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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정도전선생 제단비문/팔계 정봉시 찬

야촌(1) 2017. 12. 27. 04:42

   [생졸년] 정도전『鄭道傳, 1342년(충혜왕 3) ~ 1398년(태조 7)』

 

  ■조선개국원훈 봉화백 문헌공 삼봉 정선생 제단

     (朝鮮開國元勳奉化伯文憲公三峯鄭先生祭壇)

      배 경숙택주 경주최씨(配 慶淑宅主 慶州崔氏)

 

공의 이름은 도전(道傳)이고 자는 종지(宗之)이며, 호는 삼봉(三峯)이다. 

봉화정씨(奉化鄭氏)는 고려조부터 대대로 공경을 배출하여 왔는데 공에 이르러 더욱 크게 현달하였다.

 

증조인 영찬(英粲)은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인 균(均)은 봉익대부 검교 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에 추증되었다. 

 

부친인 운경(云敬)은 봉익대부 검교 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 숭록대부 형부상서(崇祿大夫刑部尙書)를 지냈고 시호는 염의(廉義)이며,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영천 우씨(榮川禹氏)는 사족 산원(士族散員)인 연(淵)의 따님이다.

 

공은 일찍이 형제자매와 재산을 분배할 적에 건장한 노비는 모두 아우와 누이동생들에게 주고 자기는 노약자들을 가졌으니, 그 우애의 도타움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목은(牧隱) 이선생의 문하에서 포은(圃隱) 정 선생과 가깝게 사귀었고 당시의 학자들은 공을 유종(儒宗)으로 추대하여 존중하였으니, 그 따르고 사귐에 정대함이 이러하였다.

 

공민왕 임인년(1362)에 진사에 오르고 이듬해인 계묘년(癸卯年,1363)에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었다. 갑진년(甲辰年,1364)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에 임명되었고, 을사년(乙巳年,1365)에는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삼각산 아래에 띠 집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며, 후학을 가르치어 이단을 배척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는데, 아마 삼봉(三峯)이란 호는 이때에 얻은 것 같다. 

 

병오년(丙午年,1366)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여묘 살 이를 제도대로 끝마치었고, 신해년(辛亥年,1371)에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었고, 을묘년(乙卯年, 1375)에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임명되어 바른 말을 하다가 권력 귀족들의 뜻에 거슬려 회진(會津)으로 유배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383)에 태조를 따라 함주(咸州)에 갔었고, 갑자년(甲子年,1384)에는 포은(圃隱)을 모시고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갔다. 을축년(乙丑年,1385)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 태조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임신년(壬申年,1392)에 천명의 소재와 민심이 태조에 귀의하는 것을 알고 태조를 보좌하여 왕으로 추대하였고,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숭록대부문하시랑찬성사(崇祿大夫門下侍郞賛成事)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판호사사(判戶曹事) 겸 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大學士)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겸 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봉화백(奉化伯)에 봉해졌고 실봉호(實封戶)를 더하였다.

 

또 비석을 세워 공을 기록하게 하고, 각(閣)을 지어 화상(畫像)을 모시게 하였다. 갑술년(甲戌年,태조 3년,1394) 겨울에 왕의 명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고, 을해년(乙亥年,태조 4,1395) 10월에 한양 도읍이 완성되었는데 각 궁(宮)과 전(殿), 그리고 여러 문(門)이나 방(房) 등의 이름은 거의 모두 공이 지었다.

 

임금께서 공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었는데, 술에 취하자 공에게 일어나 춤추라 하시며 거북 갑옷을 하사하는 영광을 베풀었으며 또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큰 글씨 네 자를 하사하시었다. 

 

정축년(丁丑年,태조 6,1397)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에 제수되어 원릉(園陵)을 수리하고, 균현의 경계를 정하며, 성보를 고치고, 참호를 설치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았다.

 

공은 문무의 재능과 천인의 학문을 가져 저술한 것이 매우 많은데 그 대부분이 왕명을 받고 지어서 바친 것이다. 대저 심문(心問) · 천답(天答) · 강무도(講武圖)· 문덕곡(文德曲) ·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 악사삼장(樂詞三章) · 경국전(經國典) · 심리기삼편(心理氣三篇) ·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 경제문감(經濟文鑑) · 고려사(高麗史) 등의 찬이 있고 또 문집 7책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무인년(戊寅年,태조 7, 1398) 8월 26일에 공소(恭昭)의 난으로 돌아가니 광주 사리현(廣州士里峴)에 장사지내었다. 그러나 현재 묘는 실전(失傳)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배(配)는 경숙택주(慶淑宅主)에 봉하여진 경주최씨(慶州崔氏)로 찬성(贊成) 습(隰)의 따님인데, 묘는 과천 양재역 상초리(果川良才驛霜草里)에 있다고 하지만 역시 전하지 않는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장자는 진(津)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 자헌대부 형조판서(資憲大夫刑曹判書)를 지냈고 후에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諡號)는 희절공(僖節公)이다. 둘째는 영(泳)으로 소윤(少尹)이며, 그 다음은 유(游)로 통예문지후(通禮門祗侯)였다. 

 

희절공은 2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내(來)로 한성판관(漢城判官)과 용인현령(龍仁縣令)을 지냈고, 둘째는 속(束)인데 직산현감(稷山縣監)을 지내고 뒤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판관(判官)은 2남 두었으니 장남은 장손(長孫)으로 종사랑(從仕郎)과 참봉(叅奉)을 지냈으며, 둘째는 종손(終孫)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이다. 

