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충정공 홍응신도비명(忠貞公洪應神道碑銘)

야촌(1) 2014. 4. 14. 02:45

충정홍공신도비명(忠貞洪公神道碑銘) [전제(篆題)]

 

유명조선국 추충정난 익대순성명량좌리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익성부원군 증시충정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 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 益城府院君 贈諡忠貞公 神道碑銘 幷序)

 

통정대부 예조참의 지제교 이숙함 찬(通政大夫 禮曹參議 知製敎 李淑瑊 撰)

사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홍흥 서병전액(舍弟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洪興 書幷篆額)

 

대저 하늘이 위인(偉人)을 이 세상에 낼 때, 반드시 불세출의 재주를 주고 불세출의 지우(知遇)를 열어, 불세출의 공훈을 세우게 하여 불세출의 재상의 공업을 이루게 한다. 이것은 참으로 세상에서 전혀 없으나 겨우 있다면, 바로 우리 익성(益城) 충정공(忠貞公)일 것이다.

 

공(公)의 성은 홍(洪)이고 이름은 응(應)이며, 자(字)는 응지(應之)이고 휴휴당(休休堂)은 그의 호(號)이다.

먼 조상에는 충정공(忠貞公)이 있었으니, 공의 이름은 자번(子蕃)으로 고려(高麗) 시대의 명신이었다. 고조부의 이름은 운수(云遂)로 익산군(益山君)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유룡(有龍)으로 숭정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崇政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로 추증되었다.

 

조부의 이름은 덕보(德輔)로 보국숭록 영중추부사(輔國崇祿領中樞府事)로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심(深)으로 순충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사 익산부원군(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益山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모두 공(公)의 훈공으로 추증된 것이다.

 

어머니 윤씨는 순충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사 파평부원군(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春秋館事坡平府院君)으로 추증된 규(珪)의 따님으로, 선덕(宣德) 무신년(1428년) 9월 10일 기미일(己未日)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모습에서도 특출한 모습을 드러냈다. 점점 자라면서 독서하며 날마다 수백여 마디의 말을 기억하며 학력(學力)을 크게 높였다. 경태(景泰) 신미년(1451년) 봄에 사마시(司馬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이어서 문과(文科) 갑과(甲科) 에 급제하였다.

 

승의랑(承議郞)·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지제교(知製敎)를 제수받은 뒤 얼마 있다가 승진하여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이 되었다. 이 해 겨울 집현전 수찬(集賢殿 修撰)· 지제교(知製敎)· 경연 사경(經筵 司經)으로 옮겨갔다.

 

임신년(1452년) 여름 임금께서 집현전 문사 중 가장 영묘한 이 6인을 선발하여 산방(山房)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했다. 관에서 음식과 기물을 대주어 經史百家에 대해 마음껏 공부하며 완전히 이해하고 통달하여 훗날 크게 쓸 수 있는 재목이 되도록 하였는데, 공은 첫 번째로 선발되었다.

 

자주 관직을 옮겨 조산대부 집현전응교 지제교 겸 세자좌문학 춘추관기주관(朝山大夫 集賢殿應敎 知製敎 兼 世子左文學 春秋館記注官)이 되었다. 병자년(1456) 여름 집현전(集賢殿)에서 물러나와 공은 다만 좌문학(左文學)만 맡았는데, 얼마 있다 어머니 상을 당했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년) 겨울 상복을 벗자 무관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맡게 되었다. 이 때 세조(世祖) 께서 유신(儒臣)들을 모아 기예를 시험하였는데 공이 우등하여 품계에 중훈 시행 성균관직강(中訓試行成均館直講)으로 높아졌다. 얼마 있다 세자좌필선(世子左弼善)으로 승진했고 이를 거친 뒤 우보덕(右輔德)이 되었다.

 

경진년(1460년) 여름 가뭄이 심하다 비가 내리자,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거동하시어 종재(宗宰) 들을 불러들여 보시고 술잔을 올리게 하였다. 권람(權擥)에게 일러 말하였다. “군자(君子)를 나아가게 하고 소인(小人)을 물러나게 해야지.” 권람이 대답하여 말했다.

