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약재 류상운 묘갈명 병서(領議政 約齋 柳尙運 墓碣銘 幷書)
南九萬 撰[己丑 1709年 肅宗 35年]
[묘의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3리 산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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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약재 류공묘갈명 병서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約齋 柳公墓碣銘 幷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치사 봉조하 남구만 찬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致仕 奉朝賀 南九萬 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최석정 서 병전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崔錫鼎 書 幷篆
고(故) 영의정 약재(約齋) 유공이 임종할 적에 자손들을 돌아보고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하니, 여러 아들이 감히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의 충성이 오랜 후세에 조금도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해서 오 추탄[吳楸灘, 오윤겸(吳允謙)]이 별세한 뒤의 일을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고 묘갈을 세워 세세한 것은 생략하고 큰 것만 기록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너덜너덜한 상복을 입고는 집으로 찾아와서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아, 나는 공과 함께 한 세상의 표적이 된 자이니, 지금과 후세에 믿음을 주지 못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은 나를 알아준 자이니, 내 공을 위하여 명문을 지음은 다만 공을 위한 것이다.
공이 만약 지하에서라도 앎이 있다면 또한 반드시 나의 글을 받을 것이니, 다른 것을 또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삼가 가장을 받아 다음과 같이 쓴다. 문화 류씨(文化柳氏)는 고려 때 대승(大丞)을 지낸 차달(車達)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조선조에 들어와서 좌의정을 지낸 문간공(文簡公) 휘 관(寬)이 공의 9대조이다.
5대조 휘 희저(希渚)는 부제학이고, 증조 휘 몽익(夢翼)은 첨정(僉正)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조고 휘 속(洬)은 현감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선고 휘 성오(誠吾)는 좌랑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비 나주박씨(羅州朴氏)는 좌참찬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진 동량(東亮)의 따님이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인조 14)에 공을 낳으니, 휘는 상운(尙運)이고 자는 유구(悠久)이다.
경자년[1660(현종 1)] 성균관에 들어가 병오년[1666(현종 7)]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소속되었다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예조와 병조의 좌랑, 병조정랑, 경상도 도사, 지평, 사서(司書), 부수찬(副修撰), 필선(弼善), 장령, 교리, 종부시 정,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는데, 강계부사로 있다가 돌아오자 백성들이 비석을 새겨 공의 청렴한 덕을 칭송하였다.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부총관, 도승지, 공조 참판, 대사간,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연경(燕京)에 가는 부사로 차임되고 병조ㆍ호조ㆍ형조ㆍ예조의 참판으로서 동지의금부사와 비변사 제조를 겸하였으며, 다시 서번(西藩 평안도)에 부임하였는데, 백성들이 공의 화상을 그리고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고 부제학과 대사헌을 지냈으며,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가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사직하여 체직되고 다시 호조판서가 되어 지의금부사와 사복시제조, 비변사유사당상을 겸하였다.
세 번째 호조판서에 임명되고 판의금부사와 이조판서로 발탁되었으며, 네 번째 호조판서가 되었다.
기사년(1689,숙종 15) 중궁(中宮)이 사제(私第)로 나가고 당인(黨人 남인 )들이 등용되어 공을 외방으로 내쳤는데, 갑술년(1694, 숙종 20) 환국(換局)이 되자 이조판서 겸 판의금 지경연 세자좌빈객 내의원제조(吏曹判書兼判義禁知經筵世子左賓客內醫院提調)에 다시 제수되었다.
중궁이 광복(光復)하자 옥책문(玉冊文)을 써서 올리고 말을 하사받았으며, 을해년(1695, 숙종 21) 우의정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세자부(世子傅)와 호위대장(扈衛大將), 금위영 도제조(禁衛營都提調)를 겸하였다.
병자년(1696,숙종 22) 장가(張家)의 종 업동(業同)의 무고(巫蠱) 옥사를 끝까지 다스리지 않았다 하여 사람들의 배척을 받고 도성 밖으로 나가 사직하였는데, 상[임금]은 체직하고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장가(張家)의 종의 옥사가 다시 발각되어 형벌을 받아 처형되자, 공은 상소를 올려 사죄하고 견책을 내릴 것을 청하였는데, 성상은 별로 혐의할 것이 없다고 답하시고 얼마 후 영의정을 제수하였다.
정축년(1697,숙종 23) 독권관(讀券官)으로 정시(庭試)를 관장하였는데, 창방(唱榜)을 하자 아들 봉휘(鳳輝)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언로에서 이것을 말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무인년(1698,숙종 24) 다시 영상에 제수되었다가 기묘년(1699) 사양하여 체직되고, 얼마 후 세 번째로 영상에 제수되었는데 일을 논하다가 성상의 뜻을 거슬러 파직당하고 율촌(栗村)으로 돌아가 교외에서 거주하였다.
다시 서용되어 판중추부사가 되고 또다시 호위대장과 사복시제조를 겸하였으나 공은 오히려 죄를 지었다 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경진년(1700,숙종 26) 중궁 의약청(中宮醫藥廳)을 설치하자 공은 성 밖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안후가 편치 않자 들어와 문안하는 대열에 참여하였다.
