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탁영 김일손/묘갈명/사실기록/묘표/신도비명/행장/시장

야촌(1) 2018. 1. 27. 20:29

  ■탁영 김일손 선생 묘갈명 병서

    (濯纓 金馹孫 先生 墓碣銘 竝書)

 

[생졸년] 김일손『金馹孫, 1464년(세조 10) 2월 13일(음력 1월 7일) ~ 1498년(연산 4) 8월 14일(음력 7월 27일)』

 

연산조의 무오사화를 지금 말하면 반드시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른다.

탁영 김 선생이 <무오사화의(戊午史禍)> 시초이다. 선생은 하늘이 내신 사람이나 내면서 문득 죽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선생의 문장과 절개 있는 도리는 우주라도 좁으니, 동쪽의 좁은 곳(조선)이 선생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깝다.。

 

선생이 사관이 되어 일찍이 그 스승 점필재 김공의 조의제문을 취하여 국사에 실었고, 또 역사기록에 이극돈의 추행을 있는 그대로 썼더니, 극돈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장악하여 이를 보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의제문을 공박하되 이것은 감히 만들어서 안 되고 감히 써서도 안 될 것이니 모두 대역이라 하였다.。

 

드디어 그 죄를 물어 점필공의 묘에 화를 미치고(부관참시) 선생도 주검을 길거리에 버려서 세상에 알렸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그러나 선생의 죽음은 진실로 천지의 신령도 음직일 만큼 눈과 귀를 떨게 했다.。

 

또 중종으로 왕이 바뀌어 결백함이 알려지고 원통함이 벗겨져 포상과 은혜가 융숭했고, 현종 조에 유림의 신하들이 또 그 사실을 진정해서 특별히<죄상을 적은> 책을 찢어버렸다. 사대부들이 의논하여 사모하기를 해와 별과 은하수(河漢)와 같이 하였으나 <이제는> 따를 수 없게 되었다.。

 

또 손뼉을 두드리고 서로 좋아하며 개인적인 생각으로 기뻐하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벌레(螟䘌)가 되었거나 홀로 악귀가 되어 영원히 죽게 되었으니 오호라! 하늘의 뜻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되겠는가.。

 

선생은 김해사람으로 휘는 일손(馹孫)이고 자는 계운이다. 문장가가 되어서 글을 쓰면 천백마디의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웅장하고 박식하여, 읽는 사람들이 모두 입을 벌려 혀를 내두르고 중국 사람들도 <이를> 가리켜 한자[1]에 비하더라. 어릴 때 점필공(김종직)을 따라서 배우고 또 김문경[2] 정문헌[3] 공으로 벗삼아 서로 겨루어 분발해서 원대한 포부를 길렀다.。

 

성화 병오년(1486년)에 생원에서 빼어나게 진사시에 2등을 하고, 겨울에 또 대과에 급제하여, 한원(翰苑 ; 한림원과 예문관)에서 시작하여 화려한 벼슬을 거쳐, 벼슬이 이조정랑으로 마쳤다.。

 

그 사이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진주에서 가르치고, 묻거나 따져서 바로잡는(質正) 관리로서, 경사(京師 : 서울)에 올라가면 또 호당(湖堂 : 독서당)에 있으면서 강목(綱目)을 선택하여 교정하고 바로잡으니, 명성이 뛰어나 같은 동년배(等夷)와 여러 명공(名公)들이 다 절개나 의지를 굽혀(折節) 서로 낮추었으나, 간당 중에 곁눈질하는(시기하는) 자가 많더니, 화가 일어나 한때 선비들이 선생과 같은 무리로 연좌되어, 죽거나 위태로워졌다.。

 

선생은 돌아가신 때가 35세였다. 지은 시문이 환란을 겪으면서 잃어버리고 단지 약간의 책만이 세상에 남아있다. 증조 휘(諱) 서(湑)는 현감이요 조부 절효선생은 휘극일(克一)이니 벼슬을 하지 않고, 모친의 상을 당하여 묘소를 지킬 때 정성을 맹호도 감동했다는 사실이 군지에 실려 있다.。

 

이 분이 집의 맹(孟)을 낳고 집의공이 아들 셋을 두었으니, 맏이 준손(駿孫)과 다음 기손(驥孫)이 함께 과거에 급제했으나 기손은 일찍 죽었다. 맏이(준손)는 벼슬이 직제학이고 선생은 그 막내이다.。

 

예안김씨 미손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자손이 없었다. 직제학공(준손)은 아들 대유를 낳았으니 <대유의> 호는 삼족당이다. 경술(사서삼경)과 재능 및 행실이 뛰어나, 정암[1]같은 현인들의 권장을 받아 현량과에 올라 정언을 지냈으나, 북문의 변고(사화)가 일어나 폐하고 내쫓겨져 세상을 마쳤다.。

 

슬프다! 소인들이 근거 없이 화를 불렀고 또 어찌 이같이 심한가. 학자들이 선생이 사시던 청도군에 사당을 세워 절효, 삼족, 두 공과 함께 제사지내고 향사하니 3세 제사가 더없이 빛난다.。

 

선생의 도가 어찌 찾아오지 않겠으며 어찌 전함이 없으랴. 비록 선생과 삼족공의 세대가 함께 불행했으나 그 보답이 반드시 후손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천(賤)함이 없을 것이다.。

 

선생의 묘소가 본군(청도)위의 북쪽 선영 옆에 있으나, 세월이 흘러 표석이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탄식하며 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임금의(今上) 을사년(1725) 윤봉구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책임이라 하고, 드디어 읍의 선비들과 같이 계획을 세워, 돌과 나무를 준비하니, 마침 관찰사 유척기가 또한 기쁜 일을 듣고 서로 협조하니, 후세 사람들이 선생을 사모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니 더해지니 남은 한이 없다.。

 

내가 곰곰히 생각건대 선생의 곧은 붓은 기가 꺾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비록 그 마음이 백번 죽더라도 쓰러지거나 후회하지 않았으며, 다만 이 점필재공의 글이 의의(意義)는 있으나 <자세히> 알 수가 없어 선생이 또 어찌 반드시 사책(史乘)에 실어야 했는가?

