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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선생문집 제18권 - 묘갈명(墓碣銘)

야촌(1) 2022. 5. 15. 20:57

서산선생문집 제18권 - 묘갈명(墓碣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년(순조 27) ~ 1899년(고종 36)』

 

증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성균 생원 야암 선생 김공의 묘갈명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成均生員野庵先生金公墓碣銘-서문 병기)

 

야암 선생 김공은 휘가 임(㶵)이고 자(字)가 수이(受而)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의성군(義城君) 석(錫)이 수봉(受封)한 조상이다. 그 뒤로 대대로 봉작(封爵)이 이어졌으니, 용비(龍庇)는 태자 첨사(太子詹事), 의(宜)는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태권(台權)은 문예부 좌사윤(文睿府左司尹)을 지냈으니, 모두 고려의 사적에 드러나 있다.

 

거두(居斗)는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한계(漢啓)는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를 지내다가, 단종이 손위하자 병이라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3세 뒤 진(璡)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니 호는 청계(靑溪)이다.

 

다섯명의 어진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퇴계 선생(退溪) 선생의 고제(高弟)이다. 둘째 수일(守一)은 자여찰방(自如察訪)을 지냈고 호는 구봉(龜峯)이다. 용(涌)을 낳았으니 병조참의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훈(宣武勳)에 책록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운천(雲川)이다.

 

맑은 명성과 곧은 절의가 당시에 빛났다. 다섯 아들 중 맏이인 시주(是柱)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정랑(正郞) 위(暐)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두었는데, 공이 바로 둘째 아들이다. 좌랑공의 아우는 시건(是楗)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는데 죽계안씨(竹溪安氏) 호군 담(霮)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후사가 없이 일찍 죽었다. 

 

공이 막 태어나자 참판공이 안씨부인에게 그를 아들로 삼도록 명하여, 대여섯 살 때에도 권씨부인의 소생임을 알지 못하였다. 한참 뒤에 알게 되어서도 안씨부인을 어머니로 대함에 더욱 소홀함이 없었다. 


처음 글자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참판공이 저물녘에 배꽃을 바라보다가 공에게 시구(詩句)를 지어 보도록 하였는데, 공이 바로 “배꽃은 하염없이 희네.[梨花依依白]”라고 짓자, 참판공이 크게 놀라며 “‘하염없이 희네[依依白]’ 3글자가 저물녘 경치를 잘 그려내었다.” 라고 하였다. 


당시 공의 종형제들이 시례(詩禮)의 학문에 매진하여 훌륭한 문학사(文學士)가 많았는데, 공은 더욱 노력하고 분발하여 시문을 짓는 재능이 풍부하고 빼어나, 참판공이 기이하게 여기며 사랑하여 손수 지은 「십이가(十二歌)」를 글로 써주었다. 


14세에 좌랑공의 상을 당해서는 예에 따라 집상(執喪)하였다. 4년이 지나 참판공이 또 돌아가자 공은 정훈(庭訓1)을 잃은 것을 애통해 하였다. 제전(祭奠)을 모시는 여가에도 공부에 더욱 힘써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깊이 공부하고 제자백가에도 널리 통하여, 실질을 만끽하고 배운 것을 발산함에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능숙하였다. 


유림(儒林)에 일이 생기면 굳건하게 논지를 지키고 꿋꿋하게 아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32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병정(丙丁2) 이후로 산림에 자취를 감춘 것이 거의 4∼5년이었다. 뒷날 비록 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마지못해 과장(科場)에 나아갔지만 공의 본뜻은 아니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이부랑(吏部郞)이 여러번 사람을 보내 뜻을 전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무자년(1648) 권씨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장례를 치르고 나서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곡하기를 비바람에도 거른 적이 없었다. 


신묘년(1651) 안씨부인의  명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안씨부인의 부고가 이르니 공이 크게 슬퍼하여 거의 상례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후로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거처하던 내앞[川前]의 빗골[雨谷] 언덕에 집을 지어 야암(野庵)이라 편액 하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늘그막에 장수(藏修)할 곳으로 삼아 세상일을 사절하고, 오로지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원근의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배우기를 청하는 자들이 항상 수십명이 되었는데,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세워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노고를 말하자, “내 스스로 이를 즐기니 피곤하지 않소.”라고 하였다. 때때로 좋은 때와 아름다운 절기가 되면 이웃을 초대하고 관동(冠童)들을 모아 막걸리와 산나물로 함께 진솔회(眞率會)를 가지고, 소요 자적하며 마음을 비워 득실에 뜻을 두지 않았다. 


병오년(1666) 겨울에 뜻하지 않게 감기에 걸리자 자제들에게 약을 올리지 못하게 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라고 하고 스스로 만사(輓詞) 한 편을 지었다. 그 내용에 말하였다. 

 

행동은 남에게 미치지 못하고 / 行不逮人
덕망도 남에게 미치지 못하여 / 德不及物
강호에서 늘그막을 보내면서 / 送老江湖
해와 달에 덧없이 바래었네 / 灑灑日月

 

살아서는 세상에 도움 되지 못하고 / 生無益於世
죽어서도 후세에 들림이 없으리니 / 死無聞於後
애오라지 조화에 따라 다하여 돌아가 / 聊乘化而歸盡
달갑게 초목과 함께 썩으리라 / 甘與草木而同腐

 

몇 달 만에 돌아가시니, 이날이 정미년(1667) 4월 3일이다. 태어난 갑진년(1604)으로 부터 64세를 누렸다.

유명(遺命)에 따라 고을 서쪽 임피(林皮) 선영의 서쪽 임좌(壬坐)의 언덕 에 장사 지냈다. 

 

초배위(初配位)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좌의정 정간공(貞簡公) 탁(琢)의 손녀이자 주부(主簿) 윤위(允偉)의 딸이다. 군자의 배필이 되어 덕에 어긋남이 없었으나 공보다 36년 앞서  죽었으며, 묘소는 공과 합폄(合窆)하였다.

 

계배위(繼配位)는 신천강씨(信川康氏)로, 군수(郡守) 이청(以淸)의 손녀이자 호군(護軍) 계윤(秀胤)의 딸이다. 뒤에 아들 동추공(同樞公)이 귀하게 되자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니, 부인도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 태기(泰基)는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천거되었다가 호군(護軍)으로 승차했고, 이기(履基)는 생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익기(益基)는 호군을 지냈고, 정기(鼎基)는 참의(參議)에 추증되었으니, 정씨 소생이다.

 

유기(有基)․ 관기(觀基)와 김건(金健)․ 김한국(金翰國)에게 각각 시집간 딸들은 강씨 소생이다. 여남(餘男)으로 여기(汝基)가 있다. 태기의 아들 세흠(世欽)은 교리(校理)인데, 문학과 절의로 세상의 중망을 받았다. 이기의 아들은 창문(昌文)․ 정언을 지낸 창석(昌錫)․ 창호(昌鎬)이고, 딸은 진사 이두정(李斗精)에게 시집갔다.

 

익기의 아들은 세정(世鋌)․ 한림(翰林)을 지낸 세호(世鎬)이고, 딸은 김진섭(金震燮)․ 최수천(崔壽天)․ 최유(崔愈)에게 각각 시집갔다. 정기의 아들은 세련(世鍊)․ 세진(世鎭)․ 세성(世鋮)․ 세백(世銆)이다. 유기의 아들은 세심(世鐔)․ 세장(世鏱)이고, 딸은 최하진(崔夏鎭)․ 이담(李䨵)에게 각각 시집갔으며, 여남으로는 세찬(世鑽)․ 세질(世鑕)․ 세섬(世銛)․ 세필(世鉍)이 있다.

 

관기의 아들은 세창(世錩)이고, 딸은 홍위(洪偉)․ 이태섭(李台燮)․ 이동형(李東馨)․ 황재문(黃載文)에게 각각 시집갔다. 김건의 아들은 서린(瑞麟)․ 서룡(瑞龍)․ 서우(瑞雨)․ 서욱(瑞旭)․ 서귀(瑞龜)이고, 딸은 박내상(朴鼐祥)에게 시집갔다. 김한국의 아들은 동적(東迪)이고, 딸은 이수태(李守泰)에게 시집갔다. 여기의 아들은 세확(世鑊)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은 질박하고도 강직하고 방정하였으며, 윤나는 옥처럼 온화하고 우뚝 솟은 산처럼 엄정하였다. 빼어난 재주는 호쾌하고 시원 시원함을 갖추었고 총명함은 남들보다 빼어났다.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뜻을 독실하게 하고 학문에 힘썼다.

 

부모님을 곁에서 모시고 순응하면서 온정수수(溫凊滫瀡3)에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기에, 안씨부인이 일찍이 말하기를 “아이가 내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형제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일찍이 백씨의 병을 돌보면서 탕약을 몸소 달였고, 아우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하루도 왕래를 거른 적이 없었다. 아우가 여러 해 병을 앓자 마음을 다하여 구호하고 약을 쓰며, 밤낮으로 살펴보고 혹 비바람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분가할 때에 스스로 가산을 조금만 취하였고, 고아가 된 조카를 자신의 자식처럼 돌보아 가르치고 길러 자립하게 하였다. 선조를 받듦에는 정일하고 경건을 주로 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전답을 매입하자는 집안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 돈을 내어 어려운 친척을 도왔다. 전곡노
典穀奴(수세를 담당했던 종)가 이자를 취하는 것을 꾸짖고 그 문서를 불태워 이웃에 혜택을 베풀었다. 


그가 친척들과 돈독하며 궁핍한 이를 돌보는 일이 대체로 이런 것들이 많았다. 젊었을 때 예리하고 영발함이 자못 드러났으나, 중년 이후로는 날카로운 성품을 버리고 스스로 화평하도록 힘썼다. 
자기를 지키고 남을 대할 때에는 한결 같이 겸손하고 정성스러우며 부드럽고 공손하였다.

 

애초에 참판공이 임종할 때에 ‘빈궁하여도 의리를 잃지 말고, 영달하여도 도리를 어기지 말라.『궁불실의 달불리도(窮不失義 達不離道)』’라고 한 8글자로 자손들을 면려하였는데, 공은 종신토록 이를 마음에 간직하고 따르면서 잊지 않고 입신(立身)의 종지(宗旨)로 삼았다.


 섭렵하지 않은 서적이 없었으나 사서(四書)에 더욱 정통하였다. 문장은 정밀하고 절실하여 이치에 도달하였으며, 시 또한 맑고 고상하여 세상의 속된 맛은 없었다. 청풍자(淸風子4) 정공(鄭公)이 일찍이 “아무개의 시가 적선(謫仙5)에게 얻은 것이 가장 많다.” 


라고 칭하였고, 학사(鶴沙6) 김공(金公)은 공이 젊었을 때 논사(論事)한 글을 보고 서찰로 치하하여 “식견과 문장이 또래들 가운데서 출중하다.”라고 하였다. 여러 현인에게서 중망 받음이 이와 같았으나, 일생 동안 겸손으로 감추면서 저술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시문을 지을 때마다 원고를 남겨두지 않아 지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대화(岱華)의 티끌7)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아! 공은 덕의(德義)가 높고 재학(才學)이 풍부하여 사람들은 “조석 간에 현달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우하였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남긴 가르침을 사숙하여 우뚝한 현사들이 많이 나와, 연방(蓮榜)과 계방(桂榜 : 초시와 회시급제)이 교대로 빛나서 고관들로 자리를 가득 메웠으니, ‘선을 쌓은 보답이 그 경사가 자손에까지 미친다.’8)는 말이 끝내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다. 


묘도(墓道)에 오래된 비갈이 있는데, 족세(族世)와 생몰연대만 실려 있고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은이의 성명도 지워져 후세에 징험으로 삼을 수 없기에, 후손들이 목재(木齋9)의 묘지(墓誌)와 금옹(錦翁10)의 행장(行狀)으로 나에게 묘갈명을 짓도록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늦게 태어나 들은 것이 없으니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마는 일이 가문의 선조에 관계되는지라 감히 피할 수가 없었다. 삼가 행장과 묘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내앞 마을에 / 維川有里
성대한 덕망이 모였으니 / 鬱鬱聚德
나가서는 충심을 다하고 / 出則忠藎
들어와서는 본보기가 되었네 / 處爲楷式


공이 그 자취를 이어받아 / 公繩厥武
타고난 품성도 빼어나 / 天稟英英
공경히 가정의 가르침을 받들어 / 恪受家庭
도덕과 의리를 실천하였네 / 道義是程


백가서를 환히 꿰뚫어 / 淹貫百氏
온축된 것을 더욱 두텁게 하였네 / 益厚其蓄
일찍부터 유림에서 추앙되었고 / 夙望吾林
선진들도 인정하였네 / 先進推服


때를 만나지 못하여 / 乃閼其逢
산림에 몸을 의탁하였네 / 卷焉林壑
득실은 마음에 두지 않았고 / 忘懷得喪
세월 속에 바래어 갔네 / 蕭灑日月


효도와 우애에 정성을 다하고 / 懇懇孝友
유학에 부지런히 힘을 다했네 / 亹亹儒術
스스로 촌스럽다 폄하하며 / 自貶以野
화려함 거두고 실질에 돈독하니 / 斂華敦實


감출수록 더욱 드러나 / 闇而愈章
꾸밈과 바탕이 모두 빛났네1) / 彬彬文質
적선에 보답이 없겠는가 / 有積不施
의당 자손에게 경사 있으리 / 宜慶于延


대대로 맑은 향기 떨치고 / 世揚淸芬
그 광채 성대히 빛나리니/  其光有燀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 / 沄沄者川
누가 그 근원을 더 깊게 하리오 / 孰濬其源


나로서는 이를 밝히노니 / 我則昭之
후손들을 힘쓰게 하노라 / 以勖來昆

 

[註解]

1) 정훈(庭訓) : 부모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논어  계씨(季氏)에 “일찍이 홀로서 계실 때에 내가 빨리 걸어 뜰을 지나는데 ‘시(詩)를 배웠느냐?’라고 물으심에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라고 하시므로 물러나 시를 배웠노라.[嘗獨立 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 병정(丙丁) : 청나라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말한다. 병자년(1636)에 시작하여 이듬해 정축년(1637)에 끝났으므로 일컫는 말이다.


3) 온정수수(溫凊滫瀡) : ‘온정’은 부모를 섬김에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동온하정(冬溫夏凊)의 준말이다. ‘수수’는 자식이 부모에게 음식을 부드럽게 하여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으로,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대추․밤․엿․꿀로 달게 하고, 씀바귀․환채․흰 느릅나무․느릅나무의 신선한 것이나 말려 묵힌 것을 뜨물로 삶아 부드럽게 하며, 굳은 기름 묽은 기름으로 고소하게 한다. 부모나 시부모가 음식을 맛보신 뒤에야 물러간다.[棗栗飴蜜以甘之 菫荁枌楡免薧 滫瀡以滑之 脂膏以膏之 父母舅姑 必嘗之而後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 청풍자(淸風子) : 정윤목(鄭允穆, 1571∼1629)의 호이다. 자는 목여(穆如), 본관은 청주이다. 정구(鄭逑)·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세 전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많은 서책을 읽었고, 시문에 뛰어나 일가의 체격을 이루었다.
 1589년에는 사은사의 사행길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다. 1616년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에 취임하였고, 1618년 통훈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만년에는 용궁(龍宮)의 장야평(長野坪)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청풍자집이 있다.


5) 적선(謫仙) : 천상의 신선이 인간 세상에 귀양 왔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의 시선(詩仙)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6) 학사(鶴沙) : 김응조(金應祖, 1587∼167)의 호이다.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 또는 아헌(啞軒),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161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대사간·한성부 우윤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학사집․사례문답(四禮問答)․산중록(山中錄)․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7) 대화(岱華)의 티끌 : 대화는 중국의 사악(四嶽)인 대산(岱山)․곽산(霍山)·화산(華山)․항산(恒山)을 가리키는 말로 큰 것을 표현하니, 여기에서는 많은 양에 비하여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뜻을 말한다. 


8) 선을……미친다 : 주역 「곤괘(坤卦) ․ 문언전(文言傳)」에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은 재앙이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9) 목재(木齋) : 홍여하(洪汝河, 1621∼1678)의 호이다.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 혹은 산택재(山澤齋),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정경세의 문인이다. 16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정언을 거쳤고 경연에서 주례를 강학하기도 하였다. 제1차 예송(禮訟) 때 윤휴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려 160년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풀려나 귀향하여 산택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관직에 복귀하여 병조 좌랑·사간을 역임하였다.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다. 


10) 금옹(錦翁) : 김학배(金學培, 1628∼1673)의 호이다. 자는 천휴(天休), 본관은 의성이다. 김시온의 문인이다. 1663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좌랑에 이르렀다. 1668년 성균관 안에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이 새로 설치되자 교정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금옹집이 있다.


11) 꾸밈과……빛났네[彬彬文質] : 논어 「옹야(雍也)」에 “질(바탕)이 문(꾸밈)을 이기면 촌스럽고, 문이 질을 이기면 사(겉치레만 잘함)하니, 문과 질이 적당히 배합된 뒤에야 군자이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原文]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成均生員野庵先生金公墓碣銘 幷序


野庵先生金公諱㶵字受而。其先新羅宗姓。義城君諱錫。其受封祖也。其後代襲爵封。諱龍庇太子詹事。諱宜尙書左僕射。諱台權文睿府左司尹。俱著麗乘。諱居斗入我朝。爲工曹典書。諱漢啓副知承文院事。端廟遜位。謝病歸。敎授鄕里。三世諱璡成均生員。贈吏曹判書。號靑溪。有五賢子。俱爲陶山高弟。第二諱守一自如察訪。號龜峯。生諱涌兵曹參議。以壬辰宣武勳。贈吏曹參判。號雲川。淸名直節。震耀當時。五子長諱是柱。魁司馬擢文科。官至兵曹佐郞。娶安東權氏正郞暐女。生四子。公其仲也。佐郞之弟諱是楗贈左承旨。娶竹溪安氏護軍霮女。早歿無嗣。公始生。參判公命安氏子之。五六歲時。猶未知爲權出。久乃知之。顧益母安氏不衰。始學字。參判公日暮對梨花。使作句。公應口對曰。梨花依依白。參判公大驚曰。依依白三字。能畫出暮時景。時公羣從兄弟。詩禮征邁。彬彬多文學士。公尤踔厲奮發。藻思贍逸。參判公奇愛之。手書所製十二歌與之。十四丁佐郞公憂。能執喪如禮。越四歲。參判公又卒。公痛失庭敎。祭奠之暇。劬書益力。沈潛經史。貫穿百氏。飫實噴英。日大以肆。儒林有事。毅然持論。棘棘不阿。人皆敬憚之。三十二陞上庠。丙丁以後。晦跡丘林。殆四五年。後雖以二母故。黽勉場屋。然非其志也。吏部郞有素與公善者。屢遣人致意。公不應。戊子丁權夫人憂。旣葬廬于墓側。晨昏展哭。風雨不廢。辛卯以安夫人命赴解。還至中路。安夫人訃至。公大戚。幾不勝喪。自是不復應擧。就所居川前雨谷之畔。築一室。扁以野庵。鑿池種樹。爲臨老藏修之所。謝絶人事。專以訓誨子弟爲業。遠近學者。聞風請敎者。常數十餘。嚴立課程。晝夜不懈。或言其勞苦。則曰我自樂此。不爲疲也。時値佳辰勝節。招隣里集冠童。濁醪山蔬。相與爲眞率之會。逍遙自適。曠然不以得喪爲意也。丙午冬。偶感疾彌留。不許子弟進藥曰死生命也。撰自挽一章。其辭曰行不逮人。德不及物。送老江湖。灑灑日月。生無益於世。死無聞於後。聊乘化而歸盡。甘與草木而同腐。數月而終。丁未四月三日也。距其生甲辰。享年六十四。葬府西林皮先兆之西負壬原。從遺命也。初配淸州鄭氏。左議政貞簡公琢之孫。主簿允偉女。配君子無違德。先公三十六年卒。墓與公合堋。繼配信川康氏。郡守以淸之孫。護軍秀胤女。後以子同樞公貴。贈大司憲。夫人幷封貞夫人。有男女八人。男泰基薦授掌樂主簿。陞護軍。履基生員同樞,益基護軍,鼎基贈參議鄭氏出。有基,觀基。女金健,金翰國康氏出。餘男一汝基。泰基男世欽校理。以文學名節重於世。履基男昌文,昌錫正言,昌鎬。女李斗精進士。益基男世鋌,世鎬翰林。女金震燮,崔壽天,崔愈。鼎基男世鍊,世鎭,世鋮,世銆。有基男世鐔,世鏱。女崔夏鎭,季䨵。餘男世鑽,世鑕,世銛,世鉍。觀基男世錩。女洪偉,李台燮,李東馨,黃載文。金健男瑞麟,瑞龍,瑞雨,瑞旭,瑞龜。女朴鼐祥。金翰國男東迪。女李守泰。汝基男世鑊。曾玄以下不盡錄。公容貌端正。性質剛方。溫溫如玉潤。栗栗如山起。才格英爽。穎悟絶人。早襲庭訓。篤志力學。事親左右順適。溫凊滫瀡。靡極不用。安氏嘗曰兒能以我心爲心。與兄弟友愛甚篤。嘗侍伯氏疾。湯藥必親。叔弟居間數弓。杖屨來往無虛日。弟抱病屢歲。殫心救藥。晝夜省視。不以風雨或間。析箸。自取羸薄。撫孤姪如己子。敎育而成立之。奉先主於精虔而致其愨。不聽家人買田。而撥其價。以周竆親。責典穀奴取息而焚其券。以惠鄰里。其敦親恤竆。大抵多此類也。少時鋒穎頗露。中歲以後。枿去崖角。務自平和。持己接物。一於謙虛謹愨。恂恂如也。始參判公臨終。以竆不失義達不離道八字。勉戒子孫。公終身服膺。揭爲立身宗旨。於書無不涉獵。而尤精於四子。爲文精切理到。而詩亦淸爽高古。無塵俗韻味。淸風子鄭公嘗稱某之詩。得於謫仙者最多。鶴沙金公得公少時論事之書。以書賀之曰。見識文藻。超出儕輩。其見重於諸賢若是。而一生謙晦。不以著述自居。有作輒不蓄稿。今其所存。直岱華之毫芒耳。嗚呼。以公德義之尊才學之富。人謂朝夕且揚顯矣。而卒落拓不遇。豈非命歟。然而餘敎所淑。蔚有才賢。蓮桂交輝。鞾笏滿床。爲善之報。終有不可誣者如此。墓道舊有碣。只載族世生卒。而不及事行。且沒作者姓名。無以徵信來世。後孫等以木齋之誌,錦翁之狀。屬興洛以銘事。興洛自惟。晩生無聞。何以堪是役。而事係門先。不敢遜避。謹依狀誌。敍次如右。而系以銘。銘曰。
維川有里。鬱鬱聚德。出則忠藎。處爲楷式。公繩厥武。天稟英英。恪受家庭。道義是程。淹貫百氏。益厚其蓄。夙望吾林。先進推服。乃閼其逢。卷焉林壑。忘懷得喪。蕭灑日月。懇懇孝友。亹亹儒術。自貶以野。斂華敦實。闇而愈章。彬彬文質。有積不施。宜慶于延。世揚淸芬。其光有燀。沄沄者川。孰濬其源。我則昭之。以勖來昆。<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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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직랑 정릉 참봉 증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공의 묘갈명

[奉直郞靖陵參奉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李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의 휘는 수약(守約)이고 자는 약증(若曾)이며 성은 이씨(李氏)로,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6세손이다.

