(漢書)"가 탄생하였다. ▲반소(班昭) 반소(班昭, 45년 ~ 116년)는 중국 후한의 시인으로, 자는 혜희(惠姬) 또는 혜반(惠班)이다. 생애 반표(班彪)의 딸이자 반고(班固)와 반초(班超)의 여동생으로, 14세에 조세숙에게 시집을 갔던 관계로 조대가(曹大家)로 불리었다. 남편이 죽은 후 궁정에 초청되어 왕족들을 가르쳤다. 반고가 죽자 유지를 이어 《한서》를 완성하였다. 《전한서》 편찬에서 가장 복잡했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와 천문지(天文志)"는 반소가 완성한 것이..

반초(班超) _ 후한(後漢)의 장군.

■ 반초(班超) ↑반초(班超) 중앙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지배권(支配權)을 재확립했다. 역사학자 반고(班固:32~92)의 동생으로 일찍이 학문의 길을 포기(暴棄)하고 군무(軍務)에 뜻을 세웠다. 73년 중국의 북쪽 국경지역을 침략하던 흉노족을 평정하기 위해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여 흉노족 내부에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신속하게 임무를 완수했으나, 3년 후 소환되어 그의 노력들은 좌절(挫折)되었다. 몇 년 후 그는 다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고 곧 타림 분지 전체(지금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를 장악(掌握)했다. 91년 서역도호(都護)가 되었고 파미르 고원을 가로질러 카스피아 해 연안(沿岸)까지 정복(征服)했다. 그의 지배지역(支配地域)과 로마 제국 사이에는 파르티아(지금의 이란)만이 가로놓여..

장건(張騫). 소무(蘇武). 이릉(李陵)

■ 장건(張騫,? ~ BC114)- 한무제(漢武帝)때의 신하. 처음으로 서역을 개척함. 목숨 내걸고 13년간 서역 탐방으로 동서양의 물꼬를 튼 한나라의 외교관이다. ▲장건(張騫) 한무제(漢武帝)는 흉노(匈奴)에 대한 효과적(效果的)인 공격을 위해 서역(西域)의 월지와 제휴할 목적으로 장건(張騫)을 사신(使臣)으로 파견(派遣)하였다. 장건은 중도에 흉노에 붙잡혀 억류(抑留)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대완국(大宛國), 대월지(大月氏), 대하국(大夏國)등의 서역제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장건(張騫)의 서역파견은 2차에 걸쳐 실시되는데, 그의 장기간에 걸친 탐사(探査)의 결과 서역의 사정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중국과 서역 간에는 인적, 물적인 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비단길로 불리는 아..

공손홍(公孫弘) - 한무제(漢武帝) 때의 宰相.

■공손홍(公孫弘) ▲원고생(轅固生) ▲공손홍(公孫弘) 유교(儒敎)를 중국의 공식적인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는데, 이바지한 학자로. 곡학아세(曲學阿世 : 바르지 못한 학문으로 세속의 인기에 영합하려 애씀)의 양면성을 보인 인물. 제(齊)나라 사람이다. BC 124년 그는 학자인 동중서(董仲舒)와 함께 최초의 태학(太學)을 세웠다. 이곳은 미래의 관리들을 양성하고 심사하는 유가 학교로 후대에 실시된 과거제도의 선구가 되었다 군주는 도량(度量)을 넓게 하려 힘쓰고 신하는 검소(儉素)함을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평소의 지론(持論). 문제(問題)를 제기(提起)하되 결론(決論)은 황제(黃帝)가 내리도록 하고 타인(他人)과의 론쟁(論爭)은 피(避)했다.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을 듯한 안건(案件)은 다른 사람과 아뢰..

조자룡(趙子龍)

■조자룡(趙子龍) 조자룡(168 ~ 229)은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상산군 진정현[常山郡 眞定縣 : 지금의 허베이성 정딩현(正定縣)] 출신이기 때문에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이라고도 부른다. 신장이 8척이나 되었으며, 자태나 안색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지' 촉서 관장마황조전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에 이어 조운전이 나오는데 그는 말석의 장수가 결코 아니다. 조자룡은 창을 쓰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무예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유비가 그를 가리켜 “자룡은 담덩어리”라고 했을 정도로 매우 용감했다. 때는 적벽대전이 있기 전 조조가 강남을 공격하여 유비가 쫓길 때의 일이다. 조조의 대군이 몰려오니 중과부적이라 유비군은 신야를 버리고..

위환공(衛桓公)

■위환공(衛桓公, BC 734 ~ 719) - 위(衛)나라의 12대 군주 선군 위장공(BC 757~735)은 부인 장강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진후(陳侯)의 딸 여규를 들였으나 그녀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여규의 친정동생인 대규를 받아들여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하나는 완(完)이고 다른 하나는 진(晉)이다. 둘 다 후에 군주가 되는데 위환공과 위선공이다. 천성이 착한 정부인 장강은 한 궁녀를 위장공에게 천거했는데 거기서 난 아들이 주우(州旴)였다. 주우는 장성하면서 천성이 포악하고 무예를 좋아했다. 장공은 그런 주우를 가장 사랑했다. 대부 석작에게는 아들 석후란 자가 있었는데 음탕하고 사치가 많았는데 주우와 친하게 지냈다. 위장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자 완이 군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바로 위환공이다. 위환공은 ..

공자(孔子)

■공자(孔子,BC 551~BC 479) - 노(魯) 나라의 유가 및 사상가 제자백가 중 유가(儒家)의 시조(始祖).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그곳에서 자리잡고 정치를 담당하였지만, 실권자와 충돌한 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제후들에게 자기의 사상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뜻을 얻지 못하자 만년에는 노나라에서 제자 교육과 고전 편찬에 종사하였다.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공헌은 최초의 민간사상가로서 주대(周代)의 관학(官學)으로부터 학문을 해방하고, 처음으로 사학(私學)을 창시하여 중국사상사의 기초를 이룬 점과 동시에 그후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사상이 된 유교의 골격을 쌓은 점에 있다. 공자(孔子)가 태어난 춘추 말기는 정권이 밑으로 옮겨가 농민, 수공..

조괄(趙括) - 중국의 전국시대 탁상공론 병법장수

■조괄(趙括, ?~기원전 260) ↑조괄(趙括)의 탁상공론(卓上空論)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장군이다.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로써, 조괄 자신도 병법에 통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장평전투(長平之戰)에서 진(秦)나라의 백기(白起)에게 패해 전사했다. 장평전투에서 조(趙)나라 군대는 처음엔 명장 염파(廉頗)의 지휘로 방어전을 펼쳐 진나라는 곤란에 빠졌다. 전국의 타개를 노린 진나라의 재상 범수(范雎)가 계책을 내놓아 “진나라는 조나라의 장수 염파가 아닌 병법에 뛰어난 조괄을 두려워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나라의 효성왕(孝成王)은 이 소문을 믿고 총대장을 염파에서 조괄로 교체시켰다. 조괄의 어머니는 남편이었던 조사로부터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조괄을 장군으로 쓴다면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