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정무공 최진립 묘갈명 병서 - 조경(趙絅)

야촌(1) 2016. 8. 26. 11:17

■공조참판 정무 최공 묘갈명 병서

  (工曹參判貞武崔公墓碣銘 幷序)

 

[생졸년] 1568(선조 1)∼1636(인조 14).

 

용주 조경 찬(龍洲 趙絅 撰)

[생졸년] 1586(선조 19)∼1669(현종10).

 

숭정(崇禎) 9년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 12월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는데, 전 참판 최진립(崔震立) 공은 공주 영장(公州營將)으로서 용인(龍仁) 험천(險川)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듬해 정축년(1637)에 판중추부사 김시양(金時讓)이 건의하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전장에 나아갈 때 최 진립이 몹시 늙어 전선에 내보낼 수 없다고 여겨 다른 장수로 대체하였습니다. 이때 최진립은 즉시 채비를 차려 칼과 활을 차고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내가 늙어서 전장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늙은 자는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도 없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는데, 끝내 그 말처럼 되었습니다.  병자년의 호란에 절의를 세운 자로는 최진립이 제일이니, 감히 표창하는 은전을 청합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전교하셨다. 이에 예조와 의정부에서 장례, 제사, 증직(贈職), 정문(旌門)을 모두 한 자급 올려서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그렇게 하라고 회답하였다. 금년 가을에 공의 아들 최동량(崔東亮)이 학사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공의 행장을 들고서 내 집으로 찾아와 말하였다.

 

“국가에서 우리 아버지의 충절을 드러내고 돌아가신 분을 높이는 은전을 극진히 베풀어 주었으니, 제가 아버지를 위해 가장 시급히 할 일은 이 사적이 묻히지 않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선생께선 사관(史官)의 직임을 맡아 현재 붓을 잡고서 충신과 열사의 사적을 빠짐없이 찾아 역사책에 기록하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저의 아버지의 훌륭한 자취를 기록하여 묘비명을 지어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의상 사양했으나 되지 않았다.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공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사건(士建)이다. 부친 증 병조참판 공이 정언을 지낸 평해(平海) 황정(黃汀)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경주(慶州) 견곡촌(見谷村)에서 공을 낳았으니, 바로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1)이었다.

 

나이 겨우 세 살에 황부인(黃夫人)이 돌아가시고 열 살에 또 참판공이 돌아가셨으니, 당시 공이 얼마나 어렸는가. 

그런데도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성인보다도 더 나았으니, 이웃에서 감동하여 변화된 자들이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공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는데, 즉시 발분하여 의병을 일으켜 부윤 윤인함(尹仁涵)에게 말하기를, “왜적이 큰 돼지와 뱀처럼 영남의 여러 고을을 잠식하는데도 그 예봉에 감히 맞설 자가 없어 지금 우리 고을까지 육박해 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촌(南村)으로 가면 바로 언양(彦陽)으로 가는 길입니다. 길옆에 제 선친의 집이 있는데, 왜적이 이 속에 개미떼처럼 모여 있다가 때때로 나와서 노략질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으나, 건장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상대해 보겠습니다.”하니, 부윤이 장하게 여겨 허락하였다. 

 

마침내 많은 화구(火具)를 가지고 곧장 왜적의 소굴로 가서 밤을 틈타 적을 불태우니 죽은 적이 수백 명이었다. 갑옷과 무기를 모두 거두어 고을로 가져가니, 부윤이 탄복하였다. 달아났던 고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 없이 나와서 공을 따라 적을 토벌하기를 원하니, 무리가 거의 수천에 달하였다. 

 

같은 시기에 의병에 자원한 김호(金虎)와 함께 언양 경내에 매복하여 갑자기 공격하여 적을 격파하였다. 또 계연(鷄淵)에서 싸우다가 김호가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도 공은 동요하지 않고 더욱 병사들을 단속하여 적의 뒤로 돌아가 또 격파하였다.

 

이때 공이 언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켜 적을 저지하였기에 왜적이 위축되어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했으니, 경주의 사방이 별 탈 없었던 것은 공의 힘이었다. 수급(首級)을 바칠 때에는 반드시 전사자와 사졸들에게 그 공을 사양하였기에 사람들이 더욱 공을 훌륭하게 여겼다.

 

갑오년(1594)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정유년(1597)에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 등이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에 보루를 쌓고 군사를 풀어 사방을 노략질하여 주변의 십여 고을이 모두 피해를 입었는데, 병권을 맡은 장수는 감히 왜적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였다.

 

울산 부사가 공에게 격문을 보내어 서생포를 공격하게 하자, 공은 비산(萆山)으로 가서 굴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는 직접 나가서 적을 유인하였다. 적이 굴 가까이 접근하자 활시위를 가득 당겨 쏘니 왜적이 쏘는 족족 쓰러졌다. 공도 배꼽 밑에 탄환을 맞았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기운이 팔팔하였다.

 

겨울에 명나라 경략(經略) 양호(楊鎬)와 우리나라 원수(元帥) 권율(權慄)이 대군을 몰아 도산성(島山城)의 왜적을 공격하였다. 경주 부윤(慶州府尹) 박의장(朴毅長)도 종군하였는데, 공은 그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부윤이 자신과 뜻이 다른 공을 미워하여 잘못을 저질렀다고 무함하여 참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경략이 평소에 공의 명성을 들었기에 구해주어 살아났다.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내가 아무 죄도 없이 시기하는 장수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적의 손에 죽겠다.” 하고는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탄환이 오른쪽을 볼을 관통하여 왼쪽으로 들어갔는데 뼈를 도려내어 탄환을 빼냈다.

 

무술년(1598)에 조정에서 공을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책록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하며, 훈련원 정에 제수하니, 군자들이 크게 풍기(風紀)를 세웠다고 여겼다. 

 

정승 이덕형(李德馨)이 양남 체찰사(兩南體察使)로 있으면서 힘을 다해 싸운 장사들에게 왕명에 따라 큰 상을 내렸는데, 건장한 말 하나를 가려 공에게 주었다. 

 

공이 사양하기를, “이는 적이 침입할 때 관(官)에 소속된 자로서 한 일이니, 의리상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하니, 이 정승이 매우 칭찬하였다. 경자년(1600)에 선조(宣祖)께서 또 어사를 보내 경주와 울산의 전사(戰士)들을 호궤(犒饋)하였는데, 여러 장수와 사졸들이 너도나도 대궐 아래로 나아가 공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일을 상소하였다.