신사년(1701,숙종 27) 상소를 올려 배척하는 자가 있자 상소문을 남겨놓고 다시 율촌으로 돌아갔으나 중궁의 환후가 갑자기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강가에 이르렀다가 중궁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궐문 밖의 반열에 나아가 통곡하였으며, 성복(成服)하고 율촌으로 돌아갔다.
10월에 춘궁(春宮)의 소 생모(所生母)에게 사약을 내려 자진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상소를 올려 은혜를 온전히 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 대관(臺官)이 장가의 종을 끝까지 다스리지 않았으며 곡하는 반열에서 물러나와 상소문을 올렸다 하여 나와 같은 죄로 파직을 청하였는데, 파직되자 축출할 것을 청하고, 축출되자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임오년(1702,숙종 28) 5월에 이르러 마침내 중도부처(中道付處)할 것을 명하여 유배지인 직산(稷山)으로 갔다.
겨울에 새로 중궁을 책봉하는 예 가 이루어져 사면령(赦免令)이 내렸으므로 전리로 돌아왔다.
을유년(1705,숙종 31) 특별히 서용되어 판중추부사가 되었는데, 나이가 70이 되었다 하여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이때 마침 대사헌 이돈(李墪)이 입대하였다가 공이 죄를 받은 것을 언급하면서 아뢰기를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애통합니다.” 하니, 상은 그 말을 지나치다 하여 이돈을 귀양 보내고 다시 공을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병술년(1706,숙종 32) 중추부와 사복시제조에 서용되었는데 상이 즉위한지 30년이 되었다 하여 왕세자가 진연례(進宴禮)를 올리게 되었다. 공이 명령을 받고 조정에 들어오자, 상은 인견(引見)하고 지난번의 일을 해명하였으며, 또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서 국정을 도울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공은 오히려 황공해하여 잔치에 참여한 뒤에 곧바로 율촌으로 돌아갔다. 정해년(1707,숙종 33) 5월에 상이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선유(宣諭)하고 함께 올 것을 명하였는데, 공이 여러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도성 남쪽의 옛집으로 나아갔다. 8월에 상이 산릉을 배알할 적에는 유도(留都)의 명령을 받고 도성에 남아 있었다. 11월에 병을 앓으니 상이 의원을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또 약물과 맛있는 음식을 하사함이 계속 이어졌으나 끝내 12월 4일 별세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은 놀라 슬퍼하시고 관의 재목을 하사하였으며, 철조(輟朝)하고 정시(停市)하였다. 조문과 제사를 내리고 예장(禮葬)하였으며 3년 동안 그대로 녹봉을 주게 하였다. 왕세자도 당일로 거애(擧哀)하고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문과 제사를 올렸다.
무자년(1708,숙종 34) 2월 양천(陽川)의 동쪽에 있는 선친 의정공(議政公)의 묘소 왼쪽 등성이에 장례하였다.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우의정 행원(行遠)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이 있어 친척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정축년(1637,인조 15)에 출생하여 경인년(1650 효종 1)에 시집왔으며 임술년(1682,숙종 8)에 별세하여 공과 한 무덤에 부장하였다. 5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봉서(鳳瑞)는 교리이고 봉휘(鳳輝)는 부윤이고 봉일(鳳逸)은 직장(直長)이고 다음은 봉협(鳳協)이고 봉채(鳳采)는 봉사(奉事)이며, 두 딸은 교리 이세최(李世最)와 사인(士人) 신제(申濟)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와 증손 이하가 또 십 수 명이다. 공의 유덕(遺德)을 대략 말한다면, 안으로는 부모와 아우와 여동생들에게 공경과 사랑을 돈독히 하였고 밖으로는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신의를 돈독히 하였으며, 문학과 정사의 재주와 절검(節儉)하고 정직한 지조가 모두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남이 있었으니, 이는 실로 여러 사람들이 공공연히 칭송하는 것이다.
조정에서 벼슬한 40여 년 동안 중외(中外)에 출입해서 명성과 공적이 크게 드러났다. 여러 번 황각(黃閣=의정부)에 올라서 군주의 신임과 의지함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군주에게 아뢰고 조처한 것으로 기록할 만한 내용이 많으나 지금 일일이 다 들 수가 없고, 우선 군주의 뜻에 영합하지 않고 사람들과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자신을 잊고 국가를 위하여 반드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 몇 가지 일을 서술하겠다.
오직 이 한 마음이 분명하였으니, 시종 이 때문에 성상의 마음에 깊이 합하였고, 또한 한쪽으로 치우친 의론을 하는 자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은 것이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적에 반궁(泮宮)의 장의(掌議)가 되었는데, 함께 장의를 맡고 있던 이선(李選)이 상소를 올려 서필원(徐必遠)이 김만균(金萬均)을 공격한 것을 논하려 하였으니, 이선과 김만균은 내외종형제간이었다.
공이 친척의 혐의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이선을 비난하자, 성균관 관원들은 도리어 상소를 저지한 일로 공을 처벌하였다. 공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이 일 때문에 춘추관(春秋館)에 천거되지 못하고 전랑(銓郞)에 제수되지 못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이 마음을 잡아 지킴이 견고하여 한때의 이해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것이 소년 시절부터 이미 그러하였음을 볼 수 있다.
