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조자룡(趙子龍)

야촌(1) 2012. 7. 6. 09:36

조자룡(趙子龍)

 

조자룡(168 ~ 229)은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상산군 진정현[常山郡 眞定縣 : 지금의 허베이성 정딩현(正定縣)] 출신이기 때문에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이라고도 부른다. 신장이 8척이나 되었으며, 자태나 안색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지' 촉서 관장마황조전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에 이어 조운전이 나오는데 그는 말석의 장수가 결코 아니다.

조자룡은 창을 쓰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무예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유비가 그를 가리켜 “자룡은 담덩어리”라고 했을 정도로 매우 용감했다.

 

때는 적벽대전이 있기 전 조조가 강남을 공격하여 유비가 쫓길 때의 일이다. 

조조의 대군이 몰려오니 중과부적이라 유비군은 신야를 버리고 번성, 양양을 거쳐 강릉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조의 대군을 만나 싸우던 조자룡은 자기가 보호하고 있던 유비의 집안식구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따르는 자가 겨우 30~40명에 불과했다.

 

조자룡은 유비의 미부인이 아두를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자룡이 아두를 품고 말을 달리자 조조의 전 대군이 자룡을 에워싸고 길을 막았다. 

조자룡은 마치 신 같았다. 

 

그의 칼이 번득이면 갑옷은 뚫어지고 피는 댓줄기같이 뻗쳤다. 

구슬픈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어 넘어지는 적군이 부지기수였다.

 

이때 조조는 산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판을 보니 유비의 한 장수가 좌충우돌하는데 그 위세를 당할 자가 없었다. 

 

조조가 좌우를 보며 “저 장수가 누구냐”고 물으니, 조조의 장수 조홍이 달려가 “거기에서 싸우는 장수의 이름이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자룡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조홍이 돌아와 보고하니 조조가 말했다.

 

“정말 범 같은 장수로구나. 내 저 사람을 산 채로 잡아서 내 사람을 만들리라. 절대로 활을 쏘지 마라.”

그러나 조조의 진영에는 조자룡을 사로잡을 만한 장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자룡은 아두를 품은 채 조조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나오게 되었다.

 

그날 당양 장판벌 싸움에서 조자룡이 아두를 품고 겹겹이 에워싼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때, 칼로 큰 기를 찍어 쓰러뜨린 것이 둘이요, 빼앗은 창이 셋이며, 칼로 찍고 창으로 찔러 죽인 조조군의 장수만도 오십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건안 19년(219년) 유비가 한중를 공격할 때의 일이다.

황충이 하후연을 죽이자 조조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하후연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수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충과 조자룡이 서로 조조의 군사를 막고자 자원했으나 추첨에 따라 황충이 앞장서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황충이 조조의 군사에게 포위되자 조자룡은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황충을 구출하러 갔다. 

조자룡은 크게 소리지르면서 말을 몰아 창을 휘두르며 적의 포위망을 뚫고 무인지경을 달리듯 나갔다.

 

조자룡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적의 목은 춤추며 떨어지는 배꽃처럼, 일진광풍에 휘날리는 눈발처럼 떨어져 나갔다.

조조가 이번에도 높은 곳에서 바라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져 좌우 장수에게 물었다. 

“저 장수는 누구냐?” “상산 조자룡입니다.” 

 

“전에 당양 장판 싸움 때의 기상이 아직도 살아 있구나.” 조조는 급히 전령을 보내 영을 내렸다. 

“그가 나타나면 가볍게 대하지 마라.” 이날의 싸움에서 조조는 대패했다.

 

유비가 공명과 함께 한수로 돌아오는 길에 군사에게 물었다. 

“조자룡이 어떻게 싸우더냐?” 군사가 그 날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고하자 유비는 공명에게 말했다.

“조자룡의 일신은 과연 담덩어리군.”

 

물론 정사에서 진수도 조운전 말미에 그의 용맹성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황충과 조자룡이 강하고 용맹하여 유비의 무신이 되었던 것은 한고조 때의 관영·하후영의 무리와 같도다.”

 

글 : <육군 3야전군사령부 조성룡 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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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운(趙雲)

 

▲조운(趙雲)

 

조운(趙雲, 168년 ~ 229년 9월)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이다. 자는 자룡(子龍)이다. 상산의 조자룡(常山 趙子龍), 호위장군(虎威將軍-호랑이(범) 같은 위용을 갖춘 장군)으로 유명한 맹장이며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황충(黃忠)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렸다.


 
[생애]
조운은 상산군 진정현(常山郡 真定縣) 출신이며, 신장은 8척(약 184cm)에 가깝고, 모습과 얼굴 생김새가 두드러져 근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조운이 유비(劉備)보다 나이가 더 많았고, 그가 158~159년 쯤에 태어났을 것이라고도 하고, 다른 설로 168년설이 유력하긴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가 229년에 병사하였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의 북벌 당시 나이 일흔의 노장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았을 때, 유비보다 나이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조운은 원소(袁紹)에게 졸백으로 임관했으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여 공손찬(公孫瓚) 아래로 들어갔다.삼국지연의에서는 창술의 명수로 되어 있으며, 처음에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스스로 공손찬 밑으로 달려가고, 문추(文醜)를 상대하여 공손찬을 궁지에서 구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유비와의 만남]

