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48

경주약사(慶州略史)

■경주 약사(略史) 본 글은 시인 김대원(瑞耕)님의 글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경주는 먼 옛날 진한의 12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던 지역이다.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 BC 57∼AD 4)가 이곳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그 나라 명칭을 으로 부르다 제4대 석탈해 왕 9년에는으로 불리었다. 물론 역사서엔 그전 (15대 기림이사금 289~310) 10년에도 국호가 언급(言及) 되었지만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고 이때 나라의 중심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지증 마립간(437~514) 시절에 가라국과 합병한 후 가라국(伽羅國AD42~526)의 문물제도를 흡수하여 라 호칭하다. 23대 법흥왕(514~540)때 비로써 정식으로 나라 형태를 갖추고 라 칭하게 되었으며 또한 국왕의 호칭(呼稱)을..

고서(古書)에 나타난 팔도의 인물 비교.

■ 고서(古書)에 나타난 팔도의 인물 비교. 조선시대 지리학자들은 조선 팔도의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면서 땅이 인간의 심성(心性)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여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이 발달해 왔는데 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의견의 일치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그대로 수용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변화하면서 수많은 인구이동과 지역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문화공간이 확산되면서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이해하고 여기서는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참고만 하기를 바란다. 1) 나학천(羅鶴天)의 팔도 인물평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羅鶴天)은 중국 ..

한국 반란사(펌)

■ 한국 반란사(지은이 : 박한실>>> 출판사 : 큰바위) 제1부 신라,통일신라 시대 1. 대공의 난(768년) 대공의 난은 768년(혜공왕 4년)에 대공이 대렴과 함께 일으킨 난이다. 흉년에도 나 몰라라 방탕한 왕 타도하자! 경덕왕의 맏아들인 혜공왕(신라 36대왕)은 8세때인 756년에 즉위하여 한때 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흉년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런 와중에 여러 모반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왕은 사치와 방탕에 빠진 채 선정을 베풀지 못해 백성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었다. 자연히 정치는 문란해졌고 나라의 기강도 흐트러지게 되었다. 이때, 일길찬이라는 벼슬직에 있던 문신 대공이 768년 (해공왕 4년)에 그의 동생인 아찬 대렴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는 봉기..

신륵사와 목은 이색

신륵사와 목은 이색 ■ 목은 거둔 제비여울엔 봄비가 - ↑강에 비가 내렸다. 지나치지도 않았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바람도 알맞게 불었으니 고요한 강 덕분에 마음마저 차분해졌다. 봄비가 왔다. 다시 강으로 달려간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한강을 걷기 시작하던 지난 여름, 1년 동안 내려야 할 비를 하루 만에 퍼부은 탓인지 가을이어도 비는 드물었고 겨울이어도 눈조차 헤프지 않았으니 매번 이어지는 맑은 날의 풍경이 때로는 심드렁하기도 했다. 더러는 강에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려도 나와 시간이 맞지 않아 걸음을 나누지 못했으니 오늘만큼은 기어코 비 내리는 강을 마주 보리라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눈 내리는 강의 정경을 그윽하게 바라보지 못한 아쉬움은 자못 크게 남아 있다. 마치 겨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묘한 ..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역사 발굴Ⅰ]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중국의 동북공정 뒤엎을 史料 찾았다! 백제사는 두 번에 걸쳐 크게 왜곡되는 수난을 겪었다. 첫째, 고려 시기 신라 중심으로 삼국사의 정통을 세우는 과정에서 초기 백제사의 상당부분이 삭제 혹은 훼손되었다고 본다. 둘째, 일제에 의한 왜곡으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먼저 한국사 연구에 손을 댔는데, 이때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백제사를 총관(總觀·전체를 대충 살펴봄)하는 ‘백제약사’와 ‘백제사강화’를 저술했다. 이마니시의 백제사 서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백제가 신사시대(信史時代)로 들어간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고 그 이전은 전설의 시기로 파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가 왜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만주가 우리 땅임을 입증하는 古地圖가 유럽에서 대량발견.

■만주가 우리 땅임을 입증하는 古地圖가 유럽에서 대량 발견. [도깨비 뉴스] 2007년 10월 18일 발매된 시사 월간지 신동아는 만주 지역이 조선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고지도(古地圖)가 유럽에서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관장 김혜정 교수)은 18세기 압록강-두만강 이북 집안, 간도지역이 조선의 세력권이었음을 보여주는 서양 고지도, 69점을 발굴했다고 합니다. 신동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서양 지도가 이처럼 대량으로 나온 것은 처음" 이라고 전했습니다. 신동아로 부터 사진과 기사를 제공받아 도깨비 뉴스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D’Anville)가 제작한‘et des Roj..

대마도는 한국땅이었다.

■ 쓰시마 섬이 아닌, 대마도로 부르자.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 사회과부도, 역사부도, 세계지도 등 어떤 지도를 보아도 대마도라고 쓰여져 있지 않고 쓰시마 섬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일본은 지네 땅이 아닌데도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쓰는데 우리나라는 이게 뭡니까. 혹 이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 쓰시마 섬이라고 자주 말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이제부터는 대마도라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 대마도를 찾으려고 했던 노력 ①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라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초대 부산수산대학장을 역임한 정문기(鄭文基, 1898~1996) 박 사입니다. 정박사는 ‘대마도의 조선 환속과 동양평화의 영속성’이라는 논문에서 대마도를 조선으로 환속하는 것 이 동양평화의 영속성을 기하는 길이라고 ..

중국의 한국사 왜곡 비석.

‘唐의 발해가 조공바치던 길’… 中, 백두산 가는 길목에 역사왜곡 비석 [조선일보 유석재기자] 중국 정부가 이달 초백두산관광객들이 지나다니는 지린(吉林)성 안투(安圖)현의 큰 길가에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고대사 왜곡 내용을 담은 대형 표지석을 세운 것으로 10일 확인됐다. 최근 백두산 관광을 다녀온 안병찬(62·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씨는 “지난 3일옌지(延吉)에서 백두산으로 가던 중 안투현 길가에서 중국인들이 비석을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며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안투현 인민정부가 만든 이 비석은 앞면에 붉은 글씨로 ‘당(唐) 발해국(渤海國) 조공도(朝貢道)’라고 쓰여 있다. 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조공을 바치러 다니던 길”이라는 뜻이다. 작업이 채 끝나지 않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