공은 강계(江界)에 있을 적에 상의 명령에 따라 소(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 조정의 신하들이 전하를 엄폐하고 전하께서 조정의 신하들에게 엄폐 당함이 너무 심합니다. 정태화(鄭太和)가 선왕의 묘정에 배향되지 못한 것도 예론 때문이며, 송준길(宋浚吉)이 지하에서 죄망에 걸린 것도 예론 때문입니다.
바닷가에 귀양 가있는 외로운 신하는 선왕을 폄하했다 하여 죄를 얻었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죄명이 인정에 가깝지 않음이 어찌 이와 같이 심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여기에서 공의 마음이 공정하여 배척을 당하여 외직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평소의 친소(親疎)에 따라 칭찬하거나 배척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강계에서 돌아오자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이 “유모(柳某)의 응지소(應旨疏)가 비록 도신(道臣)에게 퇴각당하여 미처 상주되지 못했으나 대략 듣건대 죄인들의 괴수를 변호하여 구원하고 또 예론을 나라에서 금지한 것이 잘못이라고 했다 하니, 그를 지신(知申, 도승지)에 의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상은 특명으로 공을 지신에 제수하시고, 인재를 등용함이 공평하지 못하다 하여 이원정을 삭탈관직 하여 축출하였다. 이 당시 예론은 세상에서 크게 금지하는 것이었으며 당인(黨人)들이 막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었으나 상이 내치고 두둔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상의 마음이 공을 믿어 사람들이 비방하는 가운데에 특별히 선발한 것이었다.
기사년(1689,숙종 15) 정월에 공경(公卿)과 삼사(三司)의 장관을 명초(命招)하여 왕자(王子)의 명호(名號)를 정하는 일을 하문하자, 공은 대략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는 진실로 종묘사직을 위한 큰 계책에서 나오신 것이나 만약 후일에 정궁(正宮=중전)이 사내아이를 생산하는 경사가 있게 된다면 실로 난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조처를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너무 빠르다고 여길 것입니다. 불행히 정궁이 대군(大君)을 탄생하는 경사가 없고 왕자의 나이가 장성하면 유사(有司)들이 자연히 서둘러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할 것입니다. 국본(國本)을 정함은 명호를 일찍 정하느냐 늦게 정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 후 대사헌 민종도(閔宗道)가 공을 탄핵하기를 “원자의 명호를 정하는 날에 유모(柳某)가 마치 폐비(廢妃) 민씨(閔氏)를 위하여 충절을 세우는 듯하였으니, 중도부처(中途付處)할 것을 청합니다.” 하여, 네 번 아뢴 뒤에 마침내 삭탈관직 하여 축출할 것을 명하였다.
갑술년(1694,숙종 20) 환국이 되자, 이때 판서 남용익(南龍翼)의 관직을 회복하라는 비망기(備忘記)에 상은 공의 기사년 상소에 ‘태자를 위하여 죽겠다.’는 말을 특별히 들어서 말하였으니, 이는 상의 마음에 공을 인정함이 죄를 지어 축출당하는 때에도 묵묵히 있었던 것이다.
공이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상에게 아뢰기를 “오도일(吳道一)은 마음이 거칠고 기(氣)가 지나친 것이 그의 병통인데, 이수언(李秀彦)은 마침내 오도일을 ‘권력을 잡은 간신에게 아첨한다.’고 지목하였으니, 조정에서 애매모호하게 분별하지 아니하여 분란이 격해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반드시 둘 다 그르다고 해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 후 도목정(都目政)에서 이수언을 내쳐 호남관찰사에 보임하고 오도일을 내쳐 영동관찰사에 보임하였으니, 공의 본래 뜻은 실로 안정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는 단서를 잠재워서 화평한 복을 이루고자 해서였고, 그 사이에 경중을 두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피차가 모두 불평하는 마음을 품었으며, 오직 상만이 공의 마음에 딴 생각이 없음을 헤아려 맡기고 의심하지 않았다. 신사년(1701, 숙종 27) 대신(臺臣)의 상소로 말하면 죄 없는 사람을 모함함이 더욱 심한 것이었다.
기사년(1689,숙종 15) 5월에 중궁이 사제(私第)로 나간 뒤로 신하와 백성들이 원통해하고 답답해하여 억울함을 펴지 못한 지가 오래였는데, 하루아침에 상의 마음이 깨달아 중궁이 복위되니, 사람들의 마음이 흔쾌하여 온 나라가 고무되었다.
그런데 중간에 하늘의 공(功)을 탐하여 스스로 자신의 이익으로 삼으려는 자가 있어 이것을 부풀려 과장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때 나는 공과 초야에 있다가 함께 부름을 받았는데, 입조하기 전에 화(禍)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운운하는 말을 이미 들었으니, 이는 후일 이현명(李顯命)의 상소와 똑같은 내용이었다.
