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기타 金石文

합천군수 이증영 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

야촌(1) 2011. 6. 11. 23:17

■합천군수 이증영 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

◇경남유형문화재 제367호(지정일자 : 2001년 12월 20일)

 

조선 중기에 합천군수(協川郡守)를 지낸 바 있는 이증영(李增榮 ?∼1563)의 본관은 덕산(德山)으로 첨정(僉正)을 지낸 노극신(盧克愼-광주노씨)은 그의 외손(外孫)이다.

 

이 비는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碑)로, 조선 명종 14년(1559)에 세워졌다. 비문을 지은 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이고, 글씨를 쓴 이는 조선시대의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이다.

 

비의 크기는 가로 87cm, 세로 202cm, 폭 17cm이며, 비문은 전체 13행, 각 행 평균 25자로 되어 있다. 비문에는 1554년부터 1558년까지 합천군수를 지낸 이증영이 1554년의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증영은 황기로와 함께 조선 중종 29년(15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명종이 경원대군이었을 때 그의 사부가 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합천군수를 지냈고, 1563년 청주목사로 재직할 때 사망하였다.

 

비석의 글씨를 쓴 황기로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을 뿐 아니라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고까지 불렸던 인물이다.

다그의 글씨 가운데 초서(草書)는 여러 점 남아 있지만 해서(楷書)로 쓴 글씨가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또 비문을 지은 남명 조식은 경의사상(敬義思想)에 입각해 살았던 학자였던 만큼 비문의 내용 또한 믿을 만하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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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陜川郡守 李增榮 遺愛碑文

何人無父母乎。何父母無赤子乎。赤子之喪慈母也。人或有收養之者。父母之哺赤子也。愛有時而間焉。獨我公之爲父母也。愛寧有時而間乎。吾赤子之去慈母也。人焉有收養之者乎。朝不哺則飢。夕不哺則瘁。三不食則委。吾赤子其塡於溝壑乎。呼之不可。借之不得。合百萬而爲羣。人五十而慕焉。長言之于康衢。被之以石焉。我父母者誰。李學士增榮。其人也。吾赤子者誰。陜川郡民也。爲父母者何。陜川郡守也。其來也于于。視我如傷。其去也柴柴。無石以載。我有田疇。公則稼之。我有桑麻。公則衣之。國有重徵。官自應之。民有菜色。推食肉之。興鄕約者。敦倫理也。殖周布者。舒民役也。孤犢觸乳。匪怒而敎。朱門索腴。每達空緘。今者去矣。愛莫從之。獨念去者去而來者來。來日之爲父母者。未有學養子而後來。爲赤子者。亦未有學愛親而後孝者。若此則繼有無窮父母。亦有無窮孝思。唯以思此父母而表遺愛也已。容焉有揀父母之恩乎。皇明嘉靖三十八年己未歲十一月日。陝川郡人立。

 

 

↑합천군수이증영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