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졸년 : 9世 강맹경『姜孟卿, 1410년(태종 10)∼1461년(세조 7)』
◈시대 : 조선(朝鮮)
◈건립 연대 : 1462년(세조 8) 5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 - 경기도 기념물 제154호
◈크기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통이마을
◈탁본문소장처 : 일본)경도대학(京都大學)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신숙주(申叔舟) / 강희안(姜希顔) / 미상
[개관]
1462년(세조 8, 임오년) 5월 아들 강윤범(姜允範)에 의해 세워진 강맹경(姜孟卿)의 묘비명(墓碑銘)이다.
이 묘비명이 실린 신도비는 묘소의 좌측에 있으며 팔각지붕형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보호 각이 마련되어 있다.
찬자(撰者)는 신숙주(1417∼1475), 서자(書者)는 강희안(1417∼1465)이다.
강맹경『姜孟卿, 1410년(태종 10)∼1461년(세조 7)』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자는 자장(子章)이다. 아버지는 강우덕(姜友德)이고 어머니는 이혜(李惠)의 딸 재령이씨(載寧李氏)이다.
1426년(세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2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451년(문종 1) 우부승지(右副承旨-正三品堂上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도승지(都承旨-正三品堂上官)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왔다. 특히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하는 일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정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우의정(右議政,正一品)에 오르고,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8년 좌의정(左議政,正一品) 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승진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묘지명의 찬자인 신숙주는, 먼저 강맹경의 혈통과 조상의 업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뒤 그의 부모의 벼슬과 가족관계를 간단히 밝혔다. 이어 강맹경의 생애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하였다. 그의 생애에 대한 서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학문과 업무의 능력이 뛰어나 정승(政丞)이 될 거라는 기대를 받던 벼슬살이의 전반부.
둘째, 계유정난에 협조하여 세조 즉위 후 공신(功臣)이 되어 영의정까지 오르며 세조 초기 모든 국정을 수립하고 천명했던 영화로웠던 시기.
셋째, 1460년(세조 6, 경진년) 가을 이후에 종환(腫患)이 발생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 왕이 직접 처방을 내
렸으며 임종시의 장면과 관련하여 그가 평소에 노모에 대한 효성이 깊었던 사실을 말하였다.
후반부에는 그의 부인과 자식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고 그의 아들이 자신에게 비명을 부탁한 사실과 자신의 강맹경의 부음(訃音) 받던 당시를 추억하였다. 명(銘)은 주로 진주강씨의 혈통과 강맹경이 조정에 충정을, 노모에게 효도를 다했음을 언급하였다.
유명조선국 수충경절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영예문관 춘추관 서운관사 세자사 진산부원군으로 증시가 문경인 강공의 묘비명 병서
수충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감춘추관사 세자부 고령부원군 신숙주(申叔舟)는 비문을 짓다.
진주(晉州) 강씨(姜氏)는 대대로 명덕(名德)이 있어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계속해서 나왔다. 시(蓍)에 이르러서는 고려에서 벼슬하여 문하찬성(門下贊成)이 되었고 공목(恭穆)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시는 회백(淮伯)을 낳았는데, 우리 조정(朝廷)에 들어와 두루 벼슬을 거쳐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지냈고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회백은 우덕(友德)을 낳았는데, 공에게는 아버지가 되며 벼슬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를 지냈고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되었으니, 모두 공 때문에 추증(追贈)된 것이다.
어머니 정경대부인(貞敬大夫人) 이씨(李氏)는 재령(載寧)의 대대로 내려오는 명망 있는 집안으로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惠)의 따님이시다. 경인년(1410, 태종 10) 2월 기미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맹경(孟卿)이요, 자(字)는 자장(子章)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문장을 지어서 나이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20세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얼마 뒤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겨졌으며, 지방으로 나아가 충청도감사(忠淸道監司)를 보좌하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다.