 

“홍응(洪應)이 군자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내 이미 알고 쓰고 있네. 다시 다른 사람을 천거하게.” 권람이 말하길, “신이 아는 것은 이 뿐입니다”하였다. 이 해 가을에 승진하여 수판종부시사 예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상서소윤(守判宗簿寺事藝文館直提學知製敎兼尙瑞少尹)이 되었고 얼마 후 궁궐 안으로 들어가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 겸 판군기감사 지형조사(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充春秋館編修官兼判軍器監事知刑曹事)가 되었다.

 

임금이 곧 공을 불러들여 보고는 말했다.

“인재를 가려뽑고 추천하는 일은 나 혼자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육적(六籍) 에서 자네를 발탁하여 제수한 것이네.”

신사년(1461) 가을 우승지(右承旨)로 옮겨갔고 나머지는 예전과 같았다. 이 해 겨울 11월 아무날 일 밤에 왕세자가 아들을 낳았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는 곧 공을 불러 침전(寢殿)에 들게 하고는 일러 말하길, “금일의 기쁨과 경사가 어찌 이전에 있었겠는가?”하고는 술 한 잔을 올리게 하고 공에게 술을 내려주며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는 글을 짓게 하였다.

 

임오년(1462) 봄에 승진하여 좌승지(左承旨)가 되었고 여름에 승진하여 도승지 겸 상서윤 지제교 충춘추관수찬관 겸 판봉상시사 지이조사 내직사준원사(都承旨兼尙瑞尹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兼判奉常寺事知吏曹事內直司樽院事)가 되었다. 임금이 공에게 일러 말했다.

 

“근래에 내가 군대 정비에 신경을 써서 군사들은 훈련이 잘 되었고 무기도 갖추어져, 내가 걱정할 것이 없어졌네. 그러나 선비에 관한 일은 혹 폐해지고 해이해진 것이 있다네.” 공이 대답하여 말했다. “신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과거를 자주 열어 요행으로 붙는 이와 재능없는 이를 선발하지 마시고, 또한 향학의 유생이 연로하더라도 군액(軍額)에 충당하지 마시고 길러야합니다.” 임금이 말했다. “경의 말이 정말 맞구나. 학교의 도를 더욱 넓히는 일은 그대가 주관하게.” 계미년(1463) 여름 관등을 뛰어넘어 가정대부 이조참판(嘉靖大夫 吏曹參判)이 되었다.

 

일찍이 어느 날 임금이 모든 재상에게 각각 지금 시대의 폐단을 진술하게 하였다. 공이 나아가서 말했다. “한직을 없애야합니다. 지금 사간원(司諫院)은 다만 사간지사(司諫知司)와 사간정언(司諫正言) 각 한 사람만 있습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간원(司諫院)은 진실로 눈과 귀의 벼슬입니다. 반드시 보고 듣는 것을 넓힌 후에야 시비(是非)와 나라 다스리는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대간(臺諫)에는 세 사람을 갖춘 후에 공사(公事)를 행하는 것이 옛날 예입니다. 지금 만약 단지 세 사람만 둔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항상 인원수가 모자라니, 어떻게 공사(公事)를 행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서울에는 각각 벼슬을 오랫동안 맡기어 시키는 법이 있어, 혹은 한 부서의 4-5명이 오랫동안 있다가 3년을 기다린 후에 체직되니, 지방의 관원이 전직되어 오기는 어렵습니다. 하물며 재능없는 이나 요행으로 붙은 이는 오랫동안 지위를 훔치고 녹을 먹으니 또한 불가합니다. 또한 성중관(成衆官)은 모두 7-8년을 벼슬살이하다 떠납니다.

 

지금 간경도감(刊經都監) 및 의방수정(醫方修正)의 사람들은 관직에 있는 인원이 지나치게 많아 혹은 반년 만에 관직에서 떠나는데, 모두 6품의 벼슬을 주어 상이 넘쳐납니다. 이것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임금이 모두 가상히 여기고 받아들였다.

