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이손신도비명 병서(李蓀神道碑銘幷序)-廣州人

야촌(1) 2015. 12. 23. 06:04

증시 호간공 이손신도비명(贈諡胡簡公李蓀神道碑銘幷序)

 

유명조선국병충분의정국공신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한산군증시호간공 신도비명 병서

 

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수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이행은 글을 짓고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김희수가 글씨를 쓰다.

 

공의 휘는 손(孫)이요 자는 자방(子芳)이며 성은 이씨이고 광릉인이다. 증조의 휘는 양중(養中)이니 고려에서 형조 좌참의이고, 조선조의 혁명이 있은 후 태조와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부의 휘는 우생(遇生)이니, 사온주부이며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았고, 선고의 휘는 수철(守哲)이니, 평안도절도사로서 의정부좌찬성의 증직을 받았다. 모친은 양성이씨이니 관찰사 맹상(孟常)의 딸이다.

 

부인은 익재(益齋) 이문충공의 6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담(儋)이며 승정원 우부대언이며, 조부의 휘는 희(暿)이니 경상도관찰사요. 부친은 계반(繼潘)이니 용양위섭호군이다.

 

모친은 함안윤씨이니 현감 한(澣)의 따님이다. 공의 나이가 부인보다 2세가 더 젊다. 부인이 작고한 후 2년만에 공께서 돌아가셨는데 다 같이 수를 82세를 누렸다.

 

아! 공이 30에 벼슬길에 올라 나라를 받들어 일 한지 50여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 높은 품계까지 올랐다.

부인은 20세에 시집와서 집안을 다스린지 60여년에 한 가지 허물도 없이 큰 복을 받았으니 사람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공은 기묘년(1459)에 진사가 되었고 학문하는 여가를 틈타서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하여 세조가 명하여 선전관에 보하였다. 성종 때에 원종공신에 뽑혔고, 경진년(1460)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옮겨 다니며 예조좌랑, 도총부 경력, 봉상시 부정으로 또 김해부사를 거쳐 승문원 판교로써 장례원 판결사로 승진하고, 이로부터 출입하고 실천하는 것이 모두 한때의 중대한 책임이었다.

 

병마절도사가 된 것은 충청 함경의 양도였고, 관찰사가 되었던 것은 충청 황해 전라의 3도였으며, 근시(近侍)에 참여한 일이 두 번이니 홍문관부제학과 승정원승지다. 여러 조(曹)를 거친 것이 5조인데 호조의 참의, 예조와 이조의 참판, 형조와 병조의 판서이다.

 

성상이 중흥하니 공께서 마침 병조판서로 있었다. 공훈을 기록하여 병충분전정국공신의 호를 내리고 숭정대부로 위계가 뛰어올라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얼마 안 있어 의정부 우참찬에 제배하였다.

 

노경에 이르러 쉬기를 청함에 왕이 명하여 궤장을 하사하고 착실히 타일러서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좌찬성에 승진시켜 공의 넓은 도를 표하였다. 조석으로 3공의 자리에 같이하게 하였다.

 

공이 너무 성하고 가득한 것을 두려워하여 표를 올려 하직하고, 평민 되기를 재삼 간절히 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위로하고 그대로 있기를 권하였다. 얼마 있다가 뜻을 굽히지 않고 병으로 사양하니 왕이 어찌 할 수 없어 자리를 바꾸어 판중추부사를 삼고 한산군(漢山君)으로 한가로이 몸을 보양토록 한지 4년 만에 생을 마쳤다.

 

병환이 중했을 때 왕이 의약을 내리도록 명하였고, 부음을 듣고 조회를 2일간 거두었다.

관에서 장사를 도와주도록 하고 봉상시에서 시호를 호간(胡簡)으로 내렸다.

 

슬프도다. 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며, 마음가짐이 공경하고 근엄하였다. 그가 집에 있을 때면 어버이 섬기기에 효도로 하고, 형제간에 우애로 처하며, 은혜로 모든 일가간에 화목하게 지냈다. 조금도 소원함이 없었고, 병들고 죽고 상을 당했을 때 구원해주는 것이 지극하였다.