이윽고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진급하며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벼슬을 지낸 곳에서는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어 조정에서 천망(薦望)할 때면 공을 으뜸으로 뽑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전고(典故)를 외우고 익혀서 논의가 맑고 시원시원하며 생각이 정밀하고 민첩하여 매번 중요한 정무가 밀려들 때마다 전혀 놀라거나 허둥대지 않고 여유 있게 처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정승이 될 거라고 기대하였다.
도승지에 임명되고 나서는 문종 임금이 막 세상을 떠났을 때 단종 임금이 어리고 권력을 쥔 간신들이 제멋대로 명(命)을 냈는데, 공이 긴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지극히 공평하게 처리하고 위세에 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차례 공을 모함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감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계유년(1453, 단종 1) 여름에 병 때문에 승정원에서 나가 이조참판이 되어 집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이해 겨울에 성상(聖上 : 세조(世祖))께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킬 때 항상 밀서(密書)를 왕래하였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성상께서 즉위하자 영예롭게 공을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으로 삼았다. 여러 차례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올라 의정부에 있었던 기간은 모두 14년이었다.
마침 주상께서 새롭게 정치를 시행하는 초기였는데, 시행하는 정책들은 모두 공이 수립하고 천명한 것이었다. 공은 차분하고 너그러우며 엄정(嚴正)하고 고상하여 대신(大臣)의 체모(體貌)를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용모가 장대하고 의전(儀典)에 대해서 해박하여 빈제(賓祭)와 대례(大禮)가 있을 때마다 성상께서 반드시 찬빈(贊儐)으로 삼았는데, 끝내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었다.
경진년(1460년, 세조 6년) 가을에 종환(腫患)을 앓기 시작하여 매우 심각해지자 성상께서 내의(內醫)에게 치료해주라고 명하여 병이 나으니, 성상께서 기뻐하여 특별히 내의 전순의(全順義)와 공의 아들과 사위를 한 자급(資級)씩 승진시켰다.
다음해 봄에 이르러 종환이 다시 발병하니 성상께서 또 내의 몇 사람에게 명하여 병을 돌보게 하고 중사(中使)를 계속해서 보내어 날마다 증세를 보고하게 하였으며 약을 쓸 때에는 성상께서 모두 직접 처방을 살펴서 정하였다.
초연히 운명하려 할 때 병세가 점차 위독해지자 4월 을유일에 자제(子弟)를 불러 타이르기를, “내가 인사(人事)에 있어서는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으나 노모께서 생존해 계시니 이 때문에 한(恨)을 안고 갈 뿐이다.” 하였다. 이어서 상제(喪制)는 일체 가례(家禮)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하루가 지나 정해일에 정침(正寢)에서 사망하였다.
성상이 매우 슬퍼하여 3일간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7일간 소선(素膳)을 들었으며, 시호(諡號)를 문경공(文景公)으로 추증(追贈)하고 관청에서 장례 치루는 일을 준비하도록 하여 이해 6월 임오일에 양근군(楊根郡)의 북쪽 묵지산(墨枝山) 산기슭에 장사지냈다.
공은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대부인(大夫人)이 진주의 옛 집에 있을 때 서울로 맞이하여 봉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연세가 많기 때문에 고향에서 편안히 지내려는 마음을 어길까 두려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의껏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특별히 해마다 한 번씩 돌아가서 어머니를 뵐 수 있도록 윤허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를 뵈러 떠날 때에는 성상께서 반드시 직접 전별금(餞別金)을 후하게 하사하여 대부인에게도 그것이 이르도록 하였다. 또 어머니가 계시는 곳에 잔치를 베풀어주니 시골 사람들이 놀라 구경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종환이 처음 다시 발병했을 때 자제들을 경계하기를, “내가 반드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우리 어머니로 하여금 나의 병을 모르게 하고 내가 죽고 난 뒤에 알리도록 하라. 내 병을 걱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나의 죽음을 슬퍼하여 어찌 우리 노모로 하여금 거듭 걱정스럽게 할 것인가?” 하였다. 아! 슬프도다.
