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송암 김면 장군 신도비명 - 채제공(蔡濟恭)

야촌(1) 2014. 6. 21. 12:43

증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절충장군 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송암 김공 신도비명 병서

 

공의 휘는 면(沔)이요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이다. 김씨는 본래 신라왕 후예인지라 신라가 망하니 자손이 흩어져서 국내의 각처에 살았는데 고령에 사는 이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하였다.

 

휘 남득(南得)이 있었는데 고려조 말기에 드러나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으로 책훈되었는데, 공의 7세조이다. 증조는 감찰을 지내고서 증 참판인 휘 장생(莊生)이요. 조(祖)는 도승지 휘 탁(鐸)이요. 고(考)는 부사(府使)를 지내고 증 좌찬성(左贊成)인 휘 세문(世文)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김해김씨로 판관 중손(仲孫)의 따님이다.

 

공은 기량이 높고 강개(慷慨)하여 큰 절의(節義)가 있었다. 글을 읽음에 문장에만 힘쓰지 아니하고 조용히 성현의 요결(要訣)을 궁구하고 더욱 이정(二程=북송의 유학자,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칭함 )의 글을 즐거이 읽고 말하기를 “행위처사를 이에서 얻으면 큰 과실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젊어서 남명(南冥)을 스승으로 하고 한강(寒岡)과 벗하여 조행(操行)이 독실하니 사방에서 배우는 자가 모여들었다. 향민들도 아름다운 덕에 훈습(薰習) 되어 서로 경계하기를 “옳지 않는 일을 하지 말라 송암선생이 두렵다”고 하였다.

 

처음에 효렴(孝廉=효성스럽고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종묘. 능침. 원의 영을 관리하는 벼슬로 參奉등의 통칭)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선조 즉위 초에 널리 유현(儒賢)들을 가려서 六품직에 올렸는데 조월천(趙月川). 성우계(成牛溪=成渾). 정한강(鄭寒岡=鄭逑). 이연봉(李蓮峯=李基卨)과 공(公)이었다.

 

처음에 공조좌랑(工曹佐郞-正六品)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윽고 처음과 같이 배수(拜受)하여 부름이 도타우니 한번 부임하였다가 사직하고 돌아와서는 그대로 종신하려 하였다. 만력 임진(宣祖 25年/1592) 四월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니 우리의 열진(列陳)이 무너져서 종사(宗社)의 존망이 경각에 놓이게 되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이 위급한데 신하로서 죽음을 마다한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하리오” 하고는 드디어 조공 종도(趙公 宗道). 곽공 준(郭公 䞭). 문공 위(文公 緯)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니 한 달이 못되어서 군사가 수천 명이 되었다. 이때에 왜적은 지례(知禮-경상북도 김천지역의 옛 지명). 금산(金山). 개령(開寧-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옛 지명)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르기를 십만이라고 하였다.

 

공이 군사를 이끌고 우지(牛旨)에 진을 쳤는데 호령이 엄명(嚴命)하여 기거동작이 엄연하여 군소리가 없었다. 적장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아군을 공격해 오므로 공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더불어 싸워서 적의 세력을 꺽으니 군세가 비로소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에 곽공(郭公) 재우(再祐)도 의병을 일으켜 서로 호응하였는데, 도백(道伯=관찰사) 김수(金晬)와 서로 미워하여 격서(檄書)를 돌려 김수의 죄를 들고 김수 또한 곽공의 단점을 행재소(行在所)에 치계(馳啓)하였다. 공은 왜적을 물리치는 일이 아직 멀었는데 내홍이 일어남을 근심하여 곽공에게 글을 보내어 곽공도 깨닫고서 인책하는 마음을 풀어서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공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적과 정진(鼎津)을 끼고 진을 치니, 백성들이 나무를 베어서 무기를 만들고 대나무로서 깃대를 만들어 따라 붙는 자들이 저자군 같았다. 곽공이 장좌에게 말하기를 김의장(金義將)이 강하나 사이를 두고 진을 치고 있는데, 그 주책(籌策)이 어떠한가 모르겠다 하고 곧 십 여기를 따르게 하여 공의 진문을 두드렸다.

