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대구 History...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야촌(1) 2009. 3. 16. 10:11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동으로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18리, 남으로 청도군(靑道郡) 경계까지 47리, 서로 성주(星州) 경계까지 52리, 북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43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인데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이 경산부(京山府)에 붙였고, 인종이 현령(縣令)을 두었다. 본조 세종 때에 승격시켜 군을 삼았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를 삼았다.

 
[속현] 

수성현(壽城縣) 부의 남쪽 12리에 있다. 본래 위화군(喟火郡) 또는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 하는데, 신라 경덕왕이 수창군으로 고쳤으며, 가창(嘉昌)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이 경주에 붙였으며, 공양왕 2년(1353)에 감무(監務)를 두어 해안현(解顔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 3년(1394)에 감무를 폐지하여 대구에 내속(來屬)시켰다가 뒤에 도로 경주(慶州)에 붙였고, 태종 14년(1414)에 다시 내속시켰다. 해안현 부의 북쪽 17리에 있다. 본래 치성화현(雉省火縣), 또는 미리(美里)라 하였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경주에 붙였고 공민왕이 감무를 두어 수성 감무가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감무를 폐지하여 내속시켰다가 뒤에 도로 경주에 붙였고, 태종 14년에 다시 내속시켰다.

하빈현(河賓縣) 부의 서쪽 37리에 있다. 본래 다사지현(多斯只縣), 또는 답지(沓只)라 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창군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경산부에 붙였는데, 뒤에 내속시켰다. 또는 금호(琴湖)라고도 부른다.

 
[진관]

도호부 1 밀양(密陽). 군 1 청도(淸道). 현 7 경산(慶山)ㆍ하양(河陽)ㆍ인동(仁同)ㆍ현풍(玄風)ㆍ의흥(義興)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이다. 『신증』 신녕(新寧)

 
[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달구화(達句火)ㆍ달성(達成).

 
[성씨]

본부 백(白)ㆍ하(夏)ㆍ배(裴)ㆍ서(徐)ㆍ이(李), 도(都) 내성(來姓)이다. 하빈(河濱) 신(申)ㆍ이(李)ㆍ송(宋). 수성(壽城) 빈(賓)ㆍ나(羅)ㆍ조(曺)ㆍ혜(嵇)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수성에 옛날에 3성(城)이 있었는데, 수대군(壽大郡), 일명 양성(壤城)은 그 성(姓)이 빈이고, 구구성(句具城)은 그 성이 나이고, 잉조이성(仍助伊城)은 그 성이 조와 혜이다.” 하였다.

 

유(柳)ㆍ장(張)ㆍ최(崔)ㆍ신(申)ㆍ유(劉)ㆍ고(高)ㆍ정(鄭)ㆍ예(芮)ㆍ진(陳)ㆍ김(金)ㆍ이(李) 모두 내성(來姓)이다. 해안(解顔) 모(牟)ㆍ백(白)ㆍ하(河)ㆍ신(申)ㆍ정(丁) 《육익》에 또한 말하기를, “성화성(省火城)은 모이고, 무가성은(無價城)은 신이고, 불좌성(佛座城)은 백과 하이고, 명성(鳴城)은 정이다.” 하였다. 제(諸)ㆍ진(秦)ㆍ박(朴) 모두 내성(來姓)이다. 한(韓) 속성(續姓)이다. 자이(資已) 김(金) 속성(續姓)이다.

 
[형승] 

땅의 형세가 평탄하고 넓다. 겹겹이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큰 내가 구불구불 얽혀 있으니, 사방에서 모이는 곳이다. 모두 김요(金銚)의 금학루기(琴鶴樓記)에 있다.

 
[산천]

연귀산(連龜山) 부의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읍을 창설할 때 돌거북을 만들어 산등성이에 남으로 머리를 두고 북으로 꼬리를 두게 묻어서 지맥(地脈)을 통하게 한 까닭에 연귀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침산(砧山) 부의 북으로 6리에 있다. 공산(公山) 팔공산(八空山)이라고도 일컫는데, 해안현에서 북으로 17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岳)이라고 일컫고, 중악(中岳 중국 숭산(嵩山)의 별칭)에 비겨 중사(中祀)를 지냈다. 둘러 있는 것은 부 및 하양ㆍ신녕ㆍ부계(缶溪)ㆍ인동ㆍ팔거(八莒) 등의 읍이다. 마천산(馬川山) 하빈현에서 남으로 1리에 있는데, 일명 금성산(錦城山)이라고도 한다. 왕산(王山) 해안현에 있다.