 

이러한 알 수 없는 일이 후세에 의혹을 자아낸다. <물론> 그 사이에 따라야할 규칙이나 법도(權度)가 있다는 것을 <나의> 얕은 지식으로 논할 바 못되거니와 선생이 계실 때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애석한 일이다.。

 

우암 송문정공[1]이 일찍이 이를 의논하여 말하기를 “어찌 정해진 슬픔과 자질구레한 말들을 성인(聖人)의 일 처리하는 솜씨(達權)가 아니면 법대로 따를 수 있겠느냐. 역사의 일을 기록하는 자는 오직 곧게 쓰는 것이 직책이다.” 하니 아! 이것은 선생의 숨은 뜻을 알아낸 후세의 명언인가? 오호라! 이는 무식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뽕나무와 가래나무가 <무성하고> 햇볕이 가려진 <이곳은> 선생의 고향일세. 5장 길이의 저 높은 봉분은 성생의 무덤이요, 두어칸 집은 선생의 사당일세. 높고 가파른 청도의 산과 흐르는 청도의 물이 선생과 길이 함께하리니,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죽음과는 다르도다。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춘추관 성균관사 예문관제학 윤봉조 찬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김진상 서

자헌대부행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도순찰사대구도호부사 유척기 전

 

숭정기원 무진후 재정사(1737년) 6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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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韓子 : 당나라의 한유(韓愈,768∼824)를 말한다. 자는 퇴지(退之)이고 시인이며 정치가이다. 당송팔대가(唐宋

    八大家)중 굴지의 명 문장가로 꼽혔던 사람이다.

 

◇김굉필(金宏弼,1454~1504). 조선전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

    ·한훤당(寒喧堂)으로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

     다.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

    蠹)이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서로는 《일두유집》이 있다.

 

◇綱目; 사물의 대략적인 줄거리와 자세한 조목

 

◇모친의 상을 당하여 조모, 조부, 두 서모임, 호랑이가 감복했다는 말은 조부의 시묘 때라고 함.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윤봉구(尹鳳九, 1681~176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

    는 구암(久菴). 호조참판 비경(飛卿)의 손자로, 명운(明運)의 아들이다. 저서로 《병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

    (文獻)이다.

 

◇유척기(兪拓基, 1691~1767).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전보(展甫)이고,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며, 시호는 문익

    (文翼)이다. 본관은 기계(杞溪)로 서울 출신이며,유명악(兪命岳)의 아들이다. 저서에『지수재집(知守齋集)』

    이 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자는 : 英甫(영보)이며 호는 尤庵(우암)이고 본관은 은진이다. 아버지 송갑조로서

    벼슬진선, 장령, 찬선,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를 지냈다.

 

◇윤봉조(尹鳳朝, 1680~176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숙(鳴叔), 호는 포암(圃巖). 직장 명

    원(明遠)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포암집》이 있다.

 

◇김진상(金鎭商,1684~175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字는 여익(汝翼) 또는 태백(太白), 호는

    어자(退子), 아버지는 증판서 만채(萬埰)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현손, 어머니는 증정부인 전의

    이씨로 집의 항(抗)의 딸이다. 저서로는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가 있다.

 

◇유척기(兪拓基, 1691~1767).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전보(展甫)이고,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며, 시호는 문익

    (文翼)이다. 본관은 기계(杞溪)로 서울 출신이며,유명악(兪命岳)의 아들이다.저서에『지수재집(知守齋集)』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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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濯纓金先生墓碣銘

 

