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탁영 김일손 선생 신도비명 - 尹鳳朝。

야촌(1) 2022. 5. 14. 00:06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신도비명(墓碣銘)

 

홍문관제학 윤봉조(尹鳳朝)가 짓고

부제학 퇴어당 김진상이 쓰고(副提學退漁堂金公鎭商書)。

관찰사 지수재 유척기가 전액을 쓰다.(觀察使知守齋兪公拓基篆)。

 

연산군 시대 무오 사화(戊午史禍)에 대하여 지금까지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목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탁영(濯纓, 김일손의 호) 김 선생(金先生)을 수위로 삼는다. 선생은 하늘이 진정 낳은 분인데, 이미 낳아 놓고서 또 죽이다니, 하늘은 도대체 무슨 까닭에서인가?

 

아! 선생의 문장과 절의(節義)는 우주에 꽉 찰 정도여서 동방(東方)의 편협한 곳에서는 용납하지 못할 바였기에, 선생은 미칠 수 없어 그렇게 되었음인가?

대저 선생은 사관(史官)이 되어서 일찍이 그 스승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 김공(金公)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갖다가 국사(國史)에 실었고, 또 사초(史草)에다 이극돈(李克墩)의 추잡한 행실을 곧이곧대로 썼는데, 이극돈이 실록청 당상관(實錄廳堂上官)이 되어 이것을 보고 원한을 품고서 드디어 불만을 지닌 무리들을 이끌고 조의제문을 가져다 이르기를, “이것은 감히 지어서도 안 되고, 이것은 감히 써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모두 대역(大逆)으로 마침내 안치(按治)하여 점필공(佔畢公)은 그 무덤에 화가 미치었고 선생 역시 참형을 당해 동쪽 저잣거리에 버려져 세상의 큰 경계를 삼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선생의 죽음은 진정 이미 신명(神明)을 움직여 사람들의 이목을 격분하게 하였다.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하기에 미쳐 맨 먼저 원통한 죄를 씻어 주어 선생을 칭찬하고 총애함이 두드러졌으며, 현종(顯宗) 때에 유신(儒臣)이 또 그 사실을 말하자, 특별히 추증(追贈)의 은전이 내려졌으므로, 사대부들이 ‘일성(日星)과 하한(河漢) 같아 다가가서 미치지 못한다’고 전송(傳誦)하며 사모하였는데, 저들 손뼉을 치고 서로 기뻐하며 스스로 유쾌히 제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은 이미 모두 남을 해치는 자로 지목되고 의심하게 해 미혹시키는 자로 인정되어 한정이 없을 때까지 귀신의 주륙을 당하였으니, 아!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선생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휘(諱)는 일손(馹孫)이며, 자(字)는 계운(季雲)이다. 문장을 지어 글을 쓸 적에 천백 마디라도 거칠 것이 없었고 웅장 박식하여 읽는 자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으며, 중국 사람들은 선생을 가리켜 “이 사람이 바로 한자(韓子, 한유(韓愈)의 경칭)이다.”라고 하였다.

 

어려서 점필공(佔畢公)에게 글을 배웠고, 또 김 문경공(金文敬公, 김굉필(金宏弼))과 정 문헌공(鄭文獻公, 정여창(鄭汝昌))과 더불어 절친하게 사귀었으며 언제나 의기가 충천하고 분발하여 원대한 생각을 가졌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병오년(丙午年, 1486년 성종 17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고, 아울러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이해 겨울에 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보임되었고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마지막 관직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 봉양을 위해 진주(晉州)의 학관(學官)으로 나갔으며, 질정관(質正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이미 또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 독서당)에 들어갔으며, 강목 교수청(綱目校讎廳)에 선발되어 종사하여 명성이 동료들을 뛰어넘자, 여러 명공(名公)들도 자신을 낮추어 주장을 굽혔으나 간사한 무리들은 이미 곁눈질함이 많았는데, 사화(史禍)가 시작되기에 미쳐 한때의 사류(士流)들은 선생의 동아리로 몰려 죽거나 귀양을 가 거의 사라졌다. 