 

상께서 특별히 공을 불러 들어오게 하고는 당시의 일을 물으셨다. 공이 머뭇거리며 사양하다가 오늘날의 중요한 일을 명확하게 분석하여 아뢰니, 상께서 가상하게 여겨 술을 내리고 또 활과 화살을 내렸으며 또 벼슬에 제수하도록 명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겸선전관(兼宣傳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도총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무신년(1608)에 마량 첨사(馬梁僉使)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611)에 경상도 좌우후(慶尙道左虞候)에 제수되었다.  가는 곳마다 반드시 곤경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성곽과 무기를 정돈하니, 감사와 군수가 모두 장계를 올려 표창하였다.
 

임자년(1612)에 명나라 지휘사(指揮使) 황응양(黃應暘)이 왜적을 정탐하러 와서 부산(釜山)에 들렀는데, 당시 공이 우후(虞候)로서 부산 별장의 일을 겸하고 있었다. 

 

황응양은 공이 청렴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 데다 또 농사를 권장하고 무예를 연마하며 식량을 저장하고 무기를 수선하는 일들이 다른 진(鎭)과 남다름을 보고는 도성에 와서 끊임없이 칭찬하였다. 

 

얼마 안 있어 비변사에서 공을 서차에 관계없이 선발하였다. 갑인년(1614)에 경원 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경원은 변방 지역이라 그곳 백성들이 사납고 순하지 않았지만, 또한 공의 굳건한 지조에 복종하여 길들여지고 안정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오는 길에 경성(鏡城)을 지나게 되었다. 판관 이윤우(李潤雨)는 문사(文士)로서 평소 공과 친한 사이였는데, 일부러 공을 시험하려고 이름난 기생을 아름답게 꾸며서 며칠간 공의 술자리에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눈도 돌리지 않았다. 이공이 감탄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마음 굳센 남자를 보았다. 악무목(岳武穆 악비(岳飛))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하였다. 

 

북병사(北兵使) 김경서(金景瑞)가 공의 복도(復陶)가 해어진 것을 보고서 새 담비 가죽으로 만들어 이별 선물로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경신년(1620)에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이 평양(平壤)을 진무(鎭撫)할 때 공을 별장으로 삼아 군무(軍務)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듬해 공이 고사리 첨사(高沙里僉使)에 제수되자, 이공이 말하기를, “첨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공이 아니면 이런 시기에 별장을 맡을 사람이 없다.”하고, 조정에 아뢰어 유임시켰다. 이어 공에게 무사 2백 명을 이끌고 양책(良策)에 주둔하게 하였다.

 

당시에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대가 금(金)나라 군사들에게 공격당하여 흩어진 군졸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루는 금나라 군사가 명나라 군사를 뒤쫓아서 갑자기 양책에 들어왔다.

 

공이 편비(褊裨)들과 맹세하기를, “저들이 만일 우리를 짓밟는다면 우리는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하였는데, 금나라 군사들은 명나라 군사들의 귀만 베어 돌아갔다.

 

모문룡의 접반사 이형원(李馨遠)이 조정에 이 일을 보고하였는데, 공이 조사받으면서 사실대로 답변하자 감형되어 울산(蔚山)에 유배되었다. 

 

처음에 찬획공(贊畫公 이시발)이 공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남들에게 말하기를, “최모(崔某)는 주머니가 텅 비었으니 옥에서 굶어죽을 것이 틀림없다.” 하고는 군영에 비축된 베를 덜어 보냈는데, 공이 사양하기를, “무거운 죄를 짓고서 어찌 감히 공가(公家)의 비축을 더럽히겠는가.”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에 반정이 일어나 마침내 풀려 가덕 첨사(加德僉使)에 제수되었다. 정승 이경여(李敬輿)가 어사로 나가 공이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극구 칭찬하니, 상께서 특별히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셨다.
 

이듬해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옮겼다. 순변사 우치적(禹致績)과 순찰사 이명(李溟)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의 치적을 최고로 상주하고, 정승 이행원(李行遠)이 어사로 나가 공이 남달리 청렴하다고 제일 첫 번째로 상주하였으며, 대궐에 들어와 상주할 때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공을 매우 칭찬하니, 마침내 자급을 올려주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 후 상이 경연(經筵)에 들었는데, 대신들이 모두 있었다. 상께서 조용히 말씀하기를, “북쪽 변경 지역은 아득히 멀어 백성들이 교화를 입지 못하니, 그곳 수령은 마땅히 청렴한 관리로 선발해야 한다.” 하니, 좌상과 우상이 번갈아 대답하기를,

“경흥 부사 최진립은 나이가 팔십에 가까우나 청렴결백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변절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최진립이 변장으로 있을 때의 일은 나도 들었다.”하였다. 경오년(1630)에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공조 참판에 발탁되었는데, 공이 심정을 토로하는 상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상께서 비답을 내려 더욱 가상히 여기고 더욱 힘쓰도록 권하니, 공이 이 때문에 더욱 힘껏 사양하였다.

 

이에 상이 공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허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히 경기 수사(京畿水使)에 제수되었다. 상께서 공을 인견(引見)하고 말씀하시기를, “경기 수사에 경을 얻었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교동(喬桐)의 모든 백성들이 도성으로 달려와 공의 유임을 청하니, 상께서 유임시키고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공이 또 글을 올려 사양하니, 상이 또 하교하기를, “나는 재물을 탐하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오직 청렴하고 근면한 사람만 서용한다.”하였다.

 

여름에 부총관으로 옮겼다. 곧이어 덕원 부사(德源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1634)에 전라 수사에 제수되었는데, 상께서 또 인견하여 더욱 위로하고 보냈다. 

 

정승 김류(金瑬)가 당시 체찰사를 맡고 있었는데, 공이 머물도록 차자를 올려서 별장으로 삼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 영장(公州營將)으로 옮겼다.

 

이때 금나라에서 호시탐탐 엿보며 침략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공을 요해지(要害地)에 두고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과연 몇 달이 지나자 금나라의 침입으로 어가가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하였으니, 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으로 피난하였을 때처럼 위급하였다.

 

사방의 근왕군(勤王軍)들이 지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도중에 적에게 가로막힌 경우도 있었지만,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만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홀로 나아갔다. 

 

공은 즉시 비분강개하여 앞서서 행진하여 용인(龍仁) 험천(險川)에 이르렀는데, 남한산성과는 30리가 못되는 지점이었다. 좌ㆍ우군으로 나누어 공은 앞에서 적을 기다리고 감사는 뒤에서 기다렸는데, 적이 밤에 후군(後軍)을 이끌어 합세하여 우리를 공격하자 앞선 군사들이 먼저 무너졌다.