燕山世戊午史禍。至今談者必哽涕。而濯纓金先生爲之首。先生天固生之也。旣生而又殺之。天曷故焉。意先生文章節義。迫隘宇宙。東褊之所不能容。則先生可無及乎。盖先生爲史官。嘗取其師佔畢金公吊義帝文載國史。又於史直書李克墩醜行。克墩掌史事。見而銜之。遂引諸不逞。亟持義帝文而曰。是不敢作。是不敢書。俱大逆。遂案佔畢公。禍其瘞。先生亦身棄東市。爲世大戒。豈不悲哉。然先生之死。固已動神明而激耳目矣。及中廟改玉。首洗寃枉。褒寵赫然。顯廟朝。儒臣又白其事實。特擧貤典。士大夫誦慕。如日星河漢不可梯及。而彼鼓掌相慶。自快私意者。已皆爲螟䘌爲狐蠱。鬼誅於無竆。嗚呼。非天意。詎至此乎。先生金海人。諱馹孫。字季雲。爲文章下筆。千百言奔放䧺博。讀者皆呿舌。華人目之曰。此韓子也。少從佔畢公學。又與金文敬,鄭文獻友善。常伉厲奮發。有遠大之慕。成化丙午。魁生貟。並中進士第二。冬。又闡大科。自翰苑歷華踐。卒官吏曹正郞。間爲養補晉州學。以質正官赴京師。已又賜暇湖堂。選隷綱目校讎廳。聲譽出等夷。諸名公皆折節相下。奸黨已多仄目者。及禍作。一時士流坐先生鉤黨。死徙殆盡。先生死時年三十五。所著詩文。經禍散佚。只若干卷行于世。曾祖諱湑縣監。祖節孝先生諱克一不仕。喪親廬墓。誠感猛獸。事在郡誌中。是生執義孟。執義公生三子。伯駿孫。仲驥孫。並登一榜。仲先夭。伯官直提學。先生其季也。娶禮安金氏尾孫女。無嗣。直學公有子大有。號三足堂。經術才行。大爲靜庵諸賢所奬。擧賢良科。拜正言。至北門變起。廢斥沒世。嗚呼。小人之不懲前禍。又何甚也。學者卽先生所居淸道郡。爲建祠。並與節孝三足二公而享祀之。三世俎豆。于光有耀。先生之道。豈無所來。而亦豈無所傳哉。雖先生與三足公。其世俱不幸。而報施之必於後者。非在斯歟。先生葬在本郡上北先墓側。歲久無顯刻。過者皆齎咨太息。今上乙巳。尹君鳳九宰是邑。慨然曰。是余之責。遂與邑士謀將伐石樹徑。觀察使兪公拓基亦樂聞而相其役。後人之爲先生寄慕者。至此而益無憾矣。余竊念先生秉直觸邪。不懾不撓。雖其心百死靡悔。而只是畢齋之文意義有不可知者。先生又必載之史乘何也。此不免後來之起疑也。抑其間自有權度。非淺識所可論歟。惜不及先生之世而講質也。尤庵宋文正嘗論此曰。豈定哀微辭。非聖人達權則不可法。而秉史筆者。惟直是職歟。噫。此可謂知先生微意。而爲後世之堯夫也歟。嗚呼。此不可與不知者道也。銘曰。

桑梓翳然。是維先生之宅里。丈五先生是埋。數架先生是祀。嶻嶭乎道之山。湯湯乎道之水。將先生與俱永存兮。其死也異乎人之死。

 

嘉善大夫禮曺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藝文館提學尹鳳朝 撰。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金鎭商 書

資憲大夫行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大邱都護府使 兪拓基 篆

 

崇禎紀元戊辰後再丁巳六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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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實[사실을 기록함]

 

선생은 황명(皇明) 천순(天順)[1] 갑신(1464)년에 태어났으니, 곧 우리 세조 10년이다. 나이 17세 때(1480년)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상(喪)을 당하여 밀양(密陽)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찾아가서 학문하는 방법을 배웠다. 성화(成化) 계묘년(1483)에 부친의 상(喪)을 당하였고, 병오년(1486)에 생원 진사(生員進士)에 합격하고 그해 10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 황명(皇明)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정미년(1487)에 진주목(晉州牧)의 학관이 되었다. 이때 중형(仲兄) 기손(驥孫)은 모친을 봉양을 위하여 창녕 현감(昌寧縣監)을 자청하여 나왔다. 선생은 매번 진주에서 내왕하며 청도에 께시는 모친을 보살폈다. 무신년(1488) 가을, 선생은 병으로 진주목 교수를 사직하고 청도로 돌아왔다.

 

기유년(1489) 겨울, 죄 없이 억울하게 금녕(金寧)에 유배(流配)되었는데, 얼마 후에 성은(聖恩) 입고 사면되었다. 또 얼마 후에 주상의 부름을 받아 요동 질정관(遼東質正官)으로 북경에 갔다. 이 때 북경의 오만관(烏蠻館)에 있으면서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주왕(周旺)이란 사람이 소장한 고서 14폭과 바꾸었다.

 

신해년(1491) 정월, 진하사 서장관으로 가서 북경(北京)에 있었는데 이때 주전(周銓)과 정유(程愈)를 만나 《소학집설(小學集說)》을 얻어 왔다. 그해 여름에 용양위 사정(龍驤衛司正)에 직을 두고 《강목(綱目)》을 교정하였다.

 

임자년(1492) 가을, 중형(仲兄)의 상을 당하여 지은 제문(祭文)이 남아 있고, 그해 가을에 또 점필재 선생의 부음을 들었으나 형의 상사로 인하여 부득이 가서 곡하지 못하였는데 형제간의 슬픔이 급하여{鴒原}[2] 강당{鱣堂}[3] 나아가지 못한다는 글이 남아 있다.

 

[2] 鴒原(영원) : 詩經의 小雅편의 常棣장에 令原으로 처음 나오고, 이후 두보의 시에 나오는 단어로서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한다.

 

[3] 鱣堂(전당) : 後漢書 의 54권 楊震傳에 나오는 단어로서 학문의 강의를 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계축년(1493) 봄, 교지를 받들어 본도(本道)에 유세(遊說)하고, 이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독서당(讀書堂)에 있으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거문고를 배우고, 병진년(1496) 3월에 모친상을 당하고, 무오년(1498) 중하(仲夏) 복을 벗었다. 이때 연산군의 정치가 어지러워 사옥(史獄)이 크게 일어나 선생은 저자에서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해 7월 27일이다.

 

함께 사형(死刑) 당한 사람이 4인이니,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허반(許磐)이다.

선생의 백형(伯兄) 제학공(提學公) 휘준손(駿孫)과 제학공의 아들 삼족당(三足堂) 휘 대유(大有)도 역시 선생의 연고로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이 등극함에 이르러 풀려났다.

 

선생의 형제 3인은 모두 청환(淸宦)으로 현달(顯達)하였으나, 중형(기손)은 일찍 세상을 떠나 가업(家業)을 이을 사람[기구(箕裘)]이 없고, 선생도 후사가 없어 적막하고, 착한 사람에게는 보답이 베풀어진다는 이치가 어디에 있는가.

