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47

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기사비

■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기사 비 -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임 신문화망(新文化罔)-신문화보(新文化報) ㅣ 2013-01-15 05:50 편집 : 레이웨이[雷威] [핵심 도움말] 얼마 전 집안시(集安市)에서 고구려시대의 중요한 문물이 발견되었다. 집안시 마선촌(麻線村) 5조(五組)의 촌민인 마샤오빈[馬紹彬]이 마선하(麻線河) 안에 있던 돌을 주웠는데, 오래된 다리 아래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강바닥에서 글자가 있는 큰 석판을 발견하였다. 집안 시문 물국(集安市文物局)은 즉시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석판에 대한 전문 감정을 실시하였고, 이 석판이 고구려시대에 세워진 기사비석[記事石碑]인 것으로 확인하였다. ↑작년 여름에 비석이 발견된 이후, 전문가 왕즈민[王志敏]이 이에 대해 연구..

류극서 유적비(柳克恕遺蹟碑) - 전주류씨 2世

고려국정순대부연안부사보문각직제학 전주류공극서유적비 (高麗國正順大夫延安府使寶文閣直提學 全州柳公克恕遺蹟碑) 직제학부군(直提學府君)이 개경(開京)에서 별세하시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汀),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빈(濱) 형제는 천리(千里)를 운구하여 호암(虎巖) 을좌원(乙坐原)에 모시니, 그 곳을 류빈골이라 이름하여 지금까지 육백여년이나 불려왔다. 한때 실전(失傳)하여 성묘를 못하다가 7대손 임란의병장 복기(復起)가 성심으로 찾아 영의정 영경(永慶)이 주선하고, 1606년 병오(丙午) 관찰사 영순(永詢)이 묘전(墓前)에 비를 세웠다. 1899년 기해(己亥) 18대손 필영(必永)이 누락된 부분을 바로잡아 묘하(墓下)에 비를 세웠으나 한문이고 글씨가 마멸되니 이제 신도비(神道碑)의 예(禮)에 ..

신라비[보물제1758호] - 포항 중성리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 --------------------------------------------- 현존 最古 중성리 신라비는 재판 판결문 ▲문화재청은 2월 22일 포항 '중성리 신라비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 1758호로 지정하였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신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내용을 연구ㆍ확정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이 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그 연대가 가장 앞선 비(碑)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신라의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고 문화재청이 발표하였다. 중성리 신라비’는2009년 5월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도로공사 도중 발견, 신고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집안의 광개토태왕 비 - 옮겨진 것이 확실하다.

지안(集安) : 고구려의 400년 도읍지이다. ■ 집안에 있는 광개토태왕 비, 옮겨진 것이 확실하다 역사왜곡을 위해 거대한 태왕비까지 옮긴 중국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비가 우뚝 서있다. 비문에 새겨진 광개토태왕의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줄여서 '호태왕'이라고도 한다. 이 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 비석이다. 비는 1876~80년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당시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

반구대 암각화(盤龜臺岩刻畵)

↑울산 반구대 암각화 3D 입체 이미지 복원 수천년 세월 암벽 뚫고 나오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최소 4점 이상의 새로운 그림이 추가로 발견됐다. 사진은 반구대 암각화 전체를 3D 스캔을 통해 채색한 것이다. [총 75종 200여 점] 사진출처 : busan. com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에 의거 김태권 기자 ktg660@busan.com ------------------------------------------------------------------------------------------------------------------------------------------- ■ 울산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山大谷里盤龜臺岩刻畵) 국보 제285호인 반구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

조선시대 '경천군 송금비' 2기 문화재 지정

YTN|조선시대 '송금비' 2기 문화재 지정 입력 2012.01.11 18:07 6백 년 전 조선시대의 자연보호 정책을 엿볼 수 있는 비석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됩니다. 서울시는 최근 북한산 둘레 길에서 발견돼 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경천군 이해룡 송금물침비' 2기를 3월 중 시 기념물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서울시는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송금비 2기는 조선시대 자연환경 보호 정책의 실례를 방증하는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해룡 송금물침비는 광해군이 1614년 경주 이 씨 이해룡에게 하사한 토지를 무단 침입하거나 경계지역에 있는 소나무를 벌목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이교준 [kyojoon@ytn.co.k..

개성 선죽교 시비(開城善竹橋詩碑)

■ 개성선죽교시비(開城善竹橋詩碑) 표면(表面) 어제(御製) 어필(御筆) 선죽교(善竹橋) 시비(詩碑) 전제(篆題) 도덕(道德)과 정충(精忠)이 만고까지 뻗치니 태산(泰山)같이 높은 절개 포은공(圃隱公)이라네 이면(裏面) 어제(御製) 어필(御筆) 선죽교(善竹橋) 소지(小識) 내가 즉위한 지 16년째 되던 경신년(영조 16, 1740년) 가을 9월 3일 목청전(穆淸殿)을 지나면서 보니 길가에 다리가 있었는데, 이곳이 고려조의 시중(侍中)인 포은(圃隱) 정공(鄭公)이 절개를 지킨 곳이다. 다리에 멈추어서 시를 지어 비석을 세우니, 공의 도덕을 높이고 공의 정충(精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지 이것이 어찌 다만 내가 한때 우연히 감격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또한 우러러 옛날 도(道)를 높이고 충(忠)을 숭상하던 성..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碑)

↑1903년 사진 1984년 사진 ■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碑)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의 비석이다. 414년(장수왕 2)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건립하였다. 높이 6.39m, 넓이 1.5m, 두께 l.53m의 사면석비[四面石碑]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3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비신[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가로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세로선을 그었다. 필체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

옛 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 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비석이다. 이 사진은 1903년에 촬영한 것으로서 조선인이 상투를 털고 망건을 쓰고 팔장을 낀채 눈내린 산야를 배경으로 비의 크 기를 비교하기 위해 서있다. 만주 지안현(輯安縣)에 거주하는 조선인 묘지기 모습이며, 우리의 역사를 가늠할수 있다(높이 22척. 4면에 1,800여자 의 금석문이 세겨져 있다) ------------------------------------------------------------------------------------------------------------------------------------------- [연합뉴스 2004.08.22 10:08:20] 조선 문화유적 ..

고구려 동명왕릉 비.

■고구려 동명왕릉 비(高勾麗 東明王陵 碑) 동명왕릉비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이다. 애초에 동부여의 왕 금와가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나는 하백의 딸인데 이곳으로 쫓겨나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그를 집에다가 거주하게 하였는데 해가 비추었으므로 몸을 끌어다 피했는데도 해가 따라와 비추니 그로 인해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을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애가 알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뛰어나고 영특하였으니 대개 천제의 아들이 해를 타고 내려 왔다고 한다. 7살에 스스로 신이한 지혜로 활을 만들었고 활을 쏘면 반드시 명중하였다. 장성하게 되어 동부여왕의 여러 아들들이 마음속으로 그의 능력을 해치고자 하여 그것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어머니가 그러한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