나의 사사로운 마음에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기사년의 변고는 다행히도 지금 일월(日月)이 이미 잘못을 고쳐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 그러나 손상된 것이 또한 너무 많으니, 만약 이러한 때에 또 혹 지나치게 조처해서 사변이 뜻밖에 일어난다면 종묘사직의 우려를 진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요,
모든 보필하는 임무에 있는 자도 그 죄를 피할 곳이 없을 것이니, 장차 다시 무슨 말로 기사년의 죄인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장희재(張希載)의 언문(諺文) 간찰에 대한 일이 발각되자, 나는 국청(鞫廳)에서 심문하는 임무를 받고 입대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내간(內間)과 연결되어서 장희재의 죄만 논하고 그치기가 어려우니, 성상께서 헤아리시는 방도가 있으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은 나의 말을 받아들였다.내가 물러 나온 뒤에 공이 마침 나를 방문하였으므로 내가 그 이유를 말하자, 공은 말하기를 “상군(相君)의 뜻을 내 압니다. 그러나 반드시 상군이 하는 일을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 유신(儒臣)이 상소하여 나를 공격하므로 나는 도성을 나가 대죄하였는데, 공이 이조판서로 성상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전유(傳諭)하였으며, 또 나에게 다시 도성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더욱 심하게 나를 공격하였으므로 또 물러나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공은 약방(藥房)에 입직(入直)하였는데 경재(卿宰)가 찾아와 내 일을 묻자, 공은 말하기를 “내 소회가 있어서 상소문을 지은 것이 여기에 있다.” 하고 그 초고를 보여주었는바, 그 대략은 “신은 수규(首揆)가 장희재의 일을 처음 물었을 적에 그가 주장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고 또다시 도성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였으니, 진퇴하는 즈음에 홀로 달리하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떠나갈 적에 이미 함께 물러가려는 뜻을 언급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벼슬을 탐하고 연연해하여 머뭇거린다면 무슨 낯으로 후일에 다시 그를 대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이었는데 경재는 묵묵히 그대로 가버렸다. 그 후에 나는 상이 간곡히 부름으로 인하여 오래지 않아 조정으로 돌아왔으므로 공이 초한 상소문은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병자년(1636,인조 14) 5월 연서역(延曙驛)에 있는 춘궁(春宮)의 사친(私親)인 장씨(張氏) 집안 묘의 무고(巫蠱) 사건으로 나는 공과 우상 신익상(申翼相)과 함께 장가(張哥)의 종인 업동(業同)을 조사하였는데, 자못 종적이 있으나 다 토설하려고 하지 않아서 형벌을 가하여 신문하게 되었다.
나의 생각으로는 ‘예로부터 무고의 옥사를 반드시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면 그 화가 반드시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또 이것은 궁중에 흉한 것을 묻은 것과는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양 무제(梁武帝) 때에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어머니인 정빈(丁嬪)의 묘소에 납아(蠟鵝)를 묻은 일이 있어 그 일을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있던 서면(徐勉)이 굳이 간하여 중지시켰으니, 그의 뜻이 충성스럽지 않아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여겼다.
이에 이러한 뜻을 가지고 상의 앞에서 진언하고자 좌상, 우상과 함께 입대할 것을 청하였는데,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고 공도 뒤따라 무고의 옥사를 끝까지 다스릴 수 없다는 뜻을 아뢰었으며, 우상도 다른 말이 없었다. 상이 “이제 경들의 말을 들으니 내 뜻과 참으로 부합한다.” 하시고는 인하여 국청을 파할 것을 명하였으며, 장가의 종 업동을 멀리 귀양 보냈다.
이에 사람들의 비난이 벌떼처럼 일어나 공격하니, 나와 공 그리고 우상이 모두 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였다.
상은 승지를 보내어 간곡히 전유하고 함께 오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이번의 처결은 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나의 마음이 바로 경들의 마음이다.” 하였다.
공이 성 밖에서 의정부의 아전을 시켜 신부(信符)를 반납하고 상소문을 남겨 놓은 다음 강을 건너 양천(陽川)의 시골집으로 돌아가니, 승지가 뒤따라 와서 전해준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경이 전후에 헌의(獻議)한 것은 국가를 위한 깊고 장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고 결코 딴 마음이 없으니 사관을 보내어 신부를 돌려주노라.” 하였다.
공이 다시 상소를 올리자, 상의 비답이 더욱 간곡하여 이르기를 “마침내 어젯밤 꿈에 경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기쁜 마음이 지극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꿈을 깨자 갑절이나 서운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으니, 진실로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일체여서 서로 필요로 하는바, 정성이 있으면 꿈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하였다.
공이 다시 상소하여 사례하고 또 체직하여 다시 대궐문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줄 것을 청하자, 상이 마침내 해임을 허락하니, 공은 비로소 서울로 돌아왔다.
