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조조(曹操).

야촌(1) 2012. 7. 18. 03:31

■ 조조(曹操 : 155~220)

 

↑조조(曹操)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시조로, 자는 맹덕(孟德),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보저우[亳州]에 해당하는 패국(沛國) 초현(譙縣) 출신으로서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가 된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두각을 나타내었고, 동탁(董卓)이 죽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武略)을 휘두르게 되었다. 200년 군벌의 최대 세력이었던 관도군의 맹주 원소(袁紹, ?~202)를 관도(官渡)의 대전에서 격파하였다. 


화북(華北)을 거의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하였으나 208년 손권(孫權)· 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대패하였고, 그 후 세력이 강남(江南)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108년) 승상(丞相), 213년 위공(魏公), 216년 위왕(魏王)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뤄양[洛陽]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아들 조비(曹丕)가 한의 제위를 찬탈하여 위(魏: 220~265)를 세웠다.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과 함께 시부(詩賦)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흥륭(興隆)을 가져오게 하였다. 후세에 간신(奸臣)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를 재평가하는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