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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권숙 묘갈명 병서(處士 權璹 墓碣銘 幷序)

야촌(1) 2017. 10. 14. 13:24

 화산 권 선생 묘갈명 병서
(華山 權先生 墓碣銘 幷序)

[생졸년] 1665(현종 6)~1716, 숙종 42)

 

성호 이익 찬(星湖 李瀷 撰)

[생졸년]  168(숙종 7)1~1763(영조 39)

 

선생의 휘는 숙(璹)이요 자는 수옥(壽玉)이다. 나중에 집()으로 이름을 고쳤다. 호남 남원(南原)의 화산(華山)에 거주하였으므로 학자들이 화산(華山) 선생이라 불렀다. 선생은 도학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했고 세상을 떠난 뒤에 명성이 더욱 알려졌다.

 

호남의 선비들이 모여서 서원에 향사(享祀)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당시 국법에 걸려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천리 길을 달려와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는데, 묘소의 비석에다 글을 새겨 공의 행적을 반드시 후세에 알리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내가 평소에 사람들을 통해 공의 덕행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선생은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으로 고려시대 태사(太師)를 지낸 행(幸)의 후손이다. 뒤에 휘 단(㫜), 휘 보(溥), 휘 후(煦)가 모두 대관(大官)을 지냈다.

 

후(煦)는 고려 조정에서 국성인 왕씨(王氏)를 하사받았으며, 3대를 지나 부사 휘 복(復)에 이르러 본래의 성을 되찾았다. 다시 4대를 지나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영의정과 동흥군(東興君)에 추증된 휘 상(常)이 있는데,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인()은 현감을 지냈고, 조부는 휘 달중(達中)이고, 고(考)는 휘 대의(大毅)이다.

비(妣)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통덕랑 이점(爾點)의 따님이자 참판 명단(明槫)의 손녀이다.

 

선생은 현종 6년 을사년(1665) 5월 28일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자질을 지녔고 풍채가 수려하여 어린 나이에도 사람들로부터 촉망을 받았다. 어진 마음과 효성이 지극하여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예법에 맞게 부모를 봉양하였다.

 

모친 박씨 부인이 병을 앓게 되자 선생은 겨우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나이임에도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모친이 한 번 밥을 먹으면 자신도 한 번 밥을 먹고 모친이 두 번 밥을 먹으면 자신도 두 번 밥을 먹으면서 매번 박씨 부인의 병세에 맞추어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부인이 앉을 때는 반드시 남에게 기대어야 하 기에 선생이 좌우에서 엎드려 받쳐 주었다. 이렇게 8년 동안 병수발을 하였으며,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이는 등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부인이 감을 먹고 싶어 하였으나 의원이 해가 된다 하여 그만두었는데, 그 후로 종신토록 감을 먹지 않았다. 고 학생공이 초종(初終) 때까지 눈을 감지 못하자 염습을 하는 이가 걱정을 하였다.

 

선생이 절을 하고 축원을 올린 후 손으로 덮어 드리니 곧바로 눈을 감았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 중문(中門) 안으로는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묘소 앞의 무릎 꿇고 절하는 자리에는 선생 때문에 풀이 자라지 못했다.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사인(士人) 규징(奎徵)의 따님이다.

 

혼인을 약속한 후에 질병이 있다는 말이 들려 선고(先考)가 혼인에 반대하였으나, 선생이 말하기를 “이 일은 가운(家運)과 관계된 것이니 혼약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선고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평상시에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책을 마주하고 단정히 앉아서 그 속의 내용을 깊이 탐구하였다.

 

겉으로는 머뭇대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 속은 절벽처럼 우뚝 솟은 기상이 있었으며, 사양하거나 받는 일에 구차함이 없고 사람들을 응대함에 있어 나태함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 지방 사람들이 선생에게 감화를 받았다.

 

후학들을 가르칠 때는 시비 양쪽을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였으며, “학문을 함에 있어 극기복례(克己復禮)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서재를 ‘극복재(克復齋)’라 이름 지었다.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가묘(家廟)에 배알하였고 재계를 할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으며, 기일(忌日)이 있으면 그달 내내 고기를 먹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도 손님을 대하듯 서로를 공경하였으며 벗을 사귈 때는 함부로 사귀지 않았다. 도의(道義)로 사귄 벗으로 처사(處士) 양처기(楊處基)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자 두 아들을 부탁하였다. 사람들이 전염될까 두려워 피하였으나 선생은 “나는 그와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이다.