신사년((1701,숙종 27) 8월에 나는 공과 함께 대궐문 밖의 곡하는 반열에 앉아 있었는데, 반열을 두루 돌아다니며 고함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장희재를 용서한 사람을 앞줄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은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반열에서 고함친 일은 지극히 위험하니, 놀라운 일이 불원간 일어나서 영부사(領府事=남구만)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갑술년(1694,숙종 20)에 상소문을 갖추어 올리려 하였으나 끝내 올리지 않은 것은 그때 영부사가 비록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을 듣고 있었으나 성상의 돌보심이 융숭하였으니, 내가 그와 죄를 함께 받을 것을 청하는 것이 도리어 영화와 은총을 받는 결과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세가 크게 다르니, 그 일을 함께하고 그 죄를 함께하지 않는 것을 나는 실로 두려워한다.” 하고는 마침내 소장을 올렸다. 그 대략에 “근래에 갑술년과 병자년에 시행한 형벌의 잘못을 논하는 자가 있으니, 신은 병자년에 옥사를 다스린 신하로서 이미 요행으로 죄를 피할 수 있는 도리가 없으며, 갑술년의 일로 말하면 오히려 다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장희재를 참작하여 조처하던 초기에 그 당시 영의정인 남구만이 성상께 품재(稟裁)하겠다는 뜻을 신에게 말하였는데, 신은 경도(經道)와 권도(權道)를 때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차자(箚子)를 올릴 적에 신에게 초고를 보여 주었는데, 신이 또 깊은 충성과 먼 생각이 있다는 말을 주장하여 그 말이 차자의 내용에 들어가서 성상께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자들이 마침내 불충(不忠)과 불의(不義)로써 남구만을 단정하는 죄안으로 삼고, 또 이른바 ‘심장하게 생각했다〔深長慮〕’는 세 글자로써 군부(君父)를 공갈하는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죄를 삼는다면 신이 실로 첫번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감히 계면쩍게 스스로 엄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은 답하기를, “위험한 말을 어찌 입에 올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후 양사(兩司)에서 합계하여 장희재의 일로써 나를 죄주고 업동의 일로써 공을 죄주고는 말하기를 “그들의 죄를 끝까지 다스리지 아니하여 무고의 변고를 빚어내었다.” 하였으며, 공이 반열에서 곡한 뒤에 소장을 올린 것을 가지고 “드러내놓고 후일의 복을 바라는 뜻이 있다.” 하였다.
내가 장희재의 일로 죄를 받은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하겠으나 업동의 옥사를 다스린 것으로 말하면 내가 당시 영상이 되어서 입대할 적에 첫 번째로 청하였고 일을 아뢸 적에 먼저 말을 꺼냈으니, 이 어찌 홀로 이것을 들어 공의 죄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또 그때 중전의 자리가 처음 비니, 화를 좋아하는 자들은 공이 이익을 기대하고 상소해서 장차 후일의 복을 취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아, 공이 상소문을 초안한 것은 이미 갑술년에 있었고 이때에 올린 것은 창졸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니, 실로 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사람을 모함하여 죄를 얽어맬 적에 옳고 그름을 변란시킴이 비록 망극하다고 하나 어찌 이와 같이 심한 경우가 있었겠는가.
다만 상의 비답에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논계(論啓)는 실정 밖의 말이 많으니, 유상운(柳尙運)의 심사를 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결코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니니, 해당되는 죄로 그를 죄줄 뿐이다.
유상운은 업동의 옥사가 처음 나왔을 적에 즉시 국문을 파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은 대단히 잘못되었으나 또한 남구만처럼 지나치게 우려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하였다.
아, 신하가 된 자가 사람들의 배척을 당해서 끝없이 깊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는데, 마침내 군주가 이와 같이 그 본심을 허여해 줌을 입었으니, 비록 이로 인해 죄가 유배 가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은총과 영광스러움이 어찌 평소 국정의 중임을 맡은 자보다 낫지 않겠는가.
당시 일을 함께 한 사람이 셋이었는데, 신공(申公)은 먼저 별세하였고 오직 나와 공이 신사년의 일을 당해서 멀리 귀양 갔다가 전원으로 돌아와 각기 다른 곳에 있었다. 지난해 부르는 명령을 받고 함께 도성으로 들어왔으나 미처 한번 만나 손을 잡아보기도 전에 공이 갑자기 세상을 버렸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도 죽지 않고 마침내 공의 묘에 명문을 지으니, 아, 서글프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신하가 군주를 섬김은 / 人臣事君(인신사군)
오직 한 마음에 달려 있으니 / 唯在一心(유재일심)
그 마음 군주가 알아준다면 / 心爲君知(심위군지)
비록 죽어도 달게 여기거늘 / 雖死猶甘(수사유감)
하물며 말년에 / 矧乎晩年(신호만년)
부지런히 불러 간곡히 타일렀으며 / 勤召慰諭(근소위유)
예전의 일을 해명하고 / 開釋前事(개석전사)
도성에 남아 돕기를 간곡히 바람에랴 / 勉留求助(면류구조)
군신 간에 / 君臣之際(군신지제)
이 또한 볼 만하며 / 此亦足觀(차역족관)
죽음을 애통해하고 높였으니 / 隱卒崇終(은졸숭종)
은총과 예우 더욱 지극하였네 / 恩禮尤殫(은례우탄)
공이 이것을 얻음은 / 公之得此(공지득차)
오직 한 마음 때문이니 / 唯心之故(유심지고)
그 밖의 것은 한가로운 일이라 / 自外悠悠(자외유유)
후세를 기다릴 수 있네 / 可俟終古(가사종고)
공의 충성을 생각하면 / 念公忠藎(념공충신)
국가의 동량이로다 / 邦國之楨(방국지정)
사후에 한 마음 밝혀짐 / 心晣身後(심석신후)
이 명문에 있지 않겠는가 / 其不在銘(기말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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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장가(張家)의 …… 옥사 : 무고는 주술(呪術)로 남을 해치는 것으로, 장희빈(張禧嬪)과 그의 오라비인 장희
재(張希載)는 노론(老論)에게 화를 전가시킬 속셈으로 업동이란 종을 시켜 자기 집안의 무덤에 주술을 하
였는데 결국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주02] 왕자(王子)의 …… 일 : 왕자는 후궁인 장희빈(張禧嬪)이 낳은 아들 즉 후일의 경종을 말하며, 명호를 정하
는 일은 세자(世子)로 책봉하는 일을 가리킨다.