 

평상시에 집에서 먹고 지내는 사람은 또한 수십 인이어서 양식이 여러 번 떨어져도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과 의논하기를 기뻐하였는데 말씀이 간결하여 권태를 느끼지 않게 하였다. 질병이 아니면 하루라도 내실에 있지 않았고, 관무(官務)를 볼 때에는 대체를 가지고 일을 처리하였다.

 

잡다한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큰 의론을 결정하기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송사(訟事)를 들을 때면 번거로운 것을 잘라 없애고, 중요한 것만 뽑아서 갈라서 판단하기를 신명하게 하니, 이속(吏屬)들은 간사함을 용납하지 못하고 백성들은 원정(怨情)을 품음이 없었다.

 

치민(治民)하는 데는 관대하면서도 방종하지 않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가혹하지 않았다. 약한 것을 소생시키고 막힌 것을 풀어서 큰 궤도로 돌려놓았으므로 가는 곳 마다 반드시 칭찬받는 치적을 올려 모두 칭송하였다.

 

총명한 성품은 천부(天賦)에서 나온 것이므로 한번만 이목을 거친 것이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국가의 역사적인 문화 물질로부터 산천과 도리(道里)며, 민정과 물상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모두 연구하여 무릇 질의를 하는 일이 있으면 응답하기를 즉각 산울임같이 하여 조금도 실수가 없었다.

 

후진들이 모르는 것을 점쳐서 알아맞히듯 물어 보았다. 늙은 후에 영상 유순(柳洵)과 판서 안침(安琛)과 여러 노정치가로 구노회(九老會)를 만들어 매 양간과 가절에 자질들의 손을 잡고 유쾌하게 서로 왕래하며 즐겨 놀고 지내니 일세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부인께서는 탄생 할 때부터 영특하고 엄숙하게 자라나서 온순하고 아름다웠다. 부모가 신기하게 생각하며 말하기를 “이 여아는 보통 사나이와는 짝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 광릉의 이씨가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거족으로서 절도사공(節度使公)이 종사(宗祀)의 중함을 생각하고, 공을 위하여 어진 맏며느리 감을 고르더니 부인을 만나서 말하기를 “족히 우리 집안일을 맡겨서 근심할 바 없을 것이다” 하였다.

 

부인은 위로 구고(舅姑)를 받들고 곁으로는 시누이와 동서를 접하며, 아래로는 비복(婢僕)을 어루만지는데 정의를 다하였다. 안팎으로 깔금하며 말이 안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잡다한 일로 부군을 괴롭히지 않으니, 공께서 많은 복을 누리며 시작부터 끝까지 예로써 살아간 것이 또한 부인께서 뜻을 잘 받들어 드린 데서 온 것이다.

 

병환이 나서 모든 자녀들이 의원을 청하고, 하늘에 빌 것을 행하고자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내 나이 80이 넘었고 귀하고 영화롭게 살아왔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 어지심이 이와 같았다.

 

공은 정통 기미년(1439) 12월 20일에 탄생하여 정덕 경진년(1520) 정월 22일에 졸하였다. 이해 4월 초 4일에 장사지내고, 부인은 정통 정사년(1437) 7월 10일에 탄생하여 정덕 무인년(1518) 2월 18일에 졸하였다. 이해 4월 28일에 장사지내어 이분동영(二墳同塋)인바 광주 동쪽 무갑산 간좌곤향의 언덕이다.

 

공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수언(守彦)은 등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공보(公輔)로 기대하였으나 40이 못되어 일찍 작고하였다. 차남 순언(純彦)은 내자시 부정이요, 다음은 온언(溫彦)인데 재명이 있었으나 과거도 못보고 일찍 세상을 떴다.