영도(詠道)는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냈는데 두 번 증직되어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호는 동암(東巖)이다. 기(岐)는 공릉 참봉(恭陵參奉)을 지냈다. 희철(希哲)은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을  지냈으며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회(櫰)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4대이다. 정부인(貞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는 통덕랑(通德郞) 익중(益重)의 딸이며 참봉 확(確)의 손녀로 공의 모친이다.


 효종 기해년(1659)에 공을 낳았다. 공은 국량(局量)이 준정(峻整)하고 의표(儀表)가 우뚝하여, 참의공이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넓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품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다른 사람의 선행을 보면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알리기를 좋아하였고, 옳지 못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바로잡았다.


또 일찍이 노여움이나 원망을 숨기지 않고, 자신이나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정성과 믿음으로 행하며 속이는 일이 없었다. 남의 환란과 궁핍을 보면 온 힘을 다해 도왔는데, 대부분 보통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모두들 공의 의로움을 경외하고 그 덕을 흠모하였다. 


부모를 섬길 때는 효성과 사랑이 정성스럽고 지극하였고, 지체(志體)의 봉양12)을 함께 다하여 세월이 지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상제(喪制)를 행할 때는 더욱 엄숙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정성과 정결함을 다하였다. 집은 가난하였지만 미리 제수(祭需)를 준비하여 때가 닥쳐도 군색함이 없게 하였다.

 

항상 “비록 어진 사람의 곡식13)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구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의롭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새로 지은 비단 저고리를 시장에 내다 팔아 제수를 마련한 적도 있었다. 사정이 생겨 시절 음식을 올리지 못하면 문득 상을 물리고 하루 종일 먹지 않았기에 집안사람들이 왕왕 그 때문에 음식을 만들지 못했다. 


외가 선조(外家先祖)의 기일에도 제수를 가지고 반드시 참여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더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으니 제행(制行)의 독실함을 엿볼 수 있다. 식솔들을 다스림에 안팎과 상하로 하여금 각각 분수대로 편안하게 하여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일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에 절도가 있어 자제들도 가르침을 잘 따라 감히 어긋남이 없었다. 날마다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어 입었고, 질문하는 경우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작은 잘못이 있으면 저녁까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더불어 말을 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여 뉘우치고 깨닫기를 기다린 연후에 그만두었다. 


학업을 엄하게 단속하였으나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성취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반드시 행실을 먼저 올바르게 하고 문예(文藝)를 나중에 하도록 하였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데에 엄격하였다. 


매양 끼니때마다 거친 음식을 내오게 하며 “기름진 음식은 독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몸에 사치스런 물건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침착하고 의연하여 안정된 힘이 있어 비록 갑작스런 일에 처하더라도 화복과 이해에 동요되지 않았다. 


매사에 공명정대하여 무릇 고을에 중요하게 논의할 일이 있으면 공의 한 말을 기다려 결정하였으니, 검약한 몸가짐과 신의가 다른 사람들을 감복시킨 것이다. 무신년(1728) 이래로 조정에서 숨은 인재를 널리 구할 때, 공이 이밀암(李密庵14) 이식산(李息山15) 등 제현과 함께 특별히 천거되어, 임자년(1732)에 참봉에 제수되었다.

 

을묘년(1735)에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1월 15일이었다. 건지산(搴芝山) 불모동(不暮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뒤에 막내아들인 세사(世師)가 귀하게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된 자(鄑)의 딸이다. 부인의 법도를 잘 갖추어 집안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엄숙하였다. 제삿날에 임해서는 반드시 매 물품을 헤아려보고, 제사를 마치면 또 헤아려서 제대로 지냈는지 여부를 점검하고 조금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으면 식사를 하지 않고 자책하였으니, 그 정성과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1657)에 태어나 정축년(1697)에 세상을 떠났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세진(世震)은 문과에 올라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지냈고, 세관(世觀)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세항(世恒)은 전부(典簿16)를 맡았고, 세사(世師)는 문과에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신익형(申益亨)․ 오상직(吳尙稷)․ 김도원(金道元)은 사위이다. 세형(世亨)․ 세정(世貞)․ 세영(世榮)과 신☐☐申☐☐에게 시집간 딸은 서자녀(庶子女)이다. 사서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통덕랑(通德郞) 귀범(龜範)과 귀하(龜夏)이다.

 

참의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첨지충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귀원(龜元)과 통덕랑 귀휴(龜烋)이다. 전부(典簿)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통덕랑 귀년(龜年)이다. 지사공(知事公)도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참봉 귀서(龜書)이다. 증현손(曾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아! 공은 걸출하고 엄정하여 범하기 어려운 기색이 있었다. 평생토록 입심행기(立心行己)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고을 사람들에게 의범(儀範)이 되기에 이른 것은 한결 같이 정대한 충절을 따르는 가운데서 온 것이며, 일이 조금이라도 부끄럽고 인색함에 가까우면 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의 공론은 그를 조정에 나아갈 그릇이라 일컬었는데, 만년에 천거를 받아 그 능력을 다 펼 수 없었으니, 애석함을 이길 수 없다. 공의 손자들이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고자, 증손인 주부공(主簿公) 야순(野淳)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짓도록 하였다.

 

대개 공은 나의 선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과 실제로는 외손의 친함이 있고, 나 또한 공의 문중에 사위가 되었으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높고 높도다 거인의 금도여 / 屹屹乎巨人襟度
굳고 굳도다 장사의 법도여 / 栗栗乎莊士矩矱
덕 있는 자는 반드시 보답을 받나니17) / 有德者必受其報
하늘은 후손에게 복을 내려 위로하리 / 天故綏之以後祿


12) 지체(志體)의 봉양 : 부모의 뜻을 받들고 또한 음식 등으로 극진히 봉양하는 것을 말하여 물심의 정성을 다함을 이른다. 13) 어진 사람의 곡식 : 예기에 “부모가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어진 사람들의 곡식을 구하여 그것으로서 제사를 지낸다.
父母旣沒 必求仁人之粟 以祀之” 하였다. 여기서는 어진 사람의 곡식을 구하는 것보다도 평소에 미리 준비하는 정성을 중히 여겼다는 뜻한다.


14) 이밀암(李密庵) : 밀암은 이재(李栽, 1657∼1730)의 호이다. 자는 유재(幼材),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이현일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휘일(徽逸)과 숭일(嵩逸)에게 배웠다. 벼슬은 주부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부친이 완성하지 못하고 절필한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완성하였고, 성유록(聖喩錄)․금수기문(錦水記聞) 등의 많은 저술을 하였다. 저서로는 밀암집이 있다. 


15) 이식산(李息山) : 식산은 이만부(李萬敷, 1664∼1732)의 호이다. 자는 중서(仲舒), 본관은 연안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평생을 초야에 묻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식산집․역통(易統)․대상편람(大象便覽)․사서강목(四書講目)․도동편(道東編)․노여론(魯餘論) 등이 있다.


16) 전부(典簿) : 조선 시대 종친부에 두었던 종5품직이다.
17) 덕……받나니 : 중용 17장에 “대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으며, 반드시 그 녹을 얻으며, 반드시 그 이름을 얻으며, 반드시 그 수를 얻는다. 『大德 必得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原文]


奉直郞靖陵參奉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李公墓碣銘 幷序


公諱守約字若曾姓李氏。退溪先生六世孫也。諱詠道原州牧使。再贈至吏曹參判。號東巖。諱岐恭陵參奉。諱希哲長水道察訪贈吏曹參議。諱櫰贈吏曹參判。公之四世也。貞夫人光州金氏。通德郞益重女。參奉確孫。公之妣也。以寧陵己亥生公。器宇峻整。儀表魁梧。參議公曰是展拓吾門戶者。性好善疾惡。見人之善。誠心嘉悅而樂道之。其有不是。必正色裁之。又未嘗藏怒匿怨。處己處人。一以誠信無僞。患難竆乏。盡力周恤。多有人不及處。人皆畏其義而懷其德也。事親。孝愛懇至。耦盡志體之養。年幾不毁。執喪制猶嚴。祭祀極其誠潔。家貧。預備物品。無臨時之窘。常曰雖仁人之粟。以求爲心則非義也。嘗有新製帛襦。鬻諸市。以辦祭用。有故闕節薦。輒推案不食以終日。家人往往爲之不火。外先忌日。賷需必與。雖風雨不廢。其制行之篤也。御家衆。令內外上下。各安其分。無有爭鬨。日用凡百。皆有節度。子弟遵奉敎戒。無敢越。日必具冠帶。非有問不敢言。有小過差。竟夕不命之入。不與之言。竢其恐懼悔悟然後已。嚴其課程。不借以色。多有成就立揚者。然亦必先行誼而後文藝。其治家敎子之嚴也。每食令進麤糲曰。膏梁是荼毒也。體不近華靡之物。沈毅有定力。雖在倉卒。不爲禍福利害動。每事公正。凡有鄕邦大議。待公一言而定。其奉身之約而信義之服人也。戊申來。朝廷搜訪遺逸。公與李密庵李息山諸賢。同入別薦。壬子除寢郞。乙卯年七十六而卒。十一月十五日也。葬搴芝山不暮洞坐乾原。後以季子世師貴。贈吏曹判書。配貞夫人晉州姜氏。贈司僕寺正鄑之女。梱範甚修。治家勤肅。臨祭必衡量每品。旣祭而又衡之。以驗享否。少有未盡。廢食自咎。其誠篤如此。生丁酉。卒丁丑。葬同塋。世震文科侍講院司書。世觀贈吏曹參議。世恒典簿。世師文科知中樞府事。其四男也。申益亨,吳尙稷,金道元。其女壻也。世亨,世貞,世榮。適申▣▣者。餘男女也。司書二男龜範通德郞,龜夏。參議二男龜元僉樞贈吏曹參判,龜烋通德郞。典簿一男龜年通德郞。知事一男龜書參奉。曾玄以下不盡錄。嗚呼。公傑卓凝嚴。有難犯之色。平生立心行己。以至刑家梱儀鄕黨者。一從正大忠實中來。事有微近羞恡者不爲也。當時公誦。稱其有廊廟之器。而晩被甄剡。未得卒究其用。可勝惜哉。公之諸孫。爲墓道將有石。以公曾孫主簿公野淳之狀。徵銘於興洛。葢公於吾先君文忠公。實爲彌甥之親。而興洛又爲公門壻。義又不可辭者。銘曰。
屹屹乎巨人襟度。栗栗乎莊士矩矱。有德者必受其報。天故綏之以後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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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권공의 묘갈명(處士權公墓碣銘) 서문 병기


처사 권공 휘 율(葎)은 효성이 지극하고 행동이 순수하였으나, 불행하게도 31세에 죽었다. 사막(沙幕)의 남향(南向) 언덕에 있는 높이 4자의 봉분이 공의 묘소이다. 1백 80년 뒤 공의 7대손 상형(相衡)이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늦게 태어나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상형이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가 했던 부탁을 생각하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였을 것 같아 차마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자는 만중(蔓仲)이고 성은 권씨이다. 고려 태사(太師18) 행(幸)이 비조(鼻祖)이며,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벌(橃)이 찬성(贊成)을 지냈으니 시호가 충정공(忠定公)으로 바로 충재 선생(冲齋先生)이다.

 

동보(東輔)를 낳았으니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호는 청암(靑巖)이다. 내(來)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는데 군자시 정(軍資寺正)을 지냈으며 호는 석천(石泉)이다.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상충(尙忠)은 집의(執義)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목(霂)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두응(斗應)은 문필(文筆)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니 호는 대졸(大拙)이다. 배위는 풍산김씨(豐山金氏) 시성(時聖)의 딸로, 청백리 양진(楊震)의 후손이다. 계배위(繼配位)는 창원황씨(昌原黃氏) 노(璐)의 딸로, 대사헌 섬(暹)의 현손인데, 

공은 김씨소생이다.

 

숙종 임술년(1682)에 태어났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성품과 행동은 단아하고 삼갔으며, 젖니를 갈 어린 나이에도 의연하여 마치 노숙한 어른 같았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백부인 하당 선생(荷塘) 선생과 부인 성씨(成氏)의 손에 자랐는데, 두 분을 낳아주신 부모처럼 섬기면서 덕의(德儀)에 흠뻑 젖었고 언행에 신칙하고 삼갔다. 


몸이 허약하여 옷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세운 뜻은 견실하고 확고하였다. 글에 힘쓰고 학업에 강마하여 굳이 이끌어 독려하길 기다리지 않았다. 자라면서 더욱 노력해 마지않아 식견은 밝고 뛰어났으며, 문장은 넉넉하고 막힘이 없었다. 


마음가짐이나 일을 행할 때에는 한결같이 고인(古人)을 규범으로 삼아 힘써 따랐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것을 종신토록 아픔으로 여겼기에, 황씨부인을 섬기면서 지극 정성으로 뜻을 잘 받들어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황씨 부인도 공을 보기를 자신이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다. 


경인년(1710) 겨울에 황씨부인이 병들어 눕자 공이 본디 몸이 허약해서 힘든 일을 감내할 수 없음에도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다. 옷은 띠를 푼적이 없고 눈은 잠시도 붙인 적이 없으며, 죽을 끓이고 약을 맛보며 눈보라를 맞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을 당하자 상복을 벗지 않았고 슬피 곡하기를 예제(禮制)보다 더하였는데, 이것이 쌓여 병이 되어 목숨이 차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스스로 병석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알았지만, 부친의 뜻을 상할까 근심하여 조금도 근심스러운 빛을 띠지 않았다. 병세가 이미 위독하였어도 정신은 흐리지 아니하여 초목자(草木滋19)를 허락하지 않고, 여종의 시중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일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임진년(1712) 6월 6일이다. 공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질로 일찍이 재현(才賢)의 가르침을 받았고, 덕기(德器)가 갖추어져 뭇사람들과 크게 달랐다. 침착하고 단정하며 간결하고 신중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몸에는 속된 기운이 없고 입에는 저속한 말을 담지 않았다. 


안색은 편안하고 마음은 온화하였으며,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직하였다. 기쁘거나 노여워도 드러내지 않고, 신실하여 큰 어른의 풍모가 있었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형제들과 처함에 화락함을 지극히 하였으며, 일가들과 화목하고 친구들과 믿음이 있어, 그 도리를 곡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부諸父들의 중망과 의지함을 크게 입었으니, 하당(荷塘)과 창설재(蒼雪齋20) 등 여러 선생의 애도의 만사에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아! 위대함이여. 행실은 귀신에게 질정하기에도 충분하고, 재주는 큰일을 맡기에 충하며, 식견과 사려는 시무(時務)를 진달하기에 충분하고, 학문은 선열들을 진작시키기에 충분한데도, 하늘은 장수(長壽)를 내리지 않아 뜻만 품은 채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슬프도다!


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사인(士人) 상호(相鎬)의 딸로, 충현공(忠顯公) 돈서(惇敍)의 증손이다. 문자를 능숙히 이해하고 정숙한 덕이 있었으며, 집안 살림에도 노고를 나누어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다. 


병든 부모를 모시거나 장례를 치르는 데도 공이 했던 것처럼 한결같이 하였다. 아들을 하나 두었으니 정례(正禮)이고, 딸도 하나인데 이진유(李鎭維)에게 시집갔다. 정례는 후사가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 종제(從弟)인 정인(正仁)의 아들 사온(思溫)을 후사로 삼았다. 이진유의 아들은 여우(汝愚)이고, 딸은 김홍원(金弘源)에게 시집갔다. 


사온(思溫)의 아들은 상도(象度)․ 기도(璣度)이며 순도(舜度)는 출계하였다. 서자는 주도(胄度)․ 시도(時度)이다. 상도(象度)의 아들 재성(載成)이 또 후사가 없어 종제 재우(載祐)의 아들 행하(行夏)로 후사를 삼았다. 행하의 아들은 중연(重淵)이고, 중연의 아들이 곧 상형(相衡)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효성과 우애로움 명석함과 순수함은 / 孝友明粹
하늘로부터 받은 본연의 자질이네 / 本之天資

 

훌륭히 훈육되고 인재로 길러졌으니/  薰擩培養
가정에 어진 스승이 있어서라네 / 家有賢師


어이하여 아름다운 덕 갖추었건만 / 何德之懿
때를 만나지 못하였나 / 而閼其逢


썩지 않을 덕을 남겼으니 / 不朽者存
무궁토록 밝게 빛나리라 / 尙昭無窮


18) 태사(太師) : 안동 지역이 후삼국 시대에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을 때, 이곳의 호족으로 왕건(王建)에게 협조했던 세 사람인 권행(權幸)․김선평(金宣平)․장길(張吉)을 말한다.


19) 초목자(草木滋) : 채소와 양념으로 입맛을 돋우어 준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증자(曾子)가 ‘상중에 병이 있으면 주육(酒肉)을 먹고 초목의 자미[草木之滋]도 있어야 한다.’  하였다.” 했는데, 그 주에 “초목은 생강․계피 등을 말한다.” 하였다.


20) 하당(荷塘)과 창설재(蒼雪齋) : 권두인(權斗寅, 1643∼1719)과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을 말한다. 권두인의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설창(雪窓), 본관은 안동이다. 홍준형(洪浚亨)의 문인이다. 166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저서로는 하당집이 있다. 권두경의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본관은 안동이다. 충정공 권벌의 5대손으로 이현일의 문인이다. 

 

[原文]



處士權公墓碣銘 幷序



處士權公諱葎。有至孝純行。不幸年三十一而卒。沙幕之原。負壬而崇四尺者。其墓也。後百八十餘年。七代孫相衡。責興洛以墓石之文。興洛辭以晩生無文。旣而相衡甫不幸。念不瞑之托。不忍終孤。謹按公字蔓仲姓權氏。麗太師幸。其鼻祖也。入國朝。有諱橃官贊成謚忠定。卽冲齋先生。生諱東輔郡守號靑巖。嗣子諱來。軍資正號石泉。是爲公高祖。曾祖諱尙忠贈執義。祖諱霂英陵參奉贈左承旨。考諱斗應。以筆鳴於世。號大拙。妣豐山金氏時聖女。淸白吏楊震後。繼妣昌原黃氏璐女。大司憲暹玄孫。公金氏出也。肅廟壬戊生。天資粹美。性行端愨。在齔。嶷然若老成。早失恃。鞠於伯父荷塘先生。夫人成氏。事之如所生。薰炙德儀。飭勵言行。體若不勝衣。而立心堅確。劬書講業。不待提督。長益刻勵不已。見識明透。文詞贍暢。秉心行事。一以古人爲的而勉循焉。自以早失慈庇。爲歿身痛。事黃夫人。至誠承順。慰悅無方。黃夫人視之。亦無異己出也。庚寅冬。黃夫人寢疾。公素羸瘁。不堪勤苦。而晝宵侍側。衣不解帶。目不交睫。煮粥嘗藥。風雪露處。終始不懈。及喪。衰絰不去身。哀毁踰制。積而成疾。漸至危殆。自知不能起。恐傷大人公意。略無幾微戚戚容。疾旣篤。神精不爽。不聽草木滋。不許女僕抑搔。居數日而終。實壬辰六月六日也。公以純懿之資。早被才賢之養。德器成就。大異衆人。沈凝簡重。表裏如一。體無粗俗之氣。口絶鄙俚之談。色夷而心和。外柔而內剛。喜怒不形。恂恂有長者風度。事父母盡其孝。處兄弟。極其怡愉。睦於宗族。信於交友。無不曲盡道理。大爲諸父所倚重。觀於荷蒼諸先生哀悼之言。可知也。於乎偉哉。衍足以質鬼神。才足以任大事。識慮足以達時務。問學足以振先烈。而天不假年。抱志而歿。悲夫。配延安李氏。士人相鎬女。忠顯公惇敍曾孫。通解文字。有靜淑之德。執爨分勞。竭誠盡禮。侍疾居憂。一如公所爲。生一男正禮。一女適李鎭維。正禮又早世無嗣。以從弟正仁子思溫后。李男汝愚。女金弘源。思溫男象度,璣度。舜度出。餘男胄度,時度。象度男載成又無嗣。以從弟載祐子行夏后。行夏男重淵。重淵男卽相衡。銘曰。
孝友明粹。本之天資。薰擩培養。家有賢師。何德之懿。而閼其逢。不朽者存。尙昭無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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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통정대부 이조참의 이공의 묘갈명(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의 휘는 세관(世觀)이고 자는 대백(大伯)이다. 진성이씨(眞城李氏)는 생원(生員)으로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된 석(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6세를 지나 문순공(文純公) 퇴계선생(退溪先生)이 있어 우리 동방 성리학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또 2세를 지나 영도(詠道)는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호는 동암(東巖)이다. 동암공이 기(岐)를 낳으니 공릉참봉(恭陵參奉)을 지냈고 호는 수졸당(守拙堂)으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희철(希哲)로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을 지냈고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조고는 회(櫰)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수약(守約)으로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모친은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자(鄑)의 딸이다. 공은 숙종 기사년(1689)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영특하여 대절(大節)이 많았다.

 

글을 읽음에 거침없이 통하여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으나 문구를 위한 공부는 달갑지 않게 여겼다. 8세 때, 안찰사(按察使)가 부내(府內)에 행차하였다가 도산(陶山)에 들어오자, 공이 부친 판서공을 배행하여 가서 뵈었는데, 안찰사가 귀함을 자처하는 기색이 있자 공이 질타하니, 안찰사가 부끄럽게 여기며 사과하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치하하였다. 


정축년(1697) 정부인(貞夫人)의 상을 당하자, 밤낮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두 아우를 돌보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병이들면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마치 고통이 자신에게 있는 듯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약관의 나이 때 우연히 누명을 쓰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증언하여 그 일을 바로잡았다.


방백(方伯)이 판정을 내리며 말하기를 “계산(溪山)의 초목도 오히려 사랑스럽거늘 이씨문중의 훌륭한 손자를 어찌 차마 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나 과거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산림에 의취를 붙여 당호(堂號)를 목우(牧牛)라 편액 하였다. 이따금 몸소 비천한 일을 하면서 말하기를 “내 힘으로 먹는 것이 바로 나의 본분이다.”라고 하였다. 


예서(隷
書)에 능하여 바야흐로 뜻이 맞으면, 무더운 날씨로 땀이 비 오듯 흘러도 피곤한 줄 몰랐고 경서와 사서, 잡문(雜文) 여러 수백권을 손수 베꼈다. 정유년(1717) 향음주례(鄕飮酒禮21)를 행할 때, 공이 의식을 행하는 자리에서 적절하게 주선하니 거동이 법도에 맞았다.

 

무신년(1728)에 의병이 일어났을 때 여러 일이 서툴고 두서가 없는 상황에서 공이 모든 일을 총괄하니, 풍채가 당당하고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여 감히 소란스럽게 하거나 대오를 이탈하는 자가 없었다. 판서공(判書公)이 일찍이 병이 들어 매우 위태롭게 되었을 때, 공은 손가락에 피를 내어 소생하게 하였다.