[주03] 국본(國本) : 나라의 뿌리란 뜻으로 태자(太子)나 세자(世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04] 대신(臺臣)의 상소 : 대신은 사헌부의 신하를 이른다. 이해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자, 장희빈과 그
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의 저주 때문이라는 설이 파다하였다. 이에 지평 이동언(李東彦)과 김재(金栽),
집의 유명웅(兪命雄), 장령 윤헌주(尹憲柱) 등이 상소하여 지난번 장희빈과 장희재의 옥사를 끝까지 다스
리지 않은 남구만과 유상운(柳尙運) 등을 공격한 일을 가리킨다.
[주05] 일월(日月)이 …… 우러러본다 : 일월은 해와 달로 군주를 비유한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
에 “옛날 군자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보았고, 잘못을 고
침에 미쳐서는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본다.〔君子 其過也 如日月之食 民皆見之 及其更也 民皆仰之”
하였다.
[주06] 유신(儒臣) : 홍문관의 관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당시 수찬(修撰)을 맡고 있던 정호(鄭澔)를 가리
킨 것이다.
[주07] 수규(首揆) : 영의정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약천을 가리킨 것이다.
[주08] 양 무제(梁武帝) …… 일 : 납아(蠟鵝)는 밀랍으로 만든 거위로,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어머니인 정빈(丁
嬪)의 묘소가 소명태자에게 불길한바, 이 납아를 묘에 묻으면 액땜을 할 수 있다 하여 은밀히 묻은 것이다.
출처 >약천집 제21권 / 묘갈명(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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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議政府 領議政 約齋 柳公[柳尙運] 墓碣銘 幷書
南九萬 撰[己丑, 1709年/肅宗 35年]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約齋柳公墓碣銘幷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致仕奉 朝賀 南九萬 撰.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崔錫鼎 書幷篆 故領議政約齋柳公其終也。顧言曰勿立神道碑。諸孤不敢違。猶以公之忠藎不少槩見於久遠爲懼。欲依吳楸灘後事不碑而碣。略其細而志其大者。纍然衰服。踵門屬余。噫。余與公同爲的於一世者也。不瑕不足信於今與後也耶。雖然公知余者也。余爲公銘。秪所以爲公。公若有知。亦必受余文。他又何論。謹受狀而序之曰。文化之柳。自高麗大丞車達始。入 我朝左議政文簡公諱寬。是公九代祖也。五代祖諱希渚。副提學。曾祖諱夢翼。僉正贈吏曹判書。祖諱洬。縣監贈左贊成。考諱誠吾。佐郞贈領議政。妣羅州朴氏。左參贊錦溪君東亮女。以崇禎丙子歲生公。諱尙運字悠久。庚子登上庠。丙午擢文科。自槐院陞典籍。歷禮兵曹佐郞,兵曹正郞,慶尙都事,持平,司書,副修撰,弼善,掌令,校理,宗簿寺正,江界府使。陞通政。旣歸民刻石頌淸德。魁文臣庭試陞嘉善。副摠管都承旨,工曹參判,大司諫,平安道觀察使,差燕行副使,兵戶刑禮曹參判,兼同知義禁,備邊司提調。再莅西藩。留像生祠。