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건(張騫,? ~ BC114)- 한무제(漢武帝)때의 신하. 처음으로 서역을 개척함.
목숨 내걸고 13년간 서역 탐방으로 동서양의 물꼬를 튼 한나라의 외교관이다.
▲장건(張騫)
한무제(漢武帝)는 흉노(匈奴)에 대한 효과적(效果的)인 공격을 위해 서역(西域)의 월지와 제휴할 목적으로 장건(張騫)을 사신(使臣)으로 파견(派遣)하였다. 장건은 중도에 흉노에 붙잡혀 억류(抑留)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대완국(大宛國), 대월지(大月氏), 대하국(大夏國)등의 서역제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장건(張騫)의 서역파견은 2차에 걸쳐 실시되는데, 그의 장기간에 걸친 탐사(探査)의 결과 서역의 사정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중국과 서역 간에는 인적, 물적인 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비단길로 불리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둔황막고굴((敦煌莫高窟) 제323굴 북벽의 장건 출사서역도 당나라 초기(618~7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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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무(蘇武), ?~BC 60 - 漢나라의 충신.
천한(天漢) 원년에 중서 소무를 파견하여 흉노족에 보냈다.
절개를 지킨 남자 소무(蘇武)는 19년간 포로 생활 후 조국으로 귀환했다.
字는 자경(子卿). 두릉(杜陵: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 시[西安市] 동남쪽) 사람이다. 아버지 소건(蘇建)은 대장군 위청(大將軍 衛靑) 휘하에서 공신이 되었고, 소무는 어려서 랑(郞)이 되었다.
무제(武帝) 때인 BC 100년에 중랑장(中郞將)으로서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체포(逮捕)되어 항복(降伏)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절의(節義)를 굽히지 않고 이를 거부(拒否)하자 바이칼 호 주변의 황야로 보내져 19년에 걸친 억류생활(抑留生活)을 했다.
소제(昭帝)가 즉위한 후 흉노와의 화해(和解)가 성립되어 BC 81년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소제는 그의 충절(忠節)을 높이 사 전속국(典屬國)에 봉했고, 소제의 뒤를 이은 선제(宣帝)도 그의 노고를 중시하여 관내후(關內侯)에 봉했다. [안서(雁書)]
天漢元年, 遣中郞將蘇武, 使匈奴.
천한(天漢) 원년에 중서 소무를 파견하여 흉노족에 보냈다.
單于欲降之, 幽武置大窖中,
선우는 소무를 투항하게 하고자 하여 소무를 가두어 큰 움 속에 두고서는
絶不飮食.
아무런 음식도 주질 않았다.
武齧雪與旃毛幷咽之, 數日不死,
소무는 눈과 모직을 씹어가며 수일 동안 죽지 않으니,
匈奴以爲神.
흉노족은 귀신처럼 여겼다.
徙武北海, 上無人處, 使牧羝曰:
그래서 소무를 북해의 사람이 전혀 없는 곳으로 옮겨 숫양을 치게 하며 말했다.
“羝乳乃得歸.”
“숫양에서 젖이 나오면 귀국할 수 있다.”
二年遣李廣利, 擊匈奴,
천한(天漢) 2년에 이광리를 파견하여 흉노를 정벌케 했는데
別將李陵, 敗降虜.
별장 이릉이 패하여 항복하고서는 포로가 되었다.
始元六年, 蘇武還自匈奴.
시원(昭帝의 연호) 6년에 소무는 흉노로부터 귀환했다.
武始徙北海上, 掘野鼠去草實而食之,
소무가 처음 북해가로 옮겨졌을 때 쥐의 굴을 파서 풀과 열매를 감춰두고서 그것을 먹으며
臥起持漢節.
앉으나 서나 한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漢使者至匈奴, 匈奴詭言武已死.
한나라 사신이 흉노에 이르니, 흉노족은 거짓말로 소무는 이미 죽었다고 했다.
漢使知之言,
그러자 한나라 사신은 정황을 알고서 말했다.
“天子射上林, 中得雁,
“천자께서 상림에서 사냥할 때 기러기를 맞춰 얻었는데
足有帛書云 ‘武在大澤中.’”
발에 백서가 있었고 거기에 ‘소무는 큰 연못 가운데에 있다’라고 써 있었다.”
匈奴不能隱, 乃遣武還.
흉노는 숨길 수 없어 마침내 소무를 귀환하게 했다.
武留匈奴十九年, 始以强壯出,
소무가 흉노에 머문 지 19년인데, 처음엔 굳세고 씩씩한 상태로 갔다가
及還須髮盡白.
돌아올 땐 수염과 머리가 모두 백발이 되었다.
拜爲典屬國.
그런 노고를 치하하여 전속국(典屬國, 이민족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 장관)의 직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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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릉(李陵) ?~BC 72.
李陵은 희생자인가 배반자인가?
▲이릉(李陵)
중국 전한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소경(少卿). 이광(李廣)의 손자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무제(武帝)때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BC 99년(天漢 2) 직접 부하 5,000명을 거느리고 흉노(匈奴)와 싸웠다.
그는 적은 수의 병사로 흉노를 무찌른 뒤, 돌아오는 길에 강력한 적의 대군을 만나 힘써 싸웠지만 결국 항복(降伏)하고 말았다. 그의 패전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한 무제가 그의 일족을 몰살(沒殺)시키려고 하자 사마천(司馬遷)이 그의 충성(忠誠)심과 용감(勇敢)한 전투정신을 칭찬(稱讚)하며 변론(辯論)했다.
그러나 무제가 오히려 더욱 분노(憤怒)하여 사마천을 궁형(宮刑)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흉노 왕은 투항(投降)한 이릉(李陵)을 사위로 삼고 우교왕(右校王)으로 봉했다. 이릉(李陵)은 그 후 20여 년 뒤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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