 

어떻게 아우가 죽게 되었는데 형이 돌보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는, 몸소 염습하여 장례를 치른 후 두 아들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가르쳐서 인재로 성장시켰다. 이때 어미 닭이 죽자 그 병아리를 다른 어미 닭이 품어 키우는 모습이 목격되었는데, 선생의 행동에 미물이 감화를 받아 그런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또 홍준명(洪遵明)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가 가난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지조를 지키는 것을 어여쁘게 여겼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마음을 다해 무덤을 만들어 주니 원근의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달려와서 도와주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아무 고을 사는 아무개가 귀신과 같은 술법을 지니고 있다고 말을 하자 선생이 그와 어울려 쫓아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얼마 뒤 그 사람이 패사(敗死)하고 그 말을 한 사람 또한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또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대장부가 비록 출셋길이 막혀 낮은 자리에 있지만 장상(將相)의 대업 또한 자신의 분수 속에 갖추고 있다. 나는 소매 속에 그것을 이루어 줄 비전(祕傳)을 가지고 있다.”하였으나, 공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감여술(堪輿術)에 현혹되는 것을 병폐로 여겨 “조상의 분묘를 누차 옮기다 보니 체백(體魄)이 안주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복을 받겠다고 한다는 짓이 무덤을 파헤치는 일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하며 개탄하였다.

 

그 지방의 선비들이 읍지(邑誌)를 다시 간행하면서 선생의 의로운 행적을 수록하자, 선생이 편지를 보내 “나는 불효자인데 허명(虛名)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장차 지하로 돌아가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진다.”하였다.

 

그런데도 선비들이 그 말을 따르지 않자, 선생이 직접 찾아가서 그 판목을 가져다 해당 내용을 파 버렸다.

선비들이 깜짝 놀라 “이 판목도 기록이다.”하고는 그것 역시 수습하여 보관해 놓았다.

 

선생은 병신년(1716, 숙종42) 3월 3일에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모산(某山) 모좌(某坐)의 언덕에 있다.

아들이 없어 열경(悅經)을 양자로 들였다. 선생의 행적을 기술한 사람은 문인 양응수(楊應秀)와 안숙(安璛)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현인을 숭상함도 끝났도다. / 已矣尙賢

군자가 불우하게 지내다니 / 君子處竆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 不賁于世

자신 속에 감추었네. / 于其躳

 

주공과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 悅周孔道

곤경에 처해도 형통했네. / 習坎亦通

 

남녘의 여러 선비들 / 維南多士

부지런히 찾아와 배웠고 / 佸佸其來從

 

후세에 전해야 한다면서 / 謂必垂後

비석 높이 세운다네. / 有樂石之崇

 

내 익히 듣고서 명을 쓰니 / 我聞而銘之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리. / 不愧中

 

[각주]

 

[주01]국법에 걸려 : 국법은 서원 건립을 금지하는 조치를 이른다. 서원은 1542년(중종37)에 주세붕(周世鵬)이 백

           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안향(安珦)을 제향한 이래 전국 각지에 건립되어 후진 양성과 선현 제향의 기

           능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오면서 남설(濫設)되거나 첩설(疊設)되어 그 수가 수백 개로 늘고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

           의 온상이 되는 폐단을 낳았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도 서원에 대한 통제에 들어가 1644년(인조22)에는 서원

           의 설립을 허가제로 하였고, 1714년(숙종40)에는 서원의 첩설을 엄중히 금지하였다. 그리고 1741년(영조

           17)에는 사사로이 건립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주02]후(煦)는 …… 되찾았다 : 후(煦)의 본래 이름은 권재(權載, 1296~1349)였으나 고려 충선왕(忠宣王)의 아

            들로 입적되면서 왕후(王煦)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권복(權復, 미상~1435)은 고려 말에 태어나

            1417년(태종17) 무과에 급제하여 태종과 세종 조에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즉,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는 시기에 본래의 성을 되찾은 것이다.

 

[주03]스승에게 …… 나이 : 10세를 가리킨다. 《예기》 〈내칙(內則)〉에 “10세가 되면 집 밖에 나가서 스승에

            게 배운다. [十年出就外傅]”라고 하였다.