 

오직 제학공(준손)이 선생보다 뒤에 별세하였고, 삼족당이 어질고 학문이 있어 조남명(曺南冥)이 세상을 덮을 만한 영웅(英雄)이라고 칭찬하였다.

 

[4] 기구(箕裘) :기구상계(箕裘相繼)의 줄임말로서 원 뜻은 ‘대장장이의 아들’ 즉 가업을 물러 받을 사람을 뜻함.

    선생은 예안 김씨(禮安金氏)인 참봉(參奉) 미손(尾孫)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김미손이 호서(湖西) 목천(木川)에 살았기에 선생은 항상 왕래하고 간혹 그곳에서 쉬기도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실 때에 부인은 목천에 살았고, 그곳에서 별세하였기에 묘가 목천의 동쪽 15리쯤에 있다.

 

[5] 1872년 10월에 청도 수야산 탁영의 묘소 옆으로 이장하였다.

     선현(先賢)의 분묘록을 보면 “김일손(金馹孫)의 묘는 청도군 서쪽 수야산(水也山)에 있다.” 라고 하였으니, 청도는 본래 선생의 고향이라 선산도 또한 이곳에 있다. 선생은 일신이 비록 좁고 거친 바다 건너 이 땅에 살고 있으나 뜻은 중화(中華)의 군자를 사모하였으니, 위로는 정주(程朱 정자와 주자)로부터 아래로 김허(金虛 원대(元代)의 명유(名儒)인 김이상(金履祥), 허형(虛衡)에 이르기까지, 항상 동시대에 태어나서 서로 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또 지금 중국에 있는 어진 선비들 한번 만나 볼 생각을 가졌었는데, 북경에 도착한 뒤에 과연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도(道)를 좋아하는 정유(程愈)요, 또 한 사람은 박학(博學)한 주전(周銓)이다.

 

그리고 이동양(李東陽)의 학문의 명망이 세상에 높다는 말을 듣고 주전의 소개로 한번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귀국할 기일이 이미 임박하여 보지 못하였다. 훗날 북경에 가는 사람 편에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두 사람에게 전하곤 하였다.

 

현인(賢人)을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그 정성은 보통을 뛰어넘었으니, 이른바 천하의 선사(善士)라야 천하의 선사와 사귈 수 있다는 옛말과 같다.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정유(程愈)의 《집설(集說)》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듣지 못하였다.

 

선생이 북경에 들어가서 정유가 《집설》을 주었을 때 이는 범중엄(范仲淹)이 장횡거(張橫渠)에게 《중용(中庸)》을 배우라고 권한 것과 같은 뜻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돌아와 국내에 간포하였다. 《집설》이 우리나라에 행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학자들의 힘입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전 후 두 번에 걸쳐 북경에 갔을 때 선생의 행색(行色)이 쓸쓸하였으니 주머니에 든 돈은 경적(經籍)을 사는 데{囊橐} 다 써 버렸기 때문이었다. 선생이 독서당(讀書堂)에 있을 때 48영(詠)을 내려서 화답하게 하였다. 선생은 화답하고, 마침내 발문(跋文)을 지어 올렸다. 대체로 이른바 48영은 곧 48종의 꽃을 읊은 것이다.

 

선생은 이 발문에서 잠시 꽃의 아름다움은 차치하고, 무궁한 사물의 이치를 부연(敷衍) 확대하거나 이것으로 인하여 저것을 나타내고, 작은 것으로서 큰 것을 비유하고, 혹은 임금의 덕을 권진(勸進)하고, 혹은 치도(治道)를 언급하고, 완물(翫物)에 마음이 쏠려서 뜻을 잃을까 경계하고, 공경을 위주로 하고 순리를 권장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실로 선행(善行)을 펴고 사심(邪心)을 막는 일이요,

 

어떤 일로 인하여 충언(忠言)을 바치는 의미였다. 이것으로 보아 역시 선생은 넓은 흉금 속에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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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記實 - 朽淺 黃宗海 撰(휴천 황종해 찬)

 

先生。以皇明天順甲申降焉。卽我世祖十年也。年十七。聞佔畢齋金先生宗直丁憂在密陽。乃往從之。得聞爲學之方。成化癸卯。丁外憂。丙午。中生員進士。其年十月。登第。丁未。爲晉州學。時仲兄驥孫。乞養昌寧。先生每自晉往來省母。戊申秋。先生以病辭晉學。還淸道。己酉冬。以非罪幽金寧。未幾。蒙恩得赦。尋被召。以遼東質正官赴京師。是時。在烏蠻館。脫所穿衣。換得何旺所藏古畫十四幅。辛亥元正。又朝京。是時。見周銓,程愈。又得小學書。 是年夏。以龍驤司正。校讎綱目。壬子秋。遭仲兄喪。有祭文。是秋。又聞佔畢訃。以兄喪不得往哭。有鴒原方急。鱣堂莫及之文。癸丑春。奉旨頒諭本道。是年秋冬。在讀書堂。有餘力學琴之語。丙辰三月。丁內艱。戊午仲夏。外除。是時。燕山亂政。史獄大起。先生戮於市。是年七月二十七日也。同時騈首死者有四人。權五福,權景裕,李穆,許磐。先生之伯兄提學公諱駿孫及提學公之子三足堂諱大有。亦以先生之故。俱配湖南。逮中廟登極得釋。先生兄弟三人。竝仕淸顯。而仲兄早世無箕裘。先生身後。亦寂寞焉。善人報施之理安在。而獨提學公後先生卒。三足堂賢而有文。曺南冥許以蓋世之雄。先生娶禮安金氏參奉尾孫之女。金居湖西木川地。故先生常往來或游息。及卒。夫人因居木以終。墓於縣東十五里許。觀先賢墳墓錄。則曰金馹孫墓在淸道郡西水也峴。淸道。本先生之桑梓。而松楸亦在此焉。先生身居海外之褊荒。志慕中華之君子。上自程朱。下至金許。常恨不同時而不相見。又念當今賢士之在中國者思有以一見。而到京之後。果得二人。一則好道之程愈。一則博學之周銓。聞有李東陽者文望高世。欲介周一拜。而歸期已迫。未能也。他日送人赴京。傳致不忘之意於二人焉。其好賢樂善之誠。出尋常萬萬。而所謂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者。其近之矣。朱先生小學書。行於我東久矣。而至於程愈集說。則初未聞也。先生之入京也。程愈贈集說。先生以爲是范子勸橫渠學中庸之意。而持以東還。刊布國中。集說之行於東方。蓋自此始。而學者之所賴者。爲如何哉。前後赴京。行色蕭然。囊橐所有。盡買經籍。先生在書堂也。上賜四十八詠。使之和進。先生遂跋文以獻。蓋所謂四十八詠。卽詠四十八種花卉也。先生姑舍花卉之鮮明。推廣物理之無窮。因此著彼。以小喩大。或進君德。或言治道。戒以翫物喪志。勸以主敬達順。此實陳善閉邪。因事納忠之意。而亦觀他一箇大胸襟包得許多也。