 

돌아가신 뒤에는 말이 선고의 일에 이르면 문득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고 생일에도 집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차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집안일을 처리함에 단정하고 엄숙하여 법도가 있었다. 안팎과 상하로 각각 분수와 직분을 지키게 하니 감히 어긋남이 없었다. 후진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먼저 가르쳐 근본을 배양하게 하였다. 


기상은 엄정하였으나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함이 넘쳐흘렀다. 친지(親知)의 상에도 음식은 소식을 하되 차등을 두었으며 종일토록 연회를 베풀어도 어지러운 데 이르지 않았다. 공세(公稅)를 실어낼 때는 반드시 가난한 집보다 먼저 하였다. 도산(陶山)에 별저(別儲)를 세우고 선조의 문집을 중간하였으며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까지 중간(重刊)하였다. 


세 번이나 참봉에 의망(擬望2)되었지만 매번 두렵게 여기며 스스로 편안해 하지 않았다. 80세가 되었을 때 마침 나라의 경사가 있어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전이 많았는데 전례에 따라 공을 보고하여 아뢰려하자, 문득 엄중히 사양하며 저지하였다. 


경인년(1770,영조 46) 공의 나이 82세 때에 병세가 위독하자, 집안일은 젖혀두고 제례의 물품과 가지 수를 바로 하고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백운지(白雲池) 선영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가, 정조 기유년(1789,정조 13)에 건지산(搴芝山) 아래 불모동(不暮洞) 동쪽 기슭 남서쪽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헌종 무술년(1838,헌종 4)에 손자인 태순(泰淳)이 귀하게 됨으로써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배위 영해신씨(寧海申氏)는 학생 신한태(申漢泰)의 딸로, 을유년(1765,영조 41)에 돌아가니 묘소는 판서공의 묘 동쪽에 있다. 2녀를 두었는데 송권(宋權)․ 권사철(權思哲)에게 각각 시집갔다.

 

계배위(繼配位)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영양남씨(英陽南氏) 표형(標衡)의 딸로, 묘소는 공의 무덤 아래에 있다.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귀원(龜元)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귀휴(龜烋)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딸은 권사직(權思職)․ 김택범(金宅範)․ 최흥옥(崔興玉)․ 박진악(朴鎭岳)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조참판의 아들은 종순(宗淳)․ 택순(宅淳)․ 의순(宜淳)․ 유순(儒淳)․ 태순(泰淳)인데 태순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다. 통덕랑의 아들은 주부(主簿) 야순(野淳)․ 정순(庭淳)․ 암순(巖淳이다. 송권의 아들은 성엽(星燁)․ 정엽(井燁)이고, 딸은 황수원(黃洙源)․ 생원 권사협(權思浹)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사철의 아들은 윤도(胤度)이고 딸은 이창동(李昌東)․ 서명윤(徐明胤)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사직의 아들은 현도(玄度)이고, 딸은 임구(任球)에게 시집갔다. 김택범의 아들은 준린(俊鄰)이고, 딸은 이덕소(李德卲)에게 시집갔다. 최흥옥의 아들은 진태(鎭泰)이다. 박진악의 아들은 상영(祥永)이며, 딸은 김관운(金觀運)․ 류한휴(柳翰休)에게 각각 시집갔다. 


종순의 아들은 휘근(彙根)․ 휘승(彙昇)․ 휘모(彙謨)이고, 택순의 아들 휘양(彙陽)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출계하였고, 다른 아들은 휘성(彙成)이다. 의순의 아들은 휘규(彙奎)․ 학림(鶴林)․ 휘조(彙朝)이고, 유순의 아들은 휘정(彙鼎)․ 휘점(彙漸)과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휘제(彙濟)이며, 태순의 아들은 생원 휘원(彙遠)과 휘운(彙運)이다.

 

야순의 대를 이은 아들은 참봉 휘정(彙政)이고, 정순의 대를 이은 아들은 휘창(彙昌)이며, 암순의 아들은 휘인(彙仁)․ 휘정(彙政)인데 휘정은 출계하였다. 현손(玄孫)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 과거로 환로에 오른 사람은 문과에 급제한 통정대부(通政大夫) 만송(晩松)․ 정언(正言) 만덕(晩德)․ 첨지중추부사 만우(晩佑)․ 감역(監役) 만각(晩愨)과 이조 참의 중두(中斗)․ 정언 중언(中彦) 등이다. 


공은 장대한 체구에 헌걸찬 모습이었으며, 성품은 침착 강직하고 간중(簡重)하였다. 검소하고 조용히 지내는 것으로 몸을 단속하고, 효도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으로 행동을 다스렸다. 역량은 상대를 진압하고 무리를 포용하기에 충분했고, 재주와 슬기는 일을 처리하고 위급함을 구제하기에 충분했으니, 그로 하여금 뜻을 얻어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처하게 하여 온축된 식견을 펼 수 있게 하였다면, 반드시 우뚝하게 혁혁한 사업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강(東岡)을 굳게 지키며 명리와 권세에서 몸을 단속하여 피한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를 감추며 생을 마쳤다. 비록 구학(溝壑의 뜻23)이 확고하여 돌리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요제행장(潦霽行藏24)의 의리가 흉중에 본디부터 정해짐이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아! 훌륭하도다. 공의 후손들이 묘도를 닦으면서, 종현손(從玄孫) 만도(晩燾)가 초안한 「유사(遺事)」를 나에게 보이면서 묘갈문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늙어 병약하고 황폐하고 비루한 나를 돌아보건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삼가 그 대략만을 취하여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치밀하고 굳셈이여 / 瑟兮僩兮
곧은 절조 바꾸지 않았으니 / 抱貞莫渝
공은 본분을 지킨 분이로다 / 公其能守身者歟


손수 많은 경서 베껴 전하고 / 手傳羣經
선조의 문집을 간행했으니 / 梓行先書
아름다운 행실에 또 누가 미칠 수 있으리 / 又何其嘉惠及人也


아!(於乎)
청산에서 한 포의25)였으나 / 靑山一布衣
후대에 말이 있으니 / 有辭來世
명성과 공적이 묻혔다 말하지 말라 / 莫曰聲績之沉淪也


21) 향음주례(鄕飮酒禮) : 온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일이다.


22) 의망(擬望) : 벼슬아치를 발탁할 때 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던 일을 말한다.


23) 구학(溝壑)의 뜻 : 고매한 뜻을 품은 지사(志士)는 쉽사리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 “뜻을 가진 선비는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기 있는 선비는 자기 머리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
志士 不忘在溝壑 勇士 不忘喪其元”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24) 요제행장(潦霽行藏) : 도가 있고 없음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 일을 수행하는 것과 집으로 들어와 조용히 지내는 것을 뜻한다. 요(潦)는 우기를, 제(霽)는 건기를 말한다. 행장은 논어 「술이(述而)」에 “써 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原文]



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公墓碣銘 幷序



公諱世觀字大伯。李之氏眞城。自生員贈密直使碩始。六世而有文純公退溪先生。爲東方理學之宗。又二世諱詠道原州牧使。贈吏曹參判。號東巖生諱岐恭陵參奉。號守拙堂。於公爲高祖。曾祖諱希哲長水道察訪。贈吏曹參議。祖諱櫰贈吏曹參判。考諱守約靖陵參奉。贈吏曹判書。妣晉州姜氏。贈司僕正鄑之女。公以肅廟己巳生。自幼卓犖多大節。讀書沛然無室礙。而不屑爲句讀學。八歲時。按使行部入陶山。公陪判書公往見。按使有挾貴色。公叱之。按使慚謝。因賀以偉器。丁丑遭貞天人喪。晝宵哭擗。幾滅性。視護兩弟。不暫離。疾病。爲之涕泣。若痛在身。鄕里咸異之。弱冠。偶陷縲絏。鄕人證直之。方伯判曰。溪山草木尙可愛。李氏芳孫豈忍刑。富於文詞。而不樂就公車。托趣山林。扁其堂曰牧牛。往往親執卑賤事。曰食力是吾本分。善隷書。方其意會。盛暑流汗如漿。而不知疲。手寫經史雜文累百卷。丁酉行鄕飮禮。公折旋罇俎之間。動中儀節。戊甲倡義旅。庶事草昧。公爲都摠。風彩英特。號令明肅。無敢喧譁失伍者。判書公嘗遘沴極殆。公灌指血以甦。孤露後語及先故。輒嗚咽流涕。生日不許家人設酒食。處家整肅有法度。內外上下。各守分職。無敢乖戾。敎後進。必先小學。培養根本。氣象凝重而接人。盎然而和。親知之喪。食素有差。燕飮終日。不及亂。輸公稅。必先下戶。陶山爲立別儲。重刊先集。以及朱節。三擬齋郞。每蹙然不自安。及躋大耋。値邦慶。士庶多別恩典。有欲循例報聞。輒嚴辭止之。庚寅公年八十二。疾革。處置家事。正祭禮品數。八月二十日終。始葬白雲池先兆下。正廟己酉。移奉于搴芝山下不暮洞東麓未向之原。憲廟戊戌。以孫泰淳貴。贈吏曹參議。配寧海申氏。學生漢泰女。卒乙酉。墓判書公兆東。有二女宋權,權思哲。繼配英陽南氏。通德郞標衡女。墓在公兆下。有二男四女。男龜元僉樞。贈吏曹參判。龜烋通德郞。女權思職,金宅範,崔興玉,朴鎭岳。吏參子宗淳,宅淳,宜淳,儒淳,泰淳文科兵曹參判。通德郞子野淳主簿,庭淳,巖淳。宋權子星燁,井燁。女黃洙源,權思浹生員。權思哲子胤度。女李昌東,徐明胤。權思職子玄度。女任球。金宅範子俊鄰。女李德卲。崔興玉子鎭泰。朴鎭岳子祥永。女金觀運,柳翰休。宗淳子彙根,彙昇,彙謨。宅淳子彙陽僉樞出。彙成。宜淳子彙奎,鶴林,彙朝。儒淳子彙鼎,彙漸,彙濟僉樞。泰淳子彙遠生員,彙運。野淳嗣子彙政參奉。庭淳嗣子彙昌。巖淳子彙仁,彙政出。玄孫以下不盡載。其有科宦者。晩松文通政,晩德正言,晩佑僉樞,晩愨監役,中斗吏議,中彦正言。公魁梧傑特。沈毅簡重。律身以儉約恬靜。制行以孝友敦睦。力量足以鎭物容衆。才諝足以綜事濟劇。使其處於得爲之地。展布其所蘊。則必有事業之巍赫矣。而乃固守東岡。斂避名勢。沈晦以終。雖其溝壑之志。確乎難回。而潦霽行藏之義。安知無素定於胷中者耶。於乎偉矣。公之諸孫。治公墓道。以公從玄孫晩燾所草遺事示興洛。責以牲石之詞。顧老病荒陋。無以堪是役。而辭之不獲命。謹最其大者。而爲之銘曰。
瑟兮僴兮。抱貞莫渝。公其能守身者歟。手傳羣經。梓行先書。又何其嘉惠及人也。於乎靑山一布衣。有辭來世。莫曰聲績之沉淪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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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조공의 묘갈명(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趙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의 휘는 석목(錫穆)이고, 자는 원중(遠仲)이다, 조씨(趙氏)는 풍양(豐壤)에서 나왔다. 고려시대 시중(侍中) 맹실(孟實)이 그 비조(鼻祖)이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숭(崇)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서정(瑞廷)이 사인(舍人), 윤영(允寧)이 부사(府使)를 지냈고, 정(靖)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도학과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분이 바로 검간(黔澗) 선생으로 공의 6세조이다.

 

고조 능(稜)은 생원으로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고, 증조 대륜(大胤)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조고 해(瀣)는 통덕랑을 지냈으니, 모두 덕행으로 세상에 일컬어졌다. 통덕랑 해(瀣)는 5남을 두었는데, 중자(仲子) 선경(善經)은 밀양(密陽) 박성임(朴聖任)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숙자(叔子) 이경(履經)은 통덕랑을 지낸 인천(仁川) 이기인(李基仁)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은 둘째 선경의 아들인데 셋째 이경의 아들로 계후하였다. 



공은 영조 병오년(1726, 영조 2)에 태어났는데, 눈망울이 맑고 무소뿔 모양의 혹이 정수리에 있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8세 때, 처음 학업을 시작했는데, 매일 아침 과제(課題)를 받으면 반드시 동학보다 먼저 하였다. 



17세에 박씨의 상을 당해서는 애절한 호곡소리가 예제(禮制)를 넘었기에, 형들이 기운이 허약한 것을 염려하여 고기를 먹도록 권하였으나 울면서 듣지 않았다. 19세에 처음 명경과를 공부하였는데 스스로 부지런히 읽고 사색하여 어른들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았다. 



임신년(1752, 영조 28) 이씨의 상을 당해서는 예를 행함에 어긋남이 없었다. 병자년(1756, 영조 32)에 과거에 올랐는데, 당시 한 집안에서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자 사람들이 영광을 흠모하였다. 공은 소년 등과가 불행이라26)는 것을 경계하여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조급하게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무인년(1758, 영조 34)에 승문원(承文院)에 선임되었고, 기묘년(1759)에는 실직으로 한권(翰圈 27)에 천거되었고, 신사년(1761, 영조 37) 8월에는 주서(注書)에 제수되었으나, 부의(副擬28)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서장(書狀)을 진달하였다. 


9월에 또 주서에 제수되어 처음 경연자리에 나아가니 임금께서 ‘정긴(精緊)한 사람이다.’라고 일컬었다. 1월에 세손이 천연두에 걸렸을 때 입직한 노고로 전적(典籍)에 올랐고, 임오년(1762, 영조 38)에 형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후로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정언(正言) 아홉번, 이조좌랑 다섯번, 지평(持平) 한번, 장령(掌令) 한번, 헌납(獻納) 열여덟번, 집의(執義) 네번, 사간(司諫) 다섯번이었다.

 

중간에 황산(黃山)의 찰방(察訪)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사복시 정과 군자시 정을 맡았고, 특별히 내린  교지(敎旨)에 의해 승지(承旨)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이다. 공은 조정에 나아간 이후로 보궐(補闕29)의 직임을 다할 것을 마음먹었다.

 

대관(臺官)이 되어 우레의 이변을 힘써 진달할 때는 실질에 힘쓰는 것으로 스스로를 수양하는 방책으로 삼고, 간언을 듣는 것으로 성심(聖心)을 증진하는 도로 삼기를 권하였다. 큰 근본과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 점을 진달할 때면 정심(正心)․ 성의(誠意30)로 근본을 바르게 하여 다스리고 세자를 가르치는 도로 삼으며, 현량(賢良)한 사람을 등용하여 선택하는 것을 올바른 정치를 정립하고 백성을 기르는 요체로 삼을 것을 말하였다. 


정조가 등극한 초기에, 가장 먼저 역적을 징토할 것을 청하였고, 다음으로는 성인(聖人)의 학문을 밝히고, 언로를 열고, 명분을 바르게 하고, 재용을 절약하고, 어진 관리를 발탁하고, 오래된 환곡을 완화하고, 경계를 바로잡고, 아울러 과거의 폐단과 인재를 천거하는 등의 무릇 수백 마디의 말을 언급하였다.


 또 상소를 하여 대관들의 유약한 실상 및 문묘를 배알할 때에 선비를 뽑은 것이 아직 너무 이르다는 실책을 논하였다. 흉년을 당했을 때 백성을 구휼하는 방법으로는 덕을 닦고 근검절약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임을 진달하였다. 

 

그리고 경상우시(慶尙右試)에서 도사(都事)가 탐오하고 불공한 것과 경상좌시(慶尙左試)에서 입장할 때 많은 선비들이 죽음에 이른 것을 논하였고, 또 과시(科試)에서의 허위(虛僞)의 폐단을 진달하였다. 또 인하여 사직소를 올리면서 지나는 길에 목격한 흉년의 참상을 진달하고 대동법(大同法31)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문효세자(文孝世子32)의 상을 당해서는 명을 받들어 만사(輓詞)를 지어 올렸다. 상소를 하여 역의(逆醫)를 징치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어진 이와 사악한 이를 구별하여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도록 극간하였다. 


시무책(時務策)에서는 ‘원자(元子)를 보필하는 방책으로 서학(西學)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밝혀야 하고, 굶주림과 환란에 빠진 백성을 진휼하고, 규장각(奎章閣)에 과시(課試)를 행하고, 수령 중에 치적이 있는 자는 청현직(淸顯職3)에 발탁하고, 도사(都事)는 의당 옛 규범을 회복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고충을 순방하는 등의 직임을 잊지 말고 마음을 다해야 함’을 진달하였다.


 이에 모두 가납하는 비답을 받았으니, 말씀하기를 ‘특별히 깊이 체념(體念)하겠노라. 응당 맹렬하게 반성하여 스스로 힘쓰겠노라.’라고 하였다. 우관(郵官34)을 맡았을 때는 직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녹봉을 내어 묵은 폐단을 혁파하였으며, 대순을 걷어서 죽제(竹堤)를 보완하는 데 공급하여 이로써 수해의 재난을 종식시켰으니, 우민(郵民)들이 이에 힘입게 되어 비석을 세워 은혜를 기리기도 했다. 


임자년(1792, 정조 16) 6월에 통정대부에 올랐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인하여 사은숙배의 명이 있었다. 공은 임금의 부름을 여러 차례 어기는 것이 분수에 편안하지 않아 7월에 애써 나가 사은숙배하고 우부승지를 맡았다가 동부승지로 옮겼다.

 

경연에 나아가니 임금께서 말씀하기를 “과거에 급제한지 30년이 되었는데도,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얼굴을 모르니,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진실로 개탄스럽도다!”라고 하고, 인하여 영남 지역의 흉년에 대해 물었다. 


공이 실상대로 아뢰고, 인하여 “진휼청을 설치하여 구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조로 바꾸어 제수하여 조금 한가로이 지내도록 하였으니, 이는 연로한 이를 예우한 특별한 은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소원한 바를 다 이루었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이 일을 끝으로 체직을 원하였다. 공을 위해 더 머물러 있으라고 만류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서둘러 돌아가지 마시오. 응당 좋은 고을의 목사(牧師)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니, 공이 더욱 놀라고 부끄러워하며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계축년(1793, 정조 17)우연히 걸린 감기로 생을 마쳤는데, 이날이 바로 3월 21일로 향년 68세였다. 고을 북쪽 금곡현(金谷峴) 남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근후하고 온화하며 말씀은 과묵하였고, 순실(純實)하여 마치 어린아이처럼 거짓됨이 없었고, 편안하고 고요하여 마치 처녀같이 꾸밈없이 본성을 지켰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것을 애통해하며 제부諸父들을 대신 섬기며 정성과 사랑을 다하였고 여러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였다. 


종족(宗族)과 향당에서의 처신은 화목과 공손함을 지극히 하였고,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충후하였다. 임금을 섬김에 우국애군은 한결같은 정성에서 나와서 일에 따라 규범을 올렸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품달하여 기어이 임금을 감동시키고자 하였다. 


여러 정사(政事)의 실상을 조치함에 있어서는 그 가르치는 뜻의 귀결처는 격물·치지·성의·정심을 치도(治道)의 근본으로 삼으며, 부세(賦稅)를 완화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돌아보는 것을 시대를 구원하는 급선무로 삼는 데 지나지 않았다. 


단아한 뜻으로 물러나 겸손하며 영리(榮利)에 담박하였다. 관적(官籍)에 오른 30년 동안 조정에 있은 지는 겨우 수십일 뿐이었고, 경연에 오른 것도 몇 차례뿐이었다. 마음을 잡고 논지를 지킨 것과 출처 거취는 오직 의리에 비추었을 뿐으로 일찍이 권세에 굴복하여 아부하려 하지 않았고 시종토록 깨끗하여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다. 진실(縉紳)들의 공의가 일치하여 ‘완명인(完名人 : 이름을 온전히 한 사람)’이라 일컬었다.

 

평생 청렴하고 근면하였으며, 일찍이 재물을 늘리는 것을 자손을 위한 산업으로 삼지 않았고, 의롭지 않는 것은 털끝 하나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우관(郵官)의 봉록을 덜어 종갓집을 보수하였고,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집에 거처할 때는 조용히 지내면서 일을 만들지 않았고, 손수 주자(朱子)의 봉사(封事35)와 퇴계 선생의 서소(書疏)를 베껴 쓰고, 밤낮으로 읽고 외웠다. 

 

우리나라 명현들의 사적을 찾아 모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항상 보았으며, 정원에는 매화․ 치자‧ 연꽃‧ 국화를 심어 그윽한 지취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정사(精舍) 두 글자를 벽에 써 놓고 이를 자호로 삼았으니, 이는 대개 성인의 가르침 중에 가장 정밀하고 긴요한 말에서 취하여 감동하여 외우고자 하는 뜻을 붙인 것이다.

 

공은 두번 장가를 들었는데, 초배위(初配位)는 옥산장씨(玉山張氏)로, 통덕랑(通德郞) 대의(大誼)의 딸이며, 문강공(文康公) 현광(顯光)의 5세손이다. 후배위(後配位)는 평산윤씨(平山尹氏)로, 통덕랑 여흠(汝欽)의 딸이며,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이동유(李東維)에게 시집간 딸은 장씨소생이고, 아들 명수(命洙)․ 간수(侃洙)․ 경수(景洙)․ 양수(養洙)와 신헌조(申獻朝)에게 시집간 딸은 윤씨소생이다. 명수의 아들은 술명(述明), 간수의 아들은 술전(述銓), 경수의 아들은 술준(述峻), 양수의 아들은 술구(述榘)이다. 이동유의 아들은 아무개이고, 신헌명의 아들은 아무개이다. 


공의 자손들이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자 문중의 젊은이 남룡(南龍)으로 하여금 구당공(舊堂公) 조목수(趙沐洙)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면서 “이 노인은 말을 넘치게 하는 분이 아니니, 그대가 그 점을 살펴 가장 적절하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보잘것없이 늙은 나를 돌아보건대 어찌 이 부탁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구당공의 말을 공경히 참고하여 그 전말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명리의 길 사람을 유인하여 / 名塗誘人
모든 수레들 함께 달려가니 / 萬轂同趨


그 누가 고삐를 잡고 / 誰撰其轡
규칙대로 달리리오 / 範以馳驅

 

아름답도다! 정옹이여 / 媺哉精翁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배우고 / 早淑家謨


규방의 여인처럼 몸을 지키고 / 閨女持身
갓난아이처럼 거짓이 없었네 / 赤子無僞


효도하는 마음 옮겨 임금 섬기니 / 移孝事君
충정과 사랑 간절하고 지극했네 / 忠愛懇至


열 가지 조목의 봉서(封書)는 / 十條囊封
임금을 돕는 뜻이 절실하여 / 志切尊庇


선왕께서 가상타 하시고 / 先王曰嘉
너의 말을 내가 체념하리라 하셨네 / 汝言予體


누가 길들여 순응하게 하리오 / 誰其馴之
출렁이는 물결 위의 갈매기를 / 鷗波浩瀰


서안 위에는 고서가 있고 / 案有古書
뜰에는 국화를 모종했네 / 庭有蒔菊


부귀영화 다 물리치고 / 屛貴遺榮
너울너울 포의로 돌아왔네 / 婆娑初服


대개 간직한 뜻은/  葢其所存
고요하게 지내며 욕심을 버리는 것 / 恬靜寡欲


이로서 진퇴하며 / 是以去就
오직 의로움만 벗 삼았네 / 惟義與鄰


처음부터 끝까지 헤아려 봐도 / 循考始終
티끌 없이 희고 깨끗하니 / 皭然無塵


완명인이라 일컬어지고 / 葆歸完名
천 년의 제향에 족하시리라 / 自足千禩


여기 이 빗돌에 새겨 / 刻此貞珉
후세 군자들을 독려하노라 / 以勵君子

 
25) 포의(布衣) : 베로 만든 옷으로, 벼슬이 없는 선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26) 소년 등과가 불행이라 : 삼불행(三不幸) 즉 세 가지의 불행한 일이란 뜻이다. 세 가지란 어린 나이에 대과(大科)에 오르는 일, 부형(父兄)의 세력으로 좋은 벼슬을 얻는 일, 재능이 빼어나서 문장에 능한 일을 말한다.

