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48

戊午史禍首末(무오사화수말)

■戊午史禍首末(무오사화수말) 점필재 김선생이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문인 김탁영(濯纓 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그 글을 사초에 올렸다. 연산군 무오년(1498)에 이르러 흉간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로 사림(士林)에 재앙을 꾸미었다. 처음에 시작은 자광이 함양군에 놀러갔다가 자신이 지은 시의 현판을 게시하였는데 필제가 함양군수에 있을 때, 철거하여 불태워 버리면서 말하기를 「자광은 어떤 자인데 감히 현판을 걸었는가」하였다. 자광이 유감을 품었다. 극돈이 입조해서 성준(成俊)과 같이 서로 모함하는 버릇이 있어 탁영(金馹孫)이 헌납으로 있을 때에 상소로 논핵(論劾)을 당하였다. 극돈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성묘의 국상 때 서울에 향(香)을 올리지 않았고 기생을 수레에 태우고 다녔다..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

■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 1604년 7월 20일 예조에서 회계(回啓)하기를 “명(明) 장수 형개(邢玠)와 양호(楊鎬)를 제사지내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에는 이미 치제(致祭)토록 하였으니 무열사(武烈祠)에도 치제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맞을 것입니다. 제물(祭物)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정하게 갖추어 시행하게 해야겠습니다만 제관(祭官)은 한성에서 차출하여 보내야 합니까?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하게 해야 합니까? 감히 여쭙니다.”하니 선조가 전교하기를 “제관은 한성에서 내려 보내야....관원을 보내어 특별히 치제하는 뜻에 맞을 것이다.”하였다. ​ ​1634년 2월 19일 장신(張紳)이 치계하기를 “평양의 무열사(武烈祠)는 바로 임진년에 동정(東征)한..

丙子南漢日記 - 이휴운(李休運) 著

丙子南漢日記 [丙子十二月] 崇禎九年丙子十二月十一日。重試。 十二日。 曉頭未明。平安監司狀啓入來云。淸川以北。煙塵漲天。義州聲息。絶不相通。賊兵多小。不知其數。自此達夜。備局會議。 ○是日午。以本館褒貶事。諸員會于崔提調家前。始聞西邊可疑之報。而還于寓所。則日已沒矣。 十三日。 朝將往參承文褒貶。而行到闕門外。則褒貶已停。備局之議方午。賊已到安州矣。城中汹汹。出門者相繼。午後狀啓。又入來云。賊已到平壤矣。蓋絶和之後。丁卯之亂。上幸江都。與之結和而還。至是汗使人來云。吾卽皇帝吾卽皇帝位。國號淸。建元崇德。兄弟之國。義當相告。故通之耳。議者以爲善遇。以觀其變。洪翼漢等唱聲曰。彼旣稱帝建元。則稱臣朝貢之䝱。非朝則夕。不如先明大義。斬使絶和之愈也云云。 人知其必被屠戮。朝廷亦於江都。多聚糧糓。以爲奔避之計。而上下慌忙。莫知所措。是日拜判尹金慶徵。爲撿察使。副提學李敏求。爲副。守江都。上問體..

독도는 우리땅이란 증거[2]

작성일 : 2013. 08. 22 독도는 서기 512년부터 우리영토라는 자료수록들입니다. 1737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 [조선왕국전도] 1785년 일본 고지도 1696년 일본정부 1869년 일본 메이지정부 1877년 일본 내무성 1877년 일본 태정관 1898년 대한여지도 1899년 대한전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1905년 일본 강제편입 1946년 연합국 독도를 한국에 반환 군령 1950년 [연합국 구일본영토처리에관한 합의서] 1950년 유엔군 한국방공식별구역

옥당이 현재를 등용하고 간쟁을 자유롭게 하길 허락하는 등의 일을 아뢰다.

작성일 : 2012. 09. 17 효종 15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7월 21일(계묘) 2번째기사 옥당이 현재를 등용하고 간쟁을 자유롭게 하길 허락하는 등의 일을 아뢰다. ------------------------------------------------------------------------------------------------------------------------------------ 옥당이【부제학 김익희(金益熙), 교리 이단상(李端相)· 홍위(洪葳), 부교리 이경징(李慶徵)· 이연년(李延年), 수찬 이경억(李慶億), 부수찬 윤집(尹鏶)】 교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홍범(洪範)》에 말하기를 ‘참람하면 극도로 햇볕이 쨍쨍하고 꾸물대면 극도로 무덥다..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삼국유사를 재간행하다.

500년전 경주에서 무슨일이?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 생각 ↑국보 제306호인 삼국유사 올해는 신라시대의 경주에서 ‘국학’이 태동한지 1330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라 얼마 전, 이 역사적 사건을 기리는 뜻 깊은 행사도 있었다. 그런데 국학 기념행사 못지않게 올해 경주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중요한 학술적 사건이 있었던 해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500년 전(1512년12월)에 경주부윤, 이계복의 ‘삼국유사 재간행’ 사건이다.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현재 경주시장)으로 와 있던 이계복(李繼福)은 경주 관아의 작은 창고에 묻혀 있던 ‘삼국유사’의 원판본을 발견하고 ‘재간행’한 해가 바로 500년 전의 올해이다. 그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중요시 하지 않던 ‘삼국유사[三國..

독도(獨島)가 우리땅인 증거[1]

■독도(獨島)가 우리땅인 증거 독도가 우리땅인지 일본땅인지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어서 다른 말이 필요없다. 우리가 부르는 독도(獨島=외로운 섬)와 일본이 부르는 죽도(竹島=대나무 섬)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알것이 아닌가? 독도에 어디 대나무 숲이 우거져서 대나무섬이라고 이름붙일 여지가 있는지, 삼척동자도 알수 있는 것을 우겨대는 꼬락서니가 참 엽겹습니다. 아래 자료는 독도연구보존협회 '신용하' 교수님께서, 그 동안 모아오신 역사자료입니다.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역사적 증거 14가지나 됩니다.

간도(間島)는 왜 우리땅인가!

■간도는 왜 우리 땅인가? 지난 2011년 8월 16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간도임시정부(총재 건 제)가 주최하는 간도땅 찾기 헌법소원 기자회견이 열렸다. 미국 LA에 본부를 두고 있는 간도임시정부는 이 날 국내 활동단체 등과 기자회견을 갖고 당시 우리 대한제국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제에 의해 1909년 9월4일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해 오늘날까지 중국이 불법적으로 점유하게 한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강조하고 대정부 건의문과 함께 헌법소원 청구와 일본에도 이를 강하게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이 날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간도가 왜 우리 땅이고, 오늘날까지 어떻게 해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어야했는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 우리 정부를 비롯해서 국민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오지 못했는지에 대한 문제점 ..

왕의 호칭

왕의 호칭 각하(閣下) 사극에서 폐하(陛下) 또는 전하(殿下)라고 하는 호칭을 듣게 됩니다. 폐하는 섬돌 폐자에 아래 하, 섬돌 아래라는 뜻이고, 전하는 전각 전자에 아래 하, 전각 아래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섬돌 아래나 전각 아래에서 올려다 보아야 하는 고귀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밖에 집 아래를 뜻하는 합하(閤下)라든가 각하(閣下)라는 호칭도 같은 용어인데 일반적으로 폐하는 황제, 전하는 황제보다 한 등급 낮은 국왕, 각하는 국왕 아래에 있는 고위관료를 지칭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이었던 1590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통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관백(關白)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국왕에게 전달하는 국서(國書) 한 통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김성일은 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