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대구 수성비(大邱 修城碑)

야촌(1) 2011. 6. 14. 17:25

수성비(修城碑)

 

아! 우리 성상께서 빛나게 보위에 임어하시고 대원위합하(大院位閤下)께서 좌우에서 잘 도와 이끄니 이로 말미암아 도는 삼영(三英 : 요·순·우)과 같이 높아졌고 지키는 것은 사방의 오랑캐에 있으니 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이 산이나 계곡이 아니고 뭇 백성들의 마음이 성처럼 견고해져서 억만년 태평한 기틀을 크게 안정시키는 것이니 아아! 아름답도다.

 

이 때에 세호(世鎬)가 외람되게 영남을 안찰하게 되었는데 명을 내리는 날에 말씀하시기를 “임금의 은덕을 베풀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나 변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이나 어찌 관찰사의 책임이 아닌 것이 없겠는가마는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백성들은 병화를 알지 못하고, 군비(軍備)가 소홀하니 이것은 장구한 술책이 아니다. 그대는 이를 힘쓰라."라고 하셨다. 삼가 재배하고 명을 받아 물러나왔다.

 

감영에 부임한 이래로 아침부터 밤까지 계획하고 기계를 수리하고 별포(別砲)를 설치하여 군대의 위용을 진작시키고 마침내 성을 수리하여 방어를 공고히 하기로 계획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대구는 옛날에는 성이 없었고 단지 토성의 터만 있었는데 과거 영조 병진년(영조 12, 1736년)에 관찰사 민응수(閔應洙)공이 토성의 주변을 따라 돌을 쌓고 문을 세웠었다.

 

그러나 망루나 포대는 갖춰지지 않았으니 아마도 겨를이 없었던 듯하다. 이제 백여 년을 지나는 사이에 치첩(稚堞 : 성가퀴)은 무너져 훼손되고 망루는 썩어 기울었으니 온 영남중의 웅장한 고을의 체모가 피폐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수리하여 중수하고자 함에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 능히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였으나, 하늘의 도우심에 사람들이 또한 순종하여 여러 사람들의 기원하는 마음을 드러내어 재물을 기부하여 보조하고 일꾼을 모집하여 백성들의 힘을 쓰지 않았으니 무릇 칠만전을 써서 8~9개월 만에 공사의 완공을 보고할 수 있었다.

 

성체(城體)는 더 높게 하였고 돌로 만든 돈대(墩臺 : 위급한 상황에서 신호를 보내는 대)를 새로 쌓고 표루(標樓)를 네 개 세웠으니 남쪽을 선은루(宣恩樓), 동쪽을 정해루(定海樓), 서쪽을 주승루(籌勝樓), 북쪽을 망경루(望京樓)라고 하였다. 여첩(女堞 : 성위에 담을 쌓은 것)은 옛날 것을 평평하게 하여 다시 쌓았고 사이에 포루(砲樓)를 표루(標樓)의 수만큼 설치하여 배로 만들었다.

 

망루는 혹은 다시 세우고 혹은 수리하여서 여러 누대와 함께 단청을 하였고 석회로 칠한 성가퀴도 그린 듯하여 채색한 누대가 서로 연이었으니 그저 백성들을 흥성하게 하고 나라를 지키는 방도가 된 것만이 아니라, 여기에서 도읍이 풍족하고 번화한 아름다움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일찍이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고 기뻐하니 이것이 어찌 세호(世鎬)가 감히 공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인가? 다만 대원위합하의 신묘하고도 원대한 계책을 삼가 받들어 국가의 유사시의 방비를 한 것이되 그 공사를 감독하여 완성한 것은 실로 여러 보좌하는 장령(將領)들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마침내 크게 잔치를 열어 낙성연을 하였고 조정에 장계로 보고를 올려 공을 논하고 차등 있게 포상하였다. 이어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고 공사의 전말과 감독한 사람의 성명을 그 아래에 쓴다. 예컨대 부실한 부분이 나타나면 잘 수리하여 영원하기를 기대하니 실로 후세의 군자에게 바라는 바이다.

성상(聖上 : 고종) 즉위 7년 경오년(고종 7, 1870년) 11월에 가선대부 관찰사 김세호(金世鎬)는 글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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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도감동(都監董) 중군 조성준