 

공이 장막안으로 맞아들여 대담하여 기쁨을 나누다가 자리를 파(罷)하였다. 곽공이 물러나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엄의(嚴毅)하도다 그 모습과 품성이 안한(安閒)하고, 그 기백이 어느 사람과 다르니 이 분을 믿지 않고 누구를 믿을 것인가“ 하였다.

 

공이 조종도(趙宗道)에게 일러 주기를 “적은 많고 우리의 수는 적으니 꾀로서 치지 않으면 쉽게 파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곧 장사를 시켜 사방(四方)에서 둘러싸고 북과 호각과 고함을 쳐서 응원병이 사방에서 모이듯이 꾸미고 바람을 따라 빈배 십여 척을 띄워 적진에 가까워지게 하였다.

 

적이 고각(鼓角)소리를 듣고 의아해 하다가 “이는 우리를 유인하여 강을 건너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하여 회군하려는데 공이 갑자기 강을 건너서 분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적이 서로 밟아 죽이기도하여 그 시체가 삼십 리레 가득하였다. 공은 승세를 타고 무계(茂溪)에 진을 치니 얼마되지 않아 적선이 강을 덮어왔는데 이는 정진(鼎津)의 분패를 갚으려 함이다.

 

공은 장좌에게 이르기를 “원컨대 제군은 한 번 죽음을 각오하라”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이 헤아릴 수 없이메워서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적이 실어가던 많은 재화를 얻었는데, 모두 방백(方伯)에게 보내어 행재소에 바치게 하였다.

 

六월에 조정에서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삼았는데 그 교서에 이르기를 “정진에서 양병(揚兵)함에 적은 넋을 잃었고 무계(茂溪)에서 칼을 휘두름에 시체가 강을 메웠다”고 하였다. 행조(行朝)가 비록 수 천리 밖에 있었지마는 공의 전적이 매우 드러나서 자세히 알고 있어서 九월에 장악원정(掌樂院正-正三品)을 배수하고 얼마 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삼품당상관)에 올랐다.

 

十一月에 왕께서는 공의 위망이 가장 현저(顯箸)하니 의병대장(義兵大將)의 호를 특별히 내리면서 그 교서(敎書)에 천백언(千百言)의 장려가 갖추어졌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깊은 원수를 갚고 구업을 회복하는 것이 그대가 아니고 누구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교서를 읽고 또 읽어 눈물을 흘리니 온 군중이 흐느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 정인홍(鄭仁弘)이 동시에 기병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공의 명성과 위망이 자기 위에 오름을 꺼려서 혐오하고 그 휘하들이 허위를 날조하여 헐뜯었으나 공은 하나같이 계교(計較)하지 않으니 인홍도 끝내 사색(辭色)으로서 대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공은 글을 호남백(湖南佰)에게 보내어 군량과 원병을 청하였는데, 사지(辭旨)가 강개하여 구구마다 눈물이었다.

 

그런데도 호남백이 듣지 않으니 공은 더욱 분려(憤勵)하여 기계를 수선하고 병사를 장려하여 지례(知禮-경상북도 김천지역의 옛 지명)를 무찌르고 개령(開寧)을 공격하였다. 영·호남의 여러 의장과 더불어 四도에서 징격하여 적의 소굴을 소탕하자고 약속하였는데 제의장이 기약대로 오지 않았다.