 

팔조령(八助嶺) 수성현에서 남으로 34리에 있다. 청도군 조에도 보인다. 입암(笠巖) 신천(新川) 가운데에 있다. 그 모양이 삿갓 같기 때문에 이름지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별이 떨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금호(琴湖) 부의 서북으로 11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영천(永川郡) 보현(普賢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모자(母子山)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사문진(沙門津)으로 들어간다. 달천진(達川津) 하빈현에서 동으로 16리에 있는데, 금호의 하류이다. 저탄(猪灘) 해안현에서 남으로 5리에 있는데, 금호의 상류이다.

 

신천(新川) 부에서 동으로 4리에 있다. 팔조령에서 나와서 금호로 들어간다. 성당지(聖堂池) 부에서 남으로 10리에 있다. 동안진(東安津) 하빈현에서 서쪽으로 16리에 있다. 근원은 봉화현(奉化縣)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온다. 『신증』 행탄(杏灘) 하빈현에서 남으로 10리에 있다. 불상지(佛上池) 부에서 북으로 10리에 있다. 연화지(蓮花池) 부에서 서쪽으로 5리에 있다.

 
[토산]

붕어[鯽魚]ㆍ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백복령(白茯苓)ㆍ감(枾)ㆍ잣[海松子]ㆍ송이[松蕈]ㆍ죽전(竹箭) 왕산(王山)에서 난다. 호두[胡桃]ㆍ입초(笠草)ㆍ지황(地黃). 『신증』 잉어[鯉魚]ㆍ지치[紫草]ㆍ옻[漆]ㆍ석류(石榴)ㆍ쇠무릎(牛膝)ㆍ구기자(枸杞子)ㆍ인삼(人蔘)

 
[성곽]

달성(達成)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 9백 44자, 높이 4자이다. 안에 우물 셋과 연못 둘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마천산 봉수(馬川山烽燧) 남으로 성주 화원현(花園縣)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으로 같은 주(州)의 각산(角山)에 응한다. 법이산 봉수(法伊山烽燧) 수성현에 있다. 남으로 청도군 팔조현(八助縣)에 응하고, 북으로는 경산현 성산에 응한다.

 
[누정]

금학루(琴鶴樓) 객관(客館)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 

 

○ 김요(金銚)의 기문에, “옛사람이 물건에 이름 붙이기를 혹은 그 땅에 말미암고, 혹은 그 사람 이름에 말미암는

     다. 파릉(巴陵)의 악양루(岳陽樓)로 말하면 그 땅 이름에 말미암았고, 저수(滁水)의 취옹정(醉翁亭 취옹은

     구양수(歐陽脩)의 아호)으로 말하면 그 사람 이름에 말미암았다. 

 

    지금 금후(琴侯 금은 성, 후는 지방을 다스리는 장관)가 정사를 맡았으며 읍에 금호(琴湖)의 이름이 있고, 누(樓)

    의 그림이 학이 춤추는 형상이니, 이 누에 오르면 한 거문고와 한 학이 있어서

    쇄락출진(洒落出塵)하는 기상이고,성문화명(聲聞和鳴)하는 멋과남풍해온(南風海慍)하는 즐거움이 있다.

 

    금학으로써 그 누각을 이름지음이 옳겠도다. 드디어 나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예전에 백

    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았소.

    언자(言子)의…정치,복자(宓子)가…것,영천(潁川)의 정치로 말하면, 그 공효(功效)가 봉황래의(鳳凰來儀)에

   이르렀으니, 옛 사람의 정치를 알 것이요.

 

    이제 후(侯)가 달구(達句)를 다스림은 신(信)이 흡족해서 사람들이 화목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공경하여 속

   이지 않고, 홀아비와 홀어미가 편안하여 원망하지 않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서 소송(訴訟)이 적어졌으니, 덕을

   숭상하고 법을 숭상하지 않으며, 너그러움에 말미암고 사나움에 말미암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였다.” 하였다.

 

◇강진덕(姜進德)의 시에, “땅이 넓어 사람이 많이 살고, 다락이 높아서 시계(視界)가 밝구나. 학은 능히 구름과 함

     께 가고, 거문고는 달과 같이 맑구나.” 하였다.