 

탁영집 > 濯纓先生文集卷之六 /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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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纓先生金公墓表

 

宋秉璿 撰

 

嗚呼。淸道之水也山直戌原。故濯纓先生金公衣履之三遷而藏者也。嗚呼。今去燕山戊午。四百有餘年。而說當時事。人莫不心隕而氣驚。君子之不幸。噫其慘矣。嗚呼。公之禍。實祟於弔義帝文。故世皆疑其載史之爲何見。然君子之不容於小人久矣。彼墩光之輩。磨牙射影。固非一日。則假使無是文。欲加之罪。何患其無辭耶。雖然。公宇宙間氣也。以直道自任。禍福固所不恤。則宜其有是事。使有所恤而齷齪趑趄。顧瞻前後。則亦不足爲公矣。吾先子嘗論此曰。豈定哀微辭。非聖人達權。則不可法。而秉史筆者。惟直是職歟。此可謂千載之斷案矣。且疏復昭陵事。寔公之大節也。而可有辭於天下後世矣。然只見於莊陵誌。而先哲無一言稱述者。抑何歟。其視禍福。恬然不動于中。則又奚足恤乎後人之知不知。而於公有何加損耶。蓋公魁偉倜儻。每讀史。至奸凶附勢。忠良受害。輒激昂慷慨。若躳親當之。噫。其剛大之氣。忠直之心。未嘗無所自也。文章汪汪若河海。立草千言。沛乎無礙。華人至稱以東國之昌黎。南秋江許以希世之才。廟堂之器。曺南冥亦曰。生有凌霜之節。死有通天之冤。嗚呼。公之所以爲公。於此數語。亦可想其大略矣。公諱馹孫。字季雲。系出駕洛國。而以新羅大角干庾信。爲上祖。曾大父諱湑。縣監。大父諱克一。號節孝。薦拜持平。考諱孟。執義贈吏曹參判。妣龍仁李氏。參議讓之女。公生于天順甲申正月七日。受命于戊午七月二十七日。壽僅三十五。未弱冠。受學于佔畢齋金文簡公。與寒暄一蠧諸賢友善。嘗伉厲奮發。期以遠大。二十三。中生員第一。進士第二。其冬。又闡大科。明年。爲養親。出補晉州學官。己酉。爲質正官。赴京師。辛亥。又朝元正。由龍驤司正。選隷綱目校讎。癸丑。賜暇湖堂。蓋其前後履歷。而在翰苑最久。歷遍三司。卒官吏曹正郞。及中廟改玉。首洗冤枉。復爵。顯廟朝。贈都承旨。純廟朝。加贈吏曹判書。諡文愍。列聖襃寵之典。至是而可無憾矣。公所著詩文。經禍散佚。只三卷行于世。公有二配。丹陽禹氏。參判克寬女。文僖公倬。其先祖也。禮安金氏。參奉尾孫之女。俱無育。金氏臨歿。以從子大壯爲后。靜菴先生奏請調用。蔭參奉。擧二男。鏗持平。鏘司果。長房無后。而金瀋副司果。李濂。其女壻也。次房男致三。參奉。參奉男。善慶。左通禮。曰濈潝贈佐郞。洛出后。瀹漾。其所出也。嗚呼。天之生公。似不偶然。而旣已摧折於凶鋒。竟莫展其所學。雲仍亦零替不振。天之報施善人。一何其薄耶。雖然。彼儻來之物。固不足爲輕重。况至今人仰公之名。若泰山北斗。天理之好還。於是乎昭昭可驗矣。十三世孫泰斗,孝斗。以墓尙闕表阡之文。將伐石而詢于不佞。嗚呼。世自知公者在。何待腐筆之鋪張爲。銘曰。

是維文愍之藏。後之人。其勿踐傷哉。

 

연재집 > 淵齋先生文集卷之四十一 /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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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道碑銘

 

弘文提學 尹鳳朝 撰

 

