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의 금석문 차례
Ⅰ. 춘천의 금석문 1
Ⅱ. 춘천 지역의 주요 금석문 1
1. 申崇謙神道碑 1
2. 朴恒神道碑 1
3. 朴元庇 神道碑 3
4. 朴安具神道碑 4
5. 宋檥神道碑 5
6. 鄭雲湖神道碑 7
7. 柳夢彪神道碑 8
8. 柳潚神道碑 11
9. 金佑明神道碑 14
10. 趙萬永神道碑 14
11. 趙寅永神道碑 17
12. 趙秉龜神道碑 20
13. 趙秉夔神道碑 23
14. 閔泳徽神道碑 24
Ⅰ.춘천의 금석문
금석문은 금속, 암석 등에 새겨놓은 글을 말한다. 춘천 지역에는 많은 양의 금석문이 분포되어 있다. 적게는 개인
의 묘역에 건립한 묘비 부터 크게는 국가 차원에서 세워준 신도비 종류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 역시 다양하다.
이같은 금석문은 새겨놓은 당대의 상황을 그대로 후대에 전해주기 때문에 역사, 문화, 인물 등의 연구에 1차 사료
(史料)가 된다. 여기서는 춘천의 금석문들 중에서 신도비 수준에 속하는 것들만 소개하고 원문을 수록하였다. 일
부는 번역문을 첨가하여 내용의 파악에 도움이 될 수 있다록 하였다.
이 글의 1차 자료는 한림대학교에서 조사 보고한 춘천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수록된 글을 토대로 하였으며, 직
접 답사를 통하여 일부 발견되는 오자(誤字)를 바로 잡았다.
Ⅱ. 춘천 지역의 주요 금석문
1. 申崇謙 神道碑
[소재지] 서면 방동1리
[인 물] 신숭겸(?~927)의 初名은 能山이다.
그의 先代는 전라도 谷城에 살았는데 뒤에 平山으로 관향을 받았다. 한편 그를 光海州人이라고 불렀는
데, 광해주는 지금의 춘천이다. 신숭겸은 태어나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천성이 용맹하였다. 장성하여서
는 왕건의 막하에 있게 되었다.
궁예가 포악한 군주로 변하자 신숭겸 등이 왕건을 내세우고 거사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가 일찍이 고려의
태조와 함께 평산을 지날 적에, 날아가는 세 마리의 기러기 중에 맨 뒤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활로 쏘라는
태조의 분부에 그대로 맞히자 모두들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 후 견훤이 경주를 공격하여 함몰시키고 돌아올 때 태조가 대구에서 그를 맞이하여 결전을 벌이게 되었
다. 태조가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이 代死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신숭겸의 시신을 태조의 것으로 착각하여 그 머리를 창에 꿰어 달아났다. 태조가 본진에 돌
아와 신숭겸의 머리를 匠人에게 명하여 만들고 시신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고 춘천에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현 황 : 신도비는 현재 장절공 묘역의 사당 옆에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신도비의 비명과 서문은 1804년에 평산신씨 후손의 요청에 의하여 金祖淳이 짓고, 후손인 申緯가 썼
으며, 徐邁修가 篆하여 1805년에 세워졌다. 신도비의 내용이 김조순의『鳳皐集』에 있는「高麗太
祖壯節申公神道碑銘의 것과 글자가 다르거나, 생략된 글자가 있다. 여기서는 신도비를 기준으로 삼
았다.
2. 朴恒 神道碑
[소재지] 신북읍 발산리 삼한골
[인 물] 박항『1227년(고종 14)~1281년(충렬왕 7)』은 고려시대 인물로 春川朴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에 이르러 春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
손들이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 휘는 恒, 초명은 東甫이고 자는 革之이며 시호는 文懿이다.
고려 고종 38년(1261) 몽고군이 침입하여 춘천이 함락되었을 때 그가 개성에서 달려와 부모의 시신을 거두
려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시신 300여구를 찾아 예를 다하여 묻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동면 감정2리에 있었던 九峰書院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신도비에 의하면 박항의 아들로 박원굉과 박원비가 있다고 하나, 동시대 무렵 崔瀣가 지은『졸고천백』권
2에는 박항의 아들로 朴光廷(신도비에는 원굉의 4남 중 3남)을 들고 있으니 상고할 만한 일이다.