 

◇일본 중 경양(慶陽)의 시에, “그림 그린 들보의 나는 듯한 가에서는 학의 여윈 그림자를 보고, 붉은 난간의 굽은

    곳에서거문고의 남은 소리를 듣네. 맑은 바람 밝은 달은 천년의 모습이요, 흐르는 물 높은 산은 태고(太古)의

    마음일세.” 하였다.

 
[학교]

향교 부에서 동으로 2리에 있다.

 
[역원]

범어역(凡於驛) 부에서 동으로 9리에 있다. 금천역(琴川驛) 하빈현의 서쪽 1리에 있다. 낙중원(洛中院) 부에서 남으로 3리에 있다. 대로원(大櫓院)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사부원(沙阜院)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관방원(觀方院) 부에서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마천원(馬川院) 하빈현에서 남으로 4리에 있다. 남천원(南川院) 하빈현에서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오원(梧院) 부에서 남쪽으로 30리에 있다. 박실원(朴實院) 부에서 서쪽으로 26리에 있다.

 
[불우]

동화사(桐華寺) 공산에 있다. 고려 김훤(金晅)이 지은 중 홍진(弘眞)의 비명(碑銘)이 있다. 지장사(地藏寺) 수성현에 있다. 고려의 김황원(金黃元)의 기문이 있다. 선사암(仙槎庵) 마천산에 있다. 암자 곁에 최치원(崔致元)이 벼루를 씻던 못이 있다. 부인사(夫人寺)ㆍ자화사(慈華寺)ㆍ파계사(把溪寺)ㆍ보리사(菩提寺) 모두 공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의 동쪽에 있다. 여단 부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공산성(公山城) 공산의 동쪽에 있는데, 부에서 30리 떨어졌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60척이고, 높이가 4척이며, 안에는 샘이 2, 도랑이 3개 있다. 미리사(美理寺) 해안현에 있다. 혹은 해안을 미리라고도 한다.

 

견훤(甄萱)이 신라의 서울 가까운 곳에 닥쳐오니, 경애왕(景哀王)이 고려에 구원을 빌었는데, 견훤이 갑자기 신라의 서울에 들어와서 왕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국고의 보배와 무기를 다 취하였고, 자녀들과 여러 공장 중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서 귀의하였다.

 

고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으로 공산 아래 미리사 앞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우니, 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죽고 여러 군대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을 피하였다. 자이소(資已所) 해안현에서 북으로 20리에 있다. 성불산고성(成佛山古城) 수성현에서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51척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본조 금유(琴柔)ㆍ옥고(玉沽) 모두 군수였다. 군의 아전 배설(裵泄)이 교활하고,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며 법률 조문을 멋대로 해석하며 남용하여 수령들이 많이 그에게 의지해서 정치를 했는데, 배설이 만년에 남에게 말하기를, “전후의 수령들을 내가 모두 거느리고 살았는데, 오직 금유와 옥고는 모시고 살았다.” 했다. 『신증』 신엄(申嚴).

 
[인물]

고려 빈우광(賓于光) 수성현 사람으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또 중국 과거에 3등으로 합격했다.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이익과 영달을 구하지 않고 산수(山水)로써 스스로 즐기면서 생애를 마쳤다.

 

필법(筆法)이 당대에 이름났다. 배정지(裵廷芝) 충렬왕 때에 인후(印侯)를 따라 연기현(燕岐縣)에서 합단(哈丹)을 쳤는데, 칼을 빼어 말을 달리니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화살이 날아와서 보거(輔車 광대뼈와 아랫이틀 사이)를 꿰뚫자 상처를 싸매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목 자른 것이 매우 많았다. 생김새가 멀쑥하고 장대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그의 무략(武略)에 탄복했다.

 

입으로는 이익을 말하지 않았으며,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서균형(徐鈞衡) 관직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본조 서거정(徐居正) 갑자과(甲子科)에 합격하고 또 중시(重試)ㆍ발영(拔英)ㆍ등준(登俊)의 3과에 뽑혔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들었고, 관직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달성군(達成君)을 봉하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시문(詩文)을 지음에 어휘가 풍부하고 민첩하여 저술한 것이 많고, 홍문관 대제학이 된 것이 모두 26년이었다.

중국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는데, 거정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시를 주고받되 붓을 멈추지 않자 기순이 탄복했다. 

 

사신이 돌아가서 그 재능을 칭찬하고, 우리 사신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안부를 물었다. 《사가집(四佳集)》ㆍ《동인시화(東人詩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태평한화(太平閑話)》가 있어 세상에 전한다.