 

 비바람이 몰아치듯 몰려오는 철기병(鐵騎兵)의 기세에 군중(軍中)이 모두 새파랗게 질렸으나, 공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서서 활을 쏘는 족족 적을 쓰러뜨렸다.

 

화살이 다하자 따르던 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굳이 나를 따라 죽을 것은 없다. 

나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그리 알라.”하였다.  

 

적이 물러난 뒤에 공의 여러 아들과 공을 따르던 관리들이 과연 그곳에서 공의 시신을 찾았는데, 몸에 수십 곳이 찔리고 고슴도치 털처럼 화살이 박혔으나 얼굴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일이 알려지자 상께서 오랫동안 애석히 여기시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 병조 판서를 증직하고, 또 경상 감사에게 명하여 관(官)에서 장사를 도와주게 하였다. 

 

그해 12월에 언양현(彦陽縣) 오지연(烏池淵) 묘향(卯向)의 산에 장사 지냈다. 15년이 지난 경인년(1650, 효종1)에 금상께서 즉위하시자 공의 예전 편비(褊裨)였던 김우적(金禹績) 등이 상소하기를,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신하와 청렴한 관리는 선조에서 으레 시호(諡號)를 내리고 뒤늦게 녹훈하였습니다. 

 

신의 옛 장수 최진립도 이에 견줄 수 있습니다.”하였다. 상께서 이를 논의하게 하자 모두 옳다고 하였다. 

봉상시에서 의논하여 시호를 ‘정무(貞武)’로 정하고, 해당 부서에서는 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綠選)하였다.

 

우리나라가 열성이 남긴 삼강(三綱)의 교화에 젖어들어 변고를 당하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키는 사대부들이 계속 이어졌다. 

예전 일은 논하지 않더라도 정묘년(1627, 인조5)의 호란(胡亂)에 안주(安州)에서 죽은 남이흥(南以興)ㆍ김준(金浚), 무오년(1618, 광해군10)의 원정(遠征)에 심하(深河)에서 죽은 김응하(金應河), 병자년(1636)에 죽은 김상용(金尙容)ㆍ심현(沈誢)ㆍ이시직(李時稷)은 그 절의가 뚜렷이 드러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논하는 자들이 최공을 가장 으뜸으로 삼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장에 제수되어 한 방면을 맡은 자는 적에게 죽지 않으면 법에 의해 죽으니, 어찌 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왕실을 보호하는 명을 받은 신하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오직 김응하는 비장(裨將)의 신분으로 이역(異域)에서 명절(名節)을 세웠으니, 공에 견주어 비슷하다고 하겠다. 다만 김응하는 장년의 나이였으나 공은 늙었으며, 김응하는 군령에 묶여 있었으나 공은 장수에게 배척을 받은 상태였다.

 

나아가고 물러남이 자신의 재량에 달렸는데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조용히 진(陣) 앞에 서서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70년을 하루같이 의(義)를 마음 편히 여긴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공의 충렬은 역사에 우뚝하다고 말할 만하다.

 

공의 평생을 돌아보면, 깃발을 세우고 부절을 나누어 받아 큰 고을과 큰 번진(藩鎭)을 다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금(千金)을 보기를 매우 하찮게 여겼으니, 누구나 모두 공의 타고난 성품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공이 타고난 것은 충렬이고, 청렴결백은 그 여사(餘事)일 뿐이다. 공은 서산 유씨(瑞山柳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동윤(東尹)은 승사랑을 지냈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동열(東說)은 통덕랑을 지내고, 동량(東亮)은 현감을 지냈다. 

 

동길(東吉)은 승사랑을 지냈는데, 공의 형 진흥(震興)의 후사가 되었다. 동경(東璟)은 승의랑을 지냈다. 딸은 사인(士人) 윤종향(尹宗享)에게 출가하였다. 

 

동윤의 소생 중아들은 국철(國哲)ㆍ국형(國衡)ㆍ국범(國範)이고, 딸 셋은 권대현(權大賢)ㆍ정희현(鄭希賢)ㆍ서유후(徐裕後)에게 출가하였다. 동열의 소생 중아들은 국정(國楨)ㆍ국환(國桓)이고, 딸 둘은 전이박(全爾璞)ㆍ김건준(金建準)에게 출가하였다.

 

동량의 소생 중 아들은 국선(國璿)ㆍ국침(國琛)ㆍ국원(國瑗)ㆍ국순(國珣)이고, 딸은 어리다. 동길의 소생 중아들은 국진(國鎭)ㆍ국전(國銓)ㆍ국현(國鉉)이고, 딸은 김우진(金宇振)에게 출가하였다. 동경의 소생 중 아들은 국영(國英)이고, 딸은 어리다. 증손이 남녀 약간 명이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옥설같은 지조 지닌 이 누구인가 / 疇玉雪而操
재물을 물리쳤다네. / 脂膏辟景

 

철석같은 심장 지닌 이 누구인가 / 疇鐵石而腸
미인들이 마음대로 못했다네. / 三粲莫逞

 

우뚝하게 일어선 이 누구인가 / 疇起而屹屹
왜적을 날뛰지 못하게 하였네. / 長京是牿

 

누가 늙은 장수를 보내어 / 疇送而皤皤
괴자마(拐子馬)와 겨루게 했나 / 拐子與角

 

공의 의지로 시작하고 / 始也吾志
공의 절의로 끝맺었네. / 終也吾義

 

오직 그 뜻과 절의로 / 惟志惟義
죽음을 편안하게 여겼다네. / 以歸視死

 

누군들 죽지 않으리오만 / 何所無死
그 충절은 우뚝 솟았네. / 而節卓冠

 

늠름한 정백은 언양 땅에 묻을 수 없으니 / 凜凜精魄彥陽之土埋不得兮
밤마다 긴 무지개 되어 우성과 두성 사이를 비추네. / 夜夜長虹兮牛斗之貫

 

[각주]

[주01]험천(險川) :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머내’ 지역을 말한다.


[주02]돌아가신 …… 은전 : 임금이 치제(致祭)하거나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을 말한다.


