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48

천첩(賤妾)과 날이 새도록 한가하게 대화하다 - 이항복

■ 신축칠월십구일야여천첩달서한화 (辛丑七月十九日夜與賤妾達曙閑話)/이항복 (신축년 칠월 구일 날 밤에 천첩(賤妾)과 날이 새도록 한가하게 대화하다/이항복) 신축년(1601 선조 34) 7월 19일 밤에 천기(天氣)는 매우 덥고 성월(星月)은 휘영청 밝은데, 잠이 오지 않아 베개에 기대어 천첩(賤妾 : 종이나 기생의 신분으로서 남의 첩이 된 여자)과 함께 새벽까지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첩이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는 심장(心腸)이 지나치게 강하시어 과감하게 떨쳐 버리는 일이 많으므로, 급한 때에 믿고 의지하기가 어렵습니다.”하였다. 인하여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첩이 말하기를, "임진년의 변란 초기에 변보(邊報)가 날로 급해진 다음에야 감역(監役)이 기종(騎從)을 첩에게 보내 대인과 만나서 결별(..

임진전란 후 여러 장군의 공적을 논함 - 이항복(李恒福)

■ 임진 전란(壬辰戰亂) 후 여러 장군의 공적을 논함-이항복(李恒福) 우리 동방(東方)에는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아무리 큰 사업(事業)이나 큰 시비(是非)가 있었더라도 몇 년만 지나고 나면 깜깜하게 전하지 않아서 고증할 데가 없게 되므로, 내가 일찍이 이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임진년의 변란 때에 내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평양(平襄)에 이르러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초배(超拜)된 이후 7년 동안 중외(中外)를 드나들면서 항상 중병(中兵)을 주관하였으므로, 제장(諸將)의 공죄(功罪)와 시위(施爲)와 사공(事功)에 대해서 대략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후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번(南藩)에 나가서 기억나는 것과 들은 것을 참작하여 공론(公論)에 질정해 본 결과 더욱 그 사실이 밝게 드러났으나, 세..

우리나라의 이름난 필예가(筆藝家)

■우리나라의 이름난 필예가(筆藝家) 통일신라시대 에는 김생(金生 : 711(성덕왕 10)~791(원성왕 7)이고 고려시대에는 문공유(文公裕)와 설경수(偰慶壽)가 가장 저명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ㆍ양사언(楊士彦)ㆍ한호(韓濩)ㆍ청선당(聽蟬堂) 한석봉(韓石峯)이다. [참고문헌] ◇성호사설 제30권 >시문문(詩文門)

왜인(倭人)들의 사로(斯盧 : 신라이전의 국호)침범.

■ 왜인(倭人)들이 사로(신라이전의 국호)를 침범하여 오다가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신미년 마한 신라 시조 8년(한 선제 감로 4, B.C. 50) 왜인(倭人)들이 사로를 침범하여 오다가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왜국(倭國)은 사로의 동쪽 대해(大海) 가운데로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산으로 된 섬을 다 덮어 사는데, 무릇 백여 나라이다. 그 땅은 동서가 4천여 리이고 남북이 8백여 리인데, 사방으로 바다에 닿게 된다. 당초에는 곳곳이 스스로 보장(保障)하여 모여 살면서 각자 나라를 만들었는데, 주(周) 평왕(平王) 49년에 그 시조(始祖) 협야(挾野) 곧 그들의 소위 신무천황(神武天皇) 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모든 나라를 통합하였다. 나라 안을 나누어 다스리며 대대로 계통을 이어받으니, 중국의 봉건..

마패(馬牌)의 역사

■ 마패(馬牌) 역사 및 마패 직인 문서 역마(驛馬)의 지급을 규정하는 패로써 발마패(發馬牌)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로 출장 가는 관원은 주로 역마를 이용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유물명칭 마패(馬牌) 국적/시대 한국(韓國) 조선(朝鮮) 재질 금속(金屬) 동합금제(銅合金製) 크기 길>10 cm / 너비>8.6 cm 용도 및 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사회제도(社會制度) 신표(信標) 마패(馬牌) 소장기관 학교(學校) / 전주대학교 ↑마패(馬牌). 조선 1434년. 성암 고서박물관 소장 ●유물명칭 : 마패 ◇연대 : 조선시대(1624년) ◇크기 : 경 11.8cm (출처 : 숙명여대) ●유물명칭 : 마패 ◇국적/시대 : 한국..

박정희(朴正熙) 소장(少將)이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보낸 5.16 통보 서한

■ 박정희(朴正熙) 소장(少將)이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보낸 5.16 통보 서한 존경(尊敬)하는 참모총장(參謀總長閣下) 각하(閣下)의 충성(忠誠)스러운 육군(陸軍)은 今十六日 (세시)三時를 기(期)하여 해공군(海空軍) 및 해병대(海兵隊)와 더불어 국가(國家)의 위기(危機)를 극복(克服)하기 위(爲)하여 궐기(蹶起)하였습니다. 閣下의 사전승인(事前承認)을 얻지 않고 독단거사(獨斷擧事)하게된것을 죄송(罪悚)하게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국가민족(國家民族)을 구(求)하고 명일(明日)의 번영(繁榮)을 약속(約束)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방도(方途)는 오직 이길 하나 밖에 없다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信念)과 민족적(民族的)인 사명감(使命感)에 일철(一徹)하여 결사감행(決死敢行)하게된..

석가탑사리함 장엄구 조계종으로 반환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 126호 석가탑 사리장엄구, 조계종으로 반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녹색 유리사리병 ↑석가탑 각종 옥 장식품 ↑석가탑 금동방형사리함. ↑은제 사리함과 내함 지난 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후 40여년간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돌려주지 않았던 사리장엄구가 오는 17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문화재청은 10일 동산문화재과 7차 회의를 열어 불국사 석가탑 발견 국보 제126호 사리장엄구의 일괄 반환을 결정했다. 조계종은 17일 오후 1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사리장엄구 반환을 알리는 고불식을 봉행한다. 석가탑 사리장엄구에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인 을 비롯해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장엄구, 고려시대에 중수한 중수문서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성보문..

간도협약 100년...'간도를 되찾자'

작성일 : 2009. 09. 04 간도협약 100년...'간도를 되찾자' 입력시각 : 2009-09-04 02:40 오늘은 일제와 청나라가 조선을 배제한 채 만주 일대를 중국 영토로 인정한 '간도 협약'을 맺은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통일 후에 대비해 이 간도 협약이 무효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자는 운동이 전개돼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윤경민 기자입니다. [리포트] 간도는 백두산 북쪽 만주지역 일대로, 현재 중국의 지린성과 하얼빈까지 포함하는 옛 고구려 영토입니다. 1771년 프랑스의 수학자 본이 제작한 지도에도 조선 영토에 간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미개척지였지만 1870년 함경도에 대 기근이 발생해 조선인들이 간도로 옮겨가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름 석자를 새긴 말뚝을 박아 자신의 땅임을 표..

대구 History...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동으로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18리, 남으로 청도군(靑道郡) 경계까지 47리, 서로 성주(星州) 경계까지 52리, 북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인데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이 경산부(京山府)에 붙였고, 인종이 현령(縣令)을 두었다. 본조 세종 때에 승격시켜 군을 삼았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를 삼았다. [속현] 수성현(壽城縣) 부의 남쪽 12리에 있다. 본래 위화군(喟火郡) 또는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 하는데, 신라 경덕왕이 수창군으로 고쳤으며, 가창(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