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국사(國史) 48

8.15해방 사진 모음

위 사진은 59년 전 8월 15일 조국이 일제로 부터 해방돼 서울 시민들이 남산 국기 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 이 사진은 촬영한 사람이 누구인지, 태극기를 게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돼지 않는 정부 자료 사진입니다. 해방 한달쯤 뒤 국민학교가 개교해 첫수업을 하는 장면, 우리나라 최초의 천연색 사진으로 알려진 해방 1주년 기념행사 사진 등 귀중한 사료도 포함돼 있습 니다. 사진은 이형모 씨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촬영한 사람이 확인돼지 않은 자료들입 니다. 또 사진에 대한 해설도 불충분 합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1945년 광복을 환호하는 모습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모습. 만나는 이 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

우리나라 문(文) - 사대(事大)하는 표(表)와 소(疏)를 이웃 나라에게 준 서(書)

해동역사 제52권 >예문지(藝文志)11> ●백제(百濟)의 개로왕(蓋鹵王)이 송(宋)나라 효무제(孝武帝)에게 올린 표문(表文). 대명(大明) 2년(458, 개로왕 4) 신의 나라는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문무(文武)의 훌륭한 신하들이 대대로 조정의 관작을 받았습니다. 행 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인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가엾게 여기시어 모두에게 관작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송서(宋書)》 ●백제의 개로왕이 후위(後魏)의 효문제(孝文帝)에게 올린 표문. 연흥(延興) 2년(472, 개로왕 18)에 개로왕이 표문을 올려 군사를 보내 주어 고구려를 정벌하기를 요청하자, 위나라 효문제가 너그러운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조서는 중국문..

6, 25 전쟁(戰爭)

■ 상기(想起)하자 6.25 전쟁(戰爭) ↑1950. 10. 1.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국군용사들 ↑1950. 10. 1. 38선을돌파하고북진하는국군용사들 ↑1950. 10. 1.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유엔군 ↑북진하는 국군용사들 ↑국군 환영 군중대회(함흥) ↑1950. 10. 10. 함흥 부근의 한 동굴에서, 공산군에 확살된 300여 명의 시신을 꺼내고 있다. ↑평양 북빙에 니히하는 공수부대 ↑평양 환영 군중대회 ↑압록강에 도착한 국군용사(1950, 11, 20) ↑1950.11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 40군단. ↑1950.11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 40군단. ↑후퇴하는 미군들... ↑후퇴하는 미군들.. ↑1950년 12월 3일 평양, 파괴된 대동강 철교에서 피란민들이 남하하고 있다..

광주반란 작전을 북한이 주도했다고 보는 증거들

광주반란 작전을 북한이 주도했다고 보는 증거들 1. 북한 노동당 소속의 출판사들이 1982년 및 1985년에 2개의 5.18역사책을 썼습니다. 여기에 있는 자료들과 2005년에 처 음 공개된 검찰수사자료를 대조해보면 중요한 사실들과 통계가 일치합니다. 하다못해 공수부대를 향해 지그재그로 돌진하던 대형 버스가 광전교통 ‘전남5아3706’이라는 번호판을 달고 있는 것까지 일치하며 시위군중 속에서나 알 수 있는 구체적인 폭동행위들을 기록해놓았습니다. 이는 광주의 수많은 곳에서 전개되는 상황들을 북한 사람들이 와서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북한은 해마다 5월이 되면 여러 날에 걸쳐 그리고 전국에 걸쳐 5.18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합니다. 당정의 초고위급이 주도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5.18역사책..

前 高靈縣監 金守默의 옥사(獄事) 관련자료/淸風金氏

영조실록 >영조 43년(1767년) >영조 43년 2월 26일 ■ 金守默 관련자료 영조실록 >영조 43년(1767년) >영조 43년 2월 26일 전배례·친경례·노주례를 행하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니,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 인하여 황단(皇壇)에 가서 봉심(奉審)을 마치고 동단(東壇)에 나아가 친경례를 행하였으며, 예를 마치자 친경대(親耕臺)로 돌아와 노주례(勞酒禮)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환궁하여 경현당에 나아가 기백(畿伯)과 여러 수령의 입시를 명하여 경잠(耕蠶)을 신칙하였다. 삭녕군수(朔寧郡守) 최홍보(崔弘輔), 영평현령(永平縣令) 유언수(兪彦銖), 연천현감(漣川縣監) 정재원(丁載遠)의 주대(奏對)가 임금의 뜻에 맞아 각각 대록비(大鹿皮) 1령(令..

