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47

논개 수명비(論介 竪命碑)

■촉석(矗石) 의기(義妓) 논개(論介) 생장향수명비(生長鄕竪命碑) 격변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구차하게 살지 않고 쉽게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은 열사(烈士)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일개 여인이 대의(大義)를 판별하고 죽음을 보기를 마치 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여겼으니 그 열렬함이 어떠했겠는가. 당일의 모습을 상상해 보건대, 늠연(凜然)한 열기가 해와 별처럼 밝았을 것이니 그 장렬함이 어떠했겠는가. 산에는 영지(靈芝 : 영험한 풀)가 있고 물에는 예천(醴泉 : 단맛이 나는 물이 나는 샘)이 있으니 군자에게 어찌 상응하는 것이 없겠는가. 하물며 사람의 명분(名分)과 절의(節義)는 천성(天性)에 근원을 두고 사람의 귀와 눈에 펼쳐짐에 있어서랴. 부끄럽게도 나는 육순의 나이를 먹은 썩은 유자(儒者)로서 끝내 자신을 ..

대구 수성비(大邱 修城碑)

■수성비(修城碑) 아! 우리 성상께서 빛나게 보위에 임어하시고 대원위합하(大院位閤下)께서 좌우에서 잘 도와 이끄니 이로 말미암아 도는 삼영(三英 : 요·순·우)과 같이 높아졌고 지키는 것은 사방의 오랑캐에 있으니 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이 산이나 계곡이 아니고 뭇 백성들의 마음이 성처럼 견고해져서 억만년 태평한 기틀을 크게 안정시키는 것이니 아아! 아름답도다. 이 때에 세호(世鎬)가 외람되게 영남을 안찰하게 되었는데 명을 내리는 날에 말씀하시기를 “임금의 은덕을 베풀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나 변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이나 어찌 관찰사의 책임이 아닌 것이 없겠는가마는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백성들은 병화를 알지 못하고, 군비(軍備)가 소홀하니 이것은 장구한 술책이 아니다. 그대는 이를 ..

합천군수 이증영 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

■합천군수 이증영 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 ◇경남유형문화재 제367호(지정일자 : 2001년 12월 20일) 조선 중기에 합천군수(協川郡守)를 지낸 바 있는 이증영(李增榮 ?∼1563)의 본관은 덕산(德山)으로 첨정(僉正)을 지낸 노극신(盧克愼-광주노씨)은 그의 외손(外孫)이다. 이 비는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碑)로, 조선 명종 14년(1559)에 세워졌다. 비문을 지은 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이고, 글씨를 쓴 이는 조선시대의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이다. 비의 크기는 가로 87cm, 세로 202cm, 폭 17cm이며, 비문은 전체 13행, 각 행 평균 25자로 되어 있다. 비문에는 1554년부터 1558년까지 합천군수를 지낸 이증영이 15..

연안 연성대첩비명 병서(延安 延城大捷碑銘 幷序)

■ 연성 대첩비(延城大捷碑) 黃海道 延白郡 龍鳳面 횡정리(橫井里)에 位置한 延城大捷碑는 壬辰倭亂 때,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黃海道 延安府에서 勝戰했던 事實을 記錄한 碑이다. 이단(二段)의 長方形 臺石위에 烏石의 大理石 材質의 月頭形 碑身을 세운 碑座圓首形이다. 1608年(宣祖 41年)에 建立된 延城大捷碑에는『延城大捷碑』라는 전서(篆書)가 陰刻되어 있다. 領議政을 歷任한 鰲城府院君 白沙 李恒福『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이 左議政 時節에 碑文을 撰述하였고, 刑曹判書를 歷任한 忠敏公 禾谷 鄭賜湖『1553년(명종 8)~1616년(광해 8)』가 司憲府 大司憲 時節에 글씨를 쓰고, 右議政을 歷任한 文忠公 仙源 金尙容『1561년(명종 16)~1637년(인조 15)』이 上護軍 時節에..

이차돈 순교비

원화 13년(헌덕왕 10; 818) 무술 8월 10일에… 부처…王失義不戡順從 국가에는 애로요 민에게는 고역인데 ▨民에게서 거두어들여 불법을 일으키고 … 국왕은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 가슴이 미어지듯 하늘을 우러러 부처를 부르며, “아! 어찌하리오. 천하에 나 혼자이니,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법을 남기리오” 하였다.이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을 염촉이라 하였다. 그가 왕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울분이 나서 먹는 것도 잊은 채 천천히 엎드려 나아가 아뢰기를, “보잘것 없는 제가 생각컨대 왕께서 큰 뜻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나뭇꾼에게도 자문한다 하였으니, 제게도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곧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얘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하자, 염촉..

