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47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북한산 진흥 순수비의 옛모습/사진(문화재청 자료) [그림 1]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24대 진흥왕이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에 순행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진흥왕순수비는 현재까지 4개가 알려졌다.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진흥왕순수비가 바로 그것이다. 창녕비는 561년(진흥왕 22)에 세운 비로 현재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으며 국보 제33호이다. 1914년에 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한 일본인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졌다. 비는 화강암으로 높이 약 300~115.1cm, 폭 175.5cm, 두께 30.3~51.5cm이다. 비면은 자연석 그대로이고 글자를 새긴 면만 약간 다듬었다. 글자는 16행이며, 행당 26자 내외의 글을 새겼다. 서체..

묘련사 중흥비(妙蓮寺重興碑)

■묘련사 중흥비(妙蓮寺重興碑) 지은이 :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을 송산『崧山 :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송악(崧嶽)을 송산(崧山)이라 하였다.』 이라고 한다. 그 산 동쪽 산등성이가 남으로 뻗어나 눕혀져서 서쪽으로 꺾이었으니, 낮게 숙인 것은 적고 우뚝 일어난 곳은 많으며, 또 나누어져 남쪽으로 세 개의 재(峴)가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용이 서리고 있는 것 같고, 가까이서 보면 마치 봉(鳳)이 높이 솟은 것 같다. 이러한 용의 배에 해당한 위치에 웅거하고, 봉의 날갯죽지에 해당한 위치에 붙어서 절이 있는데 묘련사(妙蓮寺)라고 한다. 우리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더불어 부처를 높이 신앙하였다. 불법에 들어가는 길은 《법화경(..

신라 문무왕릉비 윗조각 찾아.

빨래판으로 써온 신라 문무왕릉비 윗조각 찾아 중앙일보 2009년 09월 04일(금) 오전 03:08 중앙일보 이경희 조선시대에 발견됐다가 사라진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문무왕 재위 661~681) 조각(사진)이 200여 년 만에 다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경주시 동부동 한 주택 수돗가에서 문무왕릉비 상단(上段) 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시멘트로 발라 고정시킨 뒤 빨래판으로 쓰던 비석 조각을 수도 검침원이 발견해 신라문화동인회 김윤근(65) 부회장에게 제보하면서 실물이 확인된 것이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오늘날 시장에 해당하는 벼슬)을 지낸 홍양호(1724~1802)는 자신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진 문무왕릉비 조각들을 정조 20년(1796년) ..

우탁 유허비(禹倬遺墟碑)

고려 제주 우 선생유허(髙麗祭酒禹先生遺墟) [우탁(禹倬) 선생 생졸년] 1263년(원종 4)∼1342년(충혜왕 3) 선생이 세상을 떠난 충혜왕(忠恵王) 임오년(1342년)으로부터 447년 뒤인 기유 년(정조 13, 1789년) 9월 일 세움. [시대] 조선 [연대] 1789년(정조13년) [유형/재질] 비문/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80cm, 너비 77cm, 두께 32cm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이휘재(李彙載) / 김흘락(金興洛) / 미상 [개관] 이비는1789년(정조13년)의 우탁유허비(禹倬遺墟碑)로 이휘재(李彙載)가 비문을 지었고, 김흘락(金興洛)이 글씨를 썼다. 우탁(禹倬:1263~1342년)의 본관은 단양이고, 자는 천장(..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근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환국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북관대첩비는 1709년 숙종 임금이 임진왜란때 함경도 의병장 농포 정문부(農圃 鄭文孚) 선조등이 최초로 의병을 규합하여 함경도 지방에서 왜군을 8차례나 싸워 격퇴시킨 공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세운 전승기념비이다. 「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라는 공식명칭을 가진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3대 의병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길주군 임명역 부근에 세워졌던 높이187cm 폭66cm 너비13cm이며 그 내용은 정문부 장군을 중심으로 한 관북(함경도)의 의병이 왜군의 제2군 선봉장이던 가토리요마사(加虅淸正) 군대를 격파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북관대첩비는 1905년 러.일전쟁 당시 길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2사단 1..

권 원수(權元帥,權慄) 행주비(幸州碑)

■권 원수(權元帥)의 행주비(幸州碑) 간이 최립 찬(簡易 崔岦 撰)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권공 율(權公慄)이 세상을 떠난 지 일년이 지나고 나서, 공의 막료(幕僚)였던 사람들이 ‘공이 전에 거두었던 행주(幸州)의 승첩(勝捷) 이야말로 그 공이 워낙 컸던 만큼 그 당시 현장의 언덕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공의 사위인 현재의 영상(領相) 이공(李公)을 찾아가 나에게 글을 보내 비문을 청하도록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진년 4월에 일본이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해 왔다. 그러..

사대주의 용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사대주의 용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빛나는 조선국'이 아닌 비석 첫 머리에 새겨진 조선의 ‘사대주의’ OhmyNews 2006-12-12 18:09 백유선(loza) 기자 ↑대부분의 조선 시대의 비석이 그렇듯, 비석의 첫머리에 '유명조선국'이라 쓰고 있다.ⓒ 백유선 서울역사박물관의 앞뜰에는 무덤 앞에서 가져온 석물들이 있다. 비석을 비롯해 망주석·장명등·문인석 등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서있는 이 석물들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촬영장소가 되기도 한다. 가끔은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도 있어서 나름대로 박물관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처럼 이 비석들을 살펴보다가 조선 선비들의 사대주의 사상의 일면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