 

[주04]모친이 …… 먹으면서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문왕이 병에 걸리자 무왕이 관디(冠帶)를 벗

            지 않은 채봉양하여, 문왕이 한 번 밥을 먹으면 무왕도 한 번 밥을 먹고 문왕이 두 번 밥을 먹으면 무왕도 두

            번 밥을 먹었다. 12일이 지나서 문왕의 병이 나았다.[文王有疾 武王不說冠帶而養 文王一飯 亦一飯 文王

            再亦再飯 旬有二日 乃間]”라고 하였는데, 권집(權)이 이를 실천한 것이다.


[주05]초종(初終) : 초상이 난 뒤로부터 졸곡(卒哭) 때까지를 일컫는다.

 

[주06]양처기(楊處基) : 1661~1708.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자는 흥중(興仲)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전라도

            순창(淳昌)에서 활동하였다.

 

[주07]감여술(堪輿術) : 풍수지리설을 일컫는다.

 

星湖先生全集卷之六十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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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華山權先生墓碣銘 幷序

 

先生諱璹字壽玉。後改名。居湖南南原之華山。學者稱華山先生。先生道高而心益謙。身歾而譽益昌。湖南之士羣集而謀所以祀于瞽宗。時有邦禁。俾不得伸。則於是千里走乞銘。將標諸墓石。必有聞于後而後止。瀷雅因人慣習其質行也。樂爲之言曰。先生安東大姓。高麗太師幸之後。後有諱㫜諱溥諱煦。皆大官。煦王氏朝賜國姓。三傳至府使諱復。復本姓。又四傳至同知中樞府使 贈領議政東興君諱常。於先生爲高祖也。曾祖諱縣監。祖諱達中。考諱大毅。妣密陽朴氏。通德郞爾點之女。參判明槫之孫。先生以我 顯宗六年乙巳五月二十八日生。生有異質。器宇豪俊。冲年而屬望矣。因心孝敬。不待勉強。就養中禮。朴夫人疾淹。先生甫就外傅。宵晝不離側。一飯再飯。每視朴夫人。夫人坐必倚于人。先生或左或右。俯伏承籍。如是八年。禱天血指。無所不爲。夫人思食柹實。醫云有害而止。後終身不食柹也。考學生公初終目不瞑。斂者患之。先生拜祝。手循之卽瞑。其居喪不入中門。塋前拜跪處。草爲之不生。配廣州李氏。士人奎徵之女。旣約婚。聞其有疾。先考難之。先生曰此繫家運。約不可違。先考從之。平居夙興夜寐。端坐對卷。無不究極。循循退讓。中有壁立氣像。辭受不苟。應接不懈。鄕鄰化之。訓誨後學。叩竭兩端。嘗曰爲學莫要於克復。遂以扁其齋。晨必謁廟。齊必盡誠。忌辰終其月不食肉。夫婦相敬如賓。取友不妄。有道交楊處基處士者遘癘將終。託以二孤人避染氣。先生曰吾與某兄弟也。寧有弟死而兄不恤乎。旣親爲斂葬。撫二孤如己子。育養敎導。以至成就。時有乳雞死而佗母爲之覆哺者。人謂物感。又有洪遵明者。先生愛其貧能自守。及其歾。盡心營壙。遠近聞之。爭來助相。人有言某郡某有術如神。先生戒其毋與從遊。後其人敗死。言者亦坐謫。或謂大丈夫雖竆而在下。將相之業亦分內。吾有書在袖。先生不應也。嘗病世之狂惑堪輿術曰絫遷先墳。體魄已不安。其專意福利者。與發掘何別。鄕士重刊邑誌。錄先生行義甚悉。先生聞之。貽書云某不孝以虛名聞。將無面目歸見父母於地下。多士不從。先生乃躳造取其板剗去。多士愕曰此板所以志也。亦收藏焉。先生卒於丙申三月三日。墓在某山某坐之原。無後。有系子悅經。述其行者。卽門人楊應秀,安璛云。銘曰。
已矣尙賢君子處竆。不賁于世于其躳。悅周孔道。習坎亦通。維南多士。佸佸其來從。謂必垂後。有樂石之崇。我聞而銘之不愧中。<끝>

 