공은 돌아가신 상호군(上護軍) 윤수미(尹須彌)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영천군부인(榮川郡夫人)에 봉(封)해졌고 파평(坡平)의 명망(名望) 있는 집안이었다.
부인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윤범(允範)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돌아가신 진사(進士) 정계우(鄭繼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장녀는 옹진현령(瓮津縣令) 남희(南희)에게 출가하였는데 공보다 앞서 죽었고, 차녀는 호군(護軍) 박수장(朴壽長)에게 출가하였다.
윤범이 장사를 지내고 신도비문(神道碑文)을 기록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나 숙주(叔舟)가 친척으로서 배종(陪從)한지도 오래되었으며, 또 묘당(廟堂)에서 같이 근무하여 공을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찾아와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아! 애통하도다. 나 숙주 같은 사람이 차마 공의 비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 공이 사망할 때에 나 숙주는 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追贈)될 때에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 나아가 이를 고하고 사령장의 부본(副本)인 누런 종이를 불태우던 일] 때문에 나주에 있었다.
거기서 한창 감사와 수령 등 남쪽 고을의 친구들과 함께 술판을 벌여 즐기고 있었는데 부음이 도착하였다. 그래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술판을 파하였고 노인이나 젊은이들까지도 모두 탄식하였다.
서울로 돌아오자 성상께서 대내(大內)에서 인견(引見)하고서는 맨 먼저 공의 죽음을 언급하였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마지않았다. 이를 통해 보면 위에서 공을 후하게 대해 준 것과 아래에 사랑을 남긴 것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겠다.
아! 차마 비명을 기록할 수 있겠는가마는 비명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없다.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진주(晋州)의 뫼는 우뚝 솟아 있고
진주의 가람은 끝없이 흘러가
상서로움을 품고 길함을 쌓아서
강씨(姜氏)에게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네.
이에 현철(賢哲)한 분을 탄생시켜
이 동방(東方)을 돌아보니
손수 임금을 도와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였네.
임금과 신하가 의기투합(意氣投合)하고
백발의 노모는 집에 살아 있는데
하늘이 나라의 기둥을 꺾으시니
슬픈 눈물만 펑펑 흘린다네.
비명을 짓고 사실을 기록하여
