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80

박순 신도비명(朴淳神道碑銘) - 宋時烈 撰

■ 조선국 영의정 문충공 사암 박선생 신도비명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병조판서 증시문충공 사암 박선생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치사 봉조하 송시열은 글을 짓다. 국조에서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었으나 을사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세도가 크게 변하고 사문이 땅에 떨어져, 성현의 글은 화근으로 지적되고 선비가 일삼는 것은 과거시험보기 위한 글뿐이어서 국세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선비들이 대거 배출되어 명종, 선조 시대에는 정치와 교화가 크게 밝아짐으로써 선비된 이가 공자 · 맹자와 정자 · 주자를 근본으로 삼아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고 백성들이 이 아래에서 새로워 삼대(하 · 은 · 주)의 융성한..

이자춘 신도비명 병서(李子春神道碑銘 幷序)/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신도비명 병서(李子春神道碑銘 幷序) 생졸년 : 1315년(충숙왕 2)~1360년(공민왕 9) 고려국 증 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영록대부판장작감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高麗國 贈 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判典理司事 完山府院君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 榮祿大夫 判將作監事 李公神道碑銘 幷序) 전주(全州) 이씨(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아간(阿干) 광희(光禧)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다. 사도는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다.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다. 충민이 화(華)를 낳고, 화가 진..

포은(圃隱) 정선생(鄭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포은 정선생 신도비명 병서 圃隱 鄭先生 神道碑銘 幷序 후학 은진 송시열 찬 포은 선생이 가신 지 280여 년 만에 후학 은진(恩津) 송시열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도(道)란 천하를 상대로는 없어진 적이 없으나, 사람을 상대로는 끊이고 이어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도가 세상에 행하여지는 데는 밝고 어두운 시대가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이는 다 천명에 좌우되는 것이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는 것이다. 아, 선생 같은 이야 어찌 여기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호걸스런 재주와 우뚝 선 자질로 고려의 말기에 나서 그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원만한 신하의 도리가 이미 사책(史冊)에 전해져 고인들과 맞설 수 있으니, 고려에 선생 같은 분..

낙정 조석윤 신도비명(樂靜趙錫胤神道碑銘)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62권/우암 송시열 저 낙정(樂靜) 조공(趙公, 趙錫胤)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낙정 조공이 을미년(1655, 효종6) 8월 2일에 별세하였는데, 지금까지 묘(墓)에 비각(碑刻)이 없으므로, 고관(高官)이나 처사(處士)뿐 아니라 하인(下人) 노복(奴僕)들까지도 모두 탄식하기를, “그 사람의 어짊이 어찌 비각을 기다려서 드러나랴.” 하였다. 그러나 오직 공렬(功烈)을 기록해서 그 사람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고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번에 그의 문제자(門弟子)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비명(碑銘)을 부탁하기에 삼가 그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니, 조씨(趙氏)는 배천(白川)으로부터 나왔다. 비조(鼻祖) 문주(文胄)는 고려(高麗) 때 상장군(上將軍)이..

정기룡장군 신도비명 병서(鄭起龍將軍神道碑銘 幷序)

송자대전 제164권 >碑 ■ 통제사(統制使) 정공(鄭公) 신도비명 병서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통제사 정공 기룡(鄭公起龍)은 곤양인(昆陽人)이다. 초명(初名)은 무수(茂壽)였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공(公)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창명(唱名)할 무렵에 선조대왕이, 용(龍)이 종루가(鐘樓街 지금의 종로)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나서 인재를 물색했는데, 공을 얻고 괴이하게 여겨 지금의 이름을 하사했다.” 고도 한다. 공은 어려서부터 식우지기(食牛之氣 소를 삼킬 만한 기상을 말함)가 있었고 상호(桑弧)를 쏠 적부터 관인(官人)의 양상을 흉내 내어 뭇 아이들을 위복(威伏)시켰으므로 아이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13세에 아버지의 상(喪)을 만나 여묘(廬墓) 살이를 하면서 곡읍(..