燕山世戊午史禍。至今談者必哽涕。而濯纓金先生爲之首。先生。天固生之也。旣生而又殺之。天曷故焉。噫。先生文章節義。迫隘宇宙。東褊之所不能容。則先生可無及乎。蓋先生爲史官。嘗取其師佔畢金公弔義帝文。載國史。又於史直書李克墩醜行。克墩掌史事。見而銜之。遂引諸不逞。亟持義帝文曰。是不敢作。是不敢書。俱大逆遂按。佔畢公禍其瘞。先生亦身棄東市。爲世大戒。豈不悲哉。然先生之死。固已動神明而激耳目矣。及中廟改玉。首洗冤枉。褒寵赫然。顯廟朝儒臣。又白其事實。特擧貤典。士大夫誦慕如日星江漢。不可梯及。而彼鼓掌相慶。自快私意者。已皆爲螟蠚。爲狐蠱。鬼誅於無窮。嗚呼。非天意。詎至此乎。先生。金海人。諱馹孫。字季雲。爲文章。下筆千百言。奔放雄博。讀者皆呿舌。華人目之曰。此韓子也。少從佔畢公學。又與金文敬,鄭文獻友善。常伉厲奮發。有遠大之慕。成化丙午。魁生員。竝中進士第二。冬。又闡大科。自翰苑歷華踐。卒官吏曹正郞。間爲養補晉州學。以質正官赴京師。已又賜暇湖堂。選隷綱目校讎廳。聲譽出等夷。諸名公皆折節相下。奸黨已多側目者。及禍作。一時士流。坐先生鉤黨。死徙殆盡。先生死時年三十五。所著詩文。經禍散佚。只若干卷行于世。曾祖諱湑。縣監。祖節孝先生諱克一。不仕。喪親廬墓。誠感猛獸。事在郡誌中。是生執義孟。執義公生三子。伯駿孫。仲驥孫。竝登一榜。仲先夭。伯官直提學。先生其季也。娶禮安金氏參奉尾孫女。無嗣。直學公有子大有。號三足堂。經術才行。大爲靜庵諸賢所奬。擧賢良科。拜正言。至北門變起。廢斥沒世。嗚呼。小人之不懲前禍。又何甚也。學者卽先生所居淸道郡爲建祠。竝與節孝,三足二公而享祀之。三世俎豆。于光有耀。先生之道。豈無所來而亦無所傳哉。雖先生與三足公。其世俱不幸。而報施之必於後者。非在斯歟。先生葬在本郡上北先墓側。歲久無顯刻。過者皆齎咨太息。今上乙巳。尹君鳳九宰是邑。慨然曰。是余之責。遂與邑士謀。將伐石樹徑。觀察使兪公拓基。亦樂聞而相其役。後人之爲先生寄慕者。至此而益無憾矣。余竊念。先生秉直觸邪。不懾不撓。雖其心百死靡悔。而只是畢齋之文。意義有不可知者。先生又必載之史乘。何也。此不免後來之起疑也。抑其間自有權度。非淺識所可論歟。惜不及先生之世而講質也。尤菴宋文正嘗論此曰。豈定哀微辭。非聖人達權則不可法。而秉史筆者。惟直是職歟。噫。此可謂知先生微意。而爲後世之堯夫也歟。嗚呼。此不可與不知者道也。銘曰。

桑梓翳然。是維先生之宅里。丈五先生是埋。數架先生是祀。嶻嶭乎道之山。湯湯乎道之水。將先生與俱永存兮。其死也異乎人之死。副提學退漁堂金公鎭商書。觀察使知守齋兪公拓基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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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濯纓 行狀

 

黃宗海 撰

 