 

가을에 동지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同知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을 맡았고, 갑신년(1464년) 가을에 승진하여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었다. 임금이 공을 불러 일러 말했다. “그대에게 세자 가르칠 것을 명하네. 그대는 늙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으니, 아침저녁으로 가르치도록 하게. 그대는 힘쓰시게.”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 여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올라 형조판서(刑曹判書)의 벼슬이 더해졌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병술년(1466) 봄 정월에 관제(官制)를 고쳐 세자시강원우빈객 춘추관동지사(世子侍講院右賓客春秋館同知事)를 맡게 되었다.

정해년(1467년) 여름 5월에 역적 이시애(李施愛)의 옥사가 일어나 승정원의 사무가 갑자기 바빠져, 특별히 공에게 도승지(都承旨)의 일을 겸하게 명하였고 얼마 뒤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를 겸하게 하였다.

 

무자년(1468년) 겨울 10월, 예종(睿宗) 초년에 강순(康純) 과 남이(南怡) 의 모반이 일어나자, 공은 죄수 다스리는 일을 맡아 적당들을 국문하여 모두 복죄하게 하였다. 이에 드디어 임금이 추충정난 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철권(鐵券)를 하사하였다. 11월에는 정헌 지우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익성군(正憲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 益城君)의 벼슬이 더해졌다.

 

기축년(1469년) 봄에 이조판서 겸 경연춘추관동지사(吏曹判書兼經筵春秋館同知事)로 옮겨가서, 지금 임금이 대통을 이어받는 것을 도모하고 보호하는 데 공이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가을에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옮겨갔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경인년(1470년) 봄 정월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임진년(1472년) 봄 3월에 상복을 벗자, 임금이 순성명량 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하였다. 여름에 품계가 올라 숭정(崇政)이 되었고 인하여 군(君)으로 봉해졌으며,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가 되었고, 얼마뒤 판부사(判府事)로 승진하였다.

 

을미년(1475년) 봄에 임금이 경연(經筵)에 거동하시자 안팽명(安彭命)이 사뢰었다. “사초(史草)가 반드시 비밀을 지키는 것은 아니게 되어, 자주 더럽혀짐이 그치지 않습니다.” 임금이 공에게 어떠냐고 묻자 공이 대답하여 말했다.

 

“사관(史官)이 직필하니 비밀스럽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한 번 열게 되면 그 폐단은 끝내 막기가 어렵습니다.” 임금이 맞다고 하였다. 여름에 품계가 숭록(崇祿)으로 높아졌다. 겨울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겨갔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정유년(1477년) 여름 의정부우찬성 겸 지경연사(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로 옮겨갔다. 겨울에 별시(別試)를 관장하여 명경과(明經科)에서 권경희(權景禧) 등 5인을 선발하였다. 무술년(1478년) 여름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다.

 

겨울에는 벼슬이 높아져 보국 숭록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익성부원군(輔國崇祿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益城府院君)이 되었다.

기해년(1479) 가을에는 대광보국 숭록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가 되었다. 을사년(1485년) 봄에는 승진하여 좌의정 세자부(左議政世子傅)가 되었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병오년(1486년) 겨울에 승지(承旨)가 옥에서 죽은 죄수의 형안(刑案)을 사뢰자 임금이 말하길, “옥에서 죄수로 죽은 자가 많다. 이는 반드시 관리가 형벌을 지나치게 쓰고 삼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하였다.

 

공이 말했다. “무릇 지금 수령들은 만약 도적이라고 인식을 하면 진위를 가리지 않고 어지러이 곤장을 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즐비합니다. 옛말에, ‘삼가 형벌 사용을 분명히 하여 감옥에 남겨두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청컨대, 각 도에 명을 내려 빨리 해결하라 하십시오.” 임금이 이를 따랐다. 임금이 경연에 거둥하시자 공이 사뢰었다.

 

“근래의 법망은 매우 조밀하니 관대함을 힘써야 합니다. 게다가 옛날에는 삼보적현(三輔赤縣)을 서울에서 주관하였는데, 지금 시정은 어긋남이 없으니 청컨대 한성부에서 규찰하게 하십시오.” 임금이 이에 따랐다. 무신년(1488년) 봄에 임금이 경연에 거둥하시자 공이 사뢰었다. “재난이나 괴이한 일이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원망이 있어서입니다.