서성(西城)감동

책응도청(策應都廳) 전오위장 이회선

동성(東城)감동 전오위장 이운회

북성(北城)감동 전사과 박성연

동성별간역 오위장 서한기, 별간역 색리 정노윤, 간역 색리 윤봉림·손언국

서성별간역 오위장 서규현, 별간역 절충 정지오, 간역 색리 설익수·정택하·서필로

남성(南城)별간역 가산별장 서갑증, 간역 절충 정익승, 색리 정택인·김두갑·서지민

북성간역감관 가선 김정필, 절충 최석봉, 출신 조달운, 색리 김형주·이경룡·김태림

북문간역감관 가의 김기석, 절충 정창은, 색리 정래봉·이효상·최영민

부석소(浮石所 : 돌을 뜨는 곳)감관 사과 이연완, 기관 서필도, 색리 이태룡

벌목소(伐木所 : 나무를 베던 곳)감관 가선 김정한, 사과 이양두, 색리 신석근·양재규

무회소(貿灰所 : 석화를 마련한 곳)감관 절충 이원모, 사과 이기춘

취철소(吹鐵所 : 쇠를 불리는 곳)감관 사과 허석, 절충 한재유, 색리 이주식

야로소(冶爐所 : 철물을 주조하는 곳)감관 절충 김성원, 기관 김남주, 색리 손두오

번와소(燔瓦所 : 기와를 굽는 곳)감관 절충 조장욱, 색리 김갑조

운석(運石)감관 사과 이병하, 사과 노봉윤

비각(碑閣)감동 절충양필관

책응간역 절충 윤봉흡, 절충 허형, 절충 최석로가 글씨를 씀

체성(體城) 신축(新築) 97보, 개축(改築) 180보, 보축(補築) 1,409보

치첩(雉堞) 신축 2,680보

문루공해(門樓公廨) 신건(新建) 72간, 중건(重建) 37간, 중수(重修) 517간

공해(公廨) 여러 곳 수보(修補) 256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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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修城碑」

猗我」

聖上光御寶扆惟」

大院位閣下左右輔導之由是而道躋三英守在四鄰固國不以山谿而衆心成城丕奠萬億年盤泰之基於休盛矣時世鎬」忝按嶠南乃命之曰宣 恩德與民其樂固屛翰爲國禦侮何莫非巡按之責而昇平日久民不知兵武備疎虞是非幷用長」久之術君其勉之謹再拜受命而退莅營以來夙宵籌畫繕器械設別砲以振軍容迺謀修城以圖鞏圉謹按大丘舊無城只」有土城基址往在」英廟丙辰刺史閔公應洙因其周遭而築石建門矣然而樓櫓砲臺則闕如盖未遑也距今百有餘年之間稚堞圮毁譙樓朽傾」全嶺雄藩體貌凋弊方其修擧也役鉅力絀懼不克濟天之所助人亦順之發衆願而捐財佽助募丁夫而不用民力凡費七」萬錢閱八九朔而功告竣體城則增其高而刱築石墩建標樓者▨南曰宣恩東曰定海西曰籌勝北曰望京女惵則夷其舊」而改築間設砲樓者如標樓之數而倍之譙樓則或改建或重修幷與諸樓而丹雘之粉堞如畫彩樓相望非但爲盛民守國」之道於是乎始見都邑殷富繁華之美行者居者讚歎懽喜爲未曾有此豈世鎬之所敢居功也哉卽仰承」大院位閣下客算碩盡以爲 國家陰雨之備而其董工竣事寔賴諸將佐之力也遂大饗而落成以狀聞於 朝論賞省差」因立石紀蹟玆書力役始終與監董人名姓于下方至若隨弊繕補以期永久實有望於後來君子」聖上踐祚之七年庚午仲冬嘉善大夫觀察使金世鎬撰」都監董 中軍趙性駿 西城監董 策應都廳前五衛將李會善 東城監董前五衛將李運會 北城監董 前司果朴性淵 東城別看役五衛將徐漢琦 別看役 色吏鄭魯允 看役 色吏尹鳳林 孫彦國 西城別看役五衛將徐奎賢 別看役 折衝鄭志五 看役 色吏薛益秀 鄭宅夏 徐必魯」南城別看役架山別將徐甲增 看役 折衝鄭翊昇 色吏鄭宅仁 金斗甲 徐志敏 北城看役監官 嘉善金禎泌 折衝崔錫鳳 出身趙達雲 色吏金亨柱 李景龍 金泰林 北門看役監官 嘉義金琦奭 折衝鄭昌殷 色吏鄭來鳳 李孝祥 崔永玟」浮石所監官司果李連琬 記官徐必道 色吏李泰龍 伐木所監官嘉善金禎漢 司果李養斗 色吏申錫根 楊在奎 貿灰所監官折衝李元模 司果李基春 吹鐵所監官司果許▨鉐 折衝韓在愈 色吏李周植 冶爐所監官折衝金聲遠 記官金南周 色吏孫斗五」燔瓦所監官折衝曺章郁 色吏金甲祚 運石監官 司果李秉夏 司果盧鳳允 碑閣監董 折衝楊必寬 筞應看役 折衝尹鳳翕 折衝許 泂 折衝崔錫魯書」

體城新築九十七步 改築一百八十步 補築一千四百九步 雉堞新築二千六百八十步」

門樓公廨新建七十二間 重建三十七間 重修五百十七間 公廨各處修補二百五十六間」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