○현 황 : 박항의 묘는 신북읍 윗샘밭 농민교육원을 지나 삼한 골 입구 왼쪽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1989년에 묘역을 정비하여 구신도비, 신신도비, 신도비명, 묘궁치수기를 단장하였다. 신도비는 申錫覲
이 지었는데 6․25 전란 때에 파손되어 신비를 1970년에 세웠다. 신도비명은 1989년 李春根이 짓고 黃
在國이 篆하였으며 묘궁치수기는 1989년에 춘천박씨 종중에서 세웠다.
<新神道碑>
高麗□□功臣[1면] 春城[2면] 府院君文懿公神[3면] 道碑[4면](篆額)
<전면>
高麗佐命功臣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 春城府院君 贈諡文懿公神道碑 春川朴公諱恒字革之初名東甫
<후면>
新羅始祖王 二十九世景明王, 諱鼎英, 七男, 江南大君彦智公之十一世孫 文懿公, 高麗高宗丁亥生. 登文科, 官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 元勳封春城府院君. 忠烈王辛巳八月乙酉卒, 葬于春川市 北二十里水芝洞 艮坐原, 享年五十五 配大匡夫人, 墓失傳. 有二男, 長元宏 官平章事, 次元庇 官判事. 元宏男安具, 官集賢殿大提學, 元庇男光先光祐光廷光衍, 女適安東權慤. 公 忠孝特立於當世, 才德卓冠於百代, 事見麗史, 名在邑誌. 如無平日實行之有孚, 則那至如此耶. 余聞文懿公之忠孝德行, 未嘗不欽慕矣. 公後孫圭鉉修其譜乘, 以其遺蹟徵余一言, 摭實記于樹阡之石, 以圖不朽, 余不敢以不文辭, 遂爲銘. 曰 : 文懿公之 忠孝兩全, 百世遠芳 回仰賢圍. 山高水長 有斐有新, 永懷不忘
司憲大夫行弘文館直提學知製敎 申錫覲撰 歲祀 十月一日
檀紀四三○三年庚戌十月日 謹具 春川朴氏 宗中
3. 朴元庇 神道碑
[소재지] 북산면 청평1리 청평골
[인 물] 박원비는 춘천 박씨의 시조로 알려진 박항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
이 禮曹判事에 이르렀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고, 형제와는 우애가 깊었으며 충효를 겸전한 인
물이었다. 그에게는 4남 1녀가 있었다.
○현 황 : 청평1리 청평골 입구 선착장 건너편 언덕에 있다. 묘역 입구에 두 조각이 났던 비를 다시 세운 구신도비가
있으며 묘앞에는 신신도비가 있다. 구신도비는 숭정 기원 후에 세운 것이므로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이
가며 신신도비는 1970년에 세운 것이다. 1989년에 묘역 정비하고 묘역 입구에「判事公墓所入口」라
표시하여 놓았다.
<舊 神道碑>
高麗判事[1면] 朴[2면] 公神道碑[3면](篆額)
<1면>
判事春川朴公神道碑
公諱元庇, 新羅始祖王 二十八代孫 景明王之七子, 江南大君諱彦智, 於公爲十一代祖也. 考諱恒諡文懿, 官贊成 春城府院君也. 公於忠烈
<2면>
朝, 登文科, 官判事, 配順興安氏 興寧府院君質齋公文凱之女, 四男一
<3면>
女, 長光先官直講, 二光祐生員, 三光廷平章事, 四光衍陰德不仕, 女適安東權慤公. 墓在春川北山淸平洞酉坐原. 不肖后孫昌駿, 謹修譜乘, 略記遺蹟于樹廷之石.
<4면>
崇禎紀元后□□年七月日立
<新 神道碑>
高麗禮曹判[1면] 事春[2면] 川朴公神[3면] 道碑[4면](篆額)
<전면>
禮曹判事春川朴公元庇 神道碑(配貞夫人順興安氏)
<후면>
禮曹判事公諱元庇, 高麗之人也. 好善好德, 孝事父母, 善事兄弟, 忠孝兼全. 忠烈王朝, 登文科, 官得至於公. 吾朴源根而千有餘年. 新羅始祖王 二十八代孫 景明王之七子 江南大君諱彦智, 於公爲十代祖也. 考諱恒, 佐命功臣 春城府院君. 公有兄弟, 兄諱元宏 高麗政丞, 墓在麒麟下馬路. 公配順興安氏 興寧府院君質齋公文凱之女. 生四男一女, 長男光先直講, 二男光祐生員, 三男光廷平章事, 四男光衍陰德不仕, 女適安東人權慤公. 庚寅動亂碑文混破, 後孫圭鉉略記. 墓在春川北山淸平寺入口慶雲山, 酉坐卯向.