 

근래에 공채(公債)를 징발함이 너무 심하니, 재산을 탕진하는 것도 족히 재난을 불러올 만 합니다.” 임금이 깊이 받아들였다. 신해년(1491년) 여름에 문과별시(文科別試)를 관장하여 권세형(權世衡) 등 6인을 선발하였다.

 

임자년(1492년) 봄 3월 13일에 공이 병에 걸렸다. 임금이 내의에게 명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문득 4월 4일에 병이 위독해졌다는 말이 들렸다. 임금이 백경(伯慶)에게 편지를 보내 일렀다. “지금 정승의 증세를 들으니 할 말이 없구나. 하늘이 어진 재상을 빨리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니 슬픔과 울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늘이 만약 나를 돕는다면 어찌 다시 살아나는 이치가 없겠는가? 너희들은 망령된 의혹을 품지 말아라.” 중사(中使)를 보내 안부를 물었고, 또 승지(承旨)를 보내 훗날의 일을 물으니, 말을 할 수 없었다.

 

65세에 부고가 알려지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3일 동안 폐하였다. 부의로 관직을 더해주었고 장례를 도왔다. 태상시(太常寺)에서는 이름을 고쳐 ‘충정(忠貞)’이라 하였다. 사대부들은 서로 조정에서 조문하였고, 아래로 소모는 아이와 마부까지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는 의략장군 충좌시위사호군(宜畧將軍忠佐侍衛司護軍) 이발생(李發生)의 따님으로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상(常)이니 당양위(唐陽尉)로 명숙공주(明淑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백경(伯慶)으로 군기판관(軍器判官)이다.

 

공의 성품은 엄격하고 간결하고 신중하여, 말을 빨리 하지 않았고 안색을 급하게 바꾸지 않았다. 7-8세부터 이미 성인같이 훤칠한 모습이 있었다. 지금 좌상(左相)인 선성(宣城) 노공(盧公)은 공보다 한 살 많은데, 당시 함께 공의 외할아버지 공간공(恭簡公) 윤규에게 배웠다. 공간공은 밝게 안목이 있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크게 할 것이다. 노가 아이도 마땅히 현달하여 명예와 지위가 너와 함께 마침내는 서로 같아지겠지.” 이금 그 말이 부절을 맞춘 듯 들어맞으니, 세상에서 모두 기이하게 여기고 있다.

 

공은 기지가 영민하고 담론을 달하였으며, 풍채가 위엄 있고 의젓하여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재상 자리에 10여년 있는 동안 대체(大體)에 힘쓰고 세세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대사를 처리하는 데 큰 의심을 해결하는 것이 뼈에 붙은 살과 뼈와 살이 이어지는 곳을 가르는데 칼날을 놀리는 것이 넓고 넓은 것과 같았다.

 

부지런히 시속의 폐단을 용감히 진언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여러번 하늘의 힘을 돌려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게 한 것이 많았다. 공은 일찍이 경기·충청·전라·경상·평안·영안(永安) 6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해마다 순찰하고 살펴보며 출입하여, 부지런히 수고함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만족하였다.

 

청렴함과 간소함으로 스스로 단속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고 잡객(雜客)들을 끊었으며, 조정에서 물러 나와서는 관직이 없는 듯 조용히 바르게 앉아 좌우의 책들을 보며 편안히 지냈다. 시문은 청신(淸新)하고 간고(簡古)하였으며, 필법(筆法)도 진첩(晉帖)에 핍진하였다.

 

공은 재상에 오른 뒤로는 매양 성만(盛滿, 복록이 가득함)을 두려워하여 사직서를 올린 것이 십여 차례였으나, 임금은 바로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으니, 공의 ▨▨▨ 깊은 뜻을 볼 수 있다. 자제를 옳음과 바름으로 가르쳤던 까닭에, 당양위(唐陽尉)는 시례(詩禮)에 깊이 침잠하고 유자(儒者)의 본바탕을 힘써 행하여 교만함과 귀함을 더할 수 없었다.