 

공은 홀로 군사를 지휘하여 나아가서 죽이고 얻은 바가 많았다. 이로서 고령 지례 금산 등 읍을 수복하였다. 왕은 그 공적을 장하게 여겨서 거느린 부대로서 근왕(勤王)케 하니 공이 곧 행장을 갖추고, 떠나려 하니 백성들이 듣고서 울면서 말하기를 “공이 여기 있지 아으면 우리는 어육(魚肉)이 됩니다” 하니 관찰사 김공 성일(金誠一)은 급히 행재소에 아뢰어 “김면이 본도를 한발이라도 떠나면 남방은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명령하여 공을 본부에 머물러서 공적을 마저 이루도록 하였다.

 

공은 군읍(郡邑)을 순행하여 흩어지고 도망간 병졸을 불러 모았으며 눈비와 서리에 폭로(暴露)하여 몸을 돌보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의 행차가 선산을 지나가니 수령이 제수를 갖추어 기다리니 공은 그를 물리치고 이르기를 “능침(陵寢)에도 향사를 궐하는데 내가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겠는가” 하고 글로서만 고유하였다. 처자가 굶주리도 방랑하여 십리 안에 있어도 끝내 들리지를 않았다.

 

계사년(선조 26/1593) 정월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제수하고 선전관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명나라 원병이 이미 평양을 이겼으니 경성의 적이 마침내 반드시 도망칠 것이다. 경은 정예병을 매복하여 하나라도 돌아감이 없게 하라” 하니 공은 수임이래로 오직 은혜를 잡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이때에 성산(星山 =星州)의 적을 무찔러서 목 베임이 수백 급이었다. 다구쳐서 선산(善山)에 진박(進薄) 함에 깊이 들어감이 멈추지 않으니 관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바야흐로 적세가 성한데 어찌 서서히 하지 아니하오” 하니 공은 분연히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고서 어떻게 범의 새끼를 얻을 수 있겠소” 하고는 이미 여러 의장과 약속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마침내 三월 十一일에 진중에서 운명하였다.

 

바야흐로 병세가 위독할 때에 조공(趙宗道)이 손에 약사발을 들고 권하면서 “공이 만약 회복하지 못하면 국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이 억지로 일어나서 조공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내가 그대들과 함께 나라에 몸을 받쳐 왜적을 소멸하고 주상의 은혜에 보답하자고 맹세하였는데 불행하여 나의 수명이 여기서 마치니 이는 천명이로다” 하고 눈물을 흘리니 수하 군교와 좌우 시자(侍子)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를 못하였다.

 

이어 조공에게 부탁하기를 “적이 내가 죽은 줄 알면 반드시 틈을 타서 엄습할 것이니 나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서 신창(新倉)에 이르러서 발상하라” 하고서 운명하였다. 모든 장좌가 유명에 따라 시신을 받들고 신창에 돌아와서 비로소 발상하니 온 군중이 통곡하고 백성들은 발을 굴리면서 슬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찰사(金誠一)가 치계(馳啓)하여 아뢰기를 “강우 일대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다 김면의 힘입니다. 장성이 한 번 무너졌으니 하늘이 순(順)을 돕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홀로 남아서 어찌 꾀할까를 모르겠습니다“ 고 하였다. 왕께서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특별히 명하여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一等)으로서 고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가증하였다.

 

광해 초에 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는데 공의 향년은 五十三세요 모향모원(某鄕某原=고령선영하)에 장사하였다. 조공 종도(趙宗道)와 곽공 준(郭䞭)이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어도 굴하지 아니하고 죽었는데 그 충신(忠信)은 서로 생사로 맺어져서 서로 져버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평일에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 들났으니 황고(皇考) 찬성공이 북진(北鎭=慶源府使)에서 졸하였을 때에 모부인을 뫼시고 영남 수천리에 날씨 또한 매우 더웠는데 공이 말도 타지 않고 도보로 호곡하며 달려가니 행로의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겼다. 뒤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서도 슬퍼하고 예를 다하기를 전상과 같이 하였다. 일찍이 공은 집 뒤의 산기슭에 대를 쌓고 호선대(懷先臺)라 하고 선영을 첨망하여 평생토록 사모함을 그렸다.