先生姓金。諱馹孫。字季雲。自號濯纓。其先金海府人。駕洛國王首露之裔。世居金海。五世祖以昏娶。始卜居淸道郡。王父諱克一。節孝先生其人也。考諱孟。官至執義。外祖。官諱未詳。而按文集則必是龍仁李氏也。先生以皇明天順甲申降焉。卽我世祖十年也。成化庚子。與仲兄驥孫同赴禮圍不利。是歲先生年十七。聞佔畢齋金先生宗直丁憂在密陽。乃往從之。得聞爲學之方。自是考德問業。以爲依歸。厥後佔畢易簀。先生作祭文有曰。升其塾堂。學始知方。諭我千古。如室得戶。踐履之餘。文以博予。恩同爺孃。義當方喪云云。蓋先生之學。傳自佔畢齋也。壬寅冬。與仲兄赴殿試。仲擢第一。先生不中。弘治癸卯甲辰間。丁外憂。丙午。中進士。其年十月。登第。丁未。爲晉州學。時仲兄乞養昌寧。先生每自晉往來省母。戊申秋。先生以病辭晉學。還淸道。己酉冬。以非罪幽金寧。未幾。蒙恩得赦。尋被召。以遼東質正官赴京師。是時在烏蠻館。脫所穿衣。換得周旺所藏古畫十四幅。辛亥元正。又朝京。是時見周銓,程愈。又得小學書。俱見狀末。 是年夏。以龍驤司正。校讎綱目。壬子秋。遭仲兄喪。有祭文。是秋。又聞佔畢訃。以兄喪不得往哭。有鴒原方急。鱣堂莫及之文。癸丑春。奉旨須諭本道。是年秋冬。在讀書堂。有餘力學琴之語。丙辰三月。丁內艱。戊午仲夏。外除。是時燕山亂政。史獄大起。先生以遊佔畢門故被收。而卒於市。實是年七月十七日也。同時騈首死者有四人。而姓名無傳。又寒暄金先生,一蠹鄭先生。亦以佔畢門人。俱謫居而卒。先生之伯兄提學公諱駿孫及提學公之子三足堂諱大有。亦以先生之故。俱配湖南。逮中廟登極。得釋。先生兄弟三人。竝仕淸顯。而仲兄早歲。無箕裘。先生身後亦寂寞焉。善人報施之理安在。而獨提學公後先生卒。三足堂賢而有文。攀桂立身。曺南冥許以蓋世之雄。先生娶禮安金尾孫女。金居湖西木川地。故先生常往來或遊息。及卒。夫人因居木以終。墓於縣東十五里許。夫人之私親兄弟子孫。累世相傳。不絶香火。乃云先生亦與夫人合葬於此。然墓道無表。人皆聽氷。及觀先賢墳墓錄則曰。金某 卽先生也 墓在淸道郡西水也峴。淸道本先生之桑梓。而松楸亦在此焉。則淸道之說。似有可諉。而猶莫能釋然。恨未得擲身南紀以白眞贗也。嘻。先生一生所行。雖無可徵。而先聖有云有德者必有言。則讀其書想其人。庶可窺測其萬一矣。觀祭仲氏文。有曰。飮食必躬爨以進於親。凡應對左右。必承顏而無違。吾亦學兄而無不爲。稍知事親之方當如斯也。又云。棄官還鄕。與兄共事漁獵。用以奉養。此則可見其孝親之實也。又云。往尋佔畢。遂知向方。動必相隨。未嘗暫離。又云。經營後事。俾不供佛。撫恤孤孀。俾不失業。我在人間。兄無憂也。又云。兄於中年。飮酒失母志。吾嘗誦賈同遺蔡之詩而切責云云。於此可想友愛之道。而亦見其平生未嘗酗酒而失身也。且身居海外之偏荒。志慕中華之君子。上自程朱。下至金許。常恨不同時而不相見也。又念當今賢士之在中國者。思有以一見。而到京之後。果得二人。一則好道之程愈。一則博學之周銓。又因周銓。聞有李東陽者。文望高世。欲介周一拜。而歸期已迫。未能也。他日送人赴京。傳致不忘之意於二人焉。其好賢樂善之誠。出尋常萬萬。而所謂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者。其近之矣。朱先生小學書。行於我東久矣。而至於程愈集說。則初未聞也。先生之入京也。程愈贈集說。先生以爲是范子勸橫渠學中庸之意。而持以東還。刊布國中。集說之行於東方。蓋自此始。而學者之所賴者。爲如何也。前後赴京。行色蕭然。囊橐所有。盡買經籍。先生在書堂也。上賜四十八詠。使之和進。先生遂跋文以獻。蓋所謂四十八詠。卽詠四十八種花卉者也。先生姑舍花卉之鮮明。推廣物理之無窮。因此著彼。以小喩大。或進君德。或言治道。戒以玩物喪志。勸以主敬達順。此實陳善閉邪。因事納忠之意。而亦觀他一箇大胸襟包得許多也。先生歷職未可攷。姑敍其見於文集者。又有登瀛夏官郞等語。至今傳者。稱正郞云。文集二卷行于世。萬歷庚戌流火。朽淺黃宗海。狀。

 

후천집 > 朽淺先生集卷之八 /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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諡狀

 

吏曹參判 趙寅永 撰

 