성호전집 > 星湖先生全集卷之六十 / 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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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山權先生傳 

 

華山權先生璹者字壽玉。後改名(王+集+木)。其先安東人。先生居于南原。爲人信厚長者。事親孝。母閱歲疾甚。血指和藥。指無完膚。母思進柹實。醫云有害而止。後終身不食柹。及父喪目不瞑。斂者欲其閉不得。先生拜祝手自循之卽瞑。及葬日哭於墓前。拜跪處草爲不生。家有雞乳。爲貍所攫。羣雛悲啼。雛有甫長未孶者便來覆哺。待其成而後已。咸謂孝感。朋友死。撫其遺孤視己子。長育成就者數人。鄰有貧無以葬者。先生爲營塚壙。遠近聞之。爭來助相。不日而役畢。嘗有賈過門。先生命買什器。依其言不計直。先以家中見在與之。相稱貸而益之。賈念所取已濫。惟恐或失。遂逃。先生又命追與之。賈聞便回。倂其濫而留之。南方素稱多術士。有李姓者謂曰丈夫天下事皆當知。我有秘傳。子其有意否。先生不答。又有人爲先生道某郡某其術。幾於神。先生戒云子何取友不端。後其人果不終。相識者坐謫。邑中士聚謀錄先生行義于地誌。先生書與多士曰。某不孝。以虛名聞于後。將無面目歸見父母於地下。多士不從。先生乃躳造取其板剗去之。人曰宜留其板。以爲志也。

贊曰瀷疇昔聞南方有權先生者。後歷其傍邑。先生已歿。南士多津津來說其行高。南原古帶方國。華山在其西。山下有西林邨。卽先生所居云。

 

성호전집 > 星湖先生全集卷之六十八 / 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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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山權先生行狀。

 

