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午史禍首末(무오사화수말) 점필재 김선생이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문인 김탁영(濯纓 金馹孫)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그 글을 사초에 올렸다. 연산군 무오년(1498)에 이르러 흉간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로 사림(士林)에 재앙을 꾸미었다. 처음에 시작은 자광이 함양군에 놀러갔다가 자신이 지은 시의 현판을 게시하였는데 필제가 함양군수에 있을 때, 철거하여 불태워 버리면서 말하기를 「자광은 어떤 자인데 감히 현판을 걸었는가」하였다. 자광이 유감을 품었다. 극돈이 입조해서 성준(成俊)과 같이 서로 모함하는 버릇이 있어 탁영(金馹孫)이 헌납으로 있을 때에 상소로 논핵(論劾)을 당하였다. 극돈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성묘의 국상 때 서울에 향(香)을 올리지 않았고 기생을 수레에 태우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