兼同知經筵,副提學,大司憲,廣州留守,兼守禦使。陞戶曹判書。未幾辭遞。再拜戶判,兼知義禁,司僕寺提調備邊司有司堂上。三拜戶判。擢判義禁,吏曹判書。四拜戶判。己巳 坤宮遜私第。黨人進。黜公于外。甲戌改紀。再授吏曹判書兼判義禁,知經筵, 世子左賓客,內醫院提調。 壼位光復。寫進玉冊文賜馬。乙亥進拜右議政。俄進左。兼 世子傅,扈衛大將,禁衛營都提調。丙子以張家奴業同巫蠱獄不窮治。被人斥。出外辭職。 上許遞。使之還朝。及張奴獄更發伏法。公陳疏謝罪請譴。答以別無所嫌。俄拜領議政。丁丑以讀卷官掌庭試。及拆號子鳳輝與焉。言路有言。固辭遞職。戊寅再拜領相。己卯辭遞。俄三拜領相。以論事忤旨罷。還栗村郊居。敍判中樞。又兼扈衛大將,司僕寺提調。猶引咎不敢進。庚辰設 坤宮議藥廳。進詣城外。 上候又未寧。入參問安。辛巳有疏斥者。留疏復還栗村。聞 坤宮患候猝?。到江上。承昇遐之報。進哭闕門外班。成服還栗村。十月聞 春宮所生母賜自盡。疏請全恩不許。俄而臺官以公不窮治張奴及退自哭班陳疏。乞與余同罪。請罷職。旣罷請黜。旣黜請竄。至壬午五月。乃命中道付處。赴配稷山。冬新冊 坤宮禮成。有赦放歸田里。乙酉特敍判中樞。以年至入耆社。適大司憲李墪入對。語及公被罪曰至冤極痛。 上以其言爲過。竄李塾。復命罷公職。丙戌敍西樞司僕寺提調。以 上臨御三十年。王世子將行進宴禮。公承命入朝。 上引見。開釋前事。且諭仍留京中。以助國政。公猶惶恐參宴後。卽還栗村。丁亥五月特遣史官宣諭。命與偕來。屢疏辭不許。七月進詣城南舊第。八月 上謁 山陵。受命留都。十一月患疾。 上遣醫視診。且賜藥物食味相續。竟以十二月初四日易簀。訃聞 上震悼。賜棺材。輟朝停市。致弔祭禮葬。仍給祿三年。 王世子亦卽日擧哀。遣宮官致弔祭。戊子二月。窆于陽川治東先議政公墓之左岡。夫人全義李氏。右議政行遠女。以婦德稱于宗黨。生于丁丑。歸于庚寅。卒于壬戌。與公同壙而祔。五男鳳瑞校理,鳳輝府尹,鳳逸直長,鳳協,鳳采奉事。二女適校理李世最,士人申濟。孫曾以下又十數人。槩言公遺德。內則篤敬愛於父母弟妹。外則敦信義於朋友官僚。文學政事之才。節儉正直之操。皆有出於人者。此實輿人之公誦。立朝四十餘年。出入中外。聲積茂著。屢登黃閣。最承倚毗。其敷奏施措。可紀者多矣。今不可徧擧。姑述其不承迎於 上。不和附於衆。忘身徇國。必求其無愧於心者若而事。唯此一心炳炳。終始所以深有契於 上心。而亦所以尤見嫉於偏見之議者也。其在儒冠。掌議泮宮。同任李選將疏論徐必遠之攻金萬均。選與萬均。內外兄弟也。公以冒親嫌非選。館官乃以沮疏事罰公。及登第。坐此見枳於史薦銓郞。此見公執心之固。不以一時利害爲從違者。自年少已然也。其在江界。應旨進疏。略曰噫噫甚矣。廷臣之蔽 殿下。而 殿下之蔽於廷臣也。鄭太和之不得配食 先王者禮論也。宋浚吉之罹文罔於泉壤者禮論也。瘴海孤臣。以貶損先王爲罪。從古及今罪名之不近人情。豈有若此之甚者乎。此見公秉心之公。不以平日疏暱爲扶抑者。在擯斥猶然也。其自江界還。吏判李元禎言柳某應旨疏。雖見却道臣。不及上徹。而槩聞伸救罪魁。且言禮論邦禁之非。不可擬知申望。 上以特旨除公知申。以用人不公。削黜元禎。當其時禮論爲世大禁。黨人方擅朝柄。而 上之所以左右之者如此。是 上心之屬公。特簡於潝訾之中者也。己巳正月。命招公卿三司長官。以 王子定名號下詢。公對略曰 聖敎固出爲 宗社大計。而若他日 正宮有斯男之慶則實有難處。今日之擧。群情必以爲太遽。不幸 正宮終無誕慶。 王子年長。則有司之臣。自當建請之不暇。國本之定。不係於名號之早晩。其後大司憲閔宗道劾之曰。 元子定號之日。柳某有若立節者然。請中道付處。四啓後乃命削黜。及甲戌改紀。時南判書龍翼復官。備忘記特擧公己巳疏爲太子死語爲之辭。是 上心之許公。默存於罪黜之際者也。其判銓曹。白于 上曰。吳道一心麤氣勝。是其病痛。而李秀彥乃以諂媚權姦目之。朝廷不可含糊不辨。任其乖激。必須兩非。可以鎭定矣。 上可之。後政秀彥黜補湖南觀察。道一黜補嶺東觀察。公之本意。實欲息不靖之端。致和平之福。無容輕重於其間。而彼此皆懷不平。唯 上諒公心之無他。任之無疑焉。至若辛巳臺章。尤是誣枉之甚者。蓋自己巳五月 坤宮之遜。臣民冤痛。鬱而不伸者久矣。一朝 天衷開悟。坤儀如初。人心欣快。擧國鼓舞。而間有貪天功。欲自以爲己利者。譸張爲幻。靡所不至。時余與公自田間同被召。未入朝已聞樂禍之人有所云云。