金公馹孫。戊午冤死之首也。尤菴宋先生時烈。序其集。略曰。濯纓先生。以文章節行。冠冕一時。不幸遭逢燕山。身棄東市。禍延士林。實祟於弔義帝一篇。未知畢齋之作此文何意。先生之錄是文。又何見歟。皆非後學所敢窺測。豈定,哀微其辭事者。非聖人達權大用。則終不可師法。而秉史筆者。惟直是職歟。先生。宇宙間間氣也。其生也非偶然。其死也豈人所能哉。噫。斯言其盡之矣。雖然。自公昭洗之後。旣貤贈之。又俎豆之。所以爲崇報者。靡有憾矣。惟諡典未及焉。此聖朝之缺事而學士大夫之恥也。上之三十年庚寅秋。三道儒生李浚等上言言之事。下攸司。吏曹判書臣徐能輔。請議大臣。欲重其體也。於是。領議政臣南公轍。以爲金馹孫。慘被史禍。而師友淵源。百世可徵。文章氣義。照耀至今。加贈正卿。施以節惠。允合崇儒奬義之道云。而左議政臣李相璜,右議政臣鄭晩錫。議略同。上允之。蓋公歿之三百三十有餘年矣。公於中廟改玉之初。首蒙復爵。顯廟朝。以筵臣言。特贈都承旨。至是。加贈吏曹判書兼銜如例。公字季雲。系出駕洛國王。在新羅。大角干庾信。以功業大顯。而高麗之季。有諱管。仕至版圖判書。於公爲六世祖也。曾祖諱湑。縣監。是生節孝先生諱克一。薦拜持平。有至孝。事載邑誌。考諱孟。文科執義。贈吏曹參判。公以天順甲申生。未弱冠。聞佔畢齋金先生宗直。居憂密陽。與仲氏翰林公驥孫。往從之。得聞爲學之方。而所磨礱而浸灌者。卽惟寒暄金先生宏弼,一蠹鄭先生汝昌也。方是時。我成宗大王。尊尙儒術。作興人材。上自朝廷。至于鄕黨。韋布彬彬。多宏博雅飭之士。號稱國朝盛際。而裒然爲衆論所推。甫二十三。中生員第一,進士第二。其冬。擢文科第二。公之夙就。由此可知。明年。出補晉州學官。時仲氏乞養監昌寧縣。公爲便省母計也。戊申。病辭。己酉。以非罪幽金寧。旋赦。召爲遼東質正官。赴京師。辛亥。又朝元正。由龍驤司正。選隷綱目校讎。癸丑春。奉旨頒諭嶺南。又賜暇湖堂。而前後踐履。今雖未得其月日之詳。大槩在翰林最久。歷遍三司。而末職天官郞也。歲戊午。公新除內艱。養疾於咸陽之鄕廬。而史獄起。始公爲獻納。疏論李克墩,成俊。互相傾軋。將成牛李之黨。曁修成宗實錄。克墩管史事。見公史草。書其穢行甚悉。且載世祖朝祕事。欲因此爲修隙地。議于摠裁官魚公世謙。魚公愕然不應之。乃與柳子光謀。子光陰險樂禍者也。視以奇貨。相與慫慂於尹弼商等。告公以誣先王。激主怒。時燕山政荒。性猜暴。尤惡文士。思因事一逞。遂令金吾郞馳傳。往拿公鞫之。而別遣掖隷。察道中遲速云。今以野乘之雜出者考之。公爰辭有曰。貴人權氏。事聞於貴人之姪許磐云。有曰。請復昭陵事。欲聖朝行仁政云。公嘗爲忠淸都事。上疏請復昭陵故也。有曰。後殿曲事。昔在西湖也。茂豐副正摠。携琴相訪。彈後殿曲。其曲哀。非治世之音。故竝及之云。又問同議史草之人。公曰。旣輸情矣。請獨死。凡此事實。皆得之斷爛之餘。無以究其顚末。而畢齋所著弔義帝文。亦在史草。子光摘其語。自爲註釋。逐句解之曰。某之惡。皆宗直誨而成之也。其禍遂至滔天。公先以大逆論處極律。畢齋戮及泉壤。而一代搢紳以名流爲號者。誅竄殆盡。卽是年七月十七日也。是日晝晦。雨下如注。大風起。拔木飛瓦。都市人無不顚仆股慄。儒林喪氣。重足屛息。學舍蕭然。數月無誦讀聲。而公所居前川血流三日云。公嘗與鄭文翼公光弼。受兩南御史之命。同日辭朝。同宿於龍仁之館。公慷慨論時事。語多激。文翼屢止之曰。言不可若是。公奮曰。士勛亦爲卑下之論耶。達一宵。竟不相契。士勛。鄭公字也。南秋江孝溫之言曰。公眞希世之才。廟堂之器。論議國事。是非人物。如靑天白日。曹南冥植之言曰。公生有凌霜之節。死有通天之冤。野乘又云。公倜儻有大節。魁偉有器局。文章汪汪若河海。在書堂著秋懷賦。氣象於此可見。其立朝。好盡言。不避權貴云。公所以爲公者正在此。而亦所以取禍也歟。公於著述。立草千言。沛乎無礙滯。見者望洋。中華人。至以東國之昌黎稱之。每腹藁成。磨墨滿硯。一筆揮之。不復視。投之篋中。經累月始出而點化之。或問之。曰。始起草。猶有私意。不自見其當改。久然後私意除。公心生。乃明知其醇疵也。其用工之精如此。嘗與兩兄赴別擧。欲以壯頭讓之。公則不製焉。伯氏遂魁。仲氏聯之。而後圍初場。公醉眠曳白而歸。中場亦如之。至終場。盡粘三場試券。連數十幅而入。考官問策以中興爲目。而宋高宗齒焉。公卷其題。詣前曰。宋高宗。偸安一隅。忘親釋怨。乞和於犬羊。豈與殷宗,周宣。竝列於中興之主哉。考官大慙改之。公乘半酣揮灑。日未斜矣。榜將揭。使人覘之曰。第一名非我。勿復觀。果然。其後靜庵趙先生光祖掌試。得宋公純對策曰。季雲後。無此作。公之爲世企慕。又如此。及殿試。考官忌而置第二。公恥之。常以坡公之居第二自擬焉。足見公平日氣槩也。配禮安金氏。參奉尾孫女。無育。伯氏直提學公駿孫次子縣監大壯。主其祀。其兄三足堂大有。命之也。公葬始在木川。與夫人墓同岡。而公墓後返淸道之上北。以從先兆。尹公鳳朝銘其碑。而學者卽其舊居。又建祠享之。禮堂之請宣額者。尹公絳,宋先生浚吉,趙公復陽。而郞官金公壽興也。李公殷相撰侑文。至以趨義之勇。有過黝賁。正氣不泯。撑柱乾坤贊之。世以爲確論。公稟絶異之姿。抱有爲之志。蚤得賢師。學有指授。所與交皆當世之選。而妙歲蜚英。翺翔乎珥筆橫經之列。淸裁峻議。傾動朝野。不啻若珪璉之登廟。鸞鳳之儀庭。淸粹之蘊於中。足以格君。彪炳之著於外。足以華國。進足以謀謨巖廊。退足以領袖士林。斯可謂河嶽英靈之所鍾聚。而反以厄運乘之。淫刑酷罰。中途摧折。千載之下。聞公事者。莫不掩抑嗚咽而不忍言。不能不致疑於天道人事之際。嗚呼。殆非公一人所關也。然而當時群奸如墩,光之類。構誣煽禍。詡詡然自爲得計者。或於其身。或於其子孫。皆不免刀鉅之典。情狀畢露。昭在史牒。雖婦孺下賤。皆爲之唾罵。而公之一節。秉直不回。彌久而彌彰。磨滅不得。則天人之理。信不舛矣。寅永先祖恭肅公。亦以畢齋門人。罹史案。今於公請諡之狀。義不容辭。略掇前輩記述之可據者。以備太常氏採擇焉。<끝>

 

탁영집 > 濯纓先生文集卷之七 / 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