[효자]

고려 하광신(夏光臣) 명종 때 사람인데, 어머니를 섬기기에 효성을 지극히 하고, 여묘(廬墓)살이를 3년 하였다. 태정(泰定) 계묘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조희삼(曺希參) 수성현 사람인데, 관직은 군기소윤(軍器少尹)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15년(1382)에 어머니를 부축하고 왜란을 피하였는데,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里縣)에 이르러 강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는데, 적이 쫓아오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다. 

 

너는 말을 달려 피하는 것이 옳다.” 하니, 희삼이 말하기를 , “어머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그 어머니와 더불어 밭 사이에 숨었는데, 적이 칼을 뽑아 그 어머니를 치려하자, 희삼이 몸으로 가려서 적에게 죽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다. 김한(金閑) 해안현 사람이다.

 

어릴 때 그 아버지가 죽었는데, 늘 상례(喪禮)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더니, 어머니가 죽자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그 아버지를 이장(移葬)하고 또 3년을 살았다. 나무로 부모의 모습을 새겨서 두 무덤 사이게 두고 큰 농(籠)을 짜서 그 앞에 놓고 그 속에서 살았는데, 부모의 나서 길러주고 보살펴준 은혜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울부짖었다.

 

어떤 큰 호랑이가 농 곁에 왔으나 오히려 움직이지 않자 호랑이는 얼마 있다가 가버렸다. 채순(蔡順) 수성현 사람이다. 어머니가 죽었으나 아버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무덤을 지킬 수 없었는데, 아버지가 죽자 여묘살이하고 이듬해 그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이장하여 아침 저녁 상식을 올려 6년에 마쳤다. 

 

본조 박득춘(朴得春) 해안현(解顔縣) 사람이다. 부모를 위하여 여묘살이 6년을 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중추원 녹사(錄事) 벼슬을 내리고 정려했다.

 
[열녀]

본조 서씨(徐氏) 낭장(郞將) 김내정(金乃鼎)의 아내이다. 나이 24세에 내정이 죽었는데, 절개를 지켜 두 남편을 섬기지 않았다. 태종 때에 정려하고 복호(復戶 부역을 면해 줌)하였다.

 
[제영]

영각서풍청(鈴閣暑風淸) 금유의 시에, “군(郡)을 위해 몸이 피곤하더니, 다락에 오르니 눈이 트이네. 금호에 새 물이 가득하고, 영각에 여름 바람이 맑네. 감히 현가(絃歌)의 정치를 바랄까마는, 조수(組綬)의 영달일랑 뽐내지 마라. 3년토록 조금도 공이 없으니, 붓을 놀려 부질없이 정만 머금네.” 하였다.

 

십영(十詠) 서거정의 시이다. 금호범주(琴湖泛舟) “금호의 맑고 얕은 곳에 난주(蘭舟 목란(木蘭)으로 만든 배로 일반적으로 놀잇배를 뜻함)를 띄우니, 차츰 한가히 가서 백구(白鷗)에 가까울사. 한껏 취해 달 밝은데 노저어 되돌아가니, 풍류란 반드시 오호(五胡 중국의 경치 좋은 다섯 호수)에 노는 것이 아닐세.” 하였다.

 

입암조어(笠巖釣魚) “가랑비 자욱히 가을 물가에 내리는데, 낚싯줄 드리우고 홀로 앉아 하염없이 생각하네. 잔 고기는 낚싯밥 아래 다소 있음을 알겠는데, 금오(金鼇)를 낚지 못해 멈추지 않네” 하였다. 

 

귀수춘운(龜岫春雲) “거북 봉우리가 흐릿하여 큰 자라 봉우리 같구나. 구름이 무심히 나온다지만 또한 뜻이 있더라. 대지의 생령(生靈)들이 바야흐로 바라고 있는데, 뜻 없이 단비를 만든다 하랴.” 하였다.

 

학루명월(鶴樓明月) “한 해 열두 번 둥근 달 중에, 추석에 한껏 둥근 달을 기다려 얻네. 또한 긴 바람이 구름 쓸어 가버리니, 온 다락에 조그만 요기(妖氣)도 붙일 곳 없네.” 하였다. 남소하화(南沼荷花) “물에 돋아난 어린 연꽃은 작은 돈짝을 겹쳐 놓은 듯한데, 꽃이 피면 끝내 배[船] 보다 크네. 재질이 커서 쓰이기 어렵다 말하지 마라, 고질병을 보내어 만성(萬姓)을 고치기에 알맞으니.” 하였다.