蓋與後來李顯命疏一意也。余之私心。妄以爲己巳變故。幸今日月旣更。人皆仰之。然其所傷。亦已多矣。若於此際又或處置過正。事變橫生。則 宗社之憂。固不可勝言。而凡在丞弼之任者。無所逃其罪。更將何辭以罪己巳之人乎。及張希載諺簡事發。余受委於鞫廳。入對曰此事連及內間。有難勘罪希載而止。自 上宜有思量之道。 上納余言。旣退公適訪余。余告之故。公曰相君之意。我知之矣。然他人則必無爲相君爲者矣。俄而儒疏攻余。故出城待罪。公以吏判承 上命來諭。且勸余還入繼而攻余者益深。故又逬還鄕廬。時公入直藥房。卿宰有來問余事於公者。公曰吾有所懷。貝疏在此。出示其草。略曰臣初於首揆之問希載事。不以其所執爲不是。又勸其復入。而獨殊於進退之際。義之所不敢出。故於其去。已及同退之意。臣若貪戀遲回則何顏更對於他日乎。卿宰默然而去。其後余因 上敦召。匪久還朝。公疏不果上。丙子五月。 春宮私親張氏延曙墓有巫蠱事。余與公及申右相翼相。同按張奴業同。頗有蹤迹。而不肯盡吐。當加刑訊。余意以爲自古巫蠱獄。必欲窮治。其禍必至難言。且此非禁中埋凶者比。梁武帝時昭明太子之母丁嬪墓有埋蠟鵝者。將窮其事。尙書僕射徐勉固諫而止。其意非不忠而然也。欲以此意陳于 上前。與左右相同請入對。余先有所開說。公亦繼陳不可窮治之意。右相亦無異辭。 上曰今聞卿等之言。正合予意。仍命罷鞫。遠配張奴。於是群議譁然攻之。余與公及右相並出城外待罪。 上遣承旨敦諭。命與偕來曰。今玆處決。意實有在。予之心卽卿等之心也。公自城外使府史齎納信符。留疏過江。至陽川村舍。承旨追到。傳批曰卿之前後議讞。出於爲國家深長之慮。斷斷無他。遣史官還授信符。公再疏。 上批愈懇。有曰乃於昨夜之夢。見卿等之來思。欣喜之極。握手流涕。覺來一倍缺然。無以爲懷。信乎元首股肱一體相須。而誠之所存。至發於夢寐也。公復疏謝。且請遞職。以開重入脩門之路。 上乃許解職。公始還京。及辛巳八月。余與公同坐闕門外哭班也。有周走而呼於班者曰容貸希載之人。不可在前行。公聞之歸語家人曰。今玆班行之呼。極危怕。駭機不日當發。領府事將不免。吾於甲戌具疏擬上而未果者。其時領府事雖被人言。 上眷方隆。請與同罪。反爲與有榮寵之歸故也。今則事勢迥異。同其事不同其罪。吾實懼焉。遂上章略曰。近有論甲戌丙子刑政之失者。臣以丙子按獄之臣。已無幸逭之理。至於甲戌事。猶有未暴。希載酌處之初。其時領議政南九萬語臣以稟裁之意。臣以經權爲對。其後左議政朴世采之進箚。示臣章本。臣又主深忠遠慮之說。其言入於箚論。至達 黈纊。今言者乃以不忠不義。爲九萬斷案。且以所謂深長慮三字。爲恐動 君父之計。以此爲罪。臣實爲首。何敢厭然自揜乎。答曰危險之說。何足挂齒。俄而兩司合啓。以希載事罪余。以業同事罪公而曰。釀成蠱變。且以公哭班後上章。爲顯有要覬之意。余之以希載受罪。固所當然。至若業同按獄。余時爲領相。入對爲首請。奏事爲先發。此豈可獨擧以爲公罪者乎。且其時 坤位初虛。樂禍者謂公希冀陳疏。將欲攘取後福。噫。公之具疏。已在甲戌。及此上聞。非倉卒所發。實夫人之所知。自古誣人構罪。變亂黑白。雖曰罔極。豈有若此比者乎。唯是 上批有曰臺諫論啓。多有情外之語。柳尙運心事。予豈不知。決非如此之人。以當罪罪之而已。業同獄事初出。卽請罷鞫。此一著大段誤矣。而亦不過如南九萬之過慮矣。嗚呼。爲人臣者。方被人擠陷於無底之抗塹。乃得 君上提許其本心如此。雖因此罪至行遣。其爲光寵。豈不愈於平日任以國柄之重者乎。當時同事者三人。申公先逝。唯余與公當辛巳事。而遷謫歸田。各在異處。前歲承召。同入都下。而未及一握手。公遽厭世。至于今余猶不死。乃銘公墓。嗚呼悕矣。銘曰。人臣事君。唯在一心。心爲 君知。雖死猶甘。矧乎晩年。勤召慰諭。開釋前事。勉留求助。 君臣之際。此亦足觀。隱卒崇終。恩禮尤殫。公之得此。唯心之故。自外悠悠。可俟終古。念公忠藎。邦國之楨。心晢身後。其不在銘。崇禎後再壬辰十月 立[1712年 肅宗 38年] <끝>
출처 : 藥泉集第二十一 / 墓碣銘
↑영의정 약재 류상운 선생 묘/묘의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3리 산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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