 

아!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는 오직 충과 효이거늘 바야흐로 공이 아버지의 상을 분상함에 수천리를 도보로 갔다는 것은 이치에 마땅히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마침내 죽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이 공을 효성에서 죽게 한다면 뒷날 국가가 망하려 할 적에 엎어지는 것을 붙들어 일어킬 임무를 질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끝내 이 왕사(王事)에 정성을 다하여 진력하다가 죽어서야 그쳤다. 공이 효에 죽지 않고 충에 죽게 한 것은 하늘이 우리 국가를 사랑해서 한 일일 것이다. 공이 몰한지 七십 여년에 사림이 고령에 사우(祠宇)를 세워 조두(俎豆)로서 제향 함이니 도암서원(道巖書院)이다.

 

공이 무릇 장가를 두 번 들었다. 전배(前配)는 완산이씨(完山李氏=全州李氏) 부호군(副護軍) 황(煌)의 딸이고 후배(後配)도 완산이씨 부림부수(缶林副守) 건(建)의 딸인데 모두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아우 현령(縣令) 자(滋)의 아들 의립(毅立)을 후사로 삼았으니 그의 벼슬은 현령(縣令)이다. 의립의 장남은 정황(鼎黃)인데 동지중추(同知中樞)요 사위는 참의(參議) 오정(吳靖)이다. 증·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나에게 신도(神道)를 빛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六세손 절도사(節度使) 자(梓)이다. 명하여 가로되,

 

학문에 체와 용이 있으니(學有體用) 어찌 한갓 사물일까(豈伊死物)

만나는 바 본분 다 하면(所遇盡分) 그 근원은 하나이라(其原也一)

 

공이 예적 정좌하고(公昔靜坐) 주자학하시더니(曰朱曰程)

몸 일어켜 크게 부르짖음(起身大號) 의려 많이 모였네(義旅雲聚)

 

정진에서 적을 죽여(殺賊鼎津) 피바다 이루었고(履腸(俗子)涉血)

무계에서 적을 꺽어(摧鋒茂溪) 적들이 어오의 밥이 되었네(賊飼魚鰲)

 

왕께서 용만에 계셨지만(王在龍灣) 뛰어난 공적 들어시고(茂績升聞)

대장의 호 내리면서(錫號大將) 교서 함께 주시었네(誥綍從天)

 

공이 울음으로 배수하고(公拜以泣) 노둔하고 잔열하다 사양하니(臣駑且孱)

왕의 말씀 사양마오(王曰母讓) 그대 나의 장성이니(爾予長城)

 

무엇으로 사랑하리(寵爾維何) 호절과 아기일세(虎節牙旌)

공이 대담하여(公有斗膽) 적굴을 개미처럼 보고(蟻視賊窟)

 

우리 의장 합심하여 (同戌義將) 며칭 안에 소멸하려 했는데(不日掃滅)

천운인가 시운인가(天耶時耶) 공이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니(公不起疾)

 

군과 민의 호곡은(軍民號哭) 소가 부르짖고 우레가 터지는 듯(牛吼雷裂)

왕 또한 애도하시어(王用悼惜) 찬란한 벼슬을 추증하셨네(有爛追爵)

 

공이 옛날 정을 주로 할 때는(公昔主靜) 소상인양 앉았더니(坐泥塑若)

 

묘용을 좀 베푸심에(略施妙用) 우리 사직 붙들었네(抉我社稷)

조두가 엄연하니(俎豆有儼) 그 덕에 보답일까(亦云報德)

 

이를 명해 보여서(銘以(口示)之) 후학이 본보기 하노라(後學之則)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부 채제공 찬

 

●채제공(蔡濟恭) : 1720(숙종 46)∼1799(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 字는 백규(伯規) 號는 번암(樊巖). 문과에 급제하

   여 여러 요직을 지낸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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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原文)

 

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慶尙右道兵馬節度使松庵金公神道碑銘.