 

북벽향림(北壁香林) “옛 벽의 푸른 향나무는 옥삭(玉槊 옥으로 만들거나 혹은 옥색의 창(槍))같이 길고, 긴 바람이 끊임없어 사시(四時)에 향기롭구나. 은근히 다시 가꾸어 힘을 붙이면, 머물러 맑은 향기를 온 고장에 함께 할 수 있으리.” 하였다.

 

동사심승(桐寺尋僧) “멀리 절에 올라가는 돌층계 길엔, 등나무에 흰 버선에 또 검은 지팡이로다. 이렇게 흥겨운데 알아주는 이 없네. 하기야 흥이 청산(靑山)에 있지 중에 있진 않거니.” 하였다. 노원송객(櫓院送客) “관도(官道 국도(國道))에 해마다 

 

버들 빛이 푸르고, 단정(短亭 짧은 거리에 있는 주막)이 수없이 장정(長亭)을 이었네. 양관곡(陽關曲 이별곡) 다 부르고 각각 흩어지니, 모래밭 가에 두 흰 술 병만 누었구나.” 하였다.

 

공령적설(公嶺積雪) “공산 천 길에 울퉁불퉁 산이 겹쳐 의지했는데, 쌓인 눈이 하늘을 적셔 이슬이 맑구나. 신사(神祠)에 신령이 응당 있음을 알겠고, 해마다 삼백(三白 정월에 내리는 눈)이 내려 풍년을 얘기하네.” 하였다. 

 

침산만조(砧山晩照) “물은 서쪽에서 산 밑으로 흐르고, 침산은 푸르러 맑은 가을에 붙었구나. 저녁바람에 어디에서 방아 소리가 급한고, 비낀 해에 일임하여 나그네의 수심을 찧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풍각(豐角) 남으로 70리인데, 동남쪽으로는 밀양(密陽)과 50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 상화촌(上火村)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유산(幽山)으로 고쳐 화왕군(火王郡)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풍각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1018)에 밀성(密城)에 속했으며, 본조 현종 조에 내속했다.

 

화원(花園) 서남쪽으로 30리이며, 서쪽으로 성주(星州)와 70리 떨어져 있다. 본래 신라의 설화(舌火)인데, 경덕왕 16년에 화원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경산부(京山府)에 속했으며, 후에 본부(本府)로 옮겨 속하고, 그 후에 경산부로 다시 속했다. 본조 숙종조에 다시 본부로 속하게 하고 읍호(邑號)를 금성(錦城)이라 하였다.

 
[방면]

동상(東上) 끝은 5리이다. 동중(東中)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동하(東下)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서상(西上) 끝은 5리이다. 서중(西中)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서하(西下)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감물천(甘勿川)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옥포(玉浦) 서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월배(月背)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조암(阻巖)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법화(法華) 서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평곡(省平谷) 서남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5리이다.

 

수현내(守縣內) 동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수동(守東) 동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수북(守北)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상수남(上守南) 남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수남(下守南) 남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상수서(上守西) 남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하수서(下守西) 남쪽으로 처음은 8리이고, 끝은 10리이다.

 

◇앞의 7면은 수성(壽城) 고현 땅이다. 해동촌(解東村)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해북촌(解

    北村) 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해서부(解西府)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해서촌(解西村) 북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앞의 4면은 해안(解顔) 고현 땅이며, 지금은 금호강(琴湖江) 북쪽이다. 하동(河東) 서쪽으로 처음은 20리이

    고, 끝은 30리이다. 하서(河西) 서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하남(河南) 서쪽으로 처음은 35

    리이고, 끝은 40리이다. 하북(河北) 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이고, 끝은 50리다.

 

◇앞의 4면은 하빈(河濱) 고현 땅이며, 금호강 북쪽에 있다. 각현내(角縣內) 남쪽으로 끝은 70리이다. 각북(角

    北) 남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70리이다. 각초동(角初同) 남쪽으로 처음은 70리이고, 끝은 1백리이

    다. 각이동(角二同) 남쪽으로 처음은 80리이고, 끝은 1백 리이다. 각남(角南) 남쪽으로 처음은 70리이고,

 

◇앞의 5면은 풍각(豐角) 고현 땅이다. 화현내(花縣內) 서남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35리인데, 즉 화

    원(花園) 고현땅이다.