영구히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니
영원히 이 비명에 의거하여
공의 덕행 오래오래 전해지리라.
천순(天順) 6년인 임오년(1462, 세조 8) 5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原文]
有明朝鮮國輸忠勁節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領藝文春秋館書雲觀事 世子師晋山府院君贈謚文景姜公墓碑銘幷序
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匤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館事 世子傳高寧府院君申叔舟撰
嘉善大夫同知中樞院事行虎賁衛上護軍姜希顔書幷篆額
晉山姜氏世有名德冠冕相望至蓍仕高麗爲門下贊成謚恭穆蓍生淮伯入我 朝歷官爲東北面都巡問使贈議政府右贊成淮伯生友德於公爲考官至朝散大夫知昌寧縣事贈議政府左議政竝以公故有贈妣貞敬太夫人李氏載寧世家知甫州事惠之女庚寅二月己未生公諱孟卿字子章公自幼能讀書爲文年十七中司馬試二十中第選入翰林尋爲承政院注書遷司憲監察出佐忠淸道監司還拜吏曹佐郞俄進議政府檢詳舍人司憲執義歷敡淸要所生皆有聲績凡朝中薦望莫不以公爲首諳練典故論議淸暢思致精敏每機務雲集不動聲色處之裕如人皆以公輔期之及拜都承旨 文宗初棄群臣主幼權姦擅命公在樞要處以至公不爲勢怵屢欲陷公而終不敢歲癸酉夏以疾出爲吏曹參判在家治疾是年冬 上之靖難也常以密書往來人無知者及 上卽位榮公爲輸忠勁節佐翼功臣累進議政府參贊贊成右議政左議政領議政府事在政府凡十四考適當 主上新政之初凡所施措多公所建明沈靜寬毅方嚴雅重得大臣體天姿魁偉詳於儀度每有賓祭大禮 上必以公贊儐終無愆違歲庚辰秋始患腫甚劇 上命內醫治之而愈上喜特陞醫全順義與公子壻爵一級至明年春腫復作上又命內醫數人侍疾 中使絡繹令日 聞證候用藥上皆親自按方定脫然大命將終疾勢漸革四月乙酉召子弟詔曰吾於人事死無所憾但老母在堂以是齎恨耳因命喪制一遵家禮越一日丁亥卒于正寢 上悼甚 輟朝三日 素膳七日贈謚文景官庀葬事以是年六月壬午葬于楊根都之北墨枝山之麓公性至孝太夫人在晉州舊業欲迎養于京以年高恐違安卿曲意屢陳歸養 上不聽特許歲一歸覲母臨行 上必親餞贐錫稠重以及太夫人又命所在 賜宴鄕閭聳觀擧世榮之腫初復戒子弟曰吾必不起勿令吾母知吾病待吾死而後報旣憂吾病又悼吾死豈可使吾老母重苦乎嗚呼哀哉公娶故上護軍尹須彌之女封榮川郡夫人坡平望族也夫人生一男二女男曰允範知司諫院事娶故進士鄭繼禹之女生一男幼長女適瓮津縣令南暿先公死次適護軍朴壽長允範旣葬欲記神道而以叔舟系在屬籍陪遊且久伴食廟堂知公最悉乃來請銘嗚呼痛哉叔舟而可忍銘公也耶公之卒也叔舟以焚黃在羅州方與監司守令南州諸舊置酒爲歡而訃至滿坐垂泣而罷以至州之老幼莫不興嗟及還京 上引見 大內首及公故爲之下涕悀之無巳乃知眷遇上隆遺愛下究也如是嗚呼可忍銘也耶而亦不可不爲之銘也銘曰
晉山㠔㠔 晉水汪汪 孕祥畜吉 泄美子姜 迺生賢哲 眷此東方 手搏日轂 濟我黔蒼 雲龍道合
鶴髮在堂 天摧柱石哀淚滂滂 撰銘記實 以永傳芳 千古有托 山高水長
天順六年壬午五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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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맹경 선생 세계도
1세 | - | 2세 | - | 3세 | - | 4세 | - | 5세 | - |
계용(啓庸) | 인문(引文) | 사첨(師瞻) | 창귀(昌貴) | 군보(君寶) | |||||