최명창신도비명(崔命昌神道碑銘)

■송석 최명창선생 신도비명(松石 崔命昌先生 神道碑銘)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최공(崔公) 신도비명 : 서문을 아울러 기록하다. 자헌대부 전 의정부 우참찬 겸 지경연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김안국(金安國)이 글을 짓다. 선교랑 전 행홍문관저작 겸 경연설경 춘추관기사관 김로(金魯)가 글씨를 쓰다. 봉렬대부 수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 승문원참교 임필형(任弼亨)이 전서를 쓰다. 송석선생(松石先生) 최공(崔公)이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몇 년을 보냈는데, 서울 동쪽 변두리의 쌍계동(雙溪洞)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날마다 소나무와 바위 사이에서 시를 읊고 지내며 이로 인하여 송석거사라고 자호하였다. 한적한 모양은 마치 청빈하고 질박하여 숨어사는 사람과 같으니, 세상에서 더..

정여창선생신도비명병서(鄭汝昌先生神道碑銘幷序)

문헌공 일두 정선생 신도비명 병서 文獻公 一蠹 鄭先生 神道碑銘 幷序 동계(東谿) 조구명(趙龜命 : 1693~1737) 찬 우리 동방(東方)은 은(殷)나라 태사(太師)가 교화를 베푼 뒤로 이적(夷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성대하게 일었으나 아득한 수천 년 동안 참다운 선비가 드물었다. 고려 말기에는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었고, 우리 국조(國朝)에는 소문이 나서 알려진 분이 다섯 선생인데 선생이 그중의 한 분이다. 선생의 휘(諱)는 여창(汝昌), 자(字)는 백욱(伯勗)이며, 선대의 관향(貫鄕)은 하동(河東)인데, 뒤에 함양군(咸陽郡)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휘 지의(之義)는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이고, 휘 복주(復周)는 전농시 판사(典農寺判事)이며, 휘 육을(六乙)은 한성부 좌..

회재 이언적 신도비명 병서(李彦迪 神道碑銘 幷序) - 驪州李氏

■ 증 영의정 문원공 이공 신도비명 병서 (贈 領議政 文元公 李公 神道碑銘 幷序) 고봉 기대승 찬(高峯 奇大升 撰) 1527년(中宗 22)∼1572년(선조 5) 명종 20년(1565)에 권간(權奸)들을 축출하고 정사를 크게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많은 노성(老成)한 분과 준걸(俊傑)들을 맞이하여 등용하고, 당시에 죄를 입고 과오를 범한 자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을사년(乙巳年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로 귀양 가거나 쫓겨난 자들이 혹은 서용(敍用)되고 혹은 전직되었으며,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관직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고(故) 의정부 좌찬성 회재(晦齋) 이공은 강직한 도를 행하다가 배척을 입고 별세한 지가 13년이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복관(復官)의 대열에 참여되었다. 세도(世道)는 태평성대를 만나..

양촌 권근 신도비(陽村權近神道碑)

■ 증시 문충공 양촌 권 선생 신도지비 (贈諡 文忠公 陽村 權 先生 神道之碑) ◇慶州李氏 石灘公派 派祖 李存吾의 사위 ◇묘지 소재지 :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유명조선국 추충익대좌명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이사 길창군 증시문충공 양촌선생 권공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推忠翊戴佐命功臣崇政大夫議政府贊成事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 世子貳師 吉昌君 贈諡文忠公 陽村先生權公 神道碑銘 幷書). 선교랑 집현전부수찬 지제교 경연사경(宣敎郞 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 신(臣) 이개(李塏) 이개 (1417~1456년) :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청보(淸甫), 백고(伯高)이며,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시호는 의열(義烈)이었다가 뒤에 충간(忠諫)으로 시호를 고..

김만기선생 신도비명 병서(金萬基先生 神道碑銘 幷書)

■ 광성부원군 김공 신도비명 병서 (光城府院君 金公 神道碑銘 幷序) [생졸년] 1633(인조 11)∼1687(숙종 13).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왕자(王者)의 후예로서 서민(庶民)으로 기신(起身)하여 고려(高麗) 시대에 더욱 현달하였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그러하였다. 황강공(黃岡公) 휘 계휘(繼輝)는 선묘조(宣廟朝)의 명신(名臣)으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우리 문원공 선생(文元公先生 김장생(金長生))은 도학(道學)으로 일세의 대유(大儒)가 되었으니, 대체로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은 제유(諸儒)를 집대성(集大成)하였고, 선생은 그의 전통(傳統)을 이어받은 것이다. 선생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큰아들은 문경공(文敬公) 집(集)이고, 둘째는 곧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