 
27) 한권(翰圈) : 예문관 검열을 뽑는 절차인 한림권점(翰林圈點)의 준말로, 권점은 관원을 임명할 때 추천하는 방식의 하나인 후보자의 성명 아래에 치던 동그라미를 말한다. 


28) 부의(副擬) : 관직의 후보에 두 번째로 천거되는 것으로, 부망(副望)이라고도 한다. 전조(銓曹)에서 관원의 후보로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려서 임금의 낙점을 받는데, 첫 번째를 수망(首望), 두 번째를 부망, 세 번째를 말망(末望)이라고 한다.


29) 보궐(補闕) : 임금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간하여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30) 정심(正心)․성의(誠意) : 치자(治者)가 갖추어야 할 덕목인 대학의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 중의 하나로, 삼강령은 명명덕(明明德)․친민(新民)․지어지선(止於至善)이고, 팔조목은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31) 대동법(大同法) : 조선 중엽에 현물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던 세법을 말한다. 


32)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 : 정조의 첫 아들이다.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소생으로 태어나 정조 8년(178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조 10년 5월에 병사하였다.


33) 청현직(淸顯職) :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의 준말로,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이 하던 규장각(奎章閣)․홍문관(弘文館)․선전관청(宣傳官廳) 등의 중요한 직임을 말한다. 


34) 우관(郵官) : 옛날에 역원(驛院)을 관장한 찰방(察訪) 및 역승(驛丞)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35) 주자(朱子)의 봉사(封事) :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효종(孝宗) 15년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 첫째 태자를 바르게 인도하고, 둘째 대신(大臣)의 적임자를 선택하며, 셋째 강유(綱維)를 일으키고, 넷째 풍속을 변화시키며, 다섯째 백성의 힘을 기르고, 여섯째 군정(軍政)을 바르게 하며, 끝으로 임금이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모두 바르게 된다는 내용의 주청을 한 것을 말한다.

 

 

[原文]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趙公墓碣銘 幷序 


公諱錫穆字遠仲。趙氏出豐壤。高麗侍中孟實。其鼻祖也。入本朝。有諱崇商議中樞院事。諱瑞廷舍人。諱允寧府使。諱靖文科郡守。贈吏曹參判。以道學文章稱於世。卽黔澗先生。於公間六世。高祖諱稜生員。有儒林重望。曾祖諱大胤通德郞。祖諱瀣通德郞。俱以德行稱。通德有五子。仲諱善經娶密陽朴聖任女。叔諱履經娶通德郞仁川李基仁女。公以仲之子。而后於叔。a321_344c生英廟丙午。眉眼瀅澈。犀骨貫頂。見者異之。八歲始受學。每朝受課。必先同學。十七遭朴氏喪。哀號逾禮。諸兄慮氣弱。勸之肉。泣不聽。十九始治經業。孜孜思讀。不待長者程督。壬申居李氏憂。式禮罔愆。丙子登第。時同堂聯璧。人慕榮耀。公則以少年高科。有不幸之戒。愈兢惕。無躁進意。戊寅選補槐院。己卯入實薦翰圈。辛巳八月。除注書。書陳副擬難進狀。九月又除注書。初入筵席。上稱精緊人。十一月。用世孫痘候入直勞。陞典籍。壬午除刑曹佐郞。自是歷踐諸司。爲正言者九。吏曹佐郞者五。持平一。掌令。一獻納十八。執義四。司諫五。間出爲黃山察訪。又入爲司僕軍資寺正。特旨除承旨者三。公自立朝。以補闕盡職爲心。其爲臺官。因䨓異陳勉。則以懋實爲自修之方。聽諫爲益聖之道。陳大根本最切要。則勸上正心誠意。爲端本出治。敎導儲貳之道。任賢擇良。爲立政養民之要。當正廟初服。首請懲討。次言明聖學,開言路,正名分,節財用,擇良吏,緩舊糴,正經界。並及科弊貢士凡數十百言。又疏論臺臣巽軟之狀。及謁聖時取士尙早之失。陳凶歉救恤之方。以修德節儉爲要道。仍論慶尙右試都事貪汚不公。左試入場時多士致斃。及陳試虛僞之弊。又因辭疏。陳歷路所見荒歉之慘。請施大同之惠。文孝世子之喪。承命製進輓詞。疏請逆醫懲討。因極言辨別賢邪。進君子退小人之意。陳時務則以輔養元子。斥西學明正學。賑飢恤患。奎章閣課試。守令有治效者。擢授淸顯。都事宜復古規。任以灾傷詢訪等事眷眷焉。皆賜批嘉納。有云另用體念。有云當猛省自勉。其爲郵官。不以職慢。捐俸金以革積弊。撤笋供護竹堤。以息水患。郵民賴之。立石以記惠。壬子六月。陞通政。除同副承旨。因有肅謝之命。公以屢違恩召。於分未安。七月。黽勉趨肅。進右副。轉移同副。登筵。上曰。登科三十年。君臣不相知面。豈有是事。誠慨然矣。因問嶺外歉事。公從實奏對。因言不可無設賑濟竆之事。上換授吏房。使就小閒。優老數也。公曰志願畢矣。遂因事圖遞。有爲之留行者曰。母遽歸。當得好州牧。公益驚媿。卽日南還。自是無復當世之念。癸丑偶感疾終。實三月二十一日。享年六十八。葬州北金谷峴子午之阡。公謹重溫淡。言語寡默。純實無僞如赤子。安靜守拙如處女。痛早孤。替事諸父。盡誠愛。事諸兄如父。處宗族鄕黨。極其雍睦悌遜。待人接物。一於忠厚。其事君。憂愛出於悃愊。因事獻規。有懷必達。期有以感動宸聽。措諸政事之實。而其指意要歸。不過以格致誠正。爲出治之本源。緩稅恤隱。爲救時之急務也。雅志謙退。泊於榮利。通籍三紀。在朝僅數十日。而登筵數次而已。其秉心持論。出處去就。惟義是視。未嘗欲屈而勢懾。始終皦如。不受點汚。縉紳公議。翕然稱完名人也。平生廉謹。未嘗營殖貨財。爲子孫産業。非其義也。一毫不自近。割郵俸以葺宗第。歸槖無餘貯。家居簡靜無作爲。手書朱子封事及退溪書疏。日夕講誦。搜輯我東名賢事蹟。常目案上。庭植梅梔蓮菊。以助幽致。書精舍二字于壁。因以自號。葢取聖敎中精緊之語。以寓感誦之意也。公凡再娶。初配玉山張氏。通德郞大誼女。文康公顯光五世孫。後配平山尹氏。通德郞汝欽女。皆封淑夫人。有四子二女。女李東維張氏出。子命洙,侃洙,景洙,養洙。女申獻朝尹氏出。命洙男述明。侃洙男述銓。景洙男述峻。養洙男述榘。李東維男某某。申獻朝男某某。公之諸孫。爲墓道將有石。令門少南龍持舊堂公所撰行狀。示興洛曰。此老非溢於言者。子其按而最之。顧晩生寡陋。何以堪是寄。旣屢辭不獲命。則敬述舊翁之言。敍其始終。而系以銘曰。
名塗誘人。萬轂同趨。誰撰其轡。範以馳驅。媺哉精翁。早淑家謨。閨女持身。赤子無僞。移孝事君。忠愛懇至。十條囊封。志切尊庇。先王曰嘉。汝言予體。誰其馴之。鷗波浩瀰。案有古書。庭有蒔菊。屛貴遺榮。婆娑初服。葢其所存。恬靜寡欲。是以去就。惟義與鄰。循考始終。皭然無塵。葆歸完名。自足千禩。刻此貞珉。以勵君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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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권공의 묘갈명[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權公墓碣銘] 서문병기


공의 휘는 덕윤(德潤), 자는 자반(子胖)이다. 권씨(權氏)는 고려 태사(太師)인 행(幸)으로부터 비롯되어, 벼슬이 대대로 이어졌으니 우리 동방의 대성(大姓)이다. 수홍(守洪)은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인(靷)은 예의판서(禮儀判書), 원(原)은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계경(啓經)은 현감(縣監)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곤(琨)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는데 처음으로 금계(金溪)에 터를 잡았고, 맑은 덕행으로 중망을 받았다. 조부는 사영(士英)으로 습독(習讀)을 지냈고, 부친은 응희(應禧)로 의흥위부장(義興衛部將)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부인(淑夫人) 진안백씨(眞安白氏)는 좌부위(左副衛) 원형(元亨)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 23)에 태어나 병오년(1606, 선조 39)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9세이다. 천등산(天燈山) 남쪽 성곡(城谷) 간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원주변씨(原州邊氏) 생원 광(廣)의 딸로, 정숙하고 자애로워 이웃의 환심(懽心)을 얻었다. 계사년(1533, 중종 28)에 태어나 공보다 17년(1623, 인조 1) 뒤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공과 합폄하였다. 


3남을 두었는데, 훤(晅)은 경학과 행실이 있었으며 호가 성재(誠齋)이고, 양(暘)․ 창(昶)이다. 훤이 아들이 없어 계선(繼善)을 후사로 삼았다. 양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종선(宗善)․ 승선(承善)은 출계하였고, 계선은 들어와 공의 제사를 받들었고, 호선(好善)․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추증된 처선(處善)으로, 모두 학문과 행실로 가문을 빛냈다.

 

딸은 이형원(李馨遠)․ 이양원(李揚遠)에게 각각 시집갔다. 창은 승선을 후사로 삼았다. 계선의 아들은 자(滋)․ 영(泳)․ 찬(澯)․ 연(沇)이고, 딸은 생원 남구(南俅)․ 옥률(玉嵂)에게 각각 시집갔다. 종선의 후사(後嗣)는 제(濟)이고, 딸은 대간(大諫) 남천한(南天漢)에게 시집갔다.


처선의 아들 현(灦)은 형조참의에 추증되었고 호는 우헌(愚軒)이다. 딸은 이완(李琓)에게 시집갔다. 승선의 아들은 심(淰)․ 출계한 제(濟․ 회(淮)이고, 딸은 김진수(金軫壽)․ 김종준(金宗準)․ 문성표(文聖標)에게 각각 시집갔다.

 

자(滋)로부터 4대를 내려와 괴(烠)는 행실이 돈독하고 학문이 깊었으며 호는 행정(杏亭)이다. 병문(炳文)은 정자(正字)를 지냈으며 경술(經術)로 유림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호는 약재(約齋)이다. 휴(烌)는 생원으로 호는 묵암(默庵)이고, 준(焌)․ 습(熠)은 당대에 문헌(文獻)이 성대하였다. 


공의 타고난 품성은 화락하고 강의하며 명철하였다. 일찍이 정훈(庭訓)을 받아 법도에 벗어나는 적이 없어, 약관의 나이에 이미 노성(老成)하다는 칭송이 있었다. 부모님을 모심에 삼가 혼정신성(昏定晨省)하여 충심으로 봉양함이 지극하였고, 거상에 있어서는 슬퍼하여 몸이 손상되는 것이 예제(禮制)를 넘었다. 


형과 침상을 나란히 하여 함께 자며 우애가 독실하고 지극하였고, 선묘(先墓)에는 다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봉제사에 대비하게 하였다. 손수 집안의 법도를 써서 아들들을 성심으로 가르쳤다. 평소에도 간묵(簡黙)함으로 스스로를 지켰으며, 초대하거나 방문하며 빈번히 왕래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권송암(權松巖36) ․ 배임연(裵臨淵37) 등 현인들과는 도의의 교분을 맺어 서로 왕래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뜻을 버리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로 스스로 즐기며, 더욱이 후진을 장려하는 것으로 책무를 삼았다. 남공형(南公衡)․ 상사(上舍) 신내옥(辛乃沃)과 경광서당(鏡光書堂38)을 건립하여 제생들이 학업을 익힐 수 있게 하였고, 그 뒤에 재물을 거두고 적임자를 골라 선비를 기르는 자원을 넉넉하게 하였다. 단양(丹陽)의 훈도(訓導)로 천거되고, 뒤에 나이 80세가 되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장인 변공(邊公)이 일찍이 공에게 단금(短琴) 하나와 칠서(七書) 여러 질을 남겨 주며 금서헌(琴書軒)이라 이름 하였는데, 어쩌면 공이 이를 천명이라 여겼으므로 변공도 이로 인하여 그렇게 일컬은 것일 것이다. 후손 연호(淵浩)와 주현(周顯) 등이 묘석(墓石)을 이미 마련하고, 비석에 새길 글을 요구하였다.

 

내가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웠으나, 그러나 스스로 돌아보건대 외람되이 혈맥에 이어져있고 또 공의 후손들과 10세에 걸쳐 같은 마을에서 지낸 오랜 정리가 있어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행장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뿌리 깊으면 반드시 가지가 무성하고// 根深者末必茂
근원이 멀면 반드시 흐름이 유장하나니 / 源遠者流必長
자손이 이어짐이여 유자의 덕행 갖추었네 / 子孫繩繩兮有儒行
우리 공의 숨은 덕망과 아름다운 행적이 / 吾知公潛德幽懿
드러나지 못했으나 더욱 빛나실 것을 아네 / 闇然而彌章


36) 권송암(權松巖) : 송암은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호이다. 자는 장중(章仲), 본관은 안동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은거했다.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송암집이 있다.


 37) 배임연(裵臨淵) : 임연은 배삼익(裵三益, 1534∼158)의 호이다. 자는 여우(汝友),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564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유로부터 대사성까지 지냈고,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진사사(陳謝使)의 정사(正使)로 파견되었을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는 공개를 꺼리는 대명회전 수정된 초본을 외교적 노력을 통해 입수하였고 더불어 황제로부터 옥적(玉笛), 상홀(象笏), 앵무배(鸚鵡盃)를 받았다. 외직으로는 풍기 군수와 양양 부사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임연재집이 있다.


 38) 경광서당(鏡光書堂) : 송암 권호문이 안동 금계리에 세운 서당으로 1570년 건립되었다. 권호문의 기문이 있다.

 

 

[原文]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權公墓碣銘 幷序 


公諱德潤字子胖。權氏出麗太師幸。冠冕赫世。爲東方大姓。諱守洪尙書左僕射。諱靷禮儀判書。諱原中郞將。諱啓經縣監。贈吏參。寔公高祖。曾祖諱琨副護軍。贈吏判。始居金溪。有淸德重望。祖諱士英習讀。考諱應禧義興衛部將。贈通政。妣淑夫人眞安白氏。左副衛元亨女。公生嘉靖戊子。卒丙午。享年七十九。葬天燈南城谷枕艮之原。配原州邊氏。生員廣女。婉淑慈惠。得鄰里懽心。生癸巳。歿後公十七年。墓合堋。有三男。晅有經行。號誠齋。暘,昶。晅,無子。以繼善嗣。暘五男。宗善,承善出。繼善入承公祀。好善,處善贈掌樂正。皆以文行世其家。二女適李馨遠,李揚遠。昶嗣男承善。繼善男滋,泳,澯,沇。女南俅生員,玉嵂。宗善嗣男濟。女南天漢大諫。處善男灦贈刑議號愚軒。女李琓。承善男淰,濟出。淮。女金軫壽,金宗準,文聖標。滋之後四傳。而曰烠有至行邃學。號杏亭。炳文正字。以經術重於儒林。號約齋。烌生員號默庵。焌,熠。一時文獻蔚如也。公天稟愷悌剛明。早襲庭敎。不離典則之內。弱冠。已有老成稱。事親謹定省。極其忠養。居喪哀毁逾制。與兄聯牀共枕。愛友篤至。先墓皆置祭田。以備奠獻。手書家規。諄諄敎諸子。平居簡默自守。不喜徵逐。與權松巖,裴臨淵諸賢。道義交。相往來酬唱。絶意進取。書史自娛。尤以奬進後承爲務。與南公衡,辛上舍乃沃。刱鏡光書堂。令諸生肄業。旣又收貲擇任。以贍養士之資。以薦爲丹陽訓導。後以大耋授僉樞。外舅邊公嘗遺公短琴一張,七書諸袠。謂琴書軒。豈公以此自命。而邊公因而稱之歟。後孫淵浩,周顯等。治墓石旣具。責以顯刻之詞。興洛懼非其人。而顧忝爲自出。又與公諸孫。有十世同閈之舊。於義不敢辭。遂按其狀而敍之。系以銘曰。
根深者末必茂。源遠者流必長。子孫繩繩兮有儒行。吾知公潛德幽懿。闇然而彌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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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록대부 행 지중추부사 이공의 묘갈명(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李公墓碣銘) 서문 병기


영조 무진년(1748, 영조 24)에 지충추부사 이공이 당시에 근신(近臣)의 반열에 있었는데, 소를 올려 탕평(蕩平)에 대한 논의를 거두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입시(入侍)하라 명하고 묻기를 “내가 막 탕평책을 시행하려하는데 유신(儒臣)이 이를 반대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반대하겠습니까. 다만 탕평이 올바르게 시행되지 못함을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교지를 내려 이르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때와 힘을 헤아려서 해야 하는데, 그대는 반드시 도산(陶山)으로 돌아가서 선정신(先正臣)이 남긴 글을 읽으려 하는구나.”라고 하고, 인하여 소본(疏本)을 내어주라 명하였다. 공이 관적(官籍)에 오른 5년 동안 해마다 다른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아, 조정에서 벼슬한 것은 겨우 18일이었다. 


70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무릇 7차례에 거쳐 승자(陞資)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을 때, 임금이 이르기를 “이세사(李世師)는 나와 동갑으로 기로소에 같이 들어갔으나, 내 아직 만나 보지를 못했으니, 화상(畫像)을 그려 올리도록 하라.”고 하고, 안거(安車39)를 타고 길에 오르도록 권했다. 


공은 상소하여 질병으로 가기 어려운 정황을 극력 진달하며, 전후로 왕명을 저버린 죄를 거론하고 꾸지람을 내려줄 것을 빌었다. 옛날 융경(隆慶) 무진년(1568, 명종 13)에 퇴계 노선생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노령이라 고하고 돌아왔다. 공은 바로 퇴계 선생의 7세손으로,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의리는 선생의 가법을 삼가 지킨 것이니, 얼마나 위대한가!  


선생 이후로 대대로 훌륭한 후손들이 있었으니, 영도(詠道)는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기(岐)는 공릉참봉(恭陵參奉), 포철(布哲)은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회(櫰)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수약(守約)은 정릉참봉(靖陵參奉)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정부인(貞夫人) 진주강씨(晉州姜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된 자(鄑)의 딸이다.


숙종 갑술년(1694, 숙종 20)에 공을 낳았으니, 휘는 세사(世師)이고 자는 성백(聖伯)으로, 타고난 품성이 영특하고 정신과 풍채가 빛났다. 갑자년(1744, 영조 20)에 관직에 올라 승문원에 예속되었다가 설서(說書)에 의망(擬望)되었으며 사헌부‧ 사간원을 거쳐 홍문관에 들어갔다.

 

교지가 달마다 내려왔지만, 번번이 중도에서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태자를 보도(輔導)하는 방책과 재앙을 만났을 때 수신과 반성 및 흉년을 구제하는 정책과 과거제도등을 덧붙여 진달하였다. 당시 셋째 형인 전부공(典簿公)이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나가면서 임금께 작별을 고할 때, 임금이 공의 거취에 대해 간곡하게 말하였다.

 

대개 공이 스스로 학문이 허술하여 논사(論思40)의 직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겼고, 이보다 앞서 관원들이 신록(新錄41)을 외람되게 뒤섞어 주청하기에 이르렀는데 비록 공의 이름이 논의의 반열에 있지는 않았지만 의리상 무릅쓰고 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진년(1748, 영조 24) 9월에 취리(就理42)하였으나 곧 용서하여 다시 부르니, 대궐에 들어가 글을 올려 사직을 구하였으나, 또 특별히 교지로 도타이 면려해 줌이 끝이 없으니 마침내 그만 두지 못하고 나아가 사은숙배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는 현인의 후손인데 여러 차례 임금의 부름을 어긴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정황은 이미 소장에 다 있습니다.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나아간다면 이는 임금을 속이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그 죄가 더욱 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외진 곳에 머물러 분수를 지키고 차라리 명을 어긴 벌을 달게 여기려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공의 나이를 묻고, 근신에게 명하여 머리카락의 센정도를 살펴보게 하였으며, 또 선정신의 필적(筆蹟)을 물어 보고 영남 백성들의 피폐까지 마침내 언급하였는데, 임금의 안색은 온화하고 아름다우며 주고 받는 말씀이 메아리가 따르는 듯하였다.

 

또 묻기를 “그대는 고인이 된 사서(司書) 이세진(李世震)과 형제인가?”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탄식하고 아까워하기를 오래하였다. 23일에 상소하여 하늘의 경계를 말하고, 26일에 상소하여 백성들의 피폐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이는 임금의 물음에 미처 대답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10월에 상소하여 시사(時事)에 대해 논하였으니, 이는 탕평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고향으로 돌아가 문을 닫아 걸고 말년을 보내면서 명도(名塗)에 대한 생각을 끊었다. 도산뒤 몇리쯤 떨어진 자하봉(紫霞峯) 아래로 나아가 띠를 베어내고 집을 지었다. 이곳은 바로 문순공(文純公)의 꿈을 기록한 시43) 중에 나오는 하명동(霞明洞)의 옛터이다. 

 

“늦은 봄 산중에 기이한 꽃 피었네. 春晩山中別有花”라고 한 구절을 취하여 만화헌(晩花軒)이라 이름하고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야옹(野翁)처럼 지냈다. 


계미년(1763, 영조 39)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제수되자, 짧은 글로 진정(陳情)하였으니 사양하는 뜻이 간절하였다.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대리섭정하기 전의 지난 일을 거의 10년이나 지난 복정(復政 : 정권을 임금에게 다시 돌림) 이후까지 어찌 이렇듯 고집을 부리는가.”라고 하였다. 다시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다.


