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황룡사 9층목탑 사리함기

야촌(1) 2009. 11. 15. 18:51

[그림 1] 황룡사지 출토유물

 

황룡사 9층목탑 사리함기는 872년(경덕왕 12)에서 873년까지 황룡사 탑을 새로 수리하고 나서 작성한 것이다. 다른 말로 찰주본기(刹柱本記)라고도 부른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짓기 시작하여 574년에 완성한 신라의 대표적 사찰이다. 현재 그 터가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남아 있다.

사원의 완성과 더불어 금당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봉안(奉安)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 인도의 아쇼카왕(阿育王)과 관련된 연기설화가 전하고 있다.

9층목탑은 자장의 건의로 645년(선덕여왕 14)에 만든 것이다. 자장은 당시 국내외에서 여자가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현실에 맞서 여왕의 권위를 높여 왕실의 안정을 꾀하고, 불법의 보호를 받아 이웃나라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의도에서 9층목탑의 건립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덕여왕은 9층목탑의 건립을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아버지 용수(용춘)에게 총괄하도록 지시하였고, 백제인 기술자 아비지가 200여명의 장인들을 거느리고 탑을 건축하였다.

아비지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아비지는 고국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어 탑의 건축을 멈추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땅이 진동하면서 컴컴해졌다. 이때 어둠 속에서 노승과 장사가 금당에서 나와 찰주를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이에 잘못을 뉘우치고 목탑을 완성하였다.” 9층목탑의 전체 높이는 225척(약 80m)이었고, 자장이 중국의 오대산에서 받은 진신사리 100립 가운데 일부를 9층목탑의 기둥 속에 안치하였다.

 

나머지는 통도사 계단(戒壇)과 태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고 한다. 신라는 황룡사 장육존상(丈六尊像),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더불어 9층목탑을 3보(寶)라고 여겨 소중하게 관리하였다.


목탑의 높이가 워낙 높아 자주 벼락을 맞아 파손되매 여러 번에 걸쳐 수리하였다. 698년(효소왕 7)에 처음 벼락을 맞았고, 720년에 새로 수리하였다. 868년(경문왕 8)에 두 번째로 벼락을 맞으매, 872~873년에 걸쳐 탑을 헐고 두 번째로 수리하여 세웠다.

 

이후 927년(경애왕 4)에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954년(고려 광종 5)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아 1021년(현종 13)에 다시 수리하였다. 1036년(정종 2)에 네 번째로 벼락을 맞아 파손된 것을 1064년(문종 18)에 다시 수리하였다. 이후에도 또 한 차례 벼락을 맞아 새로 수리하였다.

 

 

↑[그림 2] 황룡사지 목탑지유구

 

9층 목탑은 1238년(고종 25) 경주를 침략한 몽고병이 불을 질러 소실되었다. 이때 황룡사 장육존상(丈六尊像)과 가람 전체가 불에 탔다고 한다. 1976년 6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황룡사지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원래 담장 내의 면적이 동서 288m, 남북 281m이며, 총면적은 8만 929㎡임이 밝혀졌다. 가람의 배치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1탑 3금당 양식이며,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된 모양이다.

 

사리함 기는 바로 872~873년에 탑을 새로 수리한 다음에 그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본래 9층목탑지에는 7칸 4면을 구성하였던 1면에 8개씩의 주초석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중심 초석 위에는 거대한 돌덩이가 얹혀 있었다.

 

사리함 기는 중심초석에 봉안해 두었던 사리장엄구 안에서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는 1964년에 도굴당하였다가 2년만에 회수하였다. 사리장엄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리장엄구가 안치되어 있었던 사리공(舍利孔)은 정방형으로 이루어졌고, 그 안에서 발견된 사리 외함에는 가로 29.4cm, 세로 현존 24.5cm로 4매에 신장상(神將像) 2구씩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9층목탑을 처음 지을 때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사리 내함은 가로 23.5cm, 세로 22.5cm로 1매는 내외에 신장장을 새기고 나머지 3매는 본 기(記)를 적어 놓은 것이다. 이밖에도 대좌, 은제사리함 부품, 대좌와 옥개 탑신부로 이루어진 금동팔각사리탑, 염주, 경통 등이 함께 수습되었다.

 

이 가운데 ‘중화삼년명사리기(仲和三年銘舍利器)’와 같이 황룡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유물도 섞여있기 때문에 유물들이 모두 9층목탑과 관련된 것인지 확실치 않다. 사리함기는 쌍구체(雙鉤體)로 음각한 것이다. 사리함 하단부가 침식되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현재 하단 한 두자씩 판독되지 않는다.

 

3매의 명문판에서 현재 해독할 수 있는 글자는 모두 900여자이다. 사리함 기를 지은 사람은 박거물(朴居勿)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요극일(姚克一)이다. 전반부는 9층목탑의 창건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 부부인데, 자장이 목탑 건립을 건의하게 된 배경, 탑의 규모, 건립의 의의 순서로 구성되었다. 후반부는 문성왕에서 경문왕대에 이르는 중수(重修) 사실을 기록한 부분이다.

 

여기에는 경문왕의 동생 위홍(魏弘)을 책임자로 하여 목탑을 헐고 새로 지은 내역, 작은 석탑 99개에 각기 사리 하나씩을 넣고, 다라니경 4가지와 경전 1권, 그리고 더불어 경전 위에 사리 1구를 안치하여 철반(鐵盤) 위에 넣어 두었다는 사실, 873년 7월에 9층목탑을 새로 완성하였다는 사실, 11월 25일에 사리함기를 작성한 사실 등이 차례로 적혀 있다.

 

그리고 말미에 9층 목탑을 새로 짓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인 성전(成典)의 관리,도감전(道監典), 속감전(俗監典)에 관계한 승려와 관리들의 명단을 기술하였다. 특히 성전의 관직으로 최고 책임자인 감수성탑사(監脩成塔事)를 비롯하여 상당(上堂), 적위와 청위, 황위가 전하는데, 이것은 통일기 사원성전의 구성과 운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 김유신의 후손들을 신김(新金)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하대에 전통 진골인 김씨들이 김유신의 후손을 차별대우하였던 실상을 반영해주는 측면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황룡사탑의 창건 연기설화와 규모를 알려주는 내용은 『삼국유사』 기록의 신빙성을 확인케 해주어서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