[주03]복도(復陶) : 털이나 가죽으로 만든 방한용 외투이다. 《春秋左氏傳 昭公12年》


[주04]정승 …… 삼았다 : 한국문집총간 91집에 수록된 《학사집(鶴沙集)》 권9 〈증병조판서행공조참판최공행

           장(贈兵曹判書行工曹參判崔公行狀)〉에 따르면, 최진립이 전라 수사에서 체직되자 김류(金瑬)가 계청하

           여 별장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05]당 덕종(唐德宗)이 …… 위급하였다 : 봉천(奉天)은 당나라 때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현인데, 당 덕종이 주

            자(朱泚)의 반역을 피하여 이곳으로 피난하였다가 반군에게 포위당하였다. 《舊唐書 卷12 德宗本紀》


[주06]무오년의 원정(遠征) : 1618년(광해군10)에 명(明)나라에서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병력을 요청

            하였는데,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2만 명의 군사를 지원하였다.


[주07]대장에 …… 자 : 남이흥(南以興, 1576~1627)과 김준(金浚, 1582~1627)을 말한다. 정묘호란 때에 남이흥

           은 평안병사 겸영변부사(平安兵使兼寧邊府使)로서, 김준은 안주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兼防禦使)로서

          재직중에 전사하였다.


[주08]왕실을 ……신하 : 김상용(金尙容, 1561~1637)ㆍ심현(沈誢, 1568~1637)ㆍ이시직(李時稷, 1572~1637)

            을 말한다. 이들은 병자호란 발발 후에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ㆍ원손(元孫)ㆍ둘째아

            들 봉림대군(鳳林大君)ㆍ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모두 순절하였다.


[주09]김응하는 …… 세웠으니 : 김응하(金應河, 1580~1619)는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휘하의 좌영장(左營將)

            으로 후금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주10]괴자마(拐子馬) : 청나라 군사들을 말한다. 괴자마는 청(淸)나라 진법(陣法)의 일종으로 3기(騎)를 가죽 끈

            으로 연결시켜 함께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

 

[原文]

 

工曹參判貞武崔公墓碣銘 幷序 - 趙絅

 

崇禎九年丙子冬十二月。翟侵我。前參判崔公震立以公州營將。與戰于龍仁之險川死之。越明年丁丑。判中樞府事金時讓建白。忠淸監司鄭世䂓之赴難也。謂震立甚老。不宜戰陣。代以他將。震立輒結束佩弓刀。騎馬而前曰。吾老不合戰陣。固也。顧老者獨不能一死報國哉。卒如其言。丙難之立節。震立爲最。敢請褒美之典。敎曰可。於是禮曹及議政府請葬祭贈旌俱一級。咸報可。今年秋。公胤東亮手金學士應祖所爲公狀。踵不佞之門曰。國家於吾父。顯忠崇終之典至矣。不肖之爲吾父道。惟不朽是急。先生職太史。方秉筆求忠臣烈士蹟如不逮書諸筴。是用籍吾父之靈跣。以請徼惠于墓樹之銘。不佞禮辭不得。則謹按狀。公慶州人。士建其字也。皇考贈兵曹參判公娶正言平海黃汀之孫女。生公於慶州見谷村。卽皇明隆慶戊辰歲也。甫三歲。黃夫人歿。十歲。參判公又歿。時公弱小之謂何。而猶持禮葬祭。譬成人有加。隣里有感而化者。及壬辰亂作。公年二十五。卽發憤倡義。謂府尹尹仁涵曰。倭爲封豕長蛇。荐食嶺南列邑。無敢嬰其鋒者。今且迫吾州矣。此去南村。卽走彥陽道也。道左有民之先人室廬在。聞倭蟻雜其中。時出摽掠。民雖駑怯。請與里中健兒嘗之。尹壯而許之。遂多持火具。直往賊處。乘夜熸賊。賊死者數百。盡得兵甲器械輸之官。尹歎服。州人之鳥獸散者。無不張膽而出。願從公討賊。衆幾數千。與同時應募者金虎合覆彥陽境。橫擊賊破之。又戰于鷄淵。虎中丸死。公益治兵自如。繞出賊後又破之。當是時。公扼彥陽之吭以遏賊。賊縮不敢恣。