先生姓權氏。諱璹字壽玉。後改諱(王+集)字某。居于南原之西林村。村在華山下。故學者稱之爲華山先生。始祖金幸。新羅宗姓。以能炳幾達權。麗祖賜姓權官太師。食邑安東。仍籍焉。歷十三世。至諱溥號菊齋。經術明闡。爲世儒宗。一家封君者九。第四子諱載。忠宣王賜姓名王煦。官雞林府院君。謚正獻。至孫府尹肅。復姓權。府尹之五世孫諱常。官同中樞贈領議政東興府院君。以孝㫌閭。於先生爲高祖也。曾祖諱(忄+寅)。居昌縣監。祖諱達中。考諱大毅。皆不仕。妣密陽朴氏。爾點之女。參判明搏之孫也。以顯宗己巳五月二十八日。生先生于安陰城北參判公故宅。生時有異夢。旣生形貌端正。稍長氣象豪邁。志意不羣。知讀書。能自奮發。慨然以克復二字扁其齋。專意性理之學。天性至孝。自八歲。已能整飭衣帶。晨昏省定。如成人然。每饋食必先嘗。魚肉必親炙之。食進必侍立。食下乃退。凡事親之節。一依小學。十一歲。朴氏有疾。先生未嘗一時離側。一飯再飯。惟朴氏是視。朴氏疾久羸甚。先生常以身承藉之。左右憑倚。惟適其便。八年如一日。未嘗少懈。每夕祝天。願以身代。刺指出血。和樂以進。幾絶而復甦者數。及喪。勺水不入口凡四日。仍歠粥以終三年。晝夜不離几筵。非受弔不與人並坐言語。哀至則哭。哭止則危坐如泥塑人。燕雀狎之。至集于冠巾及肩背。時先生居安陰。而朴氏墓在數里外。先生朝夕哭省。雖祁寒暑雨不一廢。墓前當膝處草不生。有一溪間之。或値雨漲未涉。卽於溪岸望哭焉。朴氏當疾亟。思紅柿及醢。而以醫忌不敢進。先生以是。終身不食二物焉。及府君之喪。一如前喪。府君卒而視不可瞑。斂者迭以手循之猶視。先生止哭擗。再拜床下跪陳辭。以手覆目。乃瞑。人莫不異之。有庶母敬養不衰。先生只有一婢。及庶妹嫁。先生知庶母意。以其婢從庶妹歸。有庶弟性頑。其少時行事。頗不循理。先生未嘗加以訶叱。和色溫言。至誠開諭。庶弟遂感悟。先生每當喪餘。哀號如初。旣月不食肉。南原多士纂邑誌。盛稱先生孝行。先生聞之。移書再三請刊去。終不聽。先生乃自取其板鐫削之。多士仍之以存其跡焉。先生之居家也。閨刑甚肅。夫婦相待如賓。無故則晝不入內。先生之居鄕也。有禮且厚。吉凶必慶弔以時。助贈隨宜。與親知約條。以禮讓相勉。鄰鄕亦多化焉。官長來見。則其往也。輒揖而言曰。官門非布衣出入之地。不敢謝。先生之待人也。仁和藹然。人不欲離其側。而人之不正者。未嘗與之交遊。彼自來見。則敬待之而已。古阜人李昌鉉見先生。盛稱泰仁宋賀之有神術。且道其願與相從。先生答曰。爲我道宋某。勿以非道欺世也。因戒昌鉉曰。君取友不端。殆將不免乎。遂絶之。其後宋果被誅。李亦連及謫死。先生之與朋友交也。信而義。與應秀之先君爲莫逆友。先君有疾。人疑其爲瘟。莫有省顧者。獨先生以時問疾。及其歿。躳親襲斂。家人力爭之。先生字先君曰。吾與某兄弟也。安有兄死而弟不顧乎。死生非可論也。以朋友之服。服三月。葬時操文致祭。先君沒時。應秀兄弟。俱未成人。先君疾革。託之先生。先生於祭文。告之以死者復起。生者無愧之意。卽引應秀兄弟。置之左右。惓惓乎飢寒之慮。諄諄乎仁義之敎。或有疾病。則爲之憂念。至忘寢食。應秀兄弟纔免父喪。又丁母喪。先生益加矜憫。夜則置之懷中。眞誠積久。至有感物之異。家有孶雞。下菢纔數日。爲狸所殺。衆雛失母。鳴聲正悲。鄰雞之不乳者。來將其雛。哺之覆之。克遂其生焉。鄰有洪遵明者。爲人淸介。先生愛之。死而無喪之者。先生爲營其葬。盡其誠。一坊聳感。爭相助成。朋友死。紖過門前。必致奠以哀。雖有數面之分者。聞其死。則亦爲三日不食肉。先生之敎人也。必先辨明義利之分。使知所取舍。有請學者。雖至愚鈍。亦必爲之竭誠敎誘。未嘗有厭倦之意。嘗戒門人曰。居今之世。能不與於黨論疏章之中。亦可爲善士也。又嘗戒之曰。異日京鄕之士。必有爲禧嬪陳疏者。若廁名其間。不免爲小人。爾曹其志之。後景宗大王卽位。南中人果爲陳疏。而承先生訓者。獨不與焉。先生老於衡門之下。而其愛君憂國之心。不弛于中。嘗言國有難。則我當仗劒從之。又常憤神州陸沉。乃作歌而時時歌之。其激昂慷慨之意。溢於聲容。先生器宇宏廓。知量過人。年甫十四。就學舍。値師長適外。惟童子五六守舍。至夜羣童。皆熟睡。獨先生與十六歲者。偶坐讀書。忽有大虎入庭蹲踞。目光矆睒。偶坐者驚走入室。先生責之曰。爾以年最長者先避。則彼睡者將任他虎將去乎。卽起抱羣兒投之室奧。右手擧爐火。左手取斧。當戶而坐。前置爐火。露斧刃以拒之。虎終不敢近。羣兒遂得全。比之溫公破甕。年雖稍長。而其處急之宜。濟人之仁。豈相讓哉。蓋先生以正大之姿超卓之才。加之以學問之功。而其爲學也。以明天理敦人倫爲本。以克己復禮爲要。以致其精思力踐之功。觀其氣象。則寬平退遜之中。有壁立萬仞底意思。至於用力之久。而胷中澹然純一。則粹和之氣。自然見於面。達於四體。雖販賤強盜。一見先生之處事。接先生之辭氣。則莫不感服。嘗有買鍮物商人。以倍直對。先生不爲低昂。商人異而問之。知其爲先生。乃嘆曰。吾雖逐利者。豈忍終欺君子乎。遂告其本直。而還其贏。一日夜強盜數十。以戈劒打窓戶而嚇之。人皆失色戰慄。先生獨凝然端坐。徐謂羣盜曰。財物無足惜。但夜已深。婦女皆就寢。不意恐動。則必驚而出聲。豈宜輕加兵刃乎。賊知其爲先生。卽令其徒不入內。只掠牛馬而去。先生於書。一覽輒記。經傳之微辭奧旨。不甚費思。而輒自融解。故其見識所到。無人窺測。當時從遊之人。各以其知之所及者稱之。或謂先生深於易學。或謂先生精於禮學。或謂先生明於數學。先生之無所不通。於此可知也。至於異端虛妄怪誕之書。未嘗一接於目。常以擧世之人。遊心虛遠。談玄說空。而不肯低心下意。著功於正心修身。平白正實底道理爲病。咸平李參奉有仁。博聞多識之士也。欲傳其藝。遍遊四方。與先生語大悅。講論經義之餘。從容謂先生曰。大丈夫於天下事。皆所當知。我得臥龍神法。而無人可傳。今觀子眞其人也。其有意否。先生笑而不答。知舊或勸先生著書。先生曰。自有聖經賢傳。先儒又已發明無遺。只向這裏著實軆認。則道理自足。又焉用文爲。至如詩辭吟詠。竟亦無益於身心。是故無所著文字。且當時門人。莫能善問道理。以述其語。又不能收輯其答人書牘。以示我後人。只有克復齋序一通。隨得錄若干條。答羅仁卿論費隱說。李黔翁論學蔀通辨說。及答其甥安?疑禮問數條。及詩章若干篇。而是皆悅經少時所錄。亦多闕誤。不得爲完本。可勝惜哉。然若使具眼者觀之。學術之正。識見之明。卽此寂寥數篇。亦有可以覰得者矣。先生卒于丙申三月三日。享年五十二。葬于西林南五里見所谷向南之原。配李氏籍廣州。東臯相公浚慶之五世孫也。考諱奎徵禦侮將軍。婦德甚備。嘗於祭時。治肉偶失照檢。肉一器宿于厨。深以不敬自咎。及先生入內。下階謝罪。此固由先生居室之嚴奉先之誠。而亦可見李氏敬順之德也。先先生八年而歿。葬於飛鴻山。後遷以祔焉。悅經一男世直。二女金希正金某。應秀之始學於先生也。年纔十三。越四年而遭山頹之痛。應秀自顧才性魯昧。况在幼騃。何以窺先生之閫域。而到今追述。又何以彷彿於其德行之萬一乎。上舍李公台晩。詳先生之終始。士林曾屬以狀德之文。而李公不幸未就而卒。則無復可以任其責者。先生之至行懿德。將泯焉無傳。應秀爲是之懼。不顧見識之鹵莽。文詞之拙陋。敢就所聞見者。序列如右。凡我同志之士。幸恕其僭妄。亦各述其聞見。以補其闕略。而就正於當世之立言君子。則庶先生之道。不至於全然湮沒也。辛未三月。門人南原楊應秀謹狀。