6세 | - | 7세 | - | 8세 | - | 9세 | - | 10세 | |
시(蓍) | 회백(淮伯) | 우덕(友德) | 맹경(孟卿) | 윤범(允範) 세범(世範) |
↑文景公 姜孟卿先生 神道碑閣/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강희안(姜希顔)이 글씨를 썼다.
1462년(세조 8) 5월 일에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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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館,春秋館,集賢殿,書雲館事,世子師,晉山府院君,贈諡文景姜公墓碑銘。
姜希孟 撰
公胤知司諫允範。袖公手定歷官始末。求銘其墓。希孟 謹按。公諱孟卿。字某。曾祖恭穆公蓍。仕高麗。官至判門下贊成事。祖淮伯。仕高麗。官至政堂文學。入國朝。爲東北面都巡問使。後以公勳。贈右贊成。考友德。知昌寧縣事。後以公勳。贈右議政。母李氏。知甫州事李蕙之女。以庚寅某月生公。公少有器宇。異於凡兒。李氏性有法度。敎以義方。歲丙午。年十七。中監試。己酉。年二十。許思文榜登第。入翰林。未幾。授承政院注書。甲寅。屢授司憲察監。俄拜忠淸道都事。至今有遺譽。乙卯。累授吏曹佐郞。戊午。累授奉常判官。帶議政府檢詳。己未。丁內艱。執喪盡禮。服闋。辛酉。拜吏曹正郞。復帶檢詳。癸亥。拜議政府舍人。庚午。累授司憲執義。尋以言事。遷禮賓寺尹。自是凡六除。而拜承政院同副承旨。知刑曹事。公啓獄事。情法得宜。累遷至都承旨。時文宗賓天。國勢疑危。公摠管機密。周旋鎭定。中外倚以爲重。壬申。以疾辭。遞拜吏曹參判。階加嘉善。甲戌。拜判漢城。階資憲。俄拜參贊議政府事。尋陞左參贊。階正憲。時宗室瑜,瓔。潛搆亂。公與政府大臣。密謀除之。乙亥。上卽位。命公兼判禮曹事。階崇政。上一日。語公曰。卿爲世子賓客。宜善導之。勿使驕奢。公對曰。古人云。由奢入儉難。由儉入奢易。苟毋忘此意。則無此憂矣。上稱善。九月。策公佐翼功臣爲二等。封晉山君。丙子二月。階崇祿。十月拜左贊成。丁丑二月。進世子貳師。尋拜右議政。以賀登極使赴京。賚與加等。戊寅二月。上幸公第。御于楹前榻上。仰視屋宇曰。急改蠹楹。恐傷人也。首相之第如此。玆不美乎。讓寧見堂前瓦罌數事。啓曰。此間得無有瓜子金乎。上曰。審知此家素無瓜子金也。後於大內。引見公。上與中宮。論公不營產業。夫人儉素。曰。政丞何恬淡至此耶。公對曰。優蒙聖恩。土田臧獲。無不如意。更何所望。上善其對。己卯二月。公以母老思歸養。上聞之。卽差公弟叔卿爲密陽府使歸養。一日。公啓曰。臣備位首相。縱無異能。但謹守法度。願無紛更耳。上深許之。仍寫賜御製一絶以褒之。是月。上又臨公第。天語丁寧。恩幸無比。翼日。上表陳謝。六月。公以久兩。上書請免。上批其尾曰。予與卿同體贊化。卿若退步。予何進步。時上議送倭島符驗便否。公曰。倭人本非我度內。但我以誠撫之耳。彼之詐僞。安能一禁。議遂寢。上於後苑。開田水種稻。命工繪圖。令羣臣製詩。公詩曰。周家基業永流傳。無逸邠風掛眼前。那似當今後苑裏。爲看民事早開田。時稱得體。十一月。拜領議政。上賜政府大臣宴於便殿南廊。仍賜樂。公曰。密近大內。只可飮酒耳。擧樂太康也。上以敢拒君賜爲不恭。卽命罷相。居十日而復相。庚辰三月。帝使張寧到國。上特命公爲引禮使。寧觀公秉禮。曁還。語譯者曰。姜宰相眞老實臣也。宜爲首相。主賢臣良。國有何事。公嘗患腫幾危。上命內醫治療。一鍼一藥。皆稟睿斷。及愈。上喜甚。加侍疾醫及子婿爵一級。尋以疾辭。不允。防納之禁旣開。謀利者嗾守令。民所易備者。抑勒收價。民甚苦之。公極陳其弊。上命公草諭書。聽民自便。三月。前疾復作。上遣內醫視疾。中使候問者絡繹於道。四月十五日。病革。召子弟若曰。吾於人世事已極。我無所恨。但老母在堂耳。遺命襄事。一從家禮。務從儉約。越二日丁酉。卒。享年五十二。