 

영의정으로 추증된 속(束)은 2남을 낳았으니 장자는 문형(文炯)으로 호는 야수(野叟)이고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고 시호(諡號)는 양경(良敬)이다. 둘째는 인형(仁炯)으로 문과(文科)에 올라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냈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은 뛰어난 학업과 훈업을 가지고도 원통한 한을 품은 채 460여년을 지내오다가 우리 고종 태황제 9년 임신년(고종 9, 1872년)에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를 주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16대손 응기(應蘷)를 사손(祀孫)으로 정하여 묘를 세우고 이를 주관하게 하며 대대로 음직(蔭職)을 세습하게 하였다. 이로서 공의 원통한 한은 거의 신설되었으나, 묘소를 실전한 것이 자손들의 유감이었다.

 

임술년(壬戌年,세종 24,1442) 봄에 18대손 종인이 개연히 느낀바 있어 여러 종친과 상의하기를, “묘가 실전되어 사모하는 마음 붙일 데가 없으니 단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을 설치하여 제사지낼 곳이 있게 되더라도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비석을 세워 앙모(仰慕)하는 표적이 되면 사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단을 진위(振威) 치북(治北) 은산리(銀山里) 남쪽 산록(山麓)에 건축하였으니 곧 공의 별묘가 있는 안산이다.  기록하는 것을 부탁할 곳이 없다하여 봉시(鳳時)에게 부탁하여 왔으나, 봉시는 늙고 병들어 이 책임을 승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일찍이 공의 원통함을 슬퍼하여 왔고 또 지금 군의 정성에 감동하여 붓을 들어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세대가 오래되었고 증거 할 문헌이 없으며, 사승과 가장에도 빠뜨리고 소략하게 된 것이 많아 만분의 일도 엮지 못했으니, 슬픈 일이다.

 

알봉(閼逢) 엄무(閹茂) 오월 상한에 가선대부 전규장각 부제학(嘉善大夫 前行 奎章閣副提學) 팔계 정봉시(八溪 鄭鳳時)는 삼가 짓다. 

 

17대손 재훈(在勳)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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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朝鮮開國元勳 奉化伯 文憲公 三峯 鄭先生 祭壇

配 慶淑宅主 慶州崔氏

 

公諱道傳字宗之號三峯奉化之鄭肇自麗朝赫世公卿而至公尤大顯曾祖諱英粲 贈密直副使上護軍」祖諱均 贈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考諱云敬奉翊大夫檢校密」直提學寶文閣提學上護軍崇祿大夫刑部尙書諡廉義妣貞敬夫人榮川禹氏士族散員淵之女」公甞與諸弟妹析產藏獲之强壯者悉與弟妋自取其老弱者其友愛之篤如此甞遊牧隱李先生」之門與圃隱鄭先生友善一時學者推重之其從遊之正如此恭愍壬寅登進士第癸卯忠州司錄」甲辰典校注簿乙巳通禮門祇侯是歲結廬于三角山下講論道學以訓後生闢異端爲己任三峯」爲號盖以此也丙午丁母憂廬墓終制辛亥太常博士乙卯成均司藝以言事爲權貴所忤流會津」癸亥從 太祖赴咸州甲子與圃隱奉使南京乙丑使還 太祖薦之拜成均大司成壬申知天命」之攸在人心之將歸佐我 太祖以推戴功封奮義佐命開國功臣崇祿大夫門下侍郎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判戶曹事兼判尙瑞司事寶文閣太學士知 經筵藝文春秋舘事兼義興親軍」衛節制使奉化伯加食實封戶立碑紀功建閣圖形甲戌冬承 命相宅于漢陽乙亥十月漢都成」各宮各殿諸門諸坊皆公之所名也 上召公置酒張樂酒酣 命公起舞 賜龜甲裘以榮之大」書儒宗功宗四字以 賜之丁丑除東北面都宣撫巡察使 命修 園陵劃地界定郡縣繕城堡」置站戶而還公以文武之才天人之學所著述甚多多半是膺 命撰進者也有若心問天答講武圖」文德曲夢金尺受寶籙樂詞三章經國典心理氣三篇學者指南圖經濟文鑑高麗史等之撰又」文集七册傳于世不幸於戊寅八月二十六日己巳卒于恭昭之難葬于廣州士里峴而墓則失傳」配封慶淑宅主慶州崔氏贊成隰女墓在果川良才驛霜草里而亦失傳生三男長津開國原從功」臣資憲大夫刑曹判書 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 諡僖節公次泳少尹次游通禮門祗侯僖」節公生二男長來漢城判官行龍仁縣令次束稷山縣監 贈議政府領議政判官生二男長長孫」從仕郎叅奉次終孫 齊陵參奉 贈領議政生二男長文炯號野叟右議政淸白吏諡良敬次仁」炯文科軍器寺副正餘不悉錄嗚乎以公學業勳業抱寃茹恨四百六十餘年以後曁我 高宗太」皇帝九年壬申 贈諡文憲公伻官致祭以十六代孫應蘷定祀孫立廟主之仍襲世蔭公之寃恨」庶幾伸雪而猶以墓所失傳爲子孫遺憾壬戌春十八代孫鍾寅君慨然興感與諸宗相議曰墓旣」先矣寓慕無所則不淂不設壇壇旣設矣行祀有所則不得不立碑碑旣立矣瞻仰有表則不得不」記實而壇則已於振威治北銀山里南麓建築即公之別廟案山也記則謂無以屬屬之鳳時鳳時」老且病焉不足以膺是任然盖甞悲公之寃今又感君之誠援筆以記之而世代寢久文獻無徵史」乘家狀多所闕畧畧綴其萬一噫」閼逢閹茂梧月上澣 嘉善大夫前 奎章閣副提學八溪鄭鳳時謹撰」十七代孫在勳謹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