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曺繼龍) 묘터

야촌(1) 2007. 10. 20. 15:01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曺繼龍) 묘터

 

이몽일(풍수학자ㆍ지리학박사)    ㅣ    2005-12-20 AM4:41 풍수기행

경주시 안강읍 노당(老堂)2리, 속칭 초제(草堤, 草池 혹은 풀못안) 마을에 이 나라 명묘 중의 명묘라 일컬을 만한 분묘가 한 기(基) 있다. 바로 창녕 조씨 시조인 조계룡(曺繼龍)의 묘다.


조계룡은 신라 진평왕(재위 AD579-632)의 부마(駙馬 혹은 사위)로 왜구가 침입했을 때 보국대장군이 되어 그들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춘추와 김유신 등을 배후에서 지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생존했던 통일신라기는 알고 보면 중국으로부터 풍수설이 전래된, 이 나라 풍수사(史)에서 매우중요한 시점이다. 때문에 한국음택(혹은 묘지)풍수의 역사로 볼 때 그의 분묘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그의 분묘는 저 경주 서쪽 선도산(仙桃山) 기슭의 태종 무열왕릉터나 송화산(松花山혹은 金藏山) 중턱의 김유신 묘터보다 그 입지성(性)이 훨씬 빼어나다. 굳이 견주어보자면 완전히 풍수 이론에 입각하여 터잡은 것으로 전해오는, 같은 어래산(일명 병풍산:魚來山은 御來山이 잘못 표기된 말인 듯함) 자락 육통리(六通里)의 저 흥덕왕(재위 826-836) 능터에 버금가는 명당이라 할 수 있다.


원성왕(재위 785-798)이 붕어했을 때만 해도 신라에 터 잘 잡는 사람이 없어 곡사(鵠寺)라는 절을 헐고 그 자리에 능을 썼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 묘가 그토록 훌륭한 장소에 터 잡고 있는 것이 실로 불가사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그 묘터는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태사공(太師公) 조계룡의 묘는 조종산(祖宗山)의 내맥성(來脈性), 주산(主山)의 환포성, 주맥의 중심성, 주안산(主案山)의 대대성(待對性), 혈장(穴場)의 기(氣) 응결성(凝結性) 등, 그 모든 명혈(明穴) 조건들을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종산격인 어래산의 한 지맥이 일돈일기(一頓一起)하면서 내세(來勢)가 끊어지지 않고 혈장까지 연면히 이어져, 그 시작은 하늘에 닿은 듯하고 그 끝은 평평한들판에서 멈추었다. 언뜻 보기에는 산세가 약상(弱相)인 것 같지만 그 맥세는 마치 물결의 기복이 세문(細紋)을 그린 듯하다.


더구나 높은 산이 큰 평야와 만나는 곳에서는 모름지기 그 모든 지맥의 끝자락에 결혈처(結穴處)가 있는 법, 아닌 게 아니라 어래산과 안강들이이루는 자연지세를 고려하면 그 분묘의 전반적인 놓임새가 더욱 돋보인다.


혈장을 감싸는 좌우 용호 지맥의 환포성 또한 매우 빼어나다. 영락없이 꿩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엎드려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묘터에 앉으면 복치형(伏雉形)터다운 느낌이 저절로 배어날 정도라 한다면 그 터의본색을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비룡승천혈이나 등잔혈이 수직적인공간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면 복치형 터는 엎드리고, 숨고, 감추고, 은둔한다. 때문에 시원함대신에 더욱 아늑하고 포근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그 묘터에서 시원함을 전혀 맛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동쪽으로 트인 판국(版局) 밖을 내다보면 넓은 안강들과 기계천(杞溪川)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안대(案對)를 이루고 있는 도음산(禱陰山) 줄기와, 영남의 명기(名基) 양동리의 주산격인 설창산(雪蒼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산들의 봉우리가 분묘의 곡선을 그대로 쏙 빼닮은 아름다운 금성산형(金星山形)을 이루고 있어 분묘의 뒤쪽에서 안산쪽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종래는 어느 것이 분묘이고, 어느 것이 산봉우리인지 심히 헷갈린다.


하지만 그 터가 지니고 있는 풍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봉분이 터잡고 있는 지맥 자체에서 느껴지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기운을 직접 느낄 수 없는 사람은 봉분 주변의 흙과 초목들을 유심히 관찰해 봐도 된다.

