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 1744

완전한 혼자라는 신화

나는 그대가 언젠가 펼쳐질 것을 안다. 굽어 있던 것이 펼쳐지는 것은 이치의 형세이다. [해설] 吾知子之伸 ‘화담 서경덕은 별다른 스승 없이 자연과 홀로 마주하여 씨름하며 학문을 깨우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 天 글자를 벽에 붙이고서 면벽 수행을 하듯 깊이 파고들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한 그가 사망한 뒤 30년가량이 지나 조정에서 추증 문제가 거론되었다. 선조는 서경덕의 저서를 살펴보니 기수(氣數)에 관해 논한 바는 많으나 수신에 대해서는 미치지 못했고 공부에 의심스러운 바가 많다며 우의정 추증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때 박순, 허엽 등 서경덕 아래 문인들이 항변했지만 이에도 선조는 끝내 의심스럽다며 주저했다. 그때 율곡은 서경덕의 공..

혼조(昏朝)의 권신(權臣)에서 절신(節臣)으로

[국역] 이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진천(鎭川)의 유학(幼學) 박준상(朴準祥)의 상언(上言)에 대해 본조가 복계(覆啓)하였는데, 그 8대조 박승종(朴承宗) 및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관작을 회복시키는 일을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말하기를, ‘박승종은 혼조(昏朝)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자 폐부(肺腑)와 같은 인척으로서 16년을 지냈습니다. 만약 그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고 이의를 제기하여 잘못이 없는 곳으로 임금을 인도하였다면, 실로 생사를 함께하여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사라진 때를 당하여 한마디 말이라도 내어 천지의 경상(經常)을 지킨 일이 있었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혼조를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은 ..

명곡 최석정 선생 행장

■先考議政府領議政府君行狀[명곡 영의정 최석정 행장] 아들 최창대(崔昌大) 찬 先府君姓崔氏。初諱錫萬。字汝時。後爲翰林。以顯宗小字嫌名。有命改之。改諱錫鼎。字汝和。初號存窩。後號明谷。羅代之始。有六部大人佐之。崔其一也。後世著籍于完山。以高麗上將軍純爵爲始祖。六世而有諱得枰。以選部典書致仕。生諱宰。重大匡完山君。諡文貞。父子皆以廉直孝謹。爲權貴所憚。麗史立傳以紀之。牧隱李公撰文貞墓誌。盛有稱道。生諱有慶。事我太祖。官參贊議政府事。諡平度。以孝旌閭。被廉吏之選。生諱士康。事世宗。官右贊成。兼判吏曹。金宗瑞之開六鎭。實長兵部。參聞籌畫。諡敬節。公之九世祖也。高祖諱秀俊。累贈左贊成。曾祖諱起南。游牛溪成先生門。有重名歷應敎舍人。光海朝。爲羣小所擠。卒官永興大都護府使。累贈領議政。完興府院君。谿谷張文忠公。撰其墓碑。祖諱鳴吉。策靖社元勳。典文衡。領議政完城府院君。諡文忠。文章經術。學士..

종숙(從叔)과 당숙(堂叔)의 호칭(呼稱)

종친회에 참석해보면 항렬(行列)이 다른 일가친척(一家親戚)들을 만나게 되는데 호칭(呼稱)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나이 어린 할아버지는 있어도 나이 어린 형님은 없다. 이는 친족 간에 나이가 어려도 할아버지뻘이 되는 수는 있어도 형님은 반드시 나이가 위여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의 문헌에서는 형제자매를 일컬어 동생이라 하고 형을 동생 형(同生 兄), 제(弟)를 동생제(同生弟)로 표기하였으며, 그 뒤부터는 형(兄), 제(弟) 또는 동생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노석(老石) 여구연(呂九淵)의 문집인 노석선생문집2(老石先生文集二)에서 종숙(從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父之四寸也呼語曰某某我哉稱語且書語皆曰從叔而以堂叔用之者有之是誤也從義有四寸而堂義有屋而已堂叔語意不成也父之六寸..

일본 유출『금석집첩(金石集帖)』 자료 현황

[해외사료총서 15권] 일본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Ⅲ >일본 京都大學 부속도서관 소장 『金石集帖』 자료 현황. ◈ 凡 例 1. 목록의 작성은 ‘帖數, 一連番號, 名稱, 成立年度’의 순서에 의한다. 2. 一連番號는 각 첩에 수록된 탁본에 고유번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첩수-탁본수록순서’의 형식을 취한다. 단, 선행 탁본에 부속된 탁본이 2점 이상 존재하는 경우에는 고유 번호 뒤에 ‘-1, -2’ 등으로 하위 번호를 준다. 3. 탁본의 명칭은 外題를 기준으로 하되, 명칭이 빠진 것과 순서가 틀린 것은 바로 잡는다. 4. 명칭의 기록 시, 蟲損 등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문자는 □로, 미해독 문자는 #으로 표시한다. 또 동일 인물에 대한 서로 다른 형식의 탁본이 연속되어 있는 경우, ‘/’으로..