 

◇두야보부곡(豆也保部曲)은 풍각 고현에 있다. 자이소 해안현(資已所解顔縣)은 북쪽으로 20리이다.

 
[성지]

읍성(邑城) 본조 영종(英宗) 12년(1736)에 쌓았으며, 둘레가 2천 1백 24보이고, 우물이 다섯이다. 성불산고성(成佛山古城) 수성(壽城) 고현 서쪽 10리이다. 둘레가 3천 51척이다. 마천산고성(馬川山 古城) 서쪽으로 35리이다. 하빈(河賓) 고현 남쪽 1리에 유지(遺址)가 있으며, 금성(錦城)이라 부른다. 화원고성(花園古城) 고현 북쪽 5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라 부른다. 구위성(舊倭城).

 
[영아]

순영(巡營) 태조(太祖) 원년(1392)에 안렴도관찰(按廉都觀察) 출척사(黜陟使)의 영(營)을 상주(尙州)에 설치했다. 태종(太宗) 원년(1400)에 다시 안렴사(按廉使)를 삼았고, 세조(世祖) 11년(1465)에 고쳐서 관찰사(觀察使)라 불렀다. 중종(中宗) 13년(1518)에 본도의 일이 번잡하다 하여 좌우도 관찰사(左右道觀察使)로 나누었는데 동년에 다시 합했다.

 

선조(宣祖) 25년(1592)에 왜적이 모략질하고 약탈하여 도로가 불통하였으므로 또 좌영과 우영으로 나누었는데, 좌영은 경주(慶州)에 설치하고, 우영은 상주(尙州)에 설치하였다가 26년에 다시 합쳐 영(營)을 성주(星州)의 팔거(八莒) 고현에 설치하니, 즉 총병(總兵) 유연(劉綖)이 진(陣)을 주둔했던 곳이다.

 

28년에는 땅이 넓어 다스리기가 곤란하다고 하여 다시 좌우로 나누었으며 29년에 다시 합하여 달성(達城)에 영을 설치하고 이어 석축(石築)을 더하였다. 30년에는 병화(兵火)로 인하여 또 파했는데, 31년에 관찰사 한준겸(韓浚謙)과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대구(大邱)와 성주(星州)를 한 도(道)로 하니, 백성의 피폐함이 가시지 않으므로 안동부에 유영(留營)하자고 하였다. 34년에는 체찰사가 다시 본부(本部)로 영을 옮기자고 청하였다.

 
[관원]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大邱都護府使)와 도사 중군 겸 토포사 심약검률(都使中軍兼討捕使審藥檢律) 각 1인. 

 

○ 중영(中營)은 인조(仁祖)조에 설치했다. 

○ 중영장 1인. 

○ 속읍(屬邑)은 밀양(密陽)ㆍ인동(仁同)ㆍ칠곡(漆谷)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하양(河陽)ㆍ현풍(玄風)ㆍ신

     녕(新寧)ㆍ산(靈山)ㆍ창녕(昌寧)ㆍ의홍(義興)ㆍ자인(慈仁)이다.

 
[봉수]

성산(城山) 봉수 화원(花園) 고현이며, 북쪽으로 5리이다.

 
[창고]

사창(司倉)ㆍ영창(營倉)ㆍ수성창(修城倉)ㆍ고륙(庫六) 모두 읍내에 있다. 남창(南倉) 남쪽으로 15리이다. 하창(河倉) 하서면(河西面) 낙동강(洛東江) 가이다. 강창(江倉) 금호(琴湖)가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남쪽 연안이다. 풍찰(豐倉) 풍각(豐角) 고현에 있다. 해창(解倉) 북쪽으로 10리이다. 화원창(花園倉) 고현 남쪽에 있다. 대혜창(大惠倉) 선산(善山)에 있다. 팔거창(八莒倉).

 
[역참]

설화역(舌火驛) 화원 고현 서쪽 5리이다. 유산역(幽山驛) 풍각 고현에 있다. 보발(步撥)ㆍ관문참(官門站)ㆍ오동원참(梧桐院站).

 
[진도]

사문역(沙門驛) 금호강(琴湖江)이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며, 서쪽은 성주(星州)와 통한다. 금호진(琴湖津) 서북쪽으로 10리이며, 북쪽은 칠곡(漆谷)과 통한다.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토산]

입초(笠草).