 

다음은 성언(誠彦)인데 등제하여 정국공신에 참여하였으며 수원부사가 되었다. 장녀는 성윤조(成允祖)에게 출가하였으니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부우윤을 하였다. 다음은 권견(權肩)에게 출가하니 사헌부감찰이요, 다음은 신엄(申儼)에게 출가하니 과거에 급제하여 군자감이다. 측실의 아들 방산(方山)은 충좌위사과요, 집의의 아들은 경(經)이니 장례원사의요,

 

다음 위(緯)는 사헌부감찰이요, 부정의 아들은 강(綱)이니 음죽현감이요, 다음은 기(紀)이니 무과로 철산군수요, 내외손이 78인이다. 아! 적선의 보답이 어지 아름답지 않으랴. 명(銘)에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 뿌리 북돋우면 그 가지 번성하지 않으랴

흐르는 물 길고 길게 하려면 그 근원이 깨끗해야 하느니

광릉 땅에 자리 잡은 그 선조 이아니 덕문인가.

 

참의공께서 절의 지켜 은둔함은 그 시대의 돈색(頓塞)함이었다

그 보답 받지 못하여 후손에게 내려주었네

그 사람 어찌 되었던가 수(壽)와 덕과 벼슬 높았네.

 

그 부인 누구신가 익재(益齋)선생 후손이라네.

훌륭하신 두 분이 서로 만나 벼슬 높아 영광 누리셨네.

모든 사람 자랑삼아 좋아하나 공께서는 조심하고 경계하였네.

 

아름다운 명성을 보존하고 예우 받고 자주 등용되었고

공의 높으신 그 덕은 부인께서 이것을 이어받고

공의 크고 큰 그 복은 부인께서 다같이 받으셨네

 

훌륭한 그 아들 그 손자여! 이어서 내리고 또 이어졌네

비석에 글로 새겨 세워놓고 오는 사람 다 같이 고증하리라.

정덕(正德) 15년 경진(1520) 5월 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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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原文)

 

胡簡公神道碑

 

有明朝鮮國秉忠奮義靖國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漢山君 贈諡胡簡公神道碑銘幷序

 

嘉善大夫工曹參判兼 同知 經筵春秋館義禁府事守弘文館大提 學知成均館事李荇 撰

 

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希壽 書

 

公諱蓀字子芳姓李氏廣陵人曾祖諱養中高麗刑曹左參議我朝革命 太祖 太宗累徵終不紀祖諱遇生司醞注簿贈吏曹判書考諱守哲平安道節度使贈議政府左贊成妣陽城李氏觀察使孟常之女夫人益齋李文忠公六世孫贈祖諱擔承政院右副代言祖諱暿慶尙道觀察使考諱繼藩龍驤衛攝護軍妣咸安尹氏縣監瀚之女公年少夫人二歲至是後夫人二歲卒並享壽八十二鳴呼公三十而仕奉國五十餘年不敢少懈以隮崇品夫人二十而笄治家六十餘載罔有 一愆永膺厚福人咸曰難矣哉公登己卯進士學問之餘又善弓馬 世祖命補宣傳官參 成宗朝原從功臣擢庚寅文科累轉禮曹正郞都摠府經歷奉常寺副正調金海府使由承文院判校陞掌隸院判決事自是出入踐履皆一時重任其爲兵馬節度使者曰忠淸咸慶凡兩道爲觀察使者曰忠淸黃海全羅凡三道參近侍者再曰弘文館副提學承政院承旨歷諸曹者五曰戶曹參議議禮吏曹參判刑曹兵曹判書 聖上中興公方判兵曹錄勳賜秉忠奮義靖國功臣號超堦崇政封漢山君未幾拜議政府右參贊年至請老 上命賜几杖敦諭不許旣而陞左贊成貳公弘道朝夕台鉉公益懼盛滿上表乞骸骨至再三愈懇 上賜敎書慰勉留之俄進堦崇綠公猶執先志辭以疾 上不得已遆爲判中樞府事以漢山君就閑頣養者凡四年而終疾革 上命賜醫藥訃聞輟朝二日官庀喪事太常諡曰胡簡鳴呼公性稟寬厚心存敬謹其居家事親以孝處兄弟以友恩育諸族不間疎遠疾病死喪護救備至常食于家者亦不下數十人家儲屢空略不爲意喜與人論說諄諄不知倦非疾病未嘗一日處於內其居官務持大體不事細察至決大議未嘗小撓其聽訟剔繁攝要剖斷如神吏莫容奸民無隱情其治民寬不至縱威不至荷蘇羸馭梗納之大軌故所至必有聲續盡可稱述聰明之性出於天賦一經耳目終身不忘國家典故文物以至山川道里民情物狀纖悉究到凡有疑質應苔如響無少遺失後進者倚以爲蓍蔡焉旣老與柳領相洵安判書琛及諸老之少時同遊南庠者結爲九老會每良辰佳節扶携子姪迭相往來爲娛一世稱爲美事夫人生而英肅長而溫慤父母異之曰此女不可以儷凡子廣陵之李爲世巨族節度公思惟宗祀之重爲公擇賢家婦得夫人喜曰足以付吾家事無憂矣夫人上奉舅姑芳接娣姒下無婢僕曲有禮意內外斬斬言不踰梱不以纖芥累君子公之享有多社終始以禮者亦夫人善承之也旣疾諸子請迎醫行禱夫人曰吾 年有八十榮貴亦至有何所望意不肯其亦賢矣哉公以正統己未十二月二十日生正德庚辰正月二十二日卒是年四月初四日葬夫人以正統丁巳七月初十日生正德戊寅二月十八日卒是年四月二十八日葬異墳同塋乃廣州治東無甲山艮坐坤向之原也生四男三女長粹彦登第官至司憲府執義人以公輔期之未四十而歿次純彦內資寺副正次溫彦有才名未第而夭次誠彦登第參靖國勳以水原府使坐封()罷女長適成允祖登第終漢城府郵尹次適權肩終司憲府監察次適申儼登第終軍資監正側室子方山忠佐衛司果執義有子曰經掌隸院司議曰緯司憲府監察副正有子曰綱陰竹縣監曰紀登武科鐵山郡守內外孫總七十八人鳴呼積善之報寧有艾邪銘曰