慶之四封妥帖者。公之力也。至於獻級。公必讓戰死者若卒伍。人益以此多公。甲午。登虎榜。授部將辭。丁酉。賊將淸正等壘于蔚之西生浦。放兵四劫。旁十餘郡咸被其毒。握兵之將。莫敢窺其左足。尹檄公斫西生浦。公進萆山而藏甲窟中。自出誘賊。賊近窟。滿繁弱射之。無不應弦而倒。公亦丸中臍下。氣揚揚如平昔。冬。中朝經略楊鎬與我元帥權慄進大兵擊島倭。慶尹朴毅長亦從。公屬焉。惡公異於己。誣以過犯將斬。經略素聞公名。救之免。公憤曰。我以無罪而死於忌帥之手。與其死於敵也。馳入賊陣。丸洞右頰入左。刮骨出丸。戊戌。朝廷榮宣武功。錄公原從。爵訓鍊正。君子以爲有大樹風。李相德馨體察兩南。承命大賚力戰壯士。擇一怒馬及公。辭曰。是賊入而屬官者。義不敢受。李相深加歎賞。庚子。宣廟又遣御史。犒奬慶,蔚之戰士。諸將士相率而詣闕下。疏言公倡義討賊狀。上持召公入。問當時事。公逡巡退讓。仍劈畫今日要務。上嘉之。賜酒又賜弓矢。又命授官。由是拜兼宣傳官。不就。又拜都摠都事。戊申。拜馬梁僉使。辛亥。拜慶尙左虞候。所至必以膏萎沃渴爲先。城池器械井井如也。布政閫帥皆交狀褒焉。壬子。天朝指揮使黃應睗來詗倭奴過釜山。時公以虞候。兼行釜之別將事。稔聞公氷檗聲。且見勸農講武峙糧敿戈與他鎭異。及到漢京。嘖嘖稱說不已。俄而備局逬公不次。甲寅。除慶源府使。陞通政。慶塞徼也。其民羯羠不均。然亦服公礪操。馴而安之。秩滿歸也。歷鏡城。判官李潤雨。文士也。與公素相善。故欲試公。飾名妓侍公酒所數日。公終不回眄。李公歎曰。今日始見剛腸男子。岳武穆何以加。北兵使金景瑞見公復陶敝。製以新貂爲贐。公不受。庚申。李贊畫時發鎭平壤。引公爲別將。上下軍務。明年。高沙里僉使之命下。李公曰。僉使人可爲。此時別將。非公莫可。啓留之。仍令公將武士二百屯良榮。時漢將毛文龍困於金人。散卒多投我者。一日。金兵尾漢人猝至良策。公與褊裨誓曰。彼如有轢蹙我。我當死。金人唯馘漢人而去。毛將接伴使李馨遠聞于朝。於是公置對。對以實。命減律配蔚山。初。贊畫公聞公被拿。謂人曰。崔某橐如洗。餓死獄中必矣。割營儲布遺之。公辭曰。我罪重。安敢辱公儲。癸亥反正。乃放還。拜加德僉使。李相敬輿爲御史。極褒公淸勤。上特賜內廏馬。明年。遷慶興府使。巡邊使禹致績,巡察使李溟後先奏最。李相行遠爲御史。則首啓公持廉卓異。及入奏。尤高贊不啻口。遂命加資。其后上御經筵。大臣皆在。上從容曰。北邊遐遠。民不沾化。字牧宜用簡廉吏。左右相交口對曰。慶興府使崔震立年幾八十。洗手居職。未嘗變節。上曰。震立之爲邊將時事。吾亦聞之爾。庚午。拜全羅水使。秋。擢拜工曹參判。公陳情上章固讓。上批逾嘉逾勉。公故循墻甚力。上知不能奪。乃許。未幾。特拜京畿水使。上引見諭之曰。圻閫得卿。吾無憂矣。及瓜。喬桐掃境內走京師願借。上仍命兼三道統禦使。公又上章辭。上又敎曰。予不肩好貨。唯廉謹敍欽。夏遷副摠管。旋除德源府使不赴。甲戌。拜金羅水使。上又引見。加慰遣焉。金相瑬方帶體察使。箚留爲別將。俄移公州營將。於是金人眈眈有虎狼心。故處公要害地備不虞也。果然居數月。西事急。大駕避乏廣之南漢。危與奉天等。四方勤王師有頓而不進者。有半途爲敵所擠者。獨忠淸監司鄭世䂓提褊師單進。公卽慷慨前行。行至龍仁險川。距南漢未一舍。分爲左右軍。公在前。監司在後以待敵。敵夜引其兵之殿者合以攻我。我先軍先潰。鐵騎勢如風雨。軍中無人色。公植立不動。射必殪賊。矢盡。顧謂從者曰。爾等不必從我死。我則不離此一寸而死。爾其識。及賊退。諸孤與從公吏果得公屍於其處。身被數十創。矢集如蝟。面如生。事聞。上爲之咤惜者良久。命有司致。贈兵曹判書。又命慶尙監司官庀葬事。以其年十二月。葬于彥陽縣烏池淵卯向之山。后十五年庚寅。當今上初載。公之舊日褊裨金禹績等上疏。以爲死節之臣。淸白之吏。在先朝例有賜諡追錄之事。臣之故將崔震立亦足爲比。上下其議。皆曰是。太常議諡曰貞武。該部又錄淸白。惟我東漸列聖三綱之敎。大夫士遇變故。則以身易節者相銜。亡論往古。丁卯之亂。南以興,金浚死於安州。戊午之役。金應河死於深河。丙子年。金尙容,沈睍,李時稷之死。可謂彰明較著。而論者獨以崔公爲翹楚。何哉。拜大將當一面者。不死於敵死於法。安得不死。況輔翼受命之臣哉。惟金應河以一褊裨。立名異域。比公幾矣。顧應河方壯。公旣愆。應河束於令。公斥於帥。進與不進在吾闊狹。而自不勝報主心。從容立陣前辦一死。此非心安乎義七十年如一日者。不能也。其所蹈烈。可謂卓乎千古者矣。迹公平生。建牙分符。雄州巨藩。是臨是尸。非一二止。視千金如涕唾。人孰不以爲得於性者然。然公之得於性者在忠烈。潔廉特餘事耳。公娶瑞山柳氏。生五男一女。東尹。承仕郞。先公歿。東說。通德郞。東亮。縣監。東吉。承仕郞。后公兄震興。東璟承議郞。女尹宗享。士人。國哲,國衡,國範。東尹出。女權大賢,鄭希賢,徐裕後。國楨,國桓。東說出。女全爾璞,金建準。國璿,國琛,國瑗,國珣。東亮出。女幼。國鎭,國銓,國鉉。東吉出。女金宇振。國英。東璟出。女幼。曾孫男女若干人。銘曰。