그 무렵 유비 또한 공손찬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공손찬이 원소를 막기 위해 유비를 파견해 전해(田楷)를 지원하도록 했을 때 조운도 일시적으로 유비의 지휘하에 들어가 종군했다. 이 무렵 조운은 공손찬의 난폭한 성격에 기가 질려 있었고 같이 공손찬의 부하로 있던 유비를 눈여겨 보게 된다. 유비 역시 조운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서로 깊은 유대를 맺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조운이 유비의 가신이 되고 싶다는 뜻을 전하지만 유비는 공손찬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했다. 그 뒤 조운은 형의 장례를 치르러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절대로 당신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유비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는 조운이 공손찬 밑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유비 또한 그것을 깨닫고 조용히 전송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曹操)에게 서주(徐州)를 잃은 유비가 원소에게 의지하자 조운은 유비를 접견하고 부하로 들어갔다. 이때 삼국지정사에서는‘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라고 되어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나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당양 장판에서의 활약]

 201년 조운은 여남(汝南)에서 패배한 유비를 따라 신야(新野)로 가게 되었다. 207년 형주에서는 유표(劉表)가 죽어 후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그에 편승해 조조가 침공을 시작했다. 유비가 피난길에 당양현 장판에서 조조군의 습격을 받고 도주할 때, 조운은 단기(單騎)로 적군 한가운데로 달려들어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유선(劉禪)과 감부인(甘婦人)을 구출하는 대활약을 펼쳐 아문장군(牙門将軍)으로 승진한다(장판 전투).

 

 이 전투 중에 “조운이 아군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으나 유비는 “조운은 결코 그럴 위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운이 조조에게 항복했다라고 하는 자가 미방(糜芳)으로 나오며, 조운이 조조 휘하의 장수 하후은을 죽여 청강검(靑舡劍)을 손에 넣은 후 유선을 가슴에 품고 적군 한가운데에서 분전, 그것을 본 조조가 조운을 어떻게든 생포하라고 지시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용이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삼국 정립]

 211년(건안 16년) 익주 자사 유장(劉璋)이 법정(法正)을 파견해 유비를 맞아들이고 한녕군의 태수 장로(張魯)를 공격했다. 그러나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장과 대립하게 되어 가맹관에서 군사를 돌려 유장을 공격하지만, 군사 방통(龐統)이 장임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등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래서 제갈량이 조운, 장비 등과 함께 형주의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주변의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은 강양(江陽)을 거쳐 성도로 진군, 성도 포위의 일축을 담당했다. 

 

유장의 항복 후 조운은 익군장군(翊軍将軍)에 임명되었다. 

219년 한중 전투에서 조운이 조조군의 선봉을 격파하자 조조군은 군세를 강화해 다시 조운의 진영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 조운은 문을 활짝 열고, 깃발을 숨기고, 북을 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운의 진영 앞에 도착한 조조군은 그 정적을 보고 복병이 있지 않을까 의심해 머뭇거렸다. 

그것을 본 조운이 북을 치고 쇠뇌를 쏘아 적군을 공격하자, 깜짝 놀란 조조군은 북새통이 되었고 많은 병사들은 달아나다가 한수(漢水)에 빠져 익사하는 등 참패를 당했다.

 

다음날 아침 유비는 몸소 조운의 진영을 방문하고 전날의 전장을 시찰하면서 “조운의 몸은 모두 간(肝)덩어리다”라고 칭찬하였고, 군졸들은 조운을 호위장군(虎威将軍)이라고 불렀다.

 

손권(孫權)이 형주를 습격해 관우를 살해하자 유비는 크게 노하여 손권을 공격하려 했다. 

조운은 “먼저 위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자연히 굴복할 것입니다.(중략) 위나라를 방치하고 먼저 오나라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전투가 일단 시작되면 쉽게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유비를 만류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동쪽으로 진군하고, 조운을 강주에 남겨 후방을 단속하게 했다. 유비가 자귀에서 패배하자 조운은 구원에 나서 영안까지 진군하지만 오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나고 없었다.

 

[유비 사후]

 223년 유선이 즉위하자 중호군(中護軍)·정남장군(征南将軍)이 되고, 이후 영창정후(永昌亭侯)·진동장군(鎮東将軍)으로 위임(委任)되었다. 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따라 한중에 주둔하고, 228년 제갈량과 함께 위나라로 출병, 제갈량은 사곡도(斜谷道)를 통과한다고 크게 선전하고, 조운과 등지(鄧芝)에게 위나라의 조진(曹眞)을 상대하도록 명령한 다음 그 틈에 기산을 공격했다.

 

가정 전투 에서 마속의 촉군이 패배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퇴각 명령이 명이 전해지면서 퇴각때 추격해오는 곽회의 위군과 맞서 싸우며 선봉장 소옹(蘇顒)를 전사(戦死) 시키고 곽회의 부대와 부장 만정(萬政)을 기곡(箕谷) 에서 격퇴 시켰다. 

 

제1차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참전했던 제갈량 이하 모든 장수들이 강등되면서 조운은 진군장군(鎮軍将軍)으로 좌천되었다.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장병의 단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묻자, 등지는 “조운 스스로 후방 부대를 맡아 군수 물자를 거의 버리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으므로 장병들은 흐트러짐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고 대답했다. 

 

제갈량은 조운에게 남은 군수품 견사(명주실)를 그의 장병들에게 나눠주게 했지만, 조운은 “전쟁에 진 자가 어찌 하사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군수 물자는 모두 창고에 모아 10월에 겨울 준비 물품으로 하사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해, 규율을 지켜 패전 책임을 분명히 했다.

 

제갈량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229년 62세의 나이로 병사, 261년에는 대장군 순평후(大将軍 順平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운은 관우나 장비와는 달리 이치에 맞는 행동만 하고 누구에게든 예를 갖춰 대했기 때문에 유비에게도, 제갈량에게도 인정받았다. 

 

연의에서는 하후무를 사로잡고 한덕의 네 아들을 모두 죽이는 등 공을 세웠고, 북벌 당시에, 제갈량이 말하길 "지금 내가 생각하는 장수 중 한 사람만 있더라면 이렇게 고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조운이다." 라고 할 정도로 촉나라에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