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矗石) 의기(義妓) 논개(論介) 생장향수명비(生長鄕竪命碑)
격변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구차하게 살지 않고 쉽게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은 열사(烈士)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일개 여인이 대의(大義)를 판별하고 죽음을 보기를 마치 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여겼으니 그 열렬함이 어떠했겠는가.
당일의 모습을 상상해 보건대, 늠연(凜然)한 열기가 해와 별처럼 밝았을 것이니 그 장렬함이 어떠했겠는가.
산에는 영지(靈芝 : 영험한 풀)가 있고 물에는 예천(醴泉 : 단맛이 나는 물이 나는 샘)이 있으니 군자에게 어찌 상응하는 것이 없겠는가. 하물며 사람의 명분(名分)과 절의(節義)는 천성(天性)에 근원을 두고 사람의 귀와 눈에 펼쳐짐에 있어서랴.
부끄럽게도 나는 육순의 나이를 먹은 썩은 유자(儒者)로서 끝내 자신을 성취하는 공을 이루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아오고 있는데, 이사람은 세운 공(功)이 많고 의리가 열렬하여 사람들이 즐겨 복종하고 더욱 공경하여 늘 감개(感慨)해하고 있다.
이제 의로운 기생(妓生)이라 수명(竪名)하여 후세에 전하니 평소의 바람을 이룬 것이다. 삼가 글로 적어 표시한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병오년(헌종 12, 1846년) 계추(季秋) 상순에 지현(知縣 : 현령(縣令)과 같은 말) 서원(西原) 정주석(鄭冑錫)이 삼가 짓다. 아들 유학(幼學) 기영(基永)이 삼가 글씨를 쓰다. 비(碑)를 건립하는 일의 유사(有司)는 밀성(密城) 박길인(朴吉仁)이다.
[원문]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
疾風板蕩不苟不易烈士所難而一女子辦別大義視死如歸何」
其烈也想像當日凛然烈氣炳如日星何其壮也山有靈芝水有」
醴泉君子稱尙况人之名節源扵天性布人耳目者乎愧余六旬」
腐儒終无成己之㓛每於如斯人豊功義烈艶服起敬尋常感慨」
今扵義妓竪名傳後以生平趍走下風之願謹以書記識」
崇禎紀元後四丙午季秋上澣知縣西原鄭胄錫 謹識」
子㓜學基永謹書」
碑有司密城朴吉仁」
↑진주 촉석루에 모셔진 의기 논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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