 
[누정]

관풍루(觀風樓)ㆍ척금루(滌襟樓)ㆍ점풍루(占豐樓)ㆍ읍북루(挹北樓) 모두 읍내이다. 임수정(臨水亭) 서남쪽으로 35리이다. 하목당(霞鶩堂) 낙동강가 경치가 훌륭하다.

 
[사원]

연경서원(硏經書院) 명종(明宗) 갑자년(1564)에 건립하고, 현종(玄宗) 갑자년(1660)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조에 보인다. 정술(鄭述) 충주(忠州) 조에 보인다. 정경세(鄭經世) 상주(尙州) 조에 보인다.

 

◇낙빈서원(落濱書院) 숙종 기미년(1679)에 건립하고 갑술년(1694)에 사액하였다.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

    三門)ㆍ하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모두 과천(果川) 조에 보인다.

 

◇표충사(表忠祠) 현종 경술년(1670)에 건립하고 숙종 정묘년(1687)에 사액하였다. 신숭겸(申崇兼) 마전(麻

    田) 조에 보다. 김낙(金樂) 순천 사람으로,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주01] 쇄락출진(洒落出塵)

            쇄락은 물뿌린 듯이 차고 모습이 깨끗한 것이요, 출진은 더러운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주02] 성문화명(聲聞和鳴)

            성문은 학이 깊은 못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뜻이요, 화명은 학이 그늘에서 우니 그 새끼가 화

            답운다는 뜻이다.

 

[주03] 남풍해온(南風解慍)

             순(舜) 임금의 거문고 가락 남풍가(南風歌) 중에, “여름 바람의 향기로움이 우리 백성의 걱정을 풀어줄 만하

            다. [南之薰兮可以解吾民之慍兮]”에서 온 말.

 

[주04] 언자(言子)의 현가(絃歌)의 정치

            공자의 제자 언언(言偃)이 무성(武城)의 원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교화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05] 복자(宓子)가 탄금(彈琴)하여 교화한 것

            공자의 제자 복불제(宓不齊)가 단보(單父)의 원이 되어 거문고를 타면서, 관아의 당(堂) 아래로 내려가지 않

            고도 다스렸다는 고사가 있다.

 

[주06] 영천(穎川)의 정치

             한(漢) 나라의 황패(黃霸)가 영천 태수로 선치하여 한 나라 때에 가장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으로 이름이 있

             었다.

 

[주07] 봉황래의(鳳凰來儀)

          《서경(書經)》에, “소소(簫韶 순 임금의 음악)가 9악장(樂章)을 마치니, 봉황이 와서 거동하였다.

           [簫韶九成鳳凰來儀]”고 하였으니, 곧 예악의 극치를 말한다.

 

[주08] 조수(組綬)

           벼슬을 하여 귀하게 됨을 뜻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中

●대구군(大丘郡)
    본래 달구화현(達句火縣)인데, 경덕왕이 대구(大丘)로 이름을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

    고, 고려 현종 무오에 경산부(京山府)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인종(仁宗) 21년 계해에 비로소 현령(縣令)을 두

    었다.  [바로 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13년이다.]

 

  본조(本朝) 금상(今上) 원년 기해에 1천 호(戶) 이상이 됨으로써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속현(屬縣)이 3이니, 수성현(壽城縣)은 본디 위화군(喟火郡)인데, 경덕왕이 수창군(壽昌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해안현(解顔縣)은 본디 치성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라고도 한다.】 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장산군(獐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무오년에 모두 경주(慶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수성(壽城)·해안(解顔) 겸 감무(兼監務)를 두었는데, 본조(本朝) 태조 3년 갑술에 감무(監務)를 혁파하고 대구(大丘) 임내(任內)를 삼았으며, 1세(世)를 지나서 도로 경주(慶州)에 붙였다가, 태종 14년 갑오에 다시 대구에 붙였다. 

 

하빈현(河濱縣)은, 본디 다사지현(多斯只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수성군(壽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경산부(京山府)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대구 임내로 삼았다. 소(所)가 1이니, 자이(資已)이다.

 

진산(鎭山)은 연구산(連龜山)이다.【속담에 전하기를, “돌거북[石龜]을 만들어서 산등성이에 간직하여,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으로 꼬리를 두게 하여 산기(山氣)를 통하게 한 까닭으로, ‘연구산’이라고 이른다.”고 한다.】 공산(公山)【해안현(解顔縣) 북쪽 11리 거리에 있다.