 7월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자 또 사직소를 올리니, 성상이 억지로 하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 그 당시 공은 여전히 강건하였지만 현거(懸車4)의 나이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실제로 없었다. 매번 탄식하며 “내가 지난번 배척을 받을 때에, 언관의 책무가 없어서 한마디 충심의 말로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거늘, 더구나 무릅쓰고 나아감을 다시 일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신묘년(1771, 영조 47) 정월 전교(傳敎)에 “전 참의 이세사(李世師)는 선정신의 후예로 금년 78세가 되었으니 특별히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노라.”라고 하였다. 임진년(1772) 정월에 도신(道臣)의 세찬(歲饌)에 대한 장계로 인해 특명으로 가의대부로 올랐다. 


계사년(1773, 영조 49) 정월에 자헌대부로 올랐다. 윤3월에 임금이 양로연(養老宴)을 행하고 술과 음악을 하사하고, 여러 기로신(耆老臣)에게 그들의 연치와 이력을 각자 서술하게 하였는데, 공은 「자서시自敍詩」를 지어 ‘몸은 물러났건만 벼슬은 올라가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네.’라는 뜻을 갖추어 말하였다. 


갑오년(1774, 영조 50) 정월에 정헌대부에 올랐고, 9월에 본도(本道)로부터 의복과 음식을 더하여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을미년(1775, 영조 51) 정월에 숭정대부에 올랐다.

 

공이 상소하여 임금의 옥체가 회복됨을 하례 드리고, 인하여 조용히 연익(燕翼45)의 도에 힘쓰도록 말씀드리니, 비답에 이르기를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나이 많은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을 알 수 있고, 어린 세손世孫까지 미치니 내 그 점을 가상하게 여기노라.”라고 하였다. 


병신년(1776, 영조 52) 정월에 숭록대부에 올랐다. 3월에 영조(英祖)께서 붕어하자, 공은 병중에도 가마에 실려 현(縣)의 곡반(哭班)에 들어가 곡하였다. 신축년(1781, 정조 5) 5월에 작은 질병에 걸렸지만 평소처럼 세수와 빗질을 그만두지 않다가, 28일에 자리를 바로하고 조용히 돌아가셨다.

 

이때 사나운 비바람이 불어 대문앞 수양버들이 꺾였으니 기이한 일이다. 안동 고림(高林) 해좌(坐亥)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부인과 같은 언덕에 다른 봉분이다. 공의 타고난 성품은 자상하고 너그러웠고 기질은 강정하였으며, 총명함도 뛰어났다. 15살도 되기 전에 이미 경서와 사서를 거의 섭렵하였는데 눈으로 한번 지나치기만 하면 문득 암송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매번 기일(忌日)이 되면 밤새도록 통곡하기를 마치 처음 돌아가신 날처럼 하였다. 조모 김씨(金氏)의 병이 위독했을 때 금린어(錦鱗魚)를 드시고 싶어 하심에, 공이 강가에서 통곡하니 과연 얼음이 갈라져 그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무신년(1728, 영조 4) 역변(逆變)에 난리를 피하여 도망가는 사대부들은 모두 조상의 신주를 묻었다. 공의 문중에서도 모여 종사(宗祠)를 의논하였는데, 공이 이 주부(李主簿)의 일을 인용하면서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쟁론하여 논의가 멈추었다. 


형제들과 우의가 돈독해서 어려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침상을 나란히 하고 책상을 함께 하여 종일토록 화기애애하였다. 종족들과도 화목하면서 빈궁한 이에게는 더욱 정성으로 보살펴 매번 임금이 먹을 것을 내려 주면 이웃과 함께하였다. 

 

젊어서 객지에 있을 때 길에서 죽은 사람을 보고는 자신의 옷을 벗어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었으니, 그 어진 마음이 남에게 미침이 이와 같은 류가 많았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갖추고서 방문을 마주하여 바르게 앉아서는 경전을 묵묵히 암송하였다.

 

자손들에게 선조의 글을 읽도록 권하면서 말하기를 “경전이야 누군들 공부하지 않겠는가. 후손으로 선조의 문집을 읽는다면 더욱 감발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벼슬이 이미 높았지만 자신을 단속하기를 마치 한미한 선비처럼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명성과 지위는 외물이니, 스스로 소유하면 어리석고 남에게 교만하게 굴면 미혹된다.”라고 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큰 절의에 이르러서는 확고하게 지키는 바가 있었다. 


무진년(1748, 영조 24) 이전과 계미년(1763, 영조 39) 이후에도 각각 하나의 의리가 있었으며, 구차하게 나아가지 아니하려 한 것은 아니었고 임금을 그리는 충성심은 늙어서까지도 쇠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즉철(則哲46)의 밝으심으로 여러 차례 포상의 말씀을 내렸다.


정조의 치제문(致祭文)에도 “산림에 묻히기를 길이 맹서하였으니, 만년의 절의가 아름다웠네.”라고 하였다. 배위는 정부인(貞夫)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성품과 행실이 정숙하고, 총명하며 기억력이 좋았으며, 공보다 15년 앞서 병술년(1766, 영조 42)에 죽었다.

 

아들 귀서(龜書)는 참봉(參奉)이다. 딸이 다섯인데 김응속(金應涑)․ 최흥진(崔興震)․ 생원(生員) 이일록(李日祿)․ 김상권(金相權)․ 생원 김태익(金台翼)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봉의 두 아들은 조순(祖淳)과 응교(應敎)를 지낸 가순(家淳)이고, 두 딸은 류성문(柳星文)․ 류학조(柳學祚)에게 각각 시집갔다.

 

학생(學生)의 후사(後嗣)는 휘연(彙淵)인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응교는 5남을 두었는데 휘연(彙淵)은 출계하였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휘준(彙濬)․ 휘택(彙澤)․ 감역(監役)을 지낸 휘발(彙潑)․ 휘철(彙澈)이다.

 

휘연의 아들 만걸(晩杰)은 생원이다. 휘준의 아들은 만교(晩嶠)․ 만도(晩燾)․ 만규(晩煃)인데 만도 ․ 만규는 모두 출계하였다. 휘택의 후사는 만규(晩煃)로 지금 교리(校理)이다. 휘발의 아들은 만훈(晩薰)이고, 휘철의 뒤를 이은 아들은 만도인데 지금 승지(承旨)이다. 


만도가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나에게 묘갈문을 부탁하였는데, 늦게 태어나고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삼가 행장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왕도 탕평의 실상을 진달함은 / 陳王道蕩平之實
황극을 보우하는 정성이로다 / 保極之誠也


신하로서 진퇴의 의리 다함은 / 盡人臣進退之義
가법을 계승하는 곧음이로다 / 承家之貞也


부질없이 남은 화상은 임금님 모시고 있지만 / 空留遺像陪日表
망사대47) 가에 남아 있는 / 望思臺邊
임금의 눈물 어찌 위로하리 / 曷慰宸淚之橫也


39) 안거(安車) : 늙은이를 우대하여 부들로 바퀴를 감싸 편안하게 타게 한 수레이다. 


40) 논사(論思) : 임금이 근신(近臣)들과 학문을 의논하고 사색하는 것으로, 홍문관 관원의 직책을 뜻한다. 전한(前漢) 반고(班固)의 「양도부서(兩都賦序)」에 “아침과 저녁으로 논사하고 날과 달로 충언(忠言)을 올린다.[朝夕論思 日月獻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1) 신록(新錄) : 홍문관의 교리‧ 수찬에 새로 뽑힌 사람을 말한다.


42) 취리(就理) : 죄를 지은 벼슬아치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는 것을 말한다. 43) 꿈을 기록한 시 : 이황의 시 「꿈속에 지은 시를 채워넣다[足夢中作]」에 “하명동에는 처음에는 길이 없는데, 늦은 봄 산중에 기이한 꽃 피었네. 우연히 갔다가 참으로 기이한 경치임을 보았으니, 남은 여생 그곳에 들어가 신선집을 짓고 살리라.[霞明洞裏初無路 春晩山中別有花 偶去眞成搜異境 餘齡還欲寄仙家]”라고 하였다.


 44) 현거(懸車) : 수레를 폐기하고 집에서 쉰다는 뜻으로, 연로한 나이를 말한다. 


45) 연익(燕翼) : 자손을 위해 세운 계책이나 교훈을 뜻하는 말로, 시경 「대아(大雅)·문왕유성(文王有聲)」에 “후손에게 계책을 남겨 두어, 공경하는 아들을 편안케 하셨네.[詒厥孫謀 以燕翼子]”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6) 즉철(則哲) :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을 뜻한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은 곧 어짊이니, 사람들을 제자리에 쓸 수 있을 것이다.[知人則哲 能官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7) 망사대(望思臺) :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자살한 여태자(戾太子)를 불쌍히 여겨서 지은 누대이다. 무제가 총애하던 강충(江充)의 이간으로 태자가 자살하게 되었는데 훗날 태자가 무고(無故)하게 죽은 것을 알게 된 무제가 태자를 불쌍히 여겨,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를 세웠다. 여기서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가엾게 여기는 영조(英祖)를 비견한 것이다. 

 

 

[原文]

 

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李公墓碣銘 幷序


英廟戊辰。知中樞李公時在邇列。上疏請破蕩平之論。上命入侍。問曰。予方爲蕩平。而儒臣斥之何也。對曰。安敢斥之。但言蕩平之非眞耳。上敎曰。凡事須量時量力而爲之。汝須好歸陶山。讀先正遺書。因命出給疏本。公通籍五年。歲有遷除。而皆辭不就。立朝纔十有八日。七十進通政階。凡七陞資而至崇祿。以知中樞入耆社。上曰。李世師以予一甲。同入耆社。予尙莫見。其畫像以進。仍勉以安車就道。公上疏極陳情病難強。自引前後辜負。乞賜譴斥。在昔隆慶戊辰。退溪老先生以判中樞。告老而歸。公其七世也。其難進易退之義。恪守先生家法。何其偉哉。先生之後。代有偉人。諱詠道原州牧使。以壬難勳贈吏參。諱岐恭陵參奉。諱布哲長水道察訪。贈吏議。諱櫰贈吏參。諱守約靖陵參奉。贈吏判。娶貞夫人晉州姜氏。贈司僕正鄑女。以明陵甲戌生公。諱世師字聖伯。天資英發。神彩燁如。甲子釋褐。隷槐院擬說書。歷兩司入玉堂。召旨無虛月。輒半道疏辭。附陳輔導元良。遇灾修省。及荒政科規等說。時三兄典簿公。以河陽縣監陛辭。聖諭眷眷於公之去就。葢公自以學術空疎。不堪論思之任。且前此僚員。至以新錄猥雜奏聞。雖公名不在論列。而義不可冒處也。戊辰九月。就理旋宥牌招。因詣闕上章乞免。又特敎敦勉不已。遂不獲已出肅。上曰。爾以賢裔。累違君召何也。對曰。臣之情事。已悉於疏中。冒昧承當。欺君忝祖。其罪尤重。所以滯守一隅。寧甘違命之誅也。上問年齒。命侍臣看鬢髮黑白。又問先正筆蹟。遂及嶺外民瘼。天顔溫粹。酬酢如響。又問汝與故司書李世震爲兄弟乎。對曰然。上嗟惜久之。二十三日。上疏言天戒。二十六日。疏陳民瘼。卽上所俯詢而未及仰對者也。十月疏論時事。卽蕩平之議也。旣歸杜門送老。絶意名塗。就陶山後數里許紫霞峯下。誅茅卜築。卽文純公記夢詩中霞明洞舊墟也。取春晩山中別有花之句。以晩花名軒。優遊林壑。自同野老。癸未除掌隷院判決事。上短章陳情。辭意悽惋。批曰。代理前往事。於幾十年復政之後。有何撕捱乎。再疏蒙允。七月。拜工曹參議。又上疏辭。上亦知其難強而許之。葢是時。公尙康健。而實無意復起於懸車之年也。每歎曰。吾向也譴斥。無言責。未能一言剚腹。以報恩遇。况可以復事冒進爲哉。辛卯正月傳曰。前參議李世師。以先正後裔。年今七十八。其特授同中樞。壬辰正月。因道臣歲饌狀啓。特命陞嘉義。癸巳正月。陞資憲。閏三月。上行養老宴。宣醞賜樂。命諸耆臣各述其年齒踐歷。公製進自敍詩。備言身退秩進。惶蹙不自安之意。甲午正月。陞正憲。九月。令本道加給衣資食物。乙未正月。陞崇政。公上疏賀聖侯平復。仍勉以靜攝燕翼之道。批曰。今聞卿章。可見耆耉臣惓惓愛君之心。而及於沖子。予庸嘉焉。丙申正月。陞崇祿。三月。英廟賓天。公方屬疾。扶輿入哭縣班。辛丑五月。感微疾。不廢盥櫛如平日。二十八日。正席悠然而逝。時有㬥風雨折門前垂楊。異哉。葬安東高林坐亥之原。與夫人同麓異墳。公賦性子諒。得氣剛正。聰明又絶倫。未成童。已涉獵經史殆盡。一過眼輒成誦。幼而失恃。每當忌辰。達宵號慟。如袒括之初。祖母金氏疾篤。思錦鱗魚。公緣江號泣。果剖冰得之。戊申逆變。士大夫避亂者。皆瘞其宔。一門又會議宗祠。公爭之引李主簿事以自當。議乃止。與諸兄篤友。自少至老。聯床共案。日夕怡愉。處宗族敦睦。尤加意於貧竆者。每有恩餽。與鄰里共之。少嘗客外。路有死人。解衣收瘞。其仁心之及物。多類此。日輒早起。盥洗衣冠。當戶淸坐。默誦經傳。勸子孫讀先祖遺書曰。經傳孰非可學。而以後孫讀先集。尤易感發。爵秩已崇。而斂然若寒士。嘗曰名位外物。自有則愚。驕人則惑矣。至於出處大節。確有所守。而戊辰以前癸未以後。各是一義。非苟爲不起者也。而戀闕之誠。至老不衰。所以則哲之明。屢賜褒諭。正廟侑文。亦曰林樊永矢。晩節隨臧。配貞夫人平山申氏。性行貞淑。聰識強記。先公十五年丙戌卒。子龜書參奉。五女金應涑,崔興震,李日祿生員,金相權,金台翼生員。參奉二子祖淳,家淳應敎。二女柳星文,柳學祚。學生嗣子彙淵僉樞。應敎五子。彙淵出。彙濬大司成,彙澤,彙潑監役,彙澈。彙淵子晩杰生員。彙濬子晩嶠,晩燾,晩煃皆出。彙澤嗣子晩煃今校理。彙潑子晩薰。彙澈嗣子晩燾今承旨。晩燾以公遺事。托以墓石之文。辭以晩生無文而不獲命。謹依狀而敍之系以銘曰。
陳王道蕩平之實。保極之誠也。盡人臣進退之義。承家之貞也。空留遺像陪日表。望思臺邊。曷慰宸淚之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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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곡 선생 류공의 묘갈명(壺谷先生柳公墓碣銘) 서문 병기

 

정조께서 문(文)을 숭상하여 덕망과 학문을 갖춘 선비를 가려 뽑을 때, 호곡(壺谷) 류 선생(柳先生)이 가장 먼저 정초(旌招 : 초빙하여 벼슬을 시킴)를 받았다. 일찍이 제관(祭官)으로 태묘(太廟)에 들어갔을 때 임금이 납시어 품목을 두루 살펴보는데, 그때 마침 선생이 희생(犧牲)을 덮은 보자기를 들추다가 용작(龍勺48)이 땅에 떨어져 그 소리가 종묘 안에 진동하였다. 


선생은 조용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수복(首僕49)은 용작을 바로 놓으라.’라고 하니, 주상이 눈여겨보고 마음에 담아 두었다. 얼마 뒤에 창의하였던 옛 간지(干支)가 돌아온 것에 감동하여 용와공(慵窩公50)에게 관작을 높여 추증하고, 노애공(蘆厓公51)은 관직을 제수하고, 선생을 조정으로 불러 면전에서 유(諭旨)를 내리기를 “그 조부의 손자이고 그 아비의 자식이니, 독서에 힘쓰고 행실을 닦아 훌륭한 가풍을 계승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능묘(陵墓)의 나무가 바람에 꺾이는 일이 발생하여, 사건을 심리하고 의금부에서 법대로 밝히려 하자, 임금이 말씀하기를 “류범휴(柳範休)는 사실을 속이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고, 특명으로 방면하였다. 또 채 상공(蔡相公)에게 말씀하기를 “짐이 독서인을 얻어 궁관(宮官52)에 보임코자 하는데, 류범휴가 어떻겠소?”라고 하자, 채 상공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 임금과 재상이 주목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선생의 도(道)는 이 세상에 거의 쓰일 뻔 했는데, 임금께서 갑자기 승하하여 상황이 일거에 바뀌었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도다.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70여년 뒤에 증손 건호(建鎬)씨가 나에게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돌아보건대 아득한 말학이라 어찌 감히 성덕(盛德)을 비슷하게나마 그려내겠는가 하고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는 범휴(範休)이고 자는 천서(天瑞)이며, 영조 갑자년(1744, 영조 20)에 태어났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부 용와옹(慵窩翁)의 괴걸(魁傑)함을 닮았다.”라고 하였다. 겨우 걸음마를 배울 무렵 밖에 나갔다가 큰 우레와 번개를 만나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사방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무슨 소리이며 무슨 불인가? 何聲何火”라고 하였다. 


7살에 서당에 들어가서는 사색하여 의문 나는 점은 물어 그 이치를 끝까지 따져보기를 좋아하였다. 10여 세에는 스스로 독서하는 방법을 알아,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르지 않았다.  17세에 난곡(蘭谷53) 김 선생(金先生) 가문에 장가를 들어 관감觀感54)의 도리에 삼가고 힘썼다. 정해년(1767, 영조 43)에 향시(鄕試)에 입격하였으나, 대과에는 낙방하였다. 

무자년(1768, 영조 44)에 선부인(先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임진년(1772, 영조 48)에 선부군(先府君)의 서찰을 받들고 호상(湖上5)에 나아가 배우기를 청하였는데, 한결같이 사문(師門)을 본보기로 삼았다.

 

계부(季父) 동암 선생(東巖) 선생이 기뻐하며 “아무개는 선생의 걸음을 따라 걷는 자56)라고 일컬을 수 있다.”라고 하였고, 이 선생(李先生)은 손수 “뜻을 세우고 경에 거하여, 앎을 이루고 행실에 힘쓰라. 강건하고 중정하며, 포용하고 너그러우며 빛나고 광대하라. 『立志居敬 致知力行 剛健中正 含弘光大』”라는 16글자를 써서 주었으니, 공에게 기대하는 중망이 이와 같았다. 


경자년(1780, 정조 4)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붙었다. 신축년(1781, 정조 5) 대산(大山)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은혜가 깊고 의리가 중함을 애통해하면서 건대(巾帶)로 석 달의 상기를 마쳤다. 

을사년(1785, 정조 9)에 관찰사의 천거로 태릉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마지못해 나아가 받들었다. 입직을 하면서도 책상을 마주하고 서책을 보니, 동료들이 알아서 공경하였다.


병오년(1786, 정조 10)에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자리를 옮겼고, 무신년(1788, 정조 12)에 평시서 직장(平市署直長)으로 승차하였다. 기유년(1789, 정조 13)에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자리를 옮겼고, 경술년(1790, 정조 14)에 송화현감(松禾縣監)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791, 정조 15)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부군의 상을 당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식은땀을 흘렸던 검루(黔婁57)의 일에 견주었다.  갑인년(1794, 정조 18)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올랐고, 얼마 후에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었다. 또 창릉 영(昌陵令)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의금부(義禁府)에서 심리(審理)를 받았고 바로 후릉 영(厚陵令)에 복직되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에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음날 고성군수(高城郡守)에 제수되었다. 정사년(1797, 정조 21)에 체직되어 돌아왔다가 얼마 뒤에 공릉 영(恭陵令)에 복직되었다. 안변(安邊) 고을에 수령 자리가 비었을 때, 임금은 두 번이나 의망(擬望)을 물리치고, 친히 선생의 성명을 써서 비답을 내리고 면려하는 유서(諭書)를 보냈다. 


경신년(1801, 순조 1)에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승하하였다. 신유년(1801)에 관찰사가 무고한 장계를 올려 파직을 당했는데, 암행어사가 장계를 올려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였지만 임금은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 고을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백성들은 아전을 보지도 못하였고 개도 밤에는 짖지 않았습니다. 


지아비는 들에 있고 베짜는 여인들은 베틀에 있으니, 사또께서는 얼마나 덕정(德政)을 베푸셨는데 바로 이렇게 되셨습니까.”라고 하였다. 기사년(1809, 순조 9)에 군의 공조(功曹)를 불러서 환정(還政)의 폐단을 정리하니 온 고을이 다시 살아난 듯하였다. 


계미년(1823, 순조 23)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3월에 병석에 눕더니 8월 27일에 정침에서 세상을 떠나 사월(沙月)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류씨(柳氏)의 관향은 전주(全州)로 고려(高麗)에서 장령(掌令)을 지낸 습(濕)이 실제로 비조(鼻祖)이다.

 

2세가 지나 의손(義孫)은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으로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소와정(笑臥亭)을 짓고 그곳에 머물다 세상을 떠났고, 호는 회헌(檜軒)이다. 중세(中世)에 이르러 복기(復起)는 호가 기봉(岐峯)으로 예빈 정(禮賓正)을 지냈는데 비로소 수곡(水谷)에 터를 잡았다.

 

그 3세(世)를 내려와 진휘(振輝) 진사(進士)가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봉시(奉時)로 인륜에 돈독하고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조고는 즉 용옹(慵翁) 승현(升鉉)으로 관직은 참의(參議)였다. 계조(季祖)는 관현(觀鉉)으로 역시 관직이 참의였으며 호는 양파(陽坡)이다. 용옹이 아들이 없어 양파공의 중자(仲子)인 도원(道源)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분이 노애(蘆厓)로 벼슬은 감역(監役)을 지냈으며 선생의 부친이다. 


모친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참봉 경온(景溫)의 딸이다. 부인은 의성김씨 난곡(蘭谷) 강한(江漢)의 딸이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노문(魯文)과 참봉 정문(鼎文)이고, 딸은 생원 김현규(金顯奎)․ 장석경(張錫慶)․ 김양관(金養觀)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는 8명으로, 치임(致任)․ 치검(致儉)․ 치엄(致儼)․ 치효(致孝)․ 출계한 진사 치교(致敎)․ 치후(致厚)․ 참의를 지낸 치호(致好)․ 진사 치유(致游)이고, 손녀는 김하수(金夏壽)․ 승지 김진우(金鎭右)에게 각각 시집갔다.

 

외손은 5명으로 김용건(金龍鍵)․ 봉건(鳳鍵)․ 원건(元鍵)․ 장성원(張聲遠)․ 김영유(金永裕)이다. 증손은 17명으로 건호(建鎬)․ 출계한 군수 지호(止鎬)․ 정호(廷鎬)․ 영호(永鎬)․ 기호(基鎬)․ 재호(在鎬)․ 현감 긍호(肯鎬)․ 서호(胥鎬)․ 출계한 주호(胄鎬)․ 응호(膺鎬)․ 경호(敬鎬)․ 달호(達鎬)․ 익호(翼鎬)․ 철호(哲鎬)․ 석호(石鎬)․ 벽호(璧鎬)․ 출계한 규호(奎鎬)이다. 