 

여러 부마(駙馬) 중에서 가장 삼가고 경계하는 것으로 옛 친구를 대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신의(信義)로 친척들을 보살폈고, 은혜로 의지할 곳 없는 형의 아이들을 사랑해주었다. 공은 누이의 자식과 동생의 자식들의 혼인에도 힘을 써 함께 과거에 붙은 사람들과 경사스런 잔치를 베푼 일이 많았다.

 

아아! 공은 두 번 큰 공을 세워 벼슬자리가 가장 높은 곳까지 이르렀으니, 하늘이 보답함이 어그러지지 않았구나. 유독 수명에만 인색하여 장수를 누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믿기 어렵구나.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6월 22일 신유일에 양주부(楊州府)의 남쪽 아차산(峨嵯山)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동생 동지사(同知事) 흥(興)이 나 숙함(淑瑊)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구하였다.

 

숙함은 공과는 먼 친족관계에 있고, 더구나 나와는 서국(書局)에서 함께 문장을 다듬는 일을 하면서 사귄 교분이 있어, 나를 알아줌이 진실로 깊다. 그래서 의리로 보건대 문장이 졸렬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사양할 수가 없기에, 마침내 명을 짓는다.

명(銘)은 이러하다.

 

저 익성(益城)을 바라보니,

높고 우뚝하여라 산악이여.

맑은 기운 서려있어

이곳에서 큰 덕 있는 분이 나왔도다.

일찍이 용의 머리로 선발되어,

높이 이액(梨掖, 궁궐 안)을 밟았네.

난파(鑾坡, 궁궐 안)에서 초고를 적으매,

임금의 조칙이 윤이 났도다.

세조(世祖)에게 지우를 집어

총애를 듬뿍 받았네.

은대(銀臺) 에 들어가

임금의 목구멍과 혀가 되었지.

드디어 육부(육조)의 수장이 되어

명예와 지위 빛났도다.

창릉(昌陵) 을 도와 모반자들 없애버렸네.

나라를 맑게 하니,

그의 초상이 기린각(麒麟閣)에 걸렸도다.

성종(成宗)을 보필함에 이르러서는,

균축(鈞軸)에 올랐네.

암랑(조정)에 올라 명망 더욱 커지고,

공훈 세워 맹단에서 맹약하였다네.

앉아서 태평시대 오게 하였고

손으로 옥 촛대(태평세월의 기틀) 어루만지니,

재상의 업적이 드높고

임금의 돌아보심이 더욱 돈독하였다만,

커다란 운세가 갑작스레 다하여

하늘이 빨리 명을 빼앗아가니,

별이 상태(上台)에서 떨어져(상태성이 떨어져)

복록 없는 이 백성들을 슬프게 하였네.

당저(상감)께서 비애를 일으키시니,

귀감 삼을 사람을 길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네.

우뚝 솟은 산 울창하기만 하고,

세차게 흐르는 물 콸콸 흘러가기만 하는구나.

이에 이 언덕에 나아가

청오법(靑烏法, 풍수지리설)에 따라 점을 쳐서,

여기에 널을 두나니

바로 공의 깊고 그윽한 집이로다.

내가 나의 명을 지어

곧은 옥돌에 새기오니,

풍성한 훈공 위대하고 빛나

다함없이 밝게 보이리라.

 

홍치(弘治)기원 5년 임자년(1492년, 성종 23) 가을 8월 일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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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忠貞洪公神道碑銘(篆題)

 

有明朝鮮國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益城府院君 贈諡忠貞公神道碑銘 幷序

 

通政大夫禮曹叅議知製 敎李淑瑊撰

舍弟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洪興書幷篆額

 