곡령에 올라 - 李齊賢(이제현)

登鵠嶺(등 곡령)-李齊賢(이제현) (곡령에 올라) 煙生渴咽汗如流(연생갈인한여유) / 연기는 마른 목구멍에서 생겨나고 땀은 물 흐르듯 十步眞成八九休(십보진성팔구휴) / 열 걸음 걸으면 여덟아홉 번을 쉬어야하네. 莫怪後來當面過(막괴후래당면과) / 뒤에서 오는 자가 앞질러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徐行終亦到山頭(서행종역도산두) / 천천히 가도 끝내 꼭대기까지 이를 것이네.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크기 109.4㎝(가로) x 73,6㎝(세로) 고려 후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그림 고려 말의 문신 학자이자 시인이며 화가로서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다. 이제현(李齊賢)의 이 작품은. 비단바탕에 먹과 채색으로 그린 가로 109.4㎝ x 세로 73.6㎝,의 산수..

혜존(惠存)의 뜻!

혜존(惠存)의 뜻! 보통 타인에게 책을 드릴 때 '혜존(惠存)'이라는 단어를 적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국어사전에 혜존(惠存)이란 낱말을 찾아보면, ‘잘 보아주십시오’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기의 저서나 작품 따위를 남에게 줄 때에 상대방의 이름 옆이나 아래에 덧붙여 쓰는 말'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정반대의 뜻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비들이 서로 문집(文集)을 주고받을 때, 책을 받은 사람이 겉표지에 문집 이름을 적고 속표지에는 누구에게서 언제 받았는지를 적은 다음, 책을 준사람 이름 끝에다 '은혜롭게 주시기에(惠) 잘 보존(存)하겠다'는 뜻인 '혜존'이라는 말을 적어 고마움을 나타내곤 했다. 그르던 것이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일제..

서정리 묘갈명/묘표음기/행장。

■ 贈左贊成徐公墓碣銘 [생졸년] 서정리『徐貞履, 1599년(선조 32) ~ 1664년(현종 5)』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 찬(撰) 公諱貞履。字勉中。達城之徐。遠有代序。入本朝。有諱彌性。年十七。魁司馬。官安州牧使。娶權陽村近女。生諱居廣。縣監。卽四佳公居正之兄也。生諱彭召。歷內翰,銓郞。止司憲府掌令。生諱固。禮曹參議。是公之高祖。曾祖諱懈。少有學行早歿。贈領議政。祖諱渻。判中樞。號藥峯。贈領議政。諡忠肅。考諱景霌。尙宣廟貞愼翁主。封達城尉。以萬曆己亥八月十八日生公。癸亥仁祖反正。例授宗廟奉事。不就。甲子成進士。復拜前職。歷官豐儲倉主簿,工曹佐郞,翊衛司司禦,刑曹工曹正郞,司僕軍器寺僉正。外則永春靑陽縣監,義城縣令,淸風郡守,忠原縣監,富平南原豐德府使。享年六十六。葬于長湍都羅山負丑原。都尉公兆次也。前室三陟沈氏。監察諱說之女。未育。繼室慶州李氏。刑曹判曹贈領議政號碧..

서정리(徐貞履)가 소장한 화첩(畫帖)의 서문

■ 동명 정두경(東溟 鄭斗卿) 사군(使君) 서정리(徐貞履)는 나의 죽마고우이다. 나에게 화첩(畫帖)과 화첩을 서술한 시문 하나를 보여 주었는데, 그림은 화사(畫師)인 허주(虛舟) 이징(李澄)이 그린 것이고, 시문은 현주(玄洲) 이소한(李昭漢)과 동회(東淮) 신익성(申翊聖) 두 도위(都尉)와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과 택당(澤堂) 이식(李植) 두 상서(尙書)가 지은 것이었다. 시문과 그림이 모두 한 시대에 절묘하여 그 그림을 마주하고 그 작품을 읽으면, 진토에 찌든 흉금을 씻어 내고 창주(滄洲)의 아취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다만 백주와 동회는 이미 고인(古人)이 되어 버렸기에 작품을 펼쳐서 완상한 끝에 나도 모르게 창연한 마음이 들었다. 서정리가 나에게 뒤를 이어 화답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