우리 선사(先師) 정재(定齋) 선생이 다음과 같이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선생의 자품은 자애롭고 선량하였으며 모습은 단정하고 엄중하였다. 기상은  온화하고 점잖고 정밀한 빛이 넘쳤으며, 체구는 작아도 뜻은 담대하고 얼굴색은 온화하나 말씀은 위엄이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고 나가서는 장인의 훈육에 흠뻑 젖었다. 

 

대방가(大方家)에게 귀의해서는 도는 인륜을 벗어나지 않음을 알고 이 학문은 평상(平常)에 있음을 알았다. 강학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고자 하였고, 공경을 유지함은 반드시 용모에서부터 하였다. 


그 처음에는 애써 지키려는 신고(辛苦)함이 있었지만 길들여지면 원만하게 융화되어 안정되고  굳건한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학문을 함에 뜻을 나누지 아니하고, 오로지 정밀하여 한결같이 하기를 힘썼다. 경전(經傳)․ 염락(濂洛)․ 주퇴(朱退58)의 말이 아니면 앞에 펼치지 않았으며, 시詩)․ 문장․ 글씨․ 편지 등도 뜻을 잃을까 경계하였으며 마음을 쓰고 생각하는 것이 오직 자신을 반성하는 데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속무(俗務)에 막히고 빼앗기는 것을 병으로 여겼지만 스스로는 “일에 따라 살피고 반성한다.”라고 하였고, 급히 하고 골몰하다가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지만 스스로는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힘을 붙이기에 좋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일용(日用)은 문자 없는 방책(方冊)이요 방책은 문자 있는 일용이다. 만약 책상에 앉아서는 공부를 하고, 책을 덮고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심학(心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부모를 섬길 때에는 정성과 물질의 봉양을 다하였다. 


잠시 떨어져 있어도 효도를 잊지 않아, 천 리 먼 벼슬길에 나가 있어도 하루라도 서신을 부치지 않음이 없었다. 기일(忌日)에는 하루 종일 슬퍼하였기에 애통함이 주위를 감동시켰고, 성묘를 가서는 눈물로 잔디를 적셨다.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숙부모(叔父母)를 섬기니 사랑하고 공경함에 차이가 없었고, 두 아우와도 우애롭게 지내어 내 몸과 다름없이 여겼다. 


외롭고 빈한하여 의지할 곳을 잃은 사람은 거느려 보살펴 시집보내고 장가를 보내주었다. 종족(宗族) 중에 항렬이 높은 이는 비록 우매하고 또 나이가 적더라도 공경하며 동등하게 존중하였고, 빈객을 접대함에 공경을 다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 눕고 앉는 데에 정해진 곳이 있었다. 잠자리는 반드시 바로 하고, 의관을 반드시 바르게 갖추어, 무릎을 단정히 모으고 팔을 단정하게 하여 마치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하였다.
모든 일마다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여 움직일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짚어 보았다. 정사를 볼 때는 자신을 바르게 하여 남을 이끌었고, 아전을 부릴 때는 간결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임할 때는 엄숙하게 하였다. 


은혜와 사랑에 근본을 두고 위엄을 갖추어 일을 이루었고, 절제에 삼가 하면서도 은혜를 베푸는데 여유가 있었다. 공정하게 법을 적용했고 간악한 이를 명료하게 벌하였기에, 대문을 지키는 친졸(親卒)일지라도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명령할 것이 있으며 단지 한마디뿐이었으니, ‘거듭 경계하고 신중하라.’라고 하였다. 자신은 가볍게 여기며 근검하고 단속하는 것을 가계(家計)로 삼고 거만하고 게으르고 사치하고 함부로 하는 것을 지극한 경계로 삼았다. 


초년에 궁핍하여 끼니를 걸러도 편안하게 여겼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도 예전처럼 담박하였다. 한 개의 관모(冠帽)로 세 고을을 다스렸고, 한 개의 인끈을 십 년 동안 사용하였으며, 거처가 협소해도 조금도 넓히지 않았다. 그만둘 때가 되어서는 지난날이 이미 어긋났음을 애석해하고 늘그막이 얼마 남지 않음을 서글퍼하면서, 한결 같은 마음으로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단속하였다.


체인한 바는 내 마음의 성명性命에 대한 이치이며 삼가는 바는 일용의 사물의 법칙이어서, 안팎이 일치하고 본말이 모두 갖추어졌다. 또 다음과 같은 뇌문(祭誄)의 글이 있다.

 

나아가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였으니 / 出而瑞世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이고 / 彩鳳祥麟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덕을 길렀으니 / 入而養德
영험한 거북과 학이었네 / 靈龜臯鶴


또 말하였다.


얼굴 가득 정신이 드러나니 / 滿面精神
온 몸이 바로 그 법도였네 / 全體規矩
또 말하였다. 지조는 외로이 선 나무 같고59) / 操獨木心
지킴은 처자의 몸가짐 같았네 / 守處子身

또 말하였다. 


담박하지만 싫어하지 않고, 간결하지만 문채가 나고, 온화하지만 이치에 맞는 것을 선생께서 말미암았다. 

여러 말들은 당시 덕망 있는 이들이 잘 보고 잘 말한 것으로, 오늘과 후세에 징험하여 믿기에 충분하다.


아! 대산(大山) 선생은 근세 우리 유림의 종주(宗主)인데, 선생이 그 전수의 막중함을 받아서 독실하게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물방울이 바위를 뚫고 물이 얼어 바위를 쪼개듯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침내 덕이 이루어지고 도가 높아졌다. 그리하여 받들어 배우는 무리들로 하여금 지키고 따르는 곳이 있어 쫓아가는 바에 미혹되지 않게 하였으니 어찌 다행스럽지 아니하겠는가. 


일찍이 정재(定齋) 선생에게 들으니 “처음에 손재(損齋60) 남 선생(南先生)을 찾아뵙고 학문을 하는 방도를 물었고, 또 배우기 시작한 초년에 는……”이라 하였는데, 대개 선생을 가리킨 것이다. 뒤에 태어나 몽매하고 비루한 내가 남은 가르침에 미치어 은택을 입었으니 오래도록 앙모함이 절실하였다. 


이에 감히 외람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도 않고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우뚝하게 높은 기산 / 岐山有嶪
그 기운 맑고 깨끗하여 / 其氣淑淸
독실하게 철인을 낳으니 / 篤生哲人
세상에 드문 걸출한 분이셨네 / 間世精英


기구61)의 가업 잇고 / 箕裘之業
의발을 전수 받았으니 / 衣鉢之傳
우리 도의 적실한 근원으로 / 吾道的源
열여섯 글자62)의 진결을 받았네 / 十六眞詮


걸음마다 평정하고 / 步履平正
수촌63)으로 이루어나가 / 銖寸乃成
정성이 쇠와 돌을 뚫어 / 誠透金石
실천은 신명에 통하였네 / 行徹神明


얼굴은 환하고 등은 펴지며 / 面睟背盎
승직과 준평64)으로 행동마다 법도에 맞으니 / 繩直準平
마침 좋은 때를 만나 / 際會昌辰
밝고 융화된 성상의 뜻에 계합하였네 / 契合昭融


대궐의 보살핌이 한참 높아질 때 / 宸眷方隆
유궁65)의 아픔을 겪게 되어 / 痛纏遺弓
고향 집으로 돌아와 자취를 감추고 / 歸掃先廬
삼 년을 고비6)에 앉으셨네 / 三世皋比


산림에서 덕을 닦은지 / 養德林樊
이에 팔십여 년 / 八十年斯
온전하게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 是謂歸全
살아서 순응했고 죽어 편안하리 / 存順歿寧


달이 비치는 차가운 사월에 / 寒沙照月
깊이 영령을 모시었네 / 深秘英靈
빗돌에 새겨 / 刻之貞珉
천년토록 밝게 드리우네/  昭眎千齡


48) 용작(龍勺) : 용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국자를 말한다. 작헌(酌獻)과 관세(盥洗)를 할 적에는 모두 작(勺)을 사용하여 술이나 물을 뜬다. 


49) 수복(首僕) : 조선 시대에 묘(廟)·사(社)·능(陵)·원(園)·서원(書院) 따위의 잡직(雜織)을 맡아보던 구실아치의 수장을 말한다. 


50) 용와공(慵窩公) : 용와는 류승현(柳升鉉, 1680∼1746)의 호이다. 자는 윤경(允卿), 본관은 전주이다. 1719년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 참의, 영해 부사, 풍기 군수 등을 지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토벌할 의병을 일으켰는데, 류승현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종성부사로 임명될때, 왕이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던 일을 칭찬하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용와집이 있다.


 51) 노애공(蘆厓公) : 노애는 류도원(柳道源, 1721∼1791)의 호이다. 


52) 궁관(宮官) :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 동궁은 왕세자(王世子)의 궁을 말한다. 


53) 난곡(蘭谷) : 난곡은 김강한(金江漢, 1719∼179)의 호이다. 자는 탁이(濯以), 본관은 의성이다. 김성탁에게 수학하였고 류도원(柳道源)‧ 이상정(李象靖)· 김낙행(金樂行) 등과 교유하였다. 김성탁이 호남의 광양에서 귀양살이 할 때 그곳에 따라가서 대학·중용 등을 공부하였다. 평생 동안 성리(聲利)를 멀리하고 세상을 사절하여 존양하는 학문에만 힘썼다.


 54) 관감(觀感) : 부부 또는 남녀가 서로 감동하는 의미로, 주역 「함괘(咸卦)·단사(彖辭)」에 “감동하는 바를 보면 천지 만물의 정을 볼 수 있으리라.[觀其所感而天地萬物之情 可見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55) 호상(湖上) : 안동 소호리(蘇湖里)에 있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를 의미한다. 


56) 선생의……자
『공보역보(孔步亦步)』’ 스승을 모방하여 그대로 따르는 자를 일컫는 말로,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선생님[孔子]께서 걸으면 저도 걸었고, 뛰어가면 저도 뛰었습니다.[夫子步亦步 夫子趨亦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57) 식은땀을 흘렸던 검루(黔婁) : 효성으로 조짐을 알아 먼저 돌아옴을 말한다. 중국 남제(南齊)의 효자(孝子) 유검루(庾黔婁)가 잔릉(孱陵) 고을의 현령이 되어, 도착한 지 열흘도 안 돼 아버지 유이(庾易)가 고향집에서 병에 걸렸다. 검루는 갑자기 마음이 놀라면서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 그날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날마다 북극성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면서 자신이 아버지의 병을 대신하기를 빌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南史 「庾黔婁列傳」)


58) 염락(濂洛)‧주퇴(朱退) : 중국 송나라의 학자인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와 낙수(洛水)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 그리고 주자(朱子)와 퇴계(退溪)를 일컫는 말이다.


59) 지조는……같고 : 곤궁한 처지나 난세(亂世)에도 변치 않는 군자의 지조를 일컫는 말로, 논어「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60) 손재(損齋) : 남한조(南漢朝 174∼1810)의 호이다. 자는 종백(宗伯), 본관은 의령이다. 이상정의 문인이다. 벼슬에 뜻이 없었고, 오직 초야에 은둔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다. 여러 번 도백(道伯)과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았지만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손재집이 있다.


 61) 기구(箕裘) : 가업(家業)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먼저 갖옷을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먼저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62) 열여섯 글자 : 이상정이 호곡에게 손수 써준 “뜻을 세워 마음을 경건히 하고, 지식을 닦아 힘써 행하고, 강건하되 도리에 맞으며, 넓은 도량으로 크게 빛나리.[立志居敬 致知力行 剛健中正 含弘光大]”라는 16글자를 말한다. 
63) 수촌(銖寸) : 매우 작은 것을 뜻하는 말한다. 수는 무게의 단위로 1냥의 24분의 1에 해당되고, 촌은 길이의 단위로 한 자의 10분의 1에 해당된다. 


64) 승직(繩直)과 준평(準平) : 행동이 곧고 올바름을 비유하는 말로, 먹줄[繩]은 곧게 만들고 수준기[準]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평평하게 만들므로 이르는 말이다.


65) 유궁(遺弓) : 임금이 승하함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 고대 제왕인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어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을 주조하였는데 솥이 완성되자 용이 수염을 내려뜨려 황제를 영접하니 황제가 용에 올랐다. 

 

남은 신하들이 모두 따라가고자 용수염을 붙잡고 매달리니 수염이 뽑혀 떨어지면서 황제의 활과 검이 함께 떨어졌다. 이에 남은 백성들은 그 유품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고사에서 전하였다.(史記 「孝武本紀」)


66) 고비(皋比) : 호랑이 가죽으로, 강학(講學)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중국 송(宋)나라의 장재(張載)가 항상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서 주역을 강론했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原文]


壺谷先生柳公墓碣銘 幷序


健陵右文。掄選德學之士。時則壺谷柳先生。首膺旌招。嘗以祭官入太廟。上視品。先生擧犧尊羃而龍勺落地。響震廟內。先生徐厲聲曰。首僕正勺。上注目心識。已而上感倡義舊甲。贈慵窩秩。除蘆厓官。命先生入侍。面諭曰。乃祖之孫。乃父之子。讀書修行。繩家善俗。其以陵木風落。就理也。禁府照律。上曰柳範休非瞞報。特命白放。又語蔡相公曰。吾欲得讀書人。補宮官。柳範休何如。對曰臣意也。方是時。君相之注意如此。先生之道。其庶幾乎斯世。而宮駕遽晏。時事一變。可勝歎哉。先生歿後七十餘年。曾孫建鎬氏。責興洛以顯刻之辭。顧眇爾末學。何敢摸擬盛德。而屢辭不獲命。謹按先生諱範休字天瑞。以英宗甲子生。人謂肖慵翁魁傑。甫學步。出遇大䨓電。仰天四顧曰。此何聲何火。七歲入學。喜思索請問。直竆到底。十餘歲。自知讀書。終日端坐不倦。十七委禽于蘭谷金先生門。尤觀感飭勵。丁亥中鄕解。省試報罷。戊子丁先夫人憂。壬辰奉先府君書。稟學湖上。一以師門爲矜式。季父東巖先生喜曰。某可謂孔步亦步者矣。李先生手書立志居敬。致知力行。剛健中正。含弘光大十六言以畁之。其期倚之重如此。庚子春。中生員試。辛丑大山先生易簀。痛念恩深義重。巾帶終三月。乙巳因道臣薦剡。除泰陵參奉。爲親養。黽勉出膺。入直。對案看書。諸僚知敬。丙午遷司饔奉事。戊申陞平市直長。己酉移禁府都事。庚戌除松禾縣監。辛亥棄歸。未幾遭先府君喪。人擬之黔婁汗身事。甲寅陞司僕主簿。尋除掌樂主簿。又換昌陵令。就理。旋復厚陵令。乙卯遷司䆃寺僉正。翼日除高城郡守。丁巳遞歸。尋復恭陵令。安邊缺守。上再退望。親書先生姓名下批。勉諭以遣。庚申正宗大王昇遐。辛酉被道伯構誣狀罷。繡衣啓請拿鞫。上皆不允。將歸。府民遮道曰。民不見吏。狗不夜吠。夫耕在野。婦織在機。明府行何德政而乃爾。己巳辟府功曹。整理還弊。一境若甦。癸未陞通政。三月寢疾。八月二十七日。考終于寢。葬沙月負亥原。柳氏貫全州。麗掌令諱濕實▼(自/四/又)祖。二世諱義孫集賢提學。端廟遜位。築笑臥亭以終。號檜軒。中世有諱復起號岐峯。官禮賓正。始家水谷。三世諱振輝進士。先生高祖也。曾祖諱奉時。敦倫好義。祖卽慵翁諱升鉉。官參議。季諱觀鉉。亦官參議。號陽坡。慵翁無子。以陽坡公仲子諱道源后之。卽蘆厓官監役。先生考也。妣義城金氏。參奉景溫女。配義城金氏。蘭谷江漢女。生二男魯文,鼎文參奉。三女金顯奎生員,張錫慶,金養觀。孫男八人。致任,致儉,致儼,致孝。致敎進士出。致厚,致好參議,致游進士。孫女二人。金夏壽,金鎭右承旨。外孫五人。金龍鍵,鳳鍵,元鍵,張聲遠,金永裕。曾孫十七人。建鎬。止鎬郡守出。廷鎬,永鎬,基鎬,在鎬,肯鎬縣監,胥鎬。胄鎬出。膺鎬,敬鎬,達鎬,翼鎬,哲鎬,石鎬,璧鎬。奎鎬出。吾先師定齋先生狀其行曰。先生資稟慈良而儀貌端重。氣象雍容而精采發越。體小而膽大。色溫而言厲。入而服襲家庭。出而擩染甥館。及夫依歸大方。知此道不外彝倫。此學只在平常。講學必要踐行。持敬必自容體。其初儘有辛苦矜持。而馴致乎圓融安固之域矣。其爲學也。用志不分。專精一力。非經傳濂洛朱退之言。不列於前。詩章筆翰。亦惟喪志是戒。心心念念。只在反躳上。人皆病俗務妨奪。而曰隨事觀省。急滚蹉過。而曰政好著力。嘗以爲日用是無文字底方冊。方冊是有文字底日用。若對案有工夫。掩卷無工夫者。非所謂心學也。事親盡志物之養。跬步不忘孝。千里旅宦。無日不付信。忌日悄然終日。哀動左右。省墓淚漬宿草。推而事叔父母。愛敬無間。友愛兩弟。形骸不隔。弧寒失依者。率養嫁娶。宗族屬先行者。雖愚且少。敬之同所尊。賓客接之盡敬。平居坐臥有常處。牀袵必正。衣冠必整。斂膝端拱。如對神明。件件事事。微微細細。動必責之於心。爲政也。正己以率人。御吏以簡。臨民以莊。本之惠愛而濟之以威。謹於制節而裕之以恩。公以秉法。明以懾奸。鈴下親卒。非公事不交語。有所令。只一言而已。曰申申戒勑。便自見輕。以勤儉拙約爲家計。傲惰奢濫爲至戒。初年竆約。幷日晏如。及其居官。依舊淡泊。一冠三邑。一纓十年。室廬狹窄。不增一椽。迨其謝事。悼前時之已蹉。慨晩景之無多。一意兢惕。早夜提掇。所體認者。吾心性命之理。所致謹者。日用事物之則。庶幾內外一致。本末俱擧者矣。其祭誄之文。有曰出而瑞世彩鳳祥麟。入而養德靈龜皋鶴。有曰滿面精神。全體規矩。有曰操獨木心。守處子身。有曰淡而不厭。簡而文。溫而理。先生以焉。之數語者。皆當世有德。善觀而善言之者。足以徵信於今與後也。於乎大山先生。近世宗儒也。先生受傳付之重。篤信服膺。滴水滴凍。卒之德成而道尊。使承學之徒。有所持循而不迷於所從。寧不幸哉。嘗聞師門。初拜損齋南先生。問爲學之方。曰且學某初年。葢指先生也。晩生蒙陋。與被餘敎之及。久切高山之仰。乃敢不揆僭妄。敍次如右。爲之銘曰。

岐山有嶪。其氣淑淸。篤生哲人。間世精英。箕裘之業。衣鉢之傳。吾道的源。十六眞詮。步履平正。銖寸乃成。誠透金石。行徹神明。面睟背盎。繩直準平。際會昌辰。契合昭融。宸眷方隆。痛纏遺弓。歸掃先廬。三世皋比。養德林樊。八十年斯。是謂歸全。存順歿寧。寒沙照月。深秘英靈。刻之貞珉。昭眎千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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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이공의 묘갈명(處士李公墓碣銘) 서문 병기


매죽 처사(梅竹處士) 이공의 묘는 용수산(龍壽山)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다. 장례를 치른지 89년이 지나 그의 증손 이조참의 중두(中斗) 군이 그릇되게도 묘갈명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노쇠하고 비루하여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택순(宅淳)이고 자는 우규(于揆)로,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선생이 9세조가 된다. 선생의 뒤로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 영도(詠道)는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호는 동암(東巖)이다.

 

5세를 지나 수약(守約)은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관(世觀)을 낳았으니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호는 목우당(牧牛堂)이다. 귀원(龜元)을 낳았으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식호당(式好堂)이다. 이분들이 공의 3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생원 헌복(憲復)의 딸이다.


 공은 영조 갑자년(1744, 영조 20)에 태어나 경오년(1798, 정조 22) 5월 14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7세였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생각이 남달랐고, 기예와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기에 글을 짓는 모임에서 번번이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윽고 장성해서는 엄정하고 강의하며 신중하여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니, 보는 사람들마다 정승의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몸을 낮추어 독서하였는데, 사서(四書)에 근본을 두고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그 이치를 꿰뚫어보는 데 온 힘을 다하여 성현들의 입언(立言)한 본뜻을 참되게 얻고자 하였다. 언론(言論)은 근거가 있어 절대로 허황되게 과시하는 태도가 없었기에, 이로써 시대적 추세와 맞지 않아 불우하게도 영락하였다. 


이에 ‘경운조월(耕雲釣月’67) 네 글자를 벽에 써놓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궁벽한 산속에 자취 감추어 시끄러움 사양하고 / 窮山斂跡謝紛紛
늦봄 동교에서 지팡이 세워 두고 김매네68) / 春晩東郊植杖耘


인간 세상 돌아보니 모두가 세토라 / 回視人間皆稅土
고향으로 돌아와 날로 구름을 경작하네 / 還歸故里日耕雲


늘그막에 낚싯대 매고 낙강 가 낚시터에 드리우니 / 晩荷長竿下洛磯
물가 난초 언덕 지초 이슬 먼저 마르네69) / 汀蘭岸芷露先晞


하수의 방어70)는 시장으로 다 가버리어 / 河魴盡向市門去
산속 늙은이 달빛만 낚아 돌아오네 / 由是山翁釣月歸


또 매죽으로 그 헌을 이름하여, 오로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에 힘을 다하려는 뜻을 두었으며, 선대 유학자들이 논변한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설(理氣說) 등을 가지고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항상 눈을 떼지 않았다. 


성품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부모를 모실 때는 마음과 몸을 다 같이 편안하게 모시는 봉양을 다하였다. 어버이가 연로하여 멀리 나가 놀지 않았으며, 일이 있어 나갔을 때도 밖에서 이틀 밤을 묵지 않았다. 상중에는 상복을 벗지 않았고, 묏자리를 골라 편안히 모시는데, 반드시 정성과 신실함을 다하였다.

 

생일날에도 잔을 들지 않았고, 종신토록 새벽 사당배알을 폐하지 않았다. 형제가 한곳에 같이 모여 지내며 종일토록 화기애애하였다. 다섯 번째 동생 참판공은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벼슬하기까지 공의 지도를 가장 많이 받았다. 


일찍이 주자와 퇴계 선생의 글 중에 수용하기에 절실한 것을 뽑고 초楚나라 「이소경(離騷經)」 이하 당(唐)․ 송(宋)의 여러 대가의 글까지 다 모으고 편집하여 「금총옥설(金叢玉屑)」이라 하고 건네주었다. 후손들의 학업 계승을 장려하고 훈육하여 성취하는 바가 많았으니, 사양좌(謝良佐)가 ‘극기克己 는 모름지기 자기의 성질이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것부터 극복해 나가야 한다.’71) 라고 한 말로 교도하고 변화시키는 요체로 삼았다. 