大抵天之生偉人於斯世也必賦與以不世之才德開導以不世之際遇使之立不世之勳名以成不世之相業者固世之所絶無而僅有焉則其惟我益城忠貞公乎公姓洪諱應字應」之休休堂其號也有遠祖忠貞公諱子蕃爲高麗名臣高祖諱云遂益山君曾祖諱有龍 贈崇政議政府左賛成兼判義禁府事祖諱德輔 贈輔國崇祿領中樞府事考諱深 贈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觀象監事益山府院君皆以公勳故妣尹氏 贈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春秋館事坡平府」院君珪之女以宣德戊申九月初十日己未生公公生而頴異骨表英奇稍長讀書日記數百餘言大肆學力景泰辛未春中司馬試第二名連擢文科黃甲試授承議郞司諫院右正言」知製 敎尋陞左帶春秋館記事官是年冬轉集賢殿修撰知製 敎經筵司經壬申夏 上選集賢殿文士最英妙者六人 賜暇讀書山房官給供具使之肆意於經史百家貫穿該通以貯他日大用之材公首與其選累遷至朝散集賢殿應敎知製 敎兼 世子左文學春秋館記注官丙子夏罷集賢殿公只帶」左文學未幾丁內艱天順戊寅冬服闋授西班職帶春秋館記注官時 光陵會儒臣試藝公優等階加中訓試行成均館直講俄陞世子左弼善歷至右輔德庚辰夏旱甚有」雨上御思政殿引見宗宰令進爵謂權擥曰進君子退小」人擥對曰洪應君子人也上曰予己知而用之更擧他人擥曰臣所知止此耳是年秋陞守判宗簿寺事藝文館直提學知製 敎兼尙瑞少尹尋入爲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充」春秋館編修官兼判軍器監事知刑曹事 上卽引見公謂曰銓曹薦注非一予求人於六籍中擢汝授之辛巳秋累遷右承旨餘如故是年冬十一月日夜 王世子誕男 上喜甚卽」召公入 寢殿謂曰今日喜慶詎有既耶仍進一爵 賜公酒留公製赦文壬午春陞左承旨夏陞都承旨兼尙瑞尹知製 敎充春秋館修撰官兼判奉常寺事知吏曹事內直司樽院」事 上謂公曰近日予注意修武備軍士精鍊戎器亦完予無可憂但儒事或有廢弛者公對曰臣意謂勿數設科目取僥倖非才者且鄕學儒生雖年老者勿充軍額以儲養之 上曰」卿言良是其所以益廣學校之道爾其主之癸未夏超嘉靖吏曹叅判甞一日 上令諸宰相各陳時弊公進曰汰冗官時司諫院只存司諫知司諫正言各一員臣謂諫院實耳目之司」必湏聞見廣愽而後可以議是非論治體況臺諫備三員而後行公事舊例也今若只置三員則除有故外常未備員數何以得行公事且京中各有久任之法或一司四五員爲久任待」三年後得遆則京外官遷轉爲難況非才僥倖者久竊位食祿亦不可也又成衆官率皆勤仕七八年去官今刋經都監及醫方修正人等給別仕過多或半年去官皆授六品爵賞猥濫」莫此爲甚 上皆嘉納之秋帶同知春秋館事 世子右副賓客甲申秋陞左副賓客 上召公謂曰命汝敎世子汝年未老氣力不倦朝夕納誨汝其勉之成化乙酉夏加資憲刑曹判書餘如故丙戌春正月改官制帶 世子侍講院右賓客春秋館同知事丁亥夏五月逆賊李施愛獄起政院事務偬遽 特命公兼行都承旨事尋兼義禁府知事戊子冬十月 睿宗」初年康純南怡謀叛公管詔獄推鞫賊儻皆服其罪遂 賜推忠定難翊戴功臣鐵券十一月加正憲知中樞府事兼五都摠府都摠管益城君己丑春移吏曹判書兼 經筵春秋館」同知事今 上入承大統定筞扞公與有功焉秋遷議政府右叅賛餘如故庚寅春正月丁外艱壬辰春三月服闋 賜純誠明亮佐理功臣鐵券夏階陞崇政仍封君兼知義禁府事」俄陞判府事乙未春 上御經筵安彭命 啓曰史草不須秘密累瀆不己 