 

疇玉雪而操。脂膏辟景。疇鐵石而腸。三粲莫逞。疇起而屹屹。長京是牿。疇送而皤皤。拐子與角。始也吾志。終也吾羲。惟志惟義。以歸視死。何所無死。而節卓冠。凜凜精魄。彥陽之土。埋不得兮夜夜長虹兮牛斗之貫。<끝>

 

용주유고 > 龍洲先生遺稿卷之十五 / 墓碣

-------------------------------------------------------------------------------------------------------------------------------------

 

工曹參判崔公神道碑陰記。- 尹新之

 

人孰無死。得死難耳。遭亂世盡臣節。孰不曰秉彜之天。而擁兵逗撓者。唯恐入山之不深。一介老將。無所繫屬。進退可自由。沬血先登。赴國家之急。矢盡力窮。跬步不移。竟辦一死。精忠大節。昭揭宇宙。雖謂之日月爭光可也。太史記之。羣公奏之。恩褒自天。天官贈其爵。禮官祭其墓。有司棹楔其門。大學士趙公撰其碑。大宗伯吳公書其石。諫議黃公銘其閭。於是。公之偉烈炳然。垂耀千載。嗚呼盛矣。繼有褊裨合辭請錄公淸白。仍贈謚。議下。諸大臣咸允。上可其奏。公之子東亮。以恩拜職。陞授畿邑。未幾有客使聲。東亮詣閤門。涕泣拜䟽乞遆。以避其行。政院不納。亮乃棄官歸鄕里。明年來京師。爲見余。固要以碑陰之辭。余辭曰。余陳人不齒卿士。文字非任也。奚取於余而求之勤耶。况先大夫忠孝淸操。焯焯在人耳目。宗匠巨筆銘序。盡之矣。曷敢復贅。明日又來懇。又明日又如之。孝哉。爲父故而忘余之陋。因寅念曰。余疇曩獲習于公。數與公語。竊瞷而奇之矣。其敢謂不知公者。肆揭余得一二於親庭者。昔我先君按節嶺南。首訪忠孝。嶺之人。咸稱公三歲失恃。十歲喪怙。悲號孺慕。葬祭執禮。有逾成人。一鄕感其孝。一道聞而化。及壬辰亂。年二十五。仗劒起。入見府尹曰。南中無義士。列邑風靡。今賊迫州境矣。墳墓所在。父母之鄕。去此何之。我雖駑弱。願與數十壯士。先甞賊鋒。願主公之繼之也。遂約健兒四五十人。潛持火具。繞出山後。直走彦陽道。夜斫營。因風縱火。賊熸遁。僵尸十數里。所獲劒戟器械。積于官庭。高如山。於是府民之竄伏者。稍稍出而願從公。不日。衆至數千。西生島山之戰。皆中丸。洞甲抵骨。神氣自若。竟射賊却之。及獻馘數百級。盡歸之所與同事者及戰死人。一無自占。以故朝廷不省公功。及策宣武勳。只錄原從云。非有古名將風。能如是乎。公所居。門臨大川。官禁漁採。公勑子弟。毋犯禁以養我也。不義之食。食不下咽。悉取網笱而火之。其居鄕謹飭。類如此。先君子旣採一道公論。登聞于朝。歷試內外。律己廉㓗。治績益懋。逮仁廟改玉。累遷巨鎭。數以淸謹盡瘁聞。仁廟甞臨朝。嘆息有拊髀思。先君時在相府。進曰。臣曾按嶺南。飽聞崔某忠勇。壬辰討賊狀况。有氷蘗操。至老不變。當今擇將無踰此人。上曰。予聞如何。尋有閫帥亞卿之命。丙子。淸兵猝入我境。三日。兵迫京師。車駕不及避。蹙入南漢城。城已暈矣。勤王師不進。城中危急。忠淸廵使鄭世䂓。提師先赴難。公時在營將。主將以公之老。改授之他將。而使公歸。公怒曰。主將何老我也。老者亦不得死乎。國亂之謂何。臣敢後死。乃鞭馬先出。淚流沃甲。主將禁不能止。軍到龍仁。淸人以鐵騎薄之。公挺身前行。持滿發矢。發必殪賊。軍潰公色不變。仰天呼曰。老臣今得死矣。言訖仆于地。賊退得屍。果不離尺寸地。身亦被數十創。嗚呼。公之所樹立。卓然不苟。平居不愛錢。臨難不惜死。毁魄全天。要以自靖于心。豈臨陣倉卒戰死者比哉。邈彼雞林踈遠之臣。啣恩報國乃如此。彼持粱齧肌。富貴薰天者。亦足少愧矣。綱常不墜。日月長懸。斯其爲大東奇男子忠臣崔某士建之墓。

 

현주집 > 玄洲集卷之九 / 碑誌

-------------------------------------------------------------------------------------------------------------------------------------

 

參判貞武公崔公震立神道碑後記。- 姜樸

 

嗚乎。是爲我長陵丙子死義臣貞武公崔公震立之碑也。公之死遠且百年。而至今凜然有生氣。余甞路駒城。過所謂險川者。父老尙或有指言崔將軍死處。嗟乎。其烈義何可勝道哉。然若是而死。豈公之所欲也。向公不得專閫寄。僅處以偏伍末將。固任人者失之矣。而顧老之而易他將。則主將又失之。不然。使公得專兵當一面。其出奇見功。若壬辰鷄淵萆山之爲。不可知。豈特以徒死立名如今也。彼主衆寡強弱而爲言者。甚矣其不知公也。向者鷄淵萆山之役。公豈用多力而勝哉。雖然。公得以當死死。公無憾矣。亦國家之所以報公者。有大司馬之贈。有太常易名之惠。有錄廉之褒。有錫祭之榮。有門閭棹楔之寵。有鄕祠賜號之命。則於崇終隱卒之義。亦無憾矣。抑世之立言君子。所以狀公德者。有漫浪黃公㦿之狀紀。有龍洲趙先生之神道碑。銘卽此碑也。餘亦多聞人達士之所識述。其又無憾矣夫。公長身而儀容魁偉。美鬚髯云。碑久未刻。甞屬竹南吳尙書書。不果書。今公之曾孫宣基。具石請余書。亦請碑後紀。余顧匪其人。而徒慕公深。故忘僭而如其請。宣基祖東說。而爲國桓之子云。

 

국포집 > 菊圃先生集卷之八 晉山姜樸子淳甫著 / 記

-------------------------------------------------------------------------------------------------------------------------------------

 

贈兵曹判書行工曹參判崔公行狀。- 金應祖

 

