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151

여포(呂布) - 중국 후한 말엽의 장수

■ 여포(呂布, ?~198년 2월 7일) - 중국 후한 말엽의 장수 자(字)는 봉선(奉先). 활쏘기와 말 타기에 뛰어나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장'(飛將)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의 수하에 있다가 나중에 그를 죽인 후 동탁(董卓)에게 귀순했으나 다시 왕윤(王允)과 모의하여 동탁마저 죽였다. 그 뒤 분위장군(奮威將軍)의 지위에 오르고 온후(溫侯)로 봉해지는 한편, 서주(徐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남부 및 장쑤 성[江蘇省] 북부지역)를 나누어 차지했다. 198년(建安 3)에 하비(下邳 : 지금의 장쑤 성 쑤이닝[寧] 서북쪽)에서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죽음을 당했다. ↑여포(呂布)

손권(孫權) -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권[孫權,182~252] -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자는 중모(仲謀), 시호(諡號)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周瑜)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江南)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荊州: 湖北省襄陽縣)에는 유표(劉表)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華北)에는 조조(曹操)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아들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의 압력은 더욱 강화되어 국내에서도 화전양론(和戰兩論)이 대립했으나 주유 등의 주전론이 승리하였다. 이에 손권은 유비(劉備)와 손잡고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 뒤 형주의 귀속문제(歸屬問題)를..

장비(張飛)-중국 삼국시대의 촉(蜀)나라 장군.

■ 장비(張飛, ? ~ 22)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무장으로서 자는 익덕(益德: 翼德)이며 탁군(褶郡:河北) 출생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와 함께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義)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후한(後漢) 말 동란기(動亂期)의 많은 전쟁에서 勇猛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益州) 공략 때는 主力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巴西太守)가 되었다. 위(魏)나라의 명장 장합(張姸)이 장로(張魯)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擊退)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 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유비가 패사한 관우의 복수(復讐)를 위하여 오(吳)나라를 치려는 동정(東征)에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暗殺)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

관우(關羽)

■ 관우(關羽, ? ~ 219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무장(武將)으로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윈청현[運城縣]인 하동군 해현(河東郡解縣)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운장(雲長)이며 후한말(後漢末)의 동란기에 탁현(褶縣:河北省 소재)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과 함께 예우를 극진히 받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양(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208년 적벽전(赤壁戰) 때에는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益州: 四川省) 공략 때는 형주(荊州: 湖北省)에 머물러, 촉(..

탕왕(湯王)-기원전 18세기 중국의 은(殷)나라를 세운 왕.

■ 탕왕(湯王) - BC 18세기경에 중국의 은(殷) 나라를 세운 왕. ↑탕왕(湯王), 중국 고대(BC 18세기경) 은(殷)나라((BC1600~BC 1046)를 창건한 왕으로서 이름은 이(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太乙)이고 탕(湯)은 자이며,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당시 하(夏)왕조의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였으므로,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걸왕((桀王)은 성탕(成湯)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용서하였다. 탕(湯)왕은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곧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그리고 박(현재의 허난 성 상추 시)에 도읍하여 국호를 상(..

주자(朱子) -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朱子, 1130.10.18~1200) ↑주자(朱子=朱熹) ↑주자(朱子=朱熹)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자는 원회(元晦)·또는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이름은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현(尤溪縣) 출생이다.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婺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師事)하면서 불교와 노자(老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

제갈량(諸葛亮) - 중국의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요 및 전략가

■제갈량(諸葛亮,18~234) ↑제가량 상(諸葛亮像)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 낭야군 양도현(瑯琊郡陽都縣;山東省沂南縣)에서 태어났다.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다. 유비(劉備, 161~223)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이듬해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여,적벽(赤..

유비(劉備)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

■유비(劉備, 161~223) ▲유비(劉備) ▲유비(劉備)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재위 221∼223)로. 자는 현덕(玄德). 묘호는 소열제(昭烈帝). 탁현 출신이다.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로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盧植)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公孫瓚)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 하지 않고 호협(豪俠)들과 교유했으며, 이때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인연을 맺어 《삼국지연의》에서는 도원결의(桃園結義)라는 고사로 이들의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적으로 안희현위라는 벼슬길에..

손무(孫武)-손자병법의 저자

■ 손무(孫武) : BC 545경 - BC 470경 때의 장수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 ↑손무(孫武) ↑손무(孫武) 제나라 출신(현재의 山東省)으로 성은 손(孫)이고 이름은 무(武}이다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500년 전후의 사람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병법서「손자(孫子)」의 저자로 알려졌으나 손빈(孫賓)의 저작이라는 설도 있다. 손무는 오(吳)왕 합려(闔閭) 밑에서 장수로 활동했다. 손무와 오왕의 여인들의 훈련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손자병법을 읽고 관심을 가진 오왕 합려가 손무를 불러 궁중 내 여인들을 훈련시켜 보라고 말했다. 손무는 궁중의 미녀 180명을 골라 두편으로 나누어 오왕이 총애하는 후궁 2명을 각 편의 대장으로 삼고「'좌로' 하면 왼쪽을 보고 '우로' 하면 오른쪽을 보라」고 ..

조식(曹植)-조조의 아들/문제(文帝) - 조비의 동생

■조식(曹植, 192~232 - 중국 삼국시대의 위(魏)나라 시인. ↑진사왕 조식(陳思王曹植) ↑진사왕 조식(陳思王曹植) 어느 날 연회석상에서 형 문제(文帝)가 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 한 수를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콩을 삶기 위하여 콩대를 태우나니, 콩이 가마 속에서 소리 없이 우노라. 본디. 한 뿌리에서 같이 태어났거늘 서로 괴롭히기가 어찌 이리 심한고[자두연두기(煮豆燃豆萁)하니,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이라,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으로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고]”라 읊어, 형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자기를 콩에, 형을 콩대에 비유하여 육친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노래한 이 시가 바로 이름난 《칠보지시(七步之詩)》이다. 그런데 조비가 동생 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