[後識]

應秀於丁巳夏。往留寒泉門下。一日先生問曰。南中有賢士之泯沒巖穴者乎。對曰。或有之。先生曰。君後日可錄示其行蹟也。於是應秀述華山先生言行摠錄。己未進拜時。呈于先生。先生覽畢。大加稱服曰。如此賢人。湮沒不傳。極可嗟惜。應秀起而請曰。華山學行如是。而弟子不肖。尙未得名世鴻筆。發揮幽潛。爲恨如何。竊願先生。或加哀矜而有以闡揚之也。先生曰。爲賢人闡揚。豈非好事。第華山子孫。未嘗識面。未知其意之如何耳。應秀歸傳此意於權兄悅經。權兄喜聞。欲爲請文。甲子應秀復往寒泉。乘間請曰。華山之子某。欲請狀於先生。先生果將許之乎。先生曰。此丈吾甚賢之。終不能忘矣。其胤若來請我。當副其意。應秀喜甚而歸。乙丑春。與權兄約日治發之際。金上世章,洪濟明。與其洞人齊起攻斥。權兄爲衆謗所撓奪。遂止行。豈不咄咄哉。我華山先生之名。恐將因此而無以傳信於後。謹錄其顚末。以附狀文之後。

[주-D001] 含 : 舍

 

백수집 > 白水先生文集卷之十五 / 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