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반고(班固) - 중국 후한시대의 문관·역사가(『漢書』를 著述 ).

야촌(1) 2012. 7. 17. 03:31

■반고(班固, 32년~92년) - 중국 후한시대의 문관·역사가(『漢書』를 著述)

반표(班彪)

 

반고(班固)

    아버지 "반표(班彪)"가 시작하여 아들 "반고(班固)"가 집필하고 여동생  "반소(班昭)"의 마무리로 한(漢)나라의

    역사서 "한서(漢書)"가 탄생하였다.

 

▲반소(班昭)

    반소(班昭, 45년 ~ 116년)는 중국 후한의 시인으로, 자는 혜희(惠姬) 또는 혜반(惠班)이다.

 

생애

반표(班彪)의 딸이자 반고(班固)와 반초(班超)의 여동생으로, 

14세에 조세숙에게 시집을 갔던 관계로 조대가(曹大家)로 불리었다. 

남편이 죽은 후 궁정에 초청되어 왕족들을 가르쳤다.

 

반고가 죽자 유지를 이어 《한서》를 완성하였다.

《전한서》 편찬에서 가장 복잡했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와 천문지(天文志)"는 

반소가 완성한 것이다. 

후한서 제84권 '열녀전'(列女傳)의 반소 관련 부분에서

'오라버니 반고가 [한서]를 집필했는데, 

그 8표와 '천문지'는 미처 끝내지(竟) 못하고 죽었기에, 

화제(和帝)가 반소를 불러 동관(東觀)의 장서각(藏書閣)에서

그것을 이어 완성하게 하였다'라는 언급을 볼 수 있다.

 

저서

저서에 조대가집(曹大家集)이 있는데, 

그녀의 문재 또한 아버지와 오라버니인 반고에 못지않은 문호였다.

 

그녀의 오라버니 반고(班固)가 쓴《한서 漢書》는 이후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
아버지 반표(班彪:3~54)는 호고적(好古的) 취미가 강한 지식인으로서 한(漢) 황실이 재건되었을 때(후한) 광무제(光武帝)에 의해 서령(徐令)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고 독자적으로 역사연구(歷史硏究)에 몰두(沒頭)했다.
3황 5제(三皇五帝)로부터 시작하여 전한시대 중간에서 끝을 맺은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를 계승할 역사서를 쓰기 위해 자료들을 수집(蒐輯)했다. 


 아버지 반표(班彪)가 죽은 뒤 반고는 그의 뒤를 이어 역사편찬(歷史編纂)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사(國史)를 함부로 개작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에게는 반초(班超)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반초는 중국 서쪽 변경을 파미르 고원까지 넓히는 데 공을 세운 뛰어난 무장이었다. 반고는 동생의 탄원으로 옥에서 풀려났다. 

 

그후 반고는 16년에 걸쳐《한서(漢書)》를 편찬했다.

《한서(漢書)》는 후대의 각 조가 전대(前代)의 정치를 기록한 정사류(正史類)의 전형이 되었다.

 

 이 책은 비록《사기(史記)》를 규범(模範)으로 삼았지만, 이 광범위한 역사서의 단순한 보완물이라기보다는 한 제국이 일어난 뒤부터 왕망(王莽)이 AD 9년신(新)나라를 세울 때까지의 시기를 다룬 새롭고도 포괄적(包括的)인 역사기록이었다.

 

약 200년간의 역사를 다룬《한서(漢書)》는 3,000년을 망라(網羅)했다고 하는《사기(史記)》보다도 분량이 훨씬 많다. 

사마천과 반고는 둘다 사관(史官)이었으므로 불가피하게 관찬(官撰) 기록들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황제와 황족의 생활(그들의 민정·군정상의 중요한 활동을 포함)을 인물별·연대기별로 기술했다.

 

이것이《한서(漢書)》의 첫 번째 부분인 본기(本紀)이다. 반고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사마천의《사기(史記)》체제를 따랐다.〈漢書〉에는 그의 주관적 견해를 밝힌 글이 몇 안 되는데, 그 글 가운데 하나에서 이 논쟁은 단순한 호고적 취미에서 발단된 것이 아니며, 다분히 정치적 의미가 개입된 것이라고 평했다. 

 

이 문제를 다룬 《백호통(白虎通-白虎觀에서의 강론이라는 뜻》을 편찬한 사람도 반고였다. 40대 중반에 그는 더욱 모험적인 일에 뛰어들었다. 〈한서〉의 퇴고는 특출한 학자였던 여동생 반소(班昭)에게 맡기고, 장군 두헌(竇憲)을 따라 흉노(匈奴) 정벌에 나섰다. 

 

변경으로부터 1,60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다. "우리 정병(精兵)은 오랑캐 무리를 정벌하러 이곳에 왔다. 우리는 서역인들의 무례함을 응징했고 먼 이역인 이곳을 평정했다.

 

그들은 이 거대한 평원을 지나 북쪽 고향으로 돌아갔고 장한 우리 군대는 이 전승기념비를 세우니, 위대한 천자(天子)의 업적이 앞으로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그러나 상관의 몰락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문초를 당했으며, 60세에 옥에 갇힌 채 죽었다. 여동생인 반소는 예정대로 한서의 초고를 완성하고 그 내용을 다른 학자들에게 가르치도록 공식 승인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