上問公何如公對曰史官直筆不可不密若一開端弊終難禁上然之夏階加崇祿冬遷行吏曹判書餘」如故丁酉夏轉議政府右賛成兼知 經筵事冬掌別試取明經科權景禧等五人戊戌夏陞左賛成冬階加」輔國崇祿領中樞府事兼領 經筵事益城府院君己亥秋大匡輔國崇祿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乙巳春陞左議政 世子傅餘如故丙午冬承旨 啓死囚刑案 上曰獄囚死者多是必官吏濫刑不謹存恤而致然也公曰凡今守令若」認爲盜賊不分眞僞亂加捶楚以致死者比比有之古云明愼用刑而不留獄請論各道令速決了 上從之 上御經筵公 啓曰近來法綱甚密須務寬大且古者三輔赤縣京兆主」之今市井非違請令漢城府紏察 上從之戊申春 上御經筵公 啓曰災異之出多因寃枉近來徵公債太甚蕩盡財産亦足以召灾也 上深納之辛亥夏掌文科別試取權世衡」等六人壬子春三月十三日公遘疾 上命內醫治療隨證輙以聞四月初四日病革 上賜伯慶書曰今聞政丞證勢罔知所語念天之速奪賢相不勝悲淚天若祐我豈無更生之理」汝等勿妄爲之惑遣中使問候又遣承旨問後事則不能言矣壽六十五訃聞 上震悼輟朝市三日賻贈有加官庀葬事太常易名曰忠貞士大夫相與吊於朝下至牛童馬卒莫不痛」惜配貞敬夫人李氏宣畧將軍忠佐侍司護軍李發生之女先公歿生一男曰常唐陽尉尙明淑公主生一男曰伯慶軍器判官公性嚴凝簡重不疾言遽色自七八歲己嶷然如成人」今左相宣城盧公長於公一年時與同游學公之外舅尹恭簡公炯有具眼一見異之撫公頂曰汝必大吾門戶盧家兒亦當遠到名位與汝終相埒矣至是其言如合符契世皆奇之公」有機警善談論風彩表儀儼然人望居相位十有餘年務存大體不喜紛更處大事決大疑剖析肯綮游刃恢恢孜孜以敢言陳弊爲己任屢有囘 天之力裨益治道者多矣公甞爲京」畿忠淸全羅慶尙平安永安六道都體察使逐年巡按出入勤勞不一而足淸簡自守關節不行門絶雜客朝退若無官蕭然端坐左右圖書晏如也爲詩文淸新簡古筆法亦逼晋帖公」自入相府每以盛滿爲懼上書辭職者凡十有餘次 上輙批答不允亦可以見▨▨▨止之深意矣敎子弟以義方故唐陽沉潜詩禮服勤儒素不以驕貴加人諸駙馬中最以謹飭」聞待故舊以信義撫親戚以恩愛伯氏孤子窮無所歸公辦資裝婚娶姊氏子與季氏子同榜中第公設慶席燕賀物論多之嗚呼公再做元勳位極上台天之施報亶不爽矣獨靳其壽」不使享胡考是難諶也可勝惜哉六月二十二日辛酉葬公于楊州治之南峨嵯山之原公之弟同知事興徵淑瑊神道碑銘淑瑊於公葭莩之屬且有書局筆硯之雅知待實深義不可」以文拙辭遂爲之銘曰

 

瞻彼益城 峻極維岳 淑氣鍾靈 生此碩德 早選龍頭 高步梨掖 視草鑾坡 絲綸潤色 知遇 光廟 偏荷 寵渥 旋入銀臺 爲喉爲舌」遂長六部 名位燀赫 左右 昌陵 誅鋤牙蘗 克淸大憨 圖形麟閣 逮相 聖朝 立登鈞軸 巖瞻望重 預勳明喢 坐致大平 手調玉燭 相業其隆 睿眷逾篤」大數遽窮 天奪之速 星殞上台 哀民無祿 當宁興悲 一鑑永失 峨山盤欝 峨水汩 潏 爰就斯原 靑烏乍卜 于以厝之寔公玄宅 我撰我銘 貞珉是勒豐」功偉烈 昭示無極。

 

弘治紀元五年壬子秋八月日立石

 

 

 

 

 

 

↑배위 정경부인 안성이씨 묘 : 홍응 묘 바로 아래에 위치함/소재지>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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