안동판관 김성경 유허비(安東判官金成慶遺墟碑)

■ 안동판관김공유허비(安東判官金公遺墟碑) ◇김성경(金成慶)] [연대] 1789년(정조 13) [유형/재질] 비문 / 돌 [크기] 높이 155cm, 너비 45cm, 두께 20cm [비의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탁본문 소재지] 안동대학교 박물관(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388번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유도원(柳道源) / 이인형(李寅炯) / 미상 ------------------------------------------------------------------------------------------------------------------------------------------- [개관] 이 비는 1789년(정조 13) 경기도 광주에 건립된 안동판관김공유허비(安..

춘천의 금석문

■ 춘천의 금석문 차례 Ⅰ. 춘천의 금석문 1 Ⅱ. 춘천 지역의 주요 금석문 1 1. 申崇謙神道碑 1 2. 朴恒神道碑 1 3. 朴元庇 神道碑 3 4. 朴安具神道碑 4 5. 宋檥神道碑 5 6. 鄭雲湖神道碑 7 7. 柳夢彪神道碑 8 8. 柳潚神道碑 11 9. 金佑明神道碑 14 10. 趙萬永神道碑 14 11. 趙寅永神道碑 17 12. 趙秉龜神道碑 20 13. 趙秉夔神道碑 23 14. 閔泳徽神道碑 24 Ⅰ.춘천의 금석문 금석문은 금속, 암석 등에 새겨놓은 글을 말한다. 춘천 지역에는 많은 양의 금석문이 분포되어 있다. 적게는 개인 의 묘역에 건립한 묘비 부터 크게는 국가 차원에서 세워준 신도비 종류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 역시 다양하다. 이같은 금석문은 새겨놓은 당대의 상황을 그대로 후대에 전해주기 때문에 역사,..

고령군 양전동 암각화

■ 고령 양전동 암각화 고령의 양전동(高靈 開津面 良田洞)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물론 그것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암각화는 당시 사람들의 종교, 예술, 생활, 문화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문화 결정체라 말할수 있다. 우리는 암각화를 통해서 선사인들의 생활 방식이나 그들의 생각 등을 유추 할 수 있고, 선사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암각화라는 형태의 언어로 남겨 놓은 것이다. 아마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생존의 문제였던 것으로 생각 되며, 신상을 그려서 신에게 기원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 신이라는 개념이 이때 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선사인들이 남긴 암각화는 자기들의 간절한 생각을 담고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

필운대 설권서(弼雲臺稧卷序) - 李裕元 景春 著

■ 필운대설권서(弼雲臺稧卷序) 월성 이유원 경춘저(月城李裕元景春著) 宣祖朝詢及白沙先生初號弼雲之義。金酒隱相公啓甚詳。松江鄭公詩。亦有心事弼雲山之句。弼雲之名。著于東國。余少時尋古蹟於弼雲山。見先生手書弼雲臺三字。臺之稱肇自是。而臺下有小基。指點爲先生居者。三百年于玆矣。人聚居成村。多爲數百戶。重義氣而尙然諾。辨少長而好禮讓。有時携酒登山吟咏。雖市井喧熱之中。見其人聽其言。不問可知爲臺下居人。其碌碌者流。不敢與之窺占。聖上奉迎之十年。居民修稧。以余白沙後孫。屬爲洞長。余鄕居人也。不堪知京邸一隅事。而本洞之俗。去古未遠。將使薄夫敦懦夫立。不失三百年遺風。余安能反樸回淳。自底於休休之域哉。昔白沙先生爲蓴里稧長。訓民有道。今於弼雲山下。復講舊稧。此蓴里之餘韻。而㙜之名可以悠久也。余於是不無興感而爲之序。 자료 : 嘉梧藁略) >嘉梧藁略册十二 > 記

황룡사 9층목탑 사리함기

[그림 1] 황룡사지 출토유물 황룡사 9층목탑 사리함기는 872년(경덕왕 12)에서 873년까지 황룡사 탑을 새로 수리하고 나서 작성한 것이다. 다른 말로 찰주본기(刹柱本記)라고도 부른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짓기 시작하여 574년에 완성한 신라의 대표적 사찰이다. 현재 그 터가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남아 있다. 사원의 완성과 더불어 금당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봉안(奉安)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 인도의 아쇼카왕(阿育王)과 관련된 연기설화가 전하고 있다. 9층목탑은 자장의 건의로 645년(선덕여왕 14)에 만든 것이다. 자장은 당시 국내외에서 여자가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현실에 맞서 여왕의 권위를 높여 왕실의 안정을 꾀하고, 불법의 보호를 받아 이웃나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