 

執倍其根 面枝不繁 欲流之長 在濬厥源 廣陵之先 是謂德門 參議高蹈 匪時之屯 不食其報 以遺後昆 其人伊何 爲世達尊 其配伊誰 益齋之孫 二大相偶 犀帶魚軒 衆人所矜 公戰以兢 保有令聞 禮備數登 我公之德 夫人是承 我公之福 夫人與膺 曰子曰孫 繼繼繩繩 刻石墓左 來者有徵。<끝>

 

옮긴이>이재훈

 

 

▲한산군 호간공 이손 묘역(漢山君 胡簡公 李蓀 墓域)

   광주시 기념물 제호 /광주군 초월읍신월리山22-1

 

 

 

■이손 신도비(李蓀) 神道碑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군 초월읍(草月邑) 신월리(新月里) 山22-1

◇건립연대 : 1520年(중종 15)

◇찬 자 : 이행(李荇)

◇서 자 : 김희수(金希壽)

◇크기 : 총고 267cm, 비고 164cm, 폭 70cm, 후 22cm

◇서자경(書字徑) : 전자(篆字) 13.0cm, 음기(陰記)3.0cm

◇재질(碑材質) : 이수(螭首)·비신(碑身) : 대리석,

                                대석 : 화강암

1520년에 건립된 이 비는 귀부이수(龜趺螭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수 앞면에는 용 두 마리가 가운데의 여의주를 마주 올려다보고 있는데 운문(雲紋)에 감싸여 있고, 뒷면도 동일하며, 측면에는 용꼬리와 운문이 있다.

 

귀부는 거북머리가 앞을 직시하고 목의 주름이 굵게 하나가 접혀 있으며, 앞ㆍ뒤 다리는 몸통에 부조형태로 각(刻)하여 붙였고, 꼬리도 왼쪽으로 들어 올렸다.

 

조선 중기에 건립된 비좌하엽(碑座荷葉)의 묘표가 각각 1기씩 있으며 조선 중기에 제작된 정경부인 경주이씨의 묘지석(墓誌石) 4편은 남곤(南袞)이 묘지명을 지었으며, 김노(金魯)가 백자(白磁) 편에 글씨를 썼고, 묘소 입구에는 고덕재(高德齋)가 있다.

 

백암두루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