 

公諱沔。字志海。自號松庵。金氏本新羅王者之後也。羅亡。子孫散處國中。而居高靈者仍以高靈籍焉。有諱南得。顯於麗季。策勳封高陽府院君。公之七世祖也。曾祖監察贈參判諱莊生。祖都承旨諱鐸。考府使贈左贊成諱世文。妣金海金氏贈貞敬夫人。判官仲孫之女也。公氣度峻毅慷慨有大節。讀書不務章句。默究聖賢旨訣。尤喜讀二程書。常曰行己處事。於是焉得力。可以無大過矣。弱冠。以南冥爲師。寒岡爲友。操履日篤。四方學者多歸之。鄕人薰襲德美。相戒曰。而毋爲不善。恐松庵先生知之也。初擧孝廉除寢郞。不赴。宣廟初卽位。晉擢儒賢。並陞六品職。趙月川,成牛溪,鄭寒岡及公也。初授工曹佐郞。辭不赴。已而。拜如初。敦召愈勤。黽勉一謝以歸。若將終身焉。萬曆壬辰四月。倭大擧寇。我列鎭無不奔潰。宗社呼吸存亡。公涕泣曰。君有急而臣不死。烏在其讀聖人書也。遂與趙公宗道,郭公䞭,文公緯倡義聲。不旬月而有衆數千。時賊屯知禮金山開寧界。號爲十萬。公引軍壁牛旨。號令嚴明。坐作進退。肅然無譁。賊酋盛其衆欲以乘我。公與晉州牧使金時敏。逆戰挫之。軍聲始振。當是時。郭公再祐。亦起義兵以相應。而與道伯金睟不相能。移檄數睟罪。睟亦列郭公短。馳啓行在。公憂外寇未殄。內閧先作。貽書郭公諭止之。郭公悟立引咎釋嫌。事得已。公提兵進。與賊夾鼎津對壘。民斬木揭竿。歸附者如市。郭公語將佐曰。金義將與賊隔一水陣。未知其籌畫何居。遂從十餘騎以鞭叩轅門。公邀入帳內與語。盡歡而罷。郭公退謂左右曰。嚴毅哉其容。安閒哉其氣。非斯人爲恃而誰恃。公諭趙宗道曰。賊衆我寡。不以計未易破也。乃令將士環四面。鼓角咆喊。有若援兵四集。因風縱虛舟十餘。流近賊壘。賊聞鼓角咆喊。固心疑之。及虛舟自泊。乃曰是欲誘我渡江也。回軍以退。公急渡兵奮擊大破。賊自相躁躪。僵尸滿三十里。遂乘勝屯茂溪。未幾。賊艘蔽江來。意欲洩鼎津之憤。公謂將佐日。願爲諸君决一死。自朝至暮殊死戰。賊墮水死者不可勝數。水爲之不流。是役也。獲賊貨甚多。悉輸之方伯。俾上行在。六月。朝廷以公爲陜川郡守。敎書有曰。揚兵鼎津。遁賊褫魄。接刃茂溪。流尸混江。行朝雖在數千里外。以公績藉甚。得其詳如此。九月。拜掌樂正。尋陞僉知中樞府事。十一月。上以公威望最著。特賜義兵大將號。敎書千百言。奬勵備至。末乃曰。洒深讎恢舊業。非爾誰也。公且讀且哭。一軍莫不感泣。初。鄭仁弘與公同時起兵。至是。忌公聲威出已上嗛之。其麾下構煽噂。公一不較。仁弘終不敢以色辭加焉。於是移書湖南伯。乞以兵粮援。辭旨忼慨。一字一涕。湖南伯不聽。公益憤勵。繕器械。奬率戎卒。鏖之知禮。斫之開寧。與湖嶺諸義將約四道並進。誓蕩賊窟。諸義將期不至。公獨麾兵進逼。所殺獲過當。於是收復高靈,知禮,宜寧,金山等邑。上壯其績。欲使率所部勤王。公立裝爲若不可踰日者。民聞之。哭且言曰。公不在此。吾儕其魚肉之矣。