訃聞。上震悼。輟朝三日。官庀葬事。太常易名曰文景。是年六月。葬于京畿楊根郡之某原。公天資粹美。襟度豁達。雅好儉素。不喜紛華。事母盡孝。與人接物。一以誠款。無所矯僞。居家。不事生產作業。當官。不矯矯而異。不潝潝而同。及其臨大事。决大疑。剖析肯綮。遊刃恢恢。若不經意。論定之後。文理密勿。節目詳明。牢不可破。名位已極。寵榮無前。而常自欿然。不以富貴有所移易。嗚呼。若公者。可謂大臣矣。配貞敬夫人尹氏。司諫須彌之女。生一男二女。男曰允範。知司諫院事。女長適判官南禧。先歿。次適判官朴壽長。知司諫。生一男。朴判官。生一女。皆幼。噫。希孟於丁丑春。謁公於東閣。公語希孟曰。姜氏之起於晉遠矣。世必有名卿。淸名儉德。仰之若不可及。然而勳名知遇。反不如吾。他日誄吾行者必汝也。於吾行。宜審之。希孟對曰。胡耇之年尙遠。何遽有是命耶。公曰。計吾羣弟。知我者莫詳於汝也。希孟退而未嘗不恠於心也。噫。聞命之日幾何。求誄之言。及吾耳耶。揮涕謹銘。以寫一哀。銘曰。
溥彼晉原。有姓曰姜。恭穆承家。文敬發祥。蟬聯六代。釰佩鏘鏘。公興繼緖。能掩前光。遭際風雲。佐我明王。功銘鼎鼐。位冠巖廊。有德有位。順乎將相。我王曰咨。嘉乃忠良。卿無布被。純儉孔彰。益殫乃力。弼余時康。公贊大化。庶見豐穰。孰民不獲。公視如傷。孰賢不達。公則顯揚。秉勻五載。不愆不忘。山立揚休。紫綬金章。淊淊江漢。皓晧秋陽。紹天蓍龜。瑞世鳳凰。民望方深。天奪之忙。當宁興哀。一鑑云亡。里舂不相。悲泣遑遑。惟楊之原。玄室若堂。我銘匪私。靑史煌煌。
사숙재집 > 私淑齋集卷之七 / 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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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館,春秋館,集賢殿,書雲館事,世子師,晉山府院君,贈諡文景姜公碑陰記。
姜希孟 撰.
愚嘗讀記。至孔子不知防墓所在。殯於五父之衢。問於曼父之母。然後得合葬於防。未嘗不疑其誕妄也。歲戊寅春。謁仲父墓於晉之班野洞。見堂兄文景所記先塋之次于碑陰。一日。謁公請其故。公曰。備忽忘也。夫孝子之於親。不敢斯須違離。天性也。及其歿也。飯於牖下。殯於客位。祖於庭。葬於墓。其禮卽遠。有進而無退。勢也。夫以卽遠之禮。加之天性之親。固已悲矣。由是而至於親盡。親盡則服盡。服盡則情盡。情盡則塗人也。塗人而求無忽忘焉。難矣。是亦可悲也已。吾嘗試與世之人語矣。其田廬贓穫。則必曰此幾世某祖遺業也。小有得失。必訟諸官府。求辨而後已。若問其墟墓。則漫然不知所在曰。世遠莫記也。其可乎。噫。由高堂而變墟墓。自吾親而爲塗人。此君子之所傷。而尤致其謹嚴也。吾家子若孫。因是求之。庶不至偸薄矣。愚然後乃知公之慮之深。而始悟夫記禮者之微意也。後四年辛巳。公損館。公胤知司諫院允範。葬於楊根郡治。二年夏。樹碑於墓下。請記其陰。希孟才辭譾簿。著述非任也。顧無以爲說。則記先兄所嘗告余者。仍敍先塋所在如左云。
玄祖晉原府院君諱昌貴。墓在草溪郡甲山里。室永嘉郡夫人權氏祔。
高祖鳳山君諱君寶。墓在星州加利縣。室鷄林郡夫人金氏。墓在臨江縣代日里。
曾祖恭穆公諱蓍。墓在臨江縣榛足里。室貞愼宅主河氏。墓在坡州普施里。後遷大慈菴山麓。
祖都巡問使諱淮伯。墓在漣川江內里。前室東萊郡夫人鄭氏。墓在臨江縣桃源驛。繼室貞夫人李氏。漣川與祖同兆域。
考贈左議政諱友德。墓在晉州班城縣班野洞。
天順六年五月日。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行龍驤衛大護軍,知製敎希孟。謹記。
사숙재집 > 私淑齋集卷之七 / 碑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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