 

선생이 죽을 때의 나이는 35세였다. 지어놓은 시문(詩文)은 무오 사화를 겪으면서 다 흩어지고 단지 몇 권만이 세상에 돌아다녔다. 증조(曾祖)는 휘(諱)가 서(湑)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조부(祖父)는 절효(節孝) 선생으로 휘가 극일(克一)이며 벼슬하지 않았는데, 어버이 상(喪)을 당하여 무덤의 움막에 거처할 적에 그 정성이 맹수를 감동시킨 일은 군지(郡誌)에 실려 있다.

 

이 절효 선생이 집의(執義) 김맹(金孟)을 낳았으며, 집의공은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 김준손(金駿孫)과 둘째 김기손(金驥孫)이 모두 일방(一榜)에 급제하였다. 둘째는 일찍 죽었으며, 맏이는 관직이 직제학(直提學)까지 올랐는데, 선생은 그 막내아들이다. 선생은 예안 김씨(禮安金氏) 김미손(金尾孫)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후사는 없었다.

 

직제학공의 아들 김대유(金大有)는 호(號)가 삼족당(三足堂)으로, 학문과 재행(才行)이 크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어진 이들의 칭찬하는 바가 되어서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어 정언(正言)에 제수되었으나 북문지변(北門之變, 기묘 사화(己卯士禍))이 일어나자 폐척(廢斥)되어 있다가 세상을 마쳤으니, 아! 소인이 앞서의 사화(士禍)를 징계하지 않음이 또 왜 이렇게 심하였던가?

 

학자들이 선생이 살았던 청도군(淸道郡)에다 사당을 세우고 아울러 절효 선생과 삼족당(三足堂) 두 공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삼대(三代)가 제사를 받아 찬란하게 빛났으니, 선생의 도에 어찌 내려온 바가 없으며 또한 어찌 전하는 바가 없다고 하겠는가?

비록 선생이 삼족공과 함께 그 시대에 불행하였다고 하지만, 보시(報施)의 후세에 기필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선생의 무덤이 청도군 상북(上北)의 선조 묘소 곁에 있는데, 세월이 오래 되었지만 드러나게 새겨놓은 것이 없어 지나는 자들은 모두 탄식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의 성상(聖上) 을사년(乙巳年, 1725년 영조 원년)에 윤군(尹君) 봉구(鳳九)가 이 고을의 수령이 되어 개연히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책임이다.” 하고, 마침내 고을의 선비들과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울 것을 도모하였으며, 관찰사 유공(兪公) 척기(拓基) 또한 즐거이 듣고서 그 공역을 도우니, 후세 사람들이 선생을 위하여 사모하였던 것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유감 없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건대, 선생은 정직한 마음을 지키면서 간사한 자들과 부딪쳐 두려워하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았으므로 비록 그 마음은 백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겠지만, 단지 점필재의 글은 의의(意義)를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도, 선생이 또 굳이 사승(史乘, ≪성종 실록≫)에 실어 놓으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겠는가? 이것이 후세 사람들의 의심하는 바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문득 그 사이에는 본래 권도(權度)가 있었던 것이니, 얕은 지식으론 논할 수 없다. 선생의 시대에 미쳐 강질(講質)하지 못함이 애석할 뿐이다.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일찍이 이에 대해 논하기를, “어찌 ≪춘추(春秋)≫에서 노(魯)나라 정공(定公)과 애공(哀公)에 대하여 드러내지 않고 말한 것은 성인의 달권(達權)이 아니고서는 본받을 수 없는데도 역사를 기록한 자가 오직 곧음만을 직분으로 여겼음인가?”라고 하였다.

 

아! 이것은 선생의 미묘한 뜻을 알아서 후세의 요부(堯夫, 송 철종(宋哲宗) 때의 범순인(范純仁)의 자(字)가 된다고 이를 만하다.

아!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상재(桑梓)가 가려진 곳 여기가 선생의 살던 마을인데, 1장(丈) 5척(尺)의 땅에 선생 묻히었고 두어 칸의 사당에 선생 향사(享祀)하네.