觀察使金公誠一急馳啓行在。以爲金沔離本道一步。南方收拾不得。上命公留本部。以卒成績。公廵行郡邑。招集散亡。暴露雨雪霜霧。不以身爲念。人莫不爲公憂之。不恤也。行過先壠。地主備奠需以待。却之曰。陵寢闕享祀。吾其可享吾先乎。只爲文以告。妻子飢餓流離。所居十里而近。終不入。癸巳正月。拜右道兵馬節度使。上遣宣傳官諭曰。天兵大集。旣克平壤。京城賊終必遁歸。卿其悉精銳埋伏。無使隻輪還。公自受任以來。惟不克報效是懼。勦星山賊則斬首數百級。進薄善山則不深入不止。觀察使使人諭曰。賊勢方盛。盍姑徐。公奮然曰。不入虎穴。安得虎子。部勒諸義將旣約束。公遽病矣。竟以三月十七日。卒于軍。方病革。趙公手藥盌以進曰。公如不諱。置國事何地。公强起執手曰。吾與若等。殉國忘身。誓滅賊以報主上。不幸命卒於此。天也。仍泣數行下。軍校左右侍者皆泣。莫敢仰視。已而屬趙公曰。賊知吾死。必乘釁掩我。其秘之。至新倉乃發。諸將佐奉遺命。舁還新倉始發喪。一軍痛哭。民無不頓足哀號。觀察使馳啓曰。江右一帶至今全保。皆沔之力也。長城一壞。天不助順。臣孑然獨處。不知所以爲計也。上震悼。特命贈兵曹判書。遣禮官祭。後以宣武原從功。改贈吏曹判書。光海初元。又遣官祭。公享年五十三。塟某鄕某原。趙公宗道,郭公䞭守黃石山城。城陷不屈死之。其忠信相結。生死不相負如此。公平日事親以孝。聞皇考贊成公卒於北鎭。時。公奉母夫人在嶺南。道路數千餘里。天又熇熱。公不馬而徒號擗以赴。行路爲之䀌傷。後居母憂。哀毁盡禮如前喪。嘗築臺所居後麓。名之曰懷先。瞻望塋域。以寓終身之慕。嗚呼。人生於世。惟忠與孝而已。方公之奔父喪徒步數千里也。理宜必無生也而卒不死者。天之意豈不以使公而死於孝則他日國家將亡。有誰可以降扶顚之任乎。卒能鞠躳王事。死而後已。公之不死於孝而死於忠者。天所以仁愛我國家也歟。公歿七十餘年。士林立祠高靈。俎豆享之。公凡再娶。前配完山李氏煌之女。後配完山李氏。缶林副守建之女也。俱不育。取弟縣令滋之子毅立爲嗣。官縣監。毅立一男鼎黃同中樞。婿參議吳竱。曾玄以下不盡錄。乞余文以賁神道者。六世孫節度使梓也。銘曰。

 

學有體用。豈伊死物。所遇盡分。其原也一。公昔靜坐。曰程曰朱。起身大號。義旅雲趍。殺賊鼎津。履膓涉血。摧鋒茂溪。賊飼魚鱉。王在龍灣。茂績升聞。錫號大將。誥綍從天。公拜以泣。臣鴑且孱。王曰無讓。爾予長城寵爾維何。虎節牙旌。公有斗膽。蟻視賊窟。同我義將。不日掃滅。天耶時耶。公不起疾。軍民號哭。牛吼雷裂。王庸悼惜。有爛追爵。公昔主靜。坐泥塑若。略施妙用。扶我社稷。俎豆有儼。亦云報德。銘以眎之。後學之則。

 

출전>樊巖先生集卷之四十四/蔡濟恭 著

 

 

송암 김면선생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