기개는 우뚝하고 도량은 넓고 깊었으며, 비루하고 어긋난 말을 입에서 내지 않고 게으르고 오만한 태도를 몸에 지니지 않았으니, 그 모습을 대하거나 말을 듣게 되면 감히 그릇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만년에 성품과 도량이 준엄한 것 때문에 명시(銘詩)를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뜻을 세워 행동하는 것이 응당 푸른 하늘의 해와 같아야 조금의 사악함이나 왜곡됨이 없나니,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평생토록 스스로 검속하여 이 말에 거의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공은 빼어난 자태로 가학의 실마리를 찾아,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따르면서 혹시라도 실추시키지 않았다. 한 집안에서 혁혁한 고관대작이 배출되었으니 공이 진실로 그 근원을 넓힌 것이고 역시 훌륭한 가문을 잘 계승한 자라고 이를 수 있다. 


부인은 은산박씨(殷山朴氏)로, 학생 수겸(守謙)의 딸이다. 2남을 두었는데, 휘양(彙陽)은 참봉(參奉)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출계하였고, 휘성(彙成)은 통덕랑(通德郞)인데 문행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두 딸은 권별(權O) 과 권현상(權顯相)에게 각각 시집갔다. 휘성은 2남을 두었는데, 만송(晩松)은 정언(正言)이고, 만백(晩柏)은 통덕랑이다. 휘양은 2남을 두었는데, 만수(晩受)와 만희(晩羲)로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딸은 생원 이석규(李錫圭)와 생원 김기선(金驥善)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별의 2남은 동규(東奎)와 동벽(東璧)이고, 세 딸은 이정우(李庭羽)․ 임진원(任鎭遠)․ 박주승(朴周昇)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현상의 대를 이은 아들은 주환(胄煥)이다.

 

만송의 아들은 중룡(中龍)이다. 만백의 맏아들은 중건(中鍵)이고 둘째 아들은 바로 이조 참의 중두(中斗) 군이다. 만수의 아들은 중민(中敏)과 중진(中振)이고, 만희의 아들은 중영(中英)이다. 중용의 대를 이은 아들은 국호(國鎬)이고, 중건의 대를 이은 아들은 학호(學鎬)이다.

 

중두는 3남을 두었는데, 학호(學鎬)와 국호(國鎬)는 출계하였고 필호(弼鎬)가 있다. 중민의 아들은 명호(命鎬)이고, 중진의 아들은 풍호(豐鎬)이고, 중영의 아들은 정호(正鎬)와 출계한 근호(覲鎬)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선비는 자신의 몸에서 닦아 / 士修于躳
궁해도 손해라 여기지 않네 / 窮不爲損


대대의 가훈은 아름답고 / 世訓之懿
경전의 뜻을 참되게 하였네 / 經旨之眞


온축됨이 이미 깊으니 / 蓄之旣深
그 드러남이 혁혁하였네 / 其發斯赫


내가 전수받음 있으니 / 我有所受
감히 밝은 정성 실추하랴 / 敢墜明誠


작은 집에 자취를 감추고 / 斂跡衡茅
매죽에 흥취를 붙였네 / 托趣梅竹


몸소 밭 갈고 낚시질하노니 / 我耕我釣
운월이 냇물에 넘실거리네 / 雲月滿川


남긴 풍모 맑고 깨끗하니 / 遺風灑然
후인들은 길이 공경하리라 / 來世之敬


67) 경운조월(耕雲釣月) : 은자(隱者)의 고답적인 생활을 형용한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 관사복(管師復)이 숭산(崇山)에 은거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무슨 즐거움이 있느냐?”라고 묻자, “언덕에 덮인 흰 구름은 갈아도 다함이 없고, 못에 가득한 밝은 달은 낚아도 흔적이 없네.[滿塢白雲耕不盡 一潭明月釣無痕]”라고 한 데서 전하였다.(問奇類林)


68) 지팡이……김매네 : 논어 「미자」에 “자로가 묻기를 ‘노인은 우리 부자(夫子)를 보았습니까?’ 하니, 장인(丈人)이 ‘사지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오곡을 분별하지 못하니, 누구를 부자라 하는가?’ 하고, 지팡이를 세워 두고 김을 매었다.[子路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植其杖而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69) 이슬 먼저 마르네 : 인생이 초로(草露)와 같이 덧없음을 뜻하는 말로, 「해로가(薤露歌)」에 “부추 잎의 이슬은 어찌 그리 쉬이 마르는가.[薤上朝露何易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0) 하수(河水)의 방어(魴魚) : 맛있는 고기를 말한다. 시경 「국풍(國風)·형문(衡門)」에 “어찌 고기를 먹음에 반드시 하수의 방어라야 하리오.[豈其食魚 必河之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1) 사양좌(謝良佐)가……한다 : 사양좌는 중국 북송(北宋) 때의 유학자로, 이 구절은 논어 「안연(顔淵)」의 주에 보인다.

 

 

[原文]


處士李公墓碣銘 幷序


梅竹處士李公之墓。在龍壽山枕艮之原。距其葬八十有九年。其曾孫吏議君中斗。以墓石之文。謬屬於興洛。興洛辭以衰陋不堪而不獲命。謹按公諱宅淳字于揆。文純公退溪先生。其九世祖也。先生之後。代有偉人。諱詠道原州牧使。贈吏曹參判。號東巖。五世而諱守約靖陵參奉。贈吏曹判書。生諱世觀贈吏曹參議。號牧牛堂。生諱龜元僉樞。贈吏曹參判。號式好堂。是公三世。妣贈貞夫人固城李氏。生員憲復女。公生英廟甲子。卒庚午五月十四日。年六十七。幼才思絶倫。藝學夙就。翰墨之會。輒居前列。旣長嚴毅凝重。言動不苟。見者以公輔期之。益折節讀書。本之四子。而博涉諸家。欲其專一該貫。眞見得聖賢立言本意。言論有根據。而絶無浮夸之態。以此不中時好。落拓不偶。書耕雲釣月四大字於壁上。有詩曰竆山斂跡謝紛紛。春晩東郊植杖耘。回視人間皆稅土。還歸故里日耕雲。晩荷長竿下洛磯。汀蘭岸芷露先晞。河魴盡向市門去。由是山翁釣月歸。又以梅竹名其軒。專意用力於朱子書節要。就先儒所辨四七理氣諸說。撮其大要而常目之。性孝友。事親盡志體之養。親老不遠遊。有故而出。不信宿於外。居喪衰絰不去身。擇地安厝。必於誠信。生日不擧觴。終身不廢晨謁。兄弟同會一堂。終日怡愉。五弟參判公。自承學至立朝。最被公導迪。嘗手抄朱退書切於受用者。及楚騷以下唐宋諸大家文。總而編之曰金叢玉屑以授之。奬育後承。多所成就。以謝氏性偏難克處克將去之語。爲矯揉變化之要道。氣槩軒昂。宇量宏深。鄙倍不出於口。怠慢不設於身。接其容貌。聽其言語。無敢有非心者。晩年。自以性度稍峻。作銘詩以自警。嘗曰大丈夫立心行事。當如靑天白日。無少邪曲。吾無過人者。自檢平生。庶無媿於此言也。公挺魁特之姿。尋家學之緖。一生服膺。未或失墜。一門簪紱煒爀。而公實滋息其根源。亦可謂好門庭中善繼述者也。配殷山朴氏。學生守謙女。生二男。彙陽參奉僉樞出。彙成通德郞。有文行早歿。二女權O,權顯相。彙成二男晩松正言,晩柏通德郞。彙陽二男晩受,晩羲。皆通德郞。二女李錫圭,金驥善皆生員。權二男東奎,東璧。三女李庭羽,任鎭遠,朴周昇。權顯相嗣男胄煥。晩松男中龍。晩柏男中鍵。次卽吏議君。晩受男中敏,中振。晩羲男中英。中龍嗣男國鎬。中鍵嗣男學鎬。中斗三男。學鎬出。國鎬出。弼鎬。中敏男命鎬。中振男豐鎬。中英男正鎬,覲鎬出。銘曰。
士修于躳。竆不爲損。世訓之懿。經旨之眞。蓄之旣深。其發斯赫。我有所受。敢墜明誠。斂跡衡茅。托趣梅竹。我耕我釣。雲月滿川。遺風灑然。來世之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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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 진사 제암 이공의 묘갈명(成均進士霽庵李公墓碣銘) 서문 병기


제암(霽庵) 이공(李公)의 장례를 치른 것이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데, 그 증손 집 등이 묘소의 왼편에 묘갈을 세우고자 공의 족제(族弟) 대계공(大溪公72)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두 집안은 한집과 같다. 비록 내가 글재주가 없더라도 어찌 이를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주로(周老)이고 자는 유진(幼鎭)이며, 처음 이름은 종유(宗儒)이고 자는 유진(幼珍)이었다.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세대가 오래된 집안으로 우리 동방의 큰 문벌이다. 고려에 문정공(文貞公) 행촌(杏村) 암(嵒)과 문경공(文敬公) 평재(平齋) 강(岡)이 있었고, 조선에 와서는 좌의정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용헌(容軒) 원(原)이 더욱 드러난 분이다.

 

용헌(容軒)의 여섯 번째 아들로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증(增)이 처음으로 안동에 터를 잡았고, 그 아들인 현감 명(洺)과 손자인 별제(別提) 굉(肱)이 모두 벼슬을 버리고 강호로 돌아와 지내면서 임청각(臨淸閣)과 반구정(伴鷗亭)을 지었다.


6세에 이르러 후영(後榮)이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시방(時昉)이며 호는 이가당(二可堂)이다. 조고는 헌복(憲復)이며 생원으로 호는 평지옹(平地翁)이고, 부친은 효경(孝慶)이다. 대를 연이어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며 덕행과 문학으로 가문을 이어왔다.

 

모친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학생 적(適)의 딸로, 숭정처사(崇禎處士73) 우정(宇定)의 후손이니 지극한 성품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공은 영조 기사년(1749, 영조 25)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겨우 배우기 시작해서도 문의(文義)는 그 본말을 반드시 밝히니, 생원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이 아이가 내 뜻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1세에 생원공이 세상을 떠나자 영은공(嶺隱公 74)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매일 1백 줄을 배웠는데 책을 등 뒤에 두고 암송하였다. 수년 안에 경전(經傳)에 다 통달하고 곁들여 제자서(諸子書)까지 통달하여, 발하여 드러내어 문장을 지으면 이미 노련한 구기(口氣)를 이루었다. 15세에 김경동(金慶東)의 집안에 장가를 들었는데 덕망 있는 어른들이 모두 일컬어 ‘단아하고 성숙하다.’라고 하였다. 


정유년(1777, 정조 1)에 두 번의 향시에 합격하고 진사에 올랐는데, 축하연을 베풀 때에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이 축하의 자리를 주재하면서 깊이 인정하고 장려해 주었다.

 

신축년(1781, 정조 5)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정조께서 교화를 일으켜 성균관의 유생을 이끌어 경전을 강론할 때, 공의 용모가 단아하고 신칙하며 응대가 정밀하고 상세함을 보고, 들어 그가 영남사람임을 알고 더욱 기이하게 여기고 “떠나지 말고 성균관에 머물라.”라고 하교하셨다.


그러나 얼마 뒤 모부인이 편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 수년을 모셨다. 혹 어떤 이가 성균관으로 돌아가길 권하면, 개연히 탄식하며 “설사 내가 이로 말미암아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하루의 봉양을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하물며 궁함과 영달은 천명이 있거늘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에랴.”라고 하였다. 


마침내 외물을 사모하는 뜻을 끊고 부모를 봉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여가가 있으면 경전을 읽고 문자를 베꼈고, 혹 꽃과 대나무를 가꾸는 것을 즐거워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정성을 다하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병진년(1796, 정조 20)에 영남의 유생들에게 어정오경백선(御定五經百選)75)을 교정하라는 왕명이 있어 공도 그 일에 참여했다. 교정을 마치고 진상하니, 특별히 교지를 내려 시전(詩傳) ‧ 노론(魯論) ‧ 주자서(朱子書) 등을 반질하며 노고에 보답하였다. 


이에 공이 발문(跋文)을 지어서 그 일을 기록하고 날마다 소제(掃除)한 뒤 뽑아서  보았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그들과 더불어 경서와 사서를 상량하고 토론하며 화락하였다. 정사년(1797, 정조 21)에 모친상을 당하고, 병인년(1806, 순조 11)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예식에 어긋남이 없었고, 3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날마다 가묘를 배알하고 달마다 산소를 찾았다. 


선조의 유문(遺文)과 의적(懿蹟)은 새로이 손질하여 차례대로 찬집하였고, 제전(祭田)을 별도로 마련하고, 묘석을 수리하여 거의 가닥을 잡기에 이르렀으나, 공이 이미 병이 들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제들을 둘러보고 “과거 공부는 외물이니, 세속을 따라 허둥대다 선조의 덕을 욕되게 하지 마라. 우리 가문은 4세의 종가이다.

 

통솔하고 가르치며 기르는 일은 모두 종자(宗子)의 책임이니, 장공예(張公藝)의 백인자(百忍字76)를 응당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나는 효도를 잘 마치지 못했으니, 장사는 반드시 부모님의 무덤 아래에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남긴 경계를 글로 쓰도록 했는데, 모두 선조를 받들고 가문을 지키는 절도였다. 쓰기를 마치자 부녀자들을 물리치고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에 세상을 떠나니, 이날이 바로 신미년(1811, 순조 11) 윤3월 24일로 향년 63세였다. 고을 남쪽 무릉(武陵)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목란(木蘭)을 심어놓은 부친 묘소가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이었다. 


공은 온화하면서도 덕성이 있었고 장중하면서도 도량이 있었다. 심오하면서도 명쾌하고, 소탈하면서도 치밀하였다. 두 눈동자는 빛나고, 온 얼굴이 환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당시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있었고, 고을의 선배들이 혹은 외우(畏友)로 대하였고, 혹은 국가를 경영할 인물로 허여하였다. 


부모를 모심에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며 지체(志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모시기를 다하였고, 병환을 돌볼 때는 신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응을 바랐으며, 장례에 필요한 물품은 다 미리 준비하여 일을 당해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집안은 엄숙하고 경건하여 마치 조정과 같았으니, 자제들은 가르침의 조목을 감히  어기지 않았다. 친척들을 돈독하게 대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그가 마을에 있거나 집안에 있을 때 일을 만나면 칼날을 대듯이 의리로 결단하였고 확고하여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글을 보는 견해가 뛰어났으나, 평생토록 강설(講說)은 사서육경(四書六經)을 벗어나지 않았다. 손수 성리학과 관련된 여러 글을 베껴서 항상 읽었다. 일찍이 “무릇 사람들이 지기(志氣)가 사라져 악의 구렁에 빠지는 것은 욕심이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큰 장단점은 없지만 항상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편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아우와 함께 서쪽 기슭에 초가를 짓고, 글을 읽으며 한가로움 속에서 수양하니 유연히 자득한 지취(志趣)가 있었다. 아! 공은 아름다운 덕행과 빼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종신토록 스스로를 단속하며 그 한두 가지도 펼 수가 없었으니, 이를 아는 자들은 세상을 위해 애석하게 여긴다. 


그러나 담박을 본분으로 여기고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아, 몸소 닦고 마음으로 얻어 집안을 잘 다스리고, 자손에게 모범이 되고 후손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니,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이 어찌 공의 인품에 손상이 되겠는가. 


부인은 의성김씨 교리(校理) 세흠(世欽)의 증손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학수(學秀)와 출계한 기수(氣秀)이고, 두 딸은 류수문(柳秀文)과 류경문(柳敬文)에게 각각 시집갔고, 측실 소생의 딸 하나는 김내수(金來銖)에게 시집갔다.

 

학수의 아들은 정운(庭雲)과 생원인 정익(庭翼)이며, 딸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휘연(李彙淵)에게 시집갔다. 기수의 아들은 정린(庭鱗)․ 정곤(庭鯤)․ 정리(庭鯉)이고, 딸은 생원 권승하(權承夏)․ 김현교(金玄敎)․ 김만양(李晩讓)에게 각각 시집갔다.

 

류수문의 대를 이은 아들은 치호(致頀)이고 딸은 이한신(李漢臣)에게 시집갔다. 류경문의 아들은 치강(致綱)과 치경(致經)이다. 내수의 아들은 회영(會永)과 시영(時永)이다. 정운(庭雲)은 출계하여  공의 제사를 받든자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우뚝한 철령이씨여 / 崔崔鐵嶺
우리 동국의 망족(望族)이로다 / 望我東國


중세 이후로 덕을 감추었으니 / 中世隱德
흘러 나아가지 않고 못을 이루었네 / 不川而澤


그 경사를 돈독히 하여 / 則篤其慶
대대로 훌륭한 자손 낳았네 / 代生偉人


공은 전하는 가훈을 본받아 / 公淑世訓
재목은 넉넉하고 행동은 순수하며 / 材優行純


오직 효도하고 우애로우며 / 惟孝友于
가정을 다스리는 걸로 정치를 삼았네 / 家施爲政


집안은 엄숙하고 화목했으며 / 閨門肅穆
친족은 사랑하고 공경했네 / 宗黨愛敬


말을 접하고 모습을 뵈면 / 苟接言貌
마음에 미덥지 않음이 없으니 / 靡心不孚


어찌 거짓이 용납되리 / 豈容以僞
오직 덕행에 부합하였네 / 惟德之符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 早歲陞庠
임금을 가까이서 뵈었는데 / 亦近耿光


곡진히 하교하신 말씀은 / 天語丁寧
총망히 떠나지 말라하셨네 / 爾去勿忙

귀운7)의 생각이 절실함은 / 歸雲繫思
내가 그것을 바꾸겠는가 / 我其可易


인륜의 도리를 가장 즐거워했으니 / 人倫最樂
이 해를 못내 아까워하였네 / 此日足惜


나아가 성취함에 뜻을 끊고 / 絶意進取
담박한 생활을 달게 여기며 / 甘此淡泊


정밀하고 진실됨을 가지고 / 含精葆眞
조화에 따라 즐거웠네 / 與化而嬉


임종에 내린 유훈은 / 令終有訓
후손을 경계하기에 충분했으니 / 裕厥後嗣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 而不世需
아는 이들을 탄식하게 했네 / 識者之喟


나무 우거진 무덤은 / 鬱鬱佳城
농강78)에서 멀지 않으니 / 毋遠瀧岡


지나는 자들은 경건하라 / 過者尙式
효자가 묻힌 곳이라네 / 孝子之藏


72) 대계공(大溪公) : 대계는 이주정(李周禎, 1750∼1818)의 호이다. 자는 경첨(景詹),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1795년 문과에 급제하여 결성 현감과 사헌부 지평을 거쳐 개성에서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대계집이 있다.

 

73) 숭정처사(崇禎處士) : 숭정은 중국 명(明)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재위는 1628년부터 164년까지 17년간의 기간이 이에 해당한다.


74) 영은공(嶺隱公) : 영은은 이홍직(李弘直, 1724∼1768)의 호이다. 자는 맹만(孟萬), 본관은 고성이다. 외삼촌 권렴(權濂)에게 수학하였고 1754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75) 어정오경백선(御定五經百選) : 1795년 간행된 활자본 5권 5책으로 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 등 5경 가운데서 9편, 주자(朱子)의 저술 2편을 수록한 책으로, 경상감영(慶尙監營)에 보내 유학자에게 교정을 보게 한 다음, 내각(內閣)에서 간행케 하였다. 정조의 고도의 문화 사업으로 당시의 정치적 동향을 엿볼 수 있다. 1908년 서울 휘문관(徽文館)에서 소책자로 중간하였다.


76) 장공예(張公藝)의 백인자(百忍字) : 중국 당나라 장공예의 집안이 9대가 한 집에 동거하였는데, 고종(高宗)이 소문을 듣고 그 비결을 물으니 ‘인(忍)’ 자 10개를 써서 올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가족끼리 서로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서로 양보하며 살아감을 뜻한다.


77) 귀운(歸雲) : 부모를 그리워함을 뜻하는 말로, 중국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 자사(幷州刺史)로 나가는 길에 태항산(太行山)에 올라서 멀리 흰 구름을 바라보며 “우리 어버이가 저 아래에 계시겠구나.”라고 한 데서 나왔다.


78) 농강(瀧岡) : 부모의 산소를 뜻하는 말로, 중국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부모의 산소를 용강산(瀧岡山)에 정하고 손수 글을 지어 비석에 새긴 데서 온 말이다. 