 

묘소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석물이 아닌, 그런 자연 경관물(景觀物)들을 통하여 상서로운 기운을 감지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그터가 품고 있는 힘이라 여겨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조계룡의 묘소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명백해졌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묘소의 발견 내력이 그런 객관적인 명기성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신비로움으로 가득차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창녕 조씨 문중에서는 조선조 집안 조상 중의 한 분이 선몽(善夢)하여 그 터를 찾아냈다고 하고, 또 신상뢰(辛商賚:1581-1643) 이래 초제에 세거해 온 영월 신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조상이 지석(誌石)을 찾아 조씨 문중에 건네주었다고 한다. 현재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91호로 지정돼 있는, 그 묘의 재사(齋舍)인 종덕재(種德齋) 정당(正堂)의 연혁 또한 일관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종덕재 입구의 입간판에는 조선 영조33년(1757)에 정당을 세운 것으로 쓰여 있는데, 조씨 문중의 기록물에는 정조 22년(1798)에 묘 앞에 축단(築壇)하여 처음으로 묘사를 봉행하였으며, 순조17년(1817)에 묘단비(碑)를 건립하고, 순조32년(1832)에 묘각을 방 1칸, 마루 2칸의 정당과 문간포사 등으로 중건하면서 종덕재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고 보면 조선 영.정조대에 그 분묘를 찾아낸 것이 분명한데, 그 묘가 저 어래산 줄기의 동북쪽 끝에 위치한 속칭 칠성현(峴) 정상이나, 혹은 어래산 자락 해발 60-80m의 야트막한 구릉상에 자리잡고 있는 노당리 고분군과 산대리(山垈里) 고분군의 여타 분묘들과는 확연히 다른 빼어난 풍수적 입지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만 해도 신라에는 그 정도의 터를 고를만한 정통 풍수술이 정립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터의 진위 여부가 자못 의심스러운 것이다.


두 개의 봉분 중, 뒤쪽(서쪽) 봉분을 말(馬) 무덤으로 상정해 놓은 것도 그렇다. 고분을 발굴하여 어떤 증거물이 나왔던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도 쉽게 그것을 말 무덤으로 단정지을수 있었다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쉬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구나 원래는 일반 분묘보다 약간 더 컸던 분묘를 성역화한답시고 자꾸 봉토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대형 고분처럼 돼버렸다고 하는데, 경주 일대에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은 고분들이 숱하게 산재해 있는 형편이고 보면 솔직히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바도 없지 않다.


어쨌거나 그 분묘가 조계룡의 묘로 비정(比定)된 것은 초제마을 사람들의 삶터 관념이나 환경행태에 적잖은 긍정적인 영향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어래산의 여러 산봉우리들 중에 초제마을의 이른바 복치형 지맥과 직접 연결돼 있는 봉우리가 응봉(鷹峰)이라 이름붙여진 것만 해도 그렇다.

 

풍수상 꿩이 엎드려 있는 듯한 복치형 지세에서는 주변에 독수리 형상의 취봉(鷲峰)이나, 혹은 매 형상의 응봉이 있는 것을 제격으로 친다. 그래야만 꿩이 알을 계속 품으며,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혈은 물론 그 매봉이 안 보이는 곳에 자리잡는다. 어래산의 응봉이라는지명은 그래서 생겨났다.


사실 예전만 하더라도 초제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의 불문율처럼 전해 내려오는 또다른 삶터 풍수관념이 있었다. 그것은 곧 마을이 들어앉은 오막한 지형이 소쿠리 형상과 흡사하므로, '한 소쿠리하면(재산을 어느 정도 모으면) 으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지, 그대로 눌러앉으면 벌어 모은 모든 재산을 다시 그 자리에 쏟아내게 된다'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소쿠리형 터를 복치포란형 터로 바꿔 인식하게 된 결과, 그때부터 굳이 이사가려는 사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일을 열심히 하여 이제는 모두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치형 터 인식이 그런 형이상학적인 관념 수준에만 머물렀다고 한다면그것은 사실 별로 언급할 거리가 못된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숲을 온전히 보존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무를 심고 숲을가꾸는, 보다 실천적인 환경행태로까지 이어졌다. 창녕 조씨 가문에서 마을 주변 산을 매입하여 그 숲을 잘 지키고 관리해 온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전통적인 풍수논리에 따르자면 꿩이 엎드린 복치혈은 숲속에 있을 때라야 비로소 안전하기 때문에 주변에 가능한 한 많은 나무들이우거져 있을수록 좋다. 그같은 사고방식은 물론 숲이 없으면 독수리나 매에게 들키기 쉬우니 그만큼 불길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혹자는 여기에서 그런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뭐 그리 자랑할 게 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땅 자체의 실상을 직시하는 필자로서는 사뭇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 요컨대 숲 자체가 보존되고, 숲이 가꾸어지는 실상이 중요할 따름이지 그 과정의 합리성 여부를 따지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조계룡의 묘는 그 내력이야 어찌됐든 초제 주민들에게 친환경적이자 친공동체적인 삶터관을 심어 온 명묘 중의 명묘임에 틀림없다. 안강들에서 바라보이는 초제마을을 감싼 나지막한 산줄기의 짙푸른 풍수경관 숲이 그토록 정겹게 느껴지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영남일보)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