높디 높은 도(道)의 산과 힘차게 흐르는 도의 물은 장차 선생과 함께 영원하리니, 그 죽음 사람들의 죽음과는 다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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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濯纓金先生神道碑銘。

 

弘文提學 尹鳳朝 撰。

 

燕山世戊午史禍。至今談者必哽涕。而濯纓金先生爲之首。先生。天固生之也。旣生而又殺之。天曷故焉。噫。先生文章節義。迫隘宇宙。東褊之所不能容。則先生可無及乎。蓋先生爲史官。嘗取其師佔畢金公弔義帝文。載國史。又於史直書李克墩醜行。克墩掌史事。見而銜之。遂引諸不逞。亟持義帝文曰。是不敢作。是不敢書。俱大逆遂按。佔畢公禍其瘞。先生亦身棄東市。爲世大戒。豈不悲哉。然先生之死。固已動神明而激耳目矣。及中廟改玉。首洗冤枉。褒寵赫然。顯廟朝儒臣。又白其事實。特擧貤典。士大夫誦慕如日星江漢。不可梯及。而彼鼓掌相慶。自快私意者。已皆爲螟蠚。爲狐蠱。鬼誅於無窮。嗚呼。非天意。詎至此乎。先生。金海人。諱馹孫。字季雲。爲文章。下筆千百言。奔放雄博。讀者皆呿舌。華人目之曰。此韓子也。少從佔畢公學。又與金文敬,鄭文獻友善。常伉厲奮發。有遠大之慕。成化丙午。魁生員。竝中進士第二。冬。又闡大科。自翰苑歷華踐。卒官吏曹正郞。間爲養補晉州學。以質正官赴京師。已又賜暇湖堂。選隷綱目校讎廳。聲譽出等夷。諸名公皆折節相下。奸黨已多側目者。及禍作。一時士流。坐先生鉤黨。死徙殆盡。先生死時年三十五。所著詩文。經禍散佚。只若干卷行于世。曾祖諱湑。縣監。祖節孝先生諱克一。不仕。喪親廬墓。誠感猛獸。事在郡誌中。是生執義孟。執義公生三子。伯駿孫。仲驥孫。竝登一榜。仲先夭。伯官直提學。先生其季也。娶禮安金氏參奉尾孫女。無嗣。直學公有子大有。號三足堂。經術才行。大爲靜庵諸賢所奬。擧賢良科。拜正言。至北門變起。廢斥沒世。嗚呼。小人之不懲前禍。又何甚也。學者卽先生所居淸道郡爲建祠。竝與節孝,三足二公而享祀之。三世俎豆。于光有耀。先生之道。豈無所來而亦無所傳哉。雖先生與三足公。其世俱不幸。而報施之必於後者。非在斯歟。先生葬在本郡上北先墓側。歲久無顯刻。過者皆齎咨太息。今上乙巳。尹君鳳九宰是邑。慨然曰。是余之責。遂與邑士謀。將伐石樹徑。觀察使兪公拓基。亦樂聞而相其役。後人之爲先生寄慕者。至此而益無憾矣。余竊念。先生秉直觸邪。不懾不撓。雖其心百死靡悔。而只是畢齋之文。意義有不可知者。先生又必載之史乘。何也。此不免後來之起疑也。抑其間自有權度。非淺識所可論歟。惜不及先生之世而講質也。尤菴宋文正嘗論此曰。豈定哀微辭。非聖人達權則不可法。而秉史筆者。惟直是職歟。噫。此可謂知先生微意。而爲後世之堯夫也歟。嗚呼。此不可與不知者道也。銘曰。

桑梓翳然。是維先生之宅里。丈五先生是埋。數架先生是祀。嶻嶭乎道之山。湯湯乎道之水。將先生與俱永存兮。其死也異乎人之死。副提學退漁堂金公鎭商書。觀察使知守齋兪公拓基篆。

 

탁영집 > 濯纓先生文集卷之六 / 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