曾祖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行中直大夫軍器寺僉正諱得汀。祖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通訓大夫順陵參奉諱三聘。考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宣敎郞諱臣輔。妣贈貞夫人黃氏。籍平海。公諱震立。字士建。鷄林崔氏。系出新羅參判公。配黃氏。正言汀之孫。參奉士鍾之女。以皇明隆慶戊辰正月二日壬子。生公於慶州府北谷見村。三歲。黃夫人歿。鞠於庶母。自幼不與群兒相戲狎。稍長。知讀書有儀度。人皆異而敬之。丁丑。公年十歲。丁外艱。葬祭一從禮文。始終不懈。隣里有感而化之者。萬曆壬辰之變。公慨然投筆。與弟繼宗。從判官朴毅長。在行間未知名。公之大宅在府南。賊數十百人。屯據其中。公夜率蒼頭數十人。塞其門。乘風縱火。賊皆燒死。其有從屋上穴隙而出者。輒射殺之無遺類。得鳥銃槍劍等物。輸之官。時昇平百年。人不知兵。一倭荷劍。千人騈首受刃。聞公此擧。無不扼腕生膽勇。願從者日益衆。遂與武人金虎。募得數千餘兵。設伏于彥陽境咽薄縣。斬獲甚衆。乘勝進屯蘆谷。遇賊破之。及戰于鷄淵。虎違公節度。中丸死。公不少挫。戰益力。遂據彥梁之間以扼賊。賊不得放兵四掠。本州賴以安。其功甚盛。而斬級之數。一皆讓與諸將士。故褒賞獨不及焉。甲午。中武科。始授部將。以疾辭。丁酉。賊復至。公率敢死軍數百名。擊西生堡之賊。預占高處爲土窟。聚瓦礫蔽其前。方戰。挺身突出以誘賊。賊至。從窟中射之。應弦而斃者無算。公亦丸中臍下。顏色不少變。是年冬。楊經略鎬與權元帥慄。鎭島山。府尹朴毅長。素忌公。因微失將置之法。經略素聞公名。送家丁止之。公憤然曰。吾與其浪死無辜。無寧死於國乎。卽馳入賊陣突戰。丸中右頰入左顋。歸而剝骨以出之。氣益勵。人皆壯之。戊戌。參宣武原從二等。授訓鍊院正資。庚子秋。朝廷遣御史尹暉。犒慶,蔚力戰將士以奬之。公與諸將士詣闕謝。將士等因疏陳公發縱之功。上召至差備門外。問以討賊首尾及當今急務。公敷對甚悉。上嘉之。賜以酒。錫以弓矢。仍命除守令。荐拜萬戶武兼宣傳官。不赴。丁未。拜都摠府都事。始就職。戊申。拜馬梁僉使。當蕩敗之餘。專以撫摩凋瘵爲先。節損日用。修城池備器械。聲績大著。觀察使別遣庇仁倅朴由忠點閱之。朴服公德而多公績。作按問記以美之。有眞淸強淸詐淸等語。蓋以強詐譏世而以眞歸公也。遂具由告巡相。巡相以聞于朝。拜慶尙左虞侯。政績優於馬梁。巡相尹公昉馳啓褒之。厥後巡相宋公英耇。親自按閱而褒啓之。壬子。天將黃應暘來偵釜山賊。見公禮貌之。及還朝。亟稱公淸白勤幹之狀。旣歸。因巡相權公褒啓。有不次擢用之命。甲寅。拜慶源府使。陞通政。勵操益堅。藩塞之間。至今有氷蘖聲。李贊畫時發鎭箕城。引公爲別將。共議軍務。辛酉。特除高沙里僉使。贊畫啓請留公爲別將。領武士百餘。留良策館。時毛文龍爲北兵所襲。敗卒多歸附者。一日。北兵猝至。廝殺而去。毛將接伴使李馨遠以馳報後時聞。遂因此被拿。配蔚山。道過本州。望門而不入焉。癸亥反正。放還。爲加德僉使。御史李公敬輿褒公淸勤。特賜內廏馬一匹。及歸。軍人等立碑以寓慕。丙寅。拜慶興府使。朞年而政成。巡邊使禹公致績馳啓之。朝廷令監司李公溟査啓。有居官如僧苦節可尙之語。命賜表裏一襲。己巳春。御史李公行遠。極陳公淸操于榻前。命陞嘉善。尹相昉,金相瑬。亦於筵中互相陳啓。上嘉納。新監司尹公毅立又上狀言之。庚午夏。特除全羅水使。旋遞。秋。又特除工曹參判兼副摠管。公上章辭。上答曰。癸亥以後。國中皆思改心易慮。而染汚旣深。獨卿廉簡。愛我民生。余甚嘉尙。所授亞卿之任。卿實合宜。勿辭行公。公瞿然辭益力。聖眷愈隆。越四箇月。始許之。冬。特拜京畿水使。辭朝日。上引見諭之曰。得卿淸簡爲閫帥。吾無憂矣。仍問本營藏船便否及前所歷北方事。及瓜。喬桐父老上書借寇。從之。癸酉。仍舊職。兼京畿忠淸黃海三道水軍統禦使。公累抗章辭。上答曰。予不肩好貨。廉勤敍欽。卿知此意。勿辭盡職。因降書諭之。有曰心貞氷蘗。業專韜鈐。老益堅於持身。少不損於治郡。荊南河內。周防之策非輕。保障繭絲。尹鐸之寄有意。夏以病辭。遞付副摠管。旋除德源府使。不赴。甲戌。拜全羅右水使。上又引見慰諭之。將遞。金體府瑬啓請爲別將。時朝廷有南牧憂。又移公州營將。蓋欲其預爲堡障也。丙子十二月。大駕入南漢被圍。監司鄭公世規將親率師勤王。愍公年老。以黃拍代之。諭公落後。公慨然曰。筋力雖衰。志在裹革。遂揮泣從行。左右爲之感動。至龍仁衿川。賊以鐵騎蹙之。公特立陣中。射輒殪之。先軍潰。從者以事急告。公曰。吾得死所矣。遂死之。實二十七日也。享年六十九。丁丑事定。諸孤求得公屍於陣上。獨覆以草。蓋必有義而護之者。發視之。身被數十槍。矢鏃遍體。而顏貌如生。遂輿櫬歸。貧無以爲葬。公平生所帶將士等。詣京師上疏。備陳公死敵首末。疏上。該曹回啓。崔某淸高正直。盡心國事。其死難一款。與臣等所聞。少無異同。請各別褒贈。且令本道監司。葬需及造墓軍題給。上允之。遂贈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官給葬需。以十二月。葬于彥陽縣東烏池淵卯向山。戊寅春。上遣禮曹正郞李汝翊致祭。其文有曰。天生英特。東國人傑。夜金若浼。氷壺澈空。及予遭難。唾手先行。偏師左次。隻手何爲。八尺如植。分寸不移。淸標人仰。勁節予欽。金判書時讓上箚。略曰。丙子之亂。前參判崔某。以公州營將。年滿七十。不合赴戰。監司改以他人某。無辭而退。及兵出。騎馬以從。問之則曰。以我年老不合戰用。此則甚是。受國恩甚厚。一死報國。我雖老。何後於人。竟橫屍陣中。其爲國損生之義。素定於胸中。非倉卒戰死之比。請令本道旌表其門。以爲聳動之擧。事下禮曹。回啓曰。前參判崔某。在武弁中。素以淸謹見稱。居官莅職。皆有聲績。臨難損軀。以報國恩。重臣所陳。實出心服。一依擧行。以爲褒善之地何如。上可之。庚辰秋。遂就慶州故家旌之。嗚呼。公居家孝友。人無間言。居鄕。又極謹愼。門外有大川。官禁私獵。有識者或未免犯禁。公每心非之。一日。子弟進魚饌。公曰。此物何爲而至。養之以非禮。其能下咽乎。取其網火之。其律己之嚴類此。廉潔之行。出於天性。又能混其迹。不爲矯激之態。人益賢之。李體察德馨。巡到嶺南。犒賞力戰將士。以屬公馬與公。公曰。旣云賊馬。我何受之。體察義之。嘗爲李公時發褊裨。陪至盈德。縣監贈帽扇等物。受而置之座上而歸。李相聞而悅之。在馬梁。秋毫無所犯。衙門之內。不畜婢妾。膝下二子。葛屨履霜。人皆曰古未嘗有也。其任慶源也。遭子婦喪。父老各以土產賻之。其遞歸也。藩胡等獻貂裘以備寒。皆郤之。北兵使金景瑞見公著破毛掩。以貂皮新件爲贈。公受而著之。酒後。托以耳熱。掛于幕柱而歸。方在箕城。有饋生梨者。公不受。人以爲言。公笑曰。非以爲貨之也。以其人不正故耳。逮被拿命。李贊畫憫其無以爲獄費。出營儲布。委致于京邸。公辭曰。吾罪譴旣重。何敢受此物。以重其罪乎。噫。死生之際。而不易其所操。斯固守道君子之所難也。當倭寇猝至。擧國波蕩。非鳥竄則蝨附。公以一介布衣。奮臂一呼。千人影從。出入戰陣。如履坦途。身再中丸而不少沮。斬獲雖多。而不以一級自衒。茲豈非古賢將之遺風歟。赤心憂國。始終如一。身無完衣。妻子不免飢寒。而略不以介意。其在列鎭列郡。孜孜於官事。窮日夜不厭。至於丙子。知時事將變。語及於國。未嘗不慨然流涕。終焉視死如歸。橫屍戰場。上以酬鴻私於君父。下以樹風聲於一代。何其偉哉。由是而論公之淸白。聳一時。義勇冠三軍。精忠貫白日。眞所謂烈烈轟轟做一場者矣。抑朝論重公之節操。聖上嘉公之廉謹。超資陞拜。多出特命。至於推恩三代。榮之極也。而曾不得一任閫寄。以售其韜略。斯豈得無憾於當世之秉銓衡操化權者哉。雖然。公旣自行其志。自盡其職分。自外而至者。於公又何與焉。公娶瑞山柳氏高麗文僖公號思巖諱淑之後。學生允謙之女。先公十二年卒。贈貞夫人。權厝于州北十里許蘭元堂。將合窆于公墓而未果。生一女。適士人尹宗淳。無后。男五。曰東尹,東說,東亮,東吉,東璟。孫男女。曾孫男女。又若干人。鄭都憲世規嘗記公死難時事甚詳。又因引對陳啓。上命官其子東亮。今爲通禮院引儀。<끝>