호패(號牌)

■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증(호패) 조선시대에 고위 관리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 싸지 16세 이상 모든 남자는 국가가 발행한 신분 증명서인 호패를 차고 다녀야 했다. 나무. 상아. 쇠뿔 등으로 만든 호패의 표면에는 이름, 출생년도, 제작년도와 발행기관 등이 새겨져 있다. 신분과 직책에 따라 호패의 재질과 기록 내용이 달랐다. 남자가 호패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곧 호적에 올라 병역과 조세의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신분이 알려지면 세금이나 징집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사용을 기피 하였다. 정부에서는 백성들이 호패를 차도록 권장하기 위해 호패를 위조하면 극형, 호패를 찾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도록 하는 등의 처벌 법규를 만들어 시행 하였다. 또 호패가 없는 자에게는 아예 민원을 청구하거..

우리나라 역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사람

우리나라 역대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분은 총 11명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해군의 충무공이 이순신 장군이라면, 육군의 충무공은 이수일 장군입니다. 이수일 장군이 이순신 장군만큼 알려지지 않은 점은 후손들의 못난 탓입니다. 아울러 역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01,박병묵[朴炳默] 나주박씨의 시조(羅州朴氏 始祖)로 시호(諡號)는 충무(忠武) 이다. 고려(高麗)때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나 그의 선조(先祖)에 대(對) 하여는 알 수가 없다. 박병묵( 朴炳默)은 나주(羅州)에 오래 동안 살아온 선비집안이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로 삼았다. 02,최필달[崔必達] 강릉 최씨(江陵 崔氏)의 시조(始祖)로 시호(諡號)는충무(忠武)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고구려, 백제, 신라만의 독특한 왕호

■고구려, 백제, 신라만의 독특한 왕호 고구려는 왕을 太王, 國罡上이라 불렀다. 국강상은 조선의 왕호인 주상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국원왕의 별칭인 國罡上王과 광개토왕의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왕명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의 왕명을 國岡上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왕의 무덤이 있는 장소를 왕명에 붙이는 고구려의 관습으로 보아 국강상은 왕이 묻힌 언덕을 이르는 말이 되고, 호태왕은 大王의 개념이 된다. 好가 大와 같은 수식어가 되고 太王이 王의 호칭이 되는 것이다. 백제는 왕을 어라하, 鞬吉支라고 불렀다. 어라하와 건길지는 같은 뜻으로, '어라'와 '鞬', '하'와 '吉支'로 대응된다. 어라와 건은 '크다'의 의미이며 하와 길지는 임금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을 뜻하는 말이..

역관 이화종이 요동에서 보고 들은 얘기를 말함 - 역관의 첩보활동

역관(譯官) 이화종(李和宗)이 요동에서[압해(押解)하는 일 때문에 갔었다.]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지난 3월 4일 강을 건너서 6일에 탕참(湯站)에 들어갔더니 수보관(守堡官) 한승경(韓承慶)이 ‘무슨 일로 왔는가?’ 하고 묻기에, 신이 야인들에게 잡혔다가 우리에게로 탈출해온 중국 사람 때문에 왔다고 답했습니다. 승경이 또 ‘그대 나라 사람들은 이치를 따르지 않는 자가 많아 내가 공문(公文)을 발송했는데 그대는 알고 있는가?’ 하므로 신이 안다고 대답하고 이어 자문(咨文)의 내용에 따라 공손히 ‘우리 나라의 주리(州吏)가 실례한【바로 의주(義州)의 김철(金鐵)의 일임.】 것인데 전하께서 듣고 매우 미안하게 여겼다. 전에 중국에 들어가는 사신은 으레 통사를 보내어 예로써 문후를 했고, 본보의 대인(大人)..

란후논시사차(亂後論時事箚) - 이항복

■ 란 후 논시사차(亂後論時事箚) - 이항복 (전쟁을 논평하고, 대책을 강구한 이항복의 논설차문) 신은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병조(兵曹)의 장관(長官)이 되었고 또 비변사(備邊司) 유사(有司)의 직임을 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야(草野)의 한천(寒賤)한 선비와는 체통과 형세가 절로 달라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참예하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양(平壤)으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렀다가 이곳으로 환가(還駕)하기까지 해가 장차 두 번 바뀌는 동안에 소장(疏章)이 구름처럼 쌓였으나, 신만이 유독 소장을 올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현재의 일에 미편(未便)함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까닭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뜻을 행하는 자리가 있고 말씀을 아뢰는 길이 있으며, 조정에 나가면 회의(會議)가 있고, 어전에 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