 

 

[原文]


成均進士霽庵李公墓碣銘 幷序

霽庵李公之葬。距今八十年。其曾孫等。將碣于墓左。以公族弟大溪公之狀。徵銘於興洛。興洛竊,惟吾兩家一室也。雖不文。其得辭。謹按公諱周老字幼鎭。初諱宗儒字幼珍。固城之李。遠有代序。爲東方巨閥。在麗文貞公杏村諱嵒。文敬公平齋諱岡。本朝左議政鐵城府院君容軒諱原。尤其顯者也。容軒第六子縣監贈吏曹參判諱增。始卜居安東。曁子縣監諱洺。孫別提諱肱。皆棄官歸老江湖。作臨淸閣,伴鷗亭。六世至諱後榮文科正郞。寔公高祖。曾祖諱時昉號二可堂。祖諱憲復生員。號平地翁。考諱孝慶。連代隱不仕。以德行文學世其家。妣南陽洪氏。學生諱適女。崇禎處士諱宇定後。有至性懿行。公以元陵己巳生。生有異質。甫上學。文義必核其原委。生員公大奇之曰。是成吾志者。十一。生員公下世。請敎於嶺隱公。日受百行。背卷成誦。數歲中。盡通經傳。旁及百家。發而爲文。已有老成口氣。十五聘金公慶東之門。長德咸稱其端雅夙成。丁酉占鄕解兩試。擧進士。及喜宴。大山李先生主賀席。深加推奬。辛丑遊泮時。正廟作興。引齋生講論經義。見公容貌雅飭。應對精詳。詢知爲嶺人。益奇之。有勿去留泮之敎。尋聞親闈有不安節。還侍數年。或勸其復居齋。則慨然歎曰。使我因此得志。豈可易一日之養。况竆達有命。非求之可得乎。遂絶意外慕。竭力於養親奉祭。暇則繙經籍抄文字。或蒔花種竹以自娛。課門弟子讀書。亹亹不倦。丙辰。命嶺儒校御定五經百選。公與焉。校訖進覽。特旨頒詩傳,魯論,朱子書以酬勞。公作跋語以識之。日灑掃延攬。有可客至。與之商確經史。衎衎如也。丁巳遭內艱。丙寅遭外艱。式禮罔愆。制闋。日拜家廟。月朔省丘隴。先世遺文懿蹟。繕寫而撰次之。代置祭田。修治墓石。幾至就緖。而公已病矣。疾革。顧謂子弟曰。科第外物。勿循俗奔忙。以忝先德。吾家爲四世宗。統御敎養。皆宗子責也。張公藝百忍字。宜體念焉。又曰吾未克終孝。葬必於親壠之下。仍命書遺戒。皆奉先持家之節也。書畢。屛婦女。整枕席而逝。實辛未閏三月二十四日。享年六十三。葬府南武陵艮坐之阡。去先公木蘭之塋。莽蒼而近。公溫和有德性。莊重有器量。淵深而明快。疏通而縝密。雙瞳炯然。滿面盎如。弱冠。已有當世之望。鄕鄰先進。或待以畏友。或許其可任經濟也。其事親。一念洞屬。耦盡志體之養。侍疾。叩首神明。庶幾其感應。送終之具。皆出備預。臨事無遺憾。閨門肅穆如朝廷。子弟不敢違敎條。篤於親戚。皆得其歡心。其在鄕梱。遇事迎刃。旣斷于義。確不可復撓。於書見解超詣。平生講說。不出四子六經。而手寫性理諸書。常寓目焉。嘗曰凡人消沮志氣。墮落坑塹。皆慾爲之祟。吾平生無甚短長。而常以不爲慾拖去。爲內省之方。晩與季氏。置茅齋於西麓。治書養閒。悠然有自得之趣。嗚呼。以公德行之懿。才猷之盛。幽約終身。不得展布其一二。識者葢爲世道惜之。然淡素爲本分。名敎爲樂地。躳修心得而著於門梱之治者。自可貽燕子孫。垂範後生。則外至通塞。奚足加損公哉。金夫人籍義城。校理世欽曾孫。生二男學秀,氣秀出。二女柳秀文,柳敬文。側出女一金來銖。學秀男庭雲,庭翼生員。女李彙淵僉樞。氣秀男庭鱗,庭鯤,庭鯉。女權承夏生員,金玄敎,李晩讓。柳秀文嗣男致頀。女李漢臣。柳敬文男致綱,致經。金來銖男會永時永。庭雲出。承公祀者也。銘曰。
崔崔鐵嶺。望我東國。中世隱德。不川而澤。則篤其慶。代生偉人。公淑世訓。材優行純。惟孝友于。家施爲政。閨門肅穆。宗黨愛敬。苟接言貌。靡心不孚。豈容以僞。惟德之符。早歲陞庠。亦近耿光。天語丁寧。爾去勿忙。歸雲繫思。我其可易。人倫最樂。此日足惜。絶意進取。甘此淡泊。含精葆眞。與化而嬉。令終有訓。裕厥後嗣。而不世需。識者之喟。鬱鬱佳城。毋遠瀧岡。過者尙式。孝子之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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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행 돈녕부 도정 지헌 선생 최공의 묘갈명(通政大夫行敦寧府都正止軒先生崔公墓碣銘) 서문 병기


지헌 선생(止軒)선생 최공(崔公)이 세상을 떠난지 27년이 되는 병신년(1896, 건양 1)에 공의 손자 시교(旹敎)가 긍암(肯庵79) 이공(李公)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늦게 태어나고 보잘것 없어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효술(孝述)이고 자는 치선(稺善)이며 본관은 월성(月城)이다. 세대가 오래된 집안으로, 우리 조선에 와서는 휘 단(鄲)이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한 공이 있었고 대사마를 지냈다. 맹연(孟淵)은 지방수령으로 처음으로 대구(大丘)에 거처하였고, 계(誡)는 현령(縣令)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끈 공로가 있어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동집(東㠍)은 한강(寒岡80) 정 선생(鄭)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학문과 덕행이 높아 효종(孝宗)의 태자 시절에 사부(師傅)를 맡았으나, 명나라가 망하자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수학(壽學)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고조 정석(鼎錫)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며, 증조 흥원(興遠)은 벼슬이 익찬(翊贊)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백불암(百弗庵) 선생이다.

 

조고는 주진(周鎭)으로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스승의 인정을 받았으니 호는 동계(東溪)이다. 부친 식(㵓)은 통덕랑을 지냈고 유림의 신망을 받았으며, 모친은 진주정씨(晉州鄭氏)로, 우복(愚伏) 선생의 후손으로 입재(立齋81) 종로(宗魯)의 딸이다.


정조 병오년(1786, 정조 10)에 공을 낳았다. 타고난 자질은 청명하고 기상은 우뚝 빼어났으며, 겨우 사물을 분간할 나이에 이미 사랑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부모의 뜻을 미리 알아서 행하며 뜻에 순종하면서 아이들과 어울려 장난치지 않았다. 10여 세에 문사(文辭)가 숙성하여 어른들이 원대함으로 기대하였다. 


처음에는 재종숙 칠실옹(漆室翁)에게 수학하였는데, 성품이 엄격하여 작은 잘못이라도 있으면 일찍이 넘어가는 적이 없었으므로, 공도 한결 같은 뜻으로 공경하고 공손하였다. 일찍이 외가를 왕래할 때, 입재 선생은 매양 백불암 선생이 실천한 것으로 가르쳐주었다. 


정묘년(1807, 순조 7)에 이만각(李晩覺)의 가문에서 부인을 맞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덕공이 병석에 눕자 공은 밤낮으로 애태우며 직접 약과 음식을 조섭하였고, 세상을 떠나자 염습‧ 빈소를 모시는 예․ 소상과 대상의  제사 등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어머니 모시기를 선친을 모시는 것처럼 하면서 매사를 반드시 아뢴 뒤에 행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며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여, 정성과 예를 곡진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경오년(1810, 순조 10) 입재 선생을 찾아뵙고 대산루(對山樓)의 강론에 참석하였는데, 백하(白下) 황반로(黃磻老82)와 성재(誠齋) 남한호(南漢皜83) 등 여러분이 모두 공의 견해가 정밀함을 보고 매우 칭찬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나서는 입재 선생을 모시고 우산愚山 12경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선생은 이때 「경재잠敬齋箴」 ․ 「숙흥야매잠夙夜箴」 ․ 「시분지두설時分地頭說」을 가르쳐주셨다. 병자년(1816, 순조 16)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의문스러운 점을 물을 곳이 없음을 애통해하고, 인하여 유사(遺事) 한 편을 지어 갱장(羹牆84)의 사모를 붙였다.

 

일생동안 공부한 것은 대부분 사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염락(濂洛85)의 여러 서적이고, 또 퇴계 선생과 대산 선생의 문집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취하여 자신을 닦아 나아가는 바탕으로 삼았다. 


백불암 선생의 경자패(敬字牌)를 책상에 올려놓고, 항상 보면서 엄한 스승이 앞에 계신 듯이 하였다. 부인동(夫仁洞0은 백불암 선생이 규약을 정하여 경영하던 곳으로, 선공고(先公庫). 휼빈고(恤貧庫) 등을 설치하고 또 봄가을로 강회를 열어 강론하였는데, 대략 여씨향약(呂氏鄕約86) 의 법도처럼 하였다. 


공이 한결 같은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며 옛 규약을 따랐다. 계축년(1853, 철종 4) 어머니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공은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그리워하며 슬퍼했다.


병진년(1856, 철종 7) 관찰사 신석우(申錫愚87)가 교궁(校宮)에서 강회를 베풀면서 공을 초대하여 강장(講長)으로 삼으니, 심경(心經)을 강론하였다. 갑인년(1854, 철종 5) 암행어사와 대신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천거하여 경신년(1860, 철종 11)에 장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을축년(1865, 고종 2) 80세가 되자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5월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임하니 체직되었다. 병인년(1866, 고종 3)에 서양 오랑캐들이 강역을 침범하자 사설(邪說)이 낭자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사교(邪敎)를 금지시킴은 유학을 강론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고, 이에 동천사(東川社)에서 강회를 열어 상서(尙書) 이원조(李源祚8)를 맞아 대학(大學)을 강론하고, 정묘년(1867, 고종 4)에는 유천사(柳川社)에서 모여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 


경오년(1870, 고종 7) 7월 병석에 누워 장손인 시교(旹敎)에게 경계하기를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 문호를 저버리지 말라.”라고 하고, 10월 12일 자리를 바르게 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85세였다. 광리(廣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영천(永川) 모사면(毛沙面) 남창(南昌) 병좌(丙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석담(石潭) 윤우(潤雨)의 후손이며, 만각재(晩覺齋) 동급(東汲)의 딸이다. 유순하고 정숙하였으며 부인으로서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덕(命德)‧ 명우(命愚)이고, 딸은 이찬수(李瓚秀)‧ 이연재(李淵在)‧ 정치주(鄭致周)에게 각각 시집갔다.

 

명덕은 6남을 두었는데, 아들은 시교(旹敎)‧ 남교(南敎)‧ 문교(文敎)‧ 영교(英敎)‧ 원교(元敎)‧ 헌교(憲敎)이고, 딸 하나는 이성구(李性求)에게 시집갔다. 명우는 4남 두었는데 치교(致) ‧ 예교(璿敎)‧ 상교(相敎)‧ 동교(東敎)이고, 딸은 둘인데 이철구(李喆久)‧ 손진강(孫晉康)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찬수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근창(根昌)이고, 딸은 넷이니 손정은(孫廷誾)‧ 선전관(宣傳官) 장주학(張柱鶴)‧ 손문헌(孫文憲)‧ 이수규(李壽奎)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연재의 대를 이은 아들은 교리(校理) 장기(章夔)이고, 정치주는 아들은 하나인데 진엽(鎭曄)이다. 

 

공은 백불암의 문헌(文獻)의 뜰에서 태어나, 입재 선생의 연원 깊은 학문을 계승하였다. 일찍부터 도학에 뜻을 두었고 말년까지도 부지런히 힘써, 이미 오래전에 충분한 학식을 갖추니 덕망과 기국이 뭇사람들과는 달랐다.

 

실천한 것은 법도에 맞았고, 말과 행동에는 모두 위의와 법칙이 있었다. 단아하고 신중하며 온화하고 순수하여 사람들이 바라보면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으나, 겸손으로 스스로를 기르고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일찍이 말하기를 “평소 나의 마음가짐이나 일을 행할 때는 매양 ‘구懼’ 자 한 글자를 쫓아서 지낸다.”라고 하였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사당에 배알하고 어버이 곁에 나아가 문후하였다. 방과 마루를 깨끗하게 소제하고 책상을 정돈하고,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단정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완미하고 궁구하여, 만년에도 오히려 게을리 하지 않고 부지런히 행하였다. 


그의 날마다 볼 수 있는 행실은 어버이를 모시는 것으로, 기거와 음식과 이부자리를 펴고 걷는 것도 직접 점검하였으며, 방안과 의복은 추위와 더위에 맞게 해드리고, 매월 초하루에는 반드시 절하고 축수를 올렸다. 저녁에 잠자리를 살핀 뒤에는 늘 침석에서 숨소리를 살폈다. 

 

하루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베갯머리에 앉아서 숨을 멈추고 귀를 쫑긋하여 듣는데, 모친이 공이 옆에 있는 것을 알고서 손을 들어 더듬다가 갑자기 두 어른의 이마가 서로 부딪히게 되니 모자가 함께 다 웃었다. 여기서 공의 효성을 더욱 엿볼 수 있다.


선조의 제삿날에는 기일에 앞서 집안을 정결히 하고 술과 훈채(葷菜)를 먹지 않았으며, 부모 제사에는 참립(黲笠)과 직령(直領)으로 모시되 슬퍼하는 정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제물에는 모두 정해진 법식이 있어 더함도 덜함도 없었다.

 

더운 때에는 충분히 익혀 서늘한 곳에 두고 손수 부채질하였다. 만년에 기력이 몸소 제례를 행할 수 없게 되자, 반드시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제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규방은 화목하여 온화하고 따뜻한 기운이 항상 집안에 가득 넘쳤고, 친족들과는 화목하여 있든 없든 서로 돕고 병이 나면 서로 구제하였다.

 

자식과 조카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는 순순하게 타일러 가르치며, 매양 장공예(張公藝)의 백인자(百忍字)의 뜻으로 힘쓰게 하였다. 하인들을 부릴 때는 은혜와 위엄을 병행하여, 혹 매를 맞고 꾸지람을 들은 자도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정성을 더욱 다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 두 가지 고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의복은 다만 온전하고 깨끗한 것만 취하였을 뿐이다. 남을 대우할 때면 그와 더불어 경도된 적이 없고 또한 거만한 모습도 없었으니 엄연한 가운데 정성스러운 뜻이 넘쳤다. 


자신을 단속함에는 근엄하여 고요히 혼자 있을 때도 혹 소홀하지 않았다. 한가로이 거처할 때도 편리한 복장을 하지 않고 무더운 날에도 반드시 의대(衣帶)를 갖추었다. 하루 종일 반듯이 앉아 어깨와 등을 곧게 세웠고, 밤에 침석에 들 때는 손과 발을 가지런히 하여 측신(側身89)으로 누웠으며, 일찍이 갑작스럽게 몸을 함부로 한 적이 없었다. 


대개 백불암 선생의 학문은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어 선비들이 우뚝한 종주로 삼는 바이다. 공은 그런 기상을 전수 받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나, 행실을 함은 반드시 효제충신에 근본하고, 도를 구함은 반드시 쇄소응대(灑掃應對)를 먼저 하였다.

 

평이하면서도 실질적인 일에 힘쓰고 분명한 곳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부지런하고 차근하게 80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대방가에서 잘 계술(繼述)한 분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아! 아름답도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선각이신 백불암 선생은 / 有覺弗老
영남 선비들이 종주로 여긴 바이네 / 南士攸宗


높은 덕망과 훌륭한 말씀을 / 有德有言
그 손자에게 전하셨네 / 貽厥孫子


공은 경사를 입은 후손으로 / 公乃嗣慶
바탕이 남달리 맑고 순수하며 / 異質淸純


효성은 천지신명을 감동시켰고 / 孝貫神明
학문은 심오한 이치를 꿰뚫었네 / 學透微奧


시대를 상심하고 도를 걱정하며 / 傷時憂道
현송90) 소리 양양하네 / 絃誦洋洋


한결같이 신중함을 생각하면서 / 一念兢存
공경하게 가학을 계승하였네 / 敬述家學


구순의 나이에도 개제하고 화락하여 九旬豈樂
명성을 온전히 하고 돌아가셨네 / 葆歸完名


나의 글은 과장됨이 없으니 / 我筆非夸
그 이름 영원토록 밝게 빛나리 / 尙昭千億


79) 긍암(肯庵) : 이돈우(李敦禹, 1807∼184)의 호이다. 자는 시능(始能),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류치명의 문인이다. 1850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76세 때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고산서당․고운사(孤雲寺)․임천(臨川)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긍암집이 있다.


80) 한강(寒岡) : 정구(鄭逑, 1543∼1620)의 호이다. 자는 도가(道可)․가보(可父), 본관은 청주이다. 유일로 관직에 출사하였고 지평을 거쳐 교정청 낭청에 제수되어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열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통천 군수로 의병을 거병하였고 임난 이후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형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와 역사 및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고,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81) 입재(立齋) :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호이다. 자는 사앙(士仰), 호는 입재·무적옹(無適翁), 본관은 진주이다. 정경세의 6세손으로 이상정의 문인이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하였으나, 학문과 지조 있는 행실로 여러 번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입재집과 소대명신언행록(昭大名臣言行錄) 등이 있다.


82) 황반로(黃磻老, 176∼1840) : 자는 숙황(叔璜), 호는 백하(白下),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정종로의 문인으로 경전뿐만 아니라 시문과 필법에 뛰어났으며 과거의 대책문에도 능하여 표책에 초빙되기도 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버이 상을 당한 후에는 출사의 뜻을 버리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83) 남한호(南漢皜, 1760∼1821) : 자는 자호(子皜), 호는 성재(誠齋),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어려서 족종형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에게 수학하였다. 14∼15세 때 이미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남한조에게 의문점을 물어 바로잡았고, 178년 정종로를 찾아가 공부하였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에게서도 수학하였다. 


84) 갱장(羹墻) : 죽은 이를 사모한다는 의미로,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옛날에 요임금이 돌아가시자 순임금이 3년 동안 우러러 사모하였다. 앉아있을 때는 담장에서 요임금을 보았고 먹을 때는 국에서 요임금을 바라보았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牆 食則覩堯於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85) 염락(濂洛) : 염계(濂溪)와 낙수(洛水)를 줄여서 일컫는 말로, 염계(濂溪)에는 주돈이(周敦頤)가 살았고, 낙수(洛水)에는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살았던 데서 일컫는 말이다.


86) 여씨향약(呂氏鄕約) : 중국의 남전 여씨(藍田呂氏) 형제 네 사람이 향인(鄕人)들과 함께 맺은 규약으로, 그 내용은 덕업으로 서로 권할 것[德業相勸], 과실에 서로 경계할 것[過失相規], 예속으로 서로 사귈 것[禮俗相交], 환난에 서로 도울 것[患亂相恤] 등 네 가지이다.


 87) 신석우(申錫愚, 1805∼1865) : 자는 성여(聖如), 호는 해장(海藏),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83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검열․정언을 거쳐 병조 참판‧이조 참판‧홍문관 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60년 동지사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예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해장집과 청이부지(淸伊府志)가 있다. 


88) 이원조(李源祚, 1792∼1872) :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정종로의 문인이다. 1809년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로 관직을 시작하여 경주 부윤‧제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1871년 판의금부사에 올랐다. 60여 년의 관직생활에서 오로지 충직과 청렴결백으로 일관한 문신이며, 1,70여 수의 시를 남긴 문인이다.


89) 측신(側身) : 시경 「대아(大雅)·운한(雲漢)」 서(序)에 나오는 말로, 재앙을 만나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닦아 나가는 제왕의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수신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90) 현송(絃誦) : 거문고를 타고 시(詩)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학문 수양에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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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政大夫行敦寧府都正止軒先生崔公墓碣銘 幷序



止軒先生崔公卒葬之二十七年丙申。其孫旹敎。以肯庵李公之狀。徵銘於興洛。興洛辭以晩生寡陋而不獲命。謹按公諱孝述字稺善。氏出月城。遠有代序。入本朝。有諱鄲佐太祖。有開國功。官大司馬。諱孟淵知縣事。始居大丘。諱誡縣令。以壬辰倡義功。贈兵曹參判。諱東㠍登寒岡鄭先生門。以學行薦授孝廟潛邸時師傅。明社屋。隱不仕。諱壽學監察。高祖諱鼎錫通德郞。曾祖諱興遠官翊贊。贈左承旨。卽百弗庵先生。祖諱周鎭遊大山李先生門。爲師門所推重。號東溪。考諱㵓通德郞。有儒望。妣晉州鄭氏。愚伏先生後。立齋諱宗魯女。以健陵丙午生公。姿質淸明。氣象岐嶷。甫省事。已知愛敬之道。先意順旨。不與羣兒嬉戱。十餘歲。文辭夙就。長者期以遠大。始受學於再從大父漆室翁。性嚴有少過。未嘗假借。公一意恪恭。又嘗往來外庭。立齋先生。每以百弗先生所踐履者敎詔之。丁卯授室于李晩覺門。未幾通德公寢疾。公夙夜焦煎。親調藥餌。及丁憂。殮殯祥祭。一遵家禮。奉母夫人。如事先公。每事必稟而行之。溫凊甘旨。無不曲盡誠禮。庚午往拜立齋先生。參講於對山樓。黃白下磻老,南誠齋漢皜諸公。皆以見解精深稱賞之。講畢陪先生。遍遊愚山十二景。先生授以敬齋,夙夜兩箴時分地頭說以敎之。丙子先生易簀。公痛考問無地。因作遺事一篇。以寓羹牆之慕。一生用工。多在四書及心近濂洛諸書。又取退陶,大山二先生集中最切要處。爲進修之資。置百弗先生敬字牌于案上。常目在之。若嚴師之臨焉。夫仁洞。卽百弗先生設約經理之地。而有先公恤貧等諸庫。且以春秋設會講修。略如呂氏鄕約之法。公一心奉行。克遵舊規。癸丑先夫人九耋終堂。公年幾七十。而哀慕如嬰兒。丙辰申方伯錫愚設講會于校宮。邀公爲講長。講心經。甲寅繡衣大臣交口薦達。庚申除莊陵參奉。乙丑以大耋陞通政階。五月除敦寧府都正。陳疏辭遞。丙寅洋夷犯疆。邪說浪行。公曰禁止邪敎。莫如講明吾學。乃設講會於東川社。邀李尙書源祚。講大學。丁卯會柳川社。講中庸。庚午七月寢疾。戒長孫旹敎。讀書修行。毋負門戶也。以十月十二日。正席而終。享年八十五。葬廣里某向原。後移奉于永川毛沙面南昌丙坐原。配淑夫人廣州李氏。石潭諱潤雨後。晩覺齋東汲女。柔順貞淑。媲德無違。生二男三女。男命德,命愚。女適李瓚秀,李淵在,鄭致周。命德六男旹敎,南敎,文敎,英敎,元敎,憲敎。一女李性求。命愚四男致敎,璿敎,相敎,東敎。二女李喆久,孫晉康。李瓚秀一男根昌。四女孫廷誾,張柱鶴宣傳,孫文憲,李壽奎。李淵在嗣子章夔校理。鄭致周一男鎭曄。公生弗爺文獻之庭。襲立翁淵源之學。早歲嚮道。竆老孜孜。充養旣久。德器異衆。踐履自合繩墨。言動皆有儀則。端重和粹。自然人望而生愛敬之心。以謙遜自牧。兢惕自持。嘗曰吾平生持心行事。每從一懼字過了。逐日早起盥櫛。展拜祠廟。進候親側。淨掃室堂。整頓几案。斂容端坐。潛心究翫。晩年猶不懈益勤。其日可見之行。則事親。起居飮食。枕簟斂設。親自點檢。房室衣服。適其溫凉。月朔必拜而獻壽。昏定後。每候寢席中氣息。一日氣息無聞。因坐枕邊。屛息竦聽。母夫人覺其在傍。擧手探之。忽兩額相摩。母子皆笑。此尤見公之誠孝也。祭先。前期澡潔。不酒不葷。親忌。用黲笠直領行事。而哀情動左右。祭品皆有定式。豐歉無加損。暑月。爛熟而置凉處。手自扇之。晩年不能筋力爲禮。則必扶起危坐。以待祭畢。閨門穆如。和藹之氣。常盈溢宅裡。睦於宗族。有無相資。疾病相救。子姪有過。諄諄誨誘。每以張公藝百忍之意敕勵焉。御婢僕。恩威幷行。被笞譴者。不以爲怨而尤效其誠。飮食有常度。不許重肉。衣服只取完潔。待人未嘗與之傾倒。而亦無惰慢之容。儼然之中。悃愊藹如。律己謹嚴。不以幽獨而或忽。燕處不以便服。盛暑衣帶必飭。危坐終日。肩背竦直。夜而就寢。齊手斂足。側身而臥。未嘗遽放肆也。葢弗翁之學。有本有末。蔚爲士類之宗。公以氣類之傳。生見聞之世。制行必本於孝悌忠信。求道必先於灑掃應對。平實處著力。明白處加工。勉勉循循。八十年如一日。豈非所謂合下門庭善繼述者耶。於乎偉矣。銘曰。
有覺弗老。南士攸宗。有德有言。貽厥孫子。公乃嗣慶。異質淸純。孝貫神明。學透微奧。傷時憂道。絃誦洋洋。一念兢存。敬述家學。九旬豈樂。葆歸完名。我筆非夸。尙昭千億。<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