 

신라 때에 부악(父嶽)이라 일컫고, 중악(中嶽)에 비겨 중사(中祀)로 삼았는데, 지금은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금호(琴湖)는 그 근원이 영천(永川) 모자산(母子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서 군(郡) 북쪽으로 지나가고, 또 서남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으로 들어간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경산(慶山)에 이르기 23리, 서쪽으로 성주(星州)에 이르기 41리, 남쪽으로 청도(淸道)에 이르기 35리, 북쪽으로 의흥(義興)에 이르기 35리다. 본군(本郡)은 호수는 4백 36호, 인구가 1천 3백 29명이며, 수성(壽城)의 호수가 2백 64호, 인구가 6백 44명이요, 

 

하빈(河濱)의 호수는 3백 51호, 인구가 1천 2백 49명이며, 해안현(解顔縣)의 호수는 1백 98호, 인구가 1천 2백 단(單) 3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1명, 진군(鎭軍)이 1백 단(單) 5명, 선군(船軍)이 4백 54명이다.


본군(本郡)의 토성(土姓)이 5이니, 백(白)·하(夏)·배(裵)·서(徐)·이(李)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도(都)이다. 수성(壽城)의 성이 4이니, 빈(賓)·나(羅)·조(曺)·해(嵇)이며, 내성(來姓)이 7이니, 유(柳)·장(張)·최(崔)·신(申)·유(劉)·고(高)·정(鄭)이요, 속성(續姓)이 6이니, 예(芮)【부계(缶溪)에서 왔다.】·진(陳)【계성(桂城)에서 왔다.】·최(崔)【보령(保寧)에서 왔다.】 

 

이요, 김(金)이 둘,【하나는 김해에서 왔고, 하나는 청도(淸道)에서 왔다.】·이(李)【본관은 알지 못한다. 모두 향리가 되었다.】 이다. 하빈(河濱)의 성이 3이니, 신(申)·이(李)·송(宋)이요, 해안(解顔)의 성이 5이니, 모(牟)·백(白)·하(河)·신(申)·정(丁)이며, 내성(來姓)이 3이니, 제(諸)·진(秦)·박(朴)이고, 속성(續姓)이 1이니, 한(韓)이다. 자이소(資已所)의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묘종(苗種)을 좋아한다. 간전(墾田)은 6천 5백 43결이다.【논이 10분의 3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기장·피[稷]·보리·삼[麻]·목면(木綿)이며, 토공(土貢)은 호도·대추·잣·석이[石茸]·칠(漆)·종이·지초(芝草)·입초(笠草)·은구어(銀口魚)·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잘(山獺皮)이요,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당귀(當歸)·맥문동(麥門冬)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해안현(解顔縣) 동촌(東村) 여리(汝里)에 있고, 하나는 수성현(壽城縣) 남촌(南村) 상원동(上院洞)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은 군(郡) 서쪽 2리에 있다.【둘레가 1백 51보이며, 안에 샘이 둘이 있다.】 금학루(琴鶴樓)【객사(客舍) 북쪽에 있다.】 역(驛)이 2이니, 범어(凡於)와【수성(壽城)에 있다.】 신역(新驛)【하빈(河濱)에 있다.】 이다. 봉화가 2곳이니, 법이산(法伊山)은 수성현 남쪽에 있고,【남쪽으로 청도(淸道)의 팔조현(八助峴) 봉화에 응하고, 북쪽으로 경산(慶山)의 성산(城山) 봉화에 응한다.】

 

마천(馬川)은 하빈현 남쪽에 있다.【남쪽으로 화원(花園)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성주(星州) 각산(角山)에 응한다.】 큰 방죽[大堤]이 4이니, 성당(聖堂)·불상(佛上)【군(郡) 경내에 있다.】·둔동(屯洞)【수성(壽城) 지경에 있다.】·부제(釜堤)【해안(解顔) 지경에 있다.】 이다. 

 

입암(笠岩)【군(郡) 동쪽 2리 가량 되는 새내[新川] 가운데 있다. 돌이 높이 서 있는데, 시속에서 ‘갓바위’[笠岩]라고 부른다. 세상에 전하기를, “별이 떨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中

 

● 대구의 기후?

   이시발(李時發)이 또 장계를 올렸다.
   “대구 도호부 판관(大丘都護府判官) 조홍립(曺弘立)의 치보에 ‘정월 19일 자시(子時)에 비가 내리면서 천둥이 북쪽에서

   남으로 향하다가 그쳤다. 변이가 비상하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中 선조 37년 1604년 2월 4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