 

[주-D001] 昐 : 盼

학사집 > 鶴沙先生文集卷之九 / 行狀

--------------------------------------------------------------------------------------------------------------------------------------

 

參判崔公震立旌閭碑銘 幷序 - 黃㦿

 

嗚呼。此故參判崔公之門。上命旌以棹楔。而其鄕之大夫士樹之貞珉。爲不朽圖者。不佞某則謂亡論木石。卽公之義烈。晳如日星。精爽蔽於霄壤。又奚用鐫泐爲。顧往昔伏節之臣。居平不見知于其主。主亦不知何狀。君子傷焉。迺今于公。觀君臣矣。斯可無述。繄我聖上癸亥改玉之初。倣周官六廉之政。而弊文武臣之治。疇能敬辨。以興于俗。遂起廢公。爲加德鎭僉使。旣至。御史李敬輿啓褒淸勤。上賜內廏馬。丙寅拜慶興府使。及期巡邊使禹治績啓褒。巡察使李溟啓覈其實。苦節可尙。上賜表裏一襲。已又御史李行遠還奏公淸白甚悉。相尹昉,金瑬交口慰薦。上特陞嘉善階。庚午夏。上特除全羅道左水使。秋特除工曹參判。朝制亞卿鮮以武弁選。公辭。上批曰癸亥以後。國中皆思改心易慮。而染汚旣深。獨卿廉簡。愛我民生。予甚嘉尙。所授亞卿之任。卿實合宜。冬特除京畿水使。上引見勞奬而曰。得淸簡者爲帥。予無憂矣。癸酉兼三道統禦使。公辭。上批曰予不屑好貨。廉勤敍欽。卿知此意。勿辭盡職甲戌拜全羅道右水使。上又引見慰諭。蓋公之自結上知亡他。而上所以待公如此。其曰廉簡淸簡廉勤者。雖大相元功。有能得一于上哉。丙子秋。朝廷爲飭兵。遷公公州營將。冬北狄大訌。上駕次南漢。公與巡察使鄭世䂓。將帥師赴難。而世䂓謂公年至。易以他將。且使公後。公奮曰君父在圍之謂何。而老臣敢圖生爲。吾老不任將。能任行耳。迺躍馬顏行。慷慨血泣。軍中見者莫不洒然感激。軍至龍仁險川。敵以鐵騎躪。公獨立射。射輒殪敵。軍濱從者以急告。公曰吾得吾所矣。遂死之。明年丁丑得屍。貌如生。身蝟集矢鏃。噫。孰非上臣子。而涵濡渥澤。貪饕祿位者。率鳥鼠竄矣。夫人臣平日見利而不見義。方其急難。知生而不知死固尒。惟廉者不苟生。淸者能徇節。卽上之知公深矣。向非公一死者。天理不遽熄。而人心不長晦哉。雖戰勝剋敵。其功何以加此。公所以報上知者。實不淺尠也。事稍定。舊部曲疏陳公死敵狀。上用禮官議。特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命本道庇襄事。遣官致祭如禮。判書金時讓上箚。以爲其爲國捐生之志。素定於胸中。非倉卒戰死者比。請表其門。於是有旌閭之命。鄭世䂓因登對白之。又命官其子東亮。於乎至矣。上恩終始靡替。此所謂觀君臣者非耶。公姓崔諱某字某。鷄林人。始公爲布衣時。當壬辰島夷之難。投筆糾義旅。出奇勦賊。所斬殺甚衆。不言功。故賞不及。甲午中武科。丁酉從元帥權慄戰于西生堡有功。島山之役。楊經略鎬素知公名。救公于厄。先後戰。被創刮骨而氣益振。人服其勇。庚子宣廟遣御史犒力戰將士。公因詣闕謝。宣廟特加咨訪。就賜上尊弓矢。命除守令。寔我宣廟栽培公材。以燕貽後歟。戊申拜馬梁鎭僉使。大著厥績。有眞淸名。道臣以聞。辛亥拜慶尙道左虞候。績多于馬梁。又聞於朝。黃指揮應暘從偵賊還。亟稱公淸白。甲寅拜慶源府使。始陟通政。北人至今誦氷聲。辛酉從戎關西。坐非罪謫蔚山二年。而遇我聖明。論者謂公平生所自樹立。若是魁傑。而又晩歲遭際大奇。竟不授之兵柄而有所施者。豈關諸時運歟。公生于隆慶戊辰。歸于崇禎丙子。壽六十九。葬在彥陽縣東烏池淵卯向之山。公嘗與判書李公時發,權公盼,參贊尹公某。許以知己。參贊公於不佞某。爲外王考。側聞遺風而奉緖論雅矣。第撮其淸忠大節而爲之敍。俾後之過者。而式而拜。曷敢以贅語銘。銘曰有明朝鮮國忠臣之閭。嗚呼。<끝>

 

[주-D001] 蘗 : 檗

만랑집 > 漫浪集卷之九 / 碑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