歲祀四三○三年庚戌十月日 謹具 春川朴氏 宗中
4. 朴安具 神道碑
[소재지] 신북읍 천전1리
[인 물] 박안구는 고려시대 인물로 조부는 恒, 부는 元宏이다. 元宏은 벼슬이 平長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居
實은 司僕寺正을 지냈다.
○현 황 : 신도비는 춘천공원묘지 아래 강원대 축산 대 축사 부근 나지막한 산 밑에있다.『춘천읍지』에 의하면 신
도비를 沈厚澤이 지었다고 하였다. 부 朴元宏 묘는 인제군 麒麟面 下馬路에 있다.
高麗大提學[전면] 朴公神道碑[후면](篆額)
<전면>
集賢殿大提學春川朴公神道碑
公諱安具, 江南大君彦智之後也. 祖諱恒, 官贊成事春城府院君. 諡文懿公. 考諱元宏, 官平長事. 公有一男 曰居實, 官司僕寺正. 有一孫 曰義公, 官兵判. 孫女有三, 長適慶州李齊賢, 次開城王琇, 次文化柳鎭.
<후면>
公忠國孝親, 無憾而卒. 葬于春川府北 將官臺艮坐. 後孫圭鉉謹修 謹牒, 祖述舊迹, 以爲後日不忘之表云.
崇禎紀元後五辛酉 七月 日 立. 西紀一九七三年 三月 日 再 修立. 春川朴氏一同
5. 宋檥 神道碑
[소재지] 사북면 송암리
[인 물] 송의는 어려서부터 큰 뜻을 지니고 文을 버리고 武를 택하였다. 兵曹佐郞, 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結城․蔚珍․价川군수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파천하여 청천강에 이르렀으
나 배를 구하지 못해 애태워하자, 개천군수로 재직 중이던 그는 분연히 강을 헤엄쳐 건너 배를 구해 왔
다. 이 공으로 임란 직후 原從功臣에 봉해졌다.
○현 황 : 신도비는 송암리 골짜기에 있다. 담장 안에 비각을 건립하여 신도비를 보호하고 있고,「价川郡守神道
碑閣建立記念碑」가 신도비각 옆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1․ 4․ 2․ 3면의 순으로 뒤바뀌어 있는 상태
이다. 신도비각의 뒷산에는 묘소와 묘비가 있는데, 구비가 너무 마모되어 묻고 새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1면>
扈聖原從一等功臣通政大夫 行价川郡守宋檥 神道碑
<2면>
士而無論文武, 非喬木世臣, 必有先達之名臣碩輔, 引而進之, 然後勳業著于時. 亦必有後進之聞人名士, 揄而揚之, 然後功烈垂于世. 竊觀夫宣廟龍蛇之變, 晉州死節之臣 幾百人, 龍灣扈蹕之士 亦不下數百, 而赫赫最著者十數人. 外皆瀍沒無稱, 世榮甚恨. 嘗欲爬羅蒐剔, 略爲立傳, 而見聞諛淺, 而有志未就. 晩而得一人焉, 卽故价川郡守 宋公諱檥也. 公之八世孫文郁, 爲世榮, 道其事甚詳. 公 字正叔, 鎭川人, 系新羅大阿飡 諱舜恭. 其後 高麗平章事 諱仁封 鎭川伯, 寔爲鎭宋之鼻祖, 而七傳至門下評理禮部尙書 諱匡輔, 義不仕我朝, 世稱麗季完節, 是公五世祖也. 高祖, 甲寅謁聖文科, 府使 兵曹判書, 諱盤. 曾祖 折衝護君 諱環貞, 祖忠左衛司直 諱佸. 考護軍 贈兵曹參判 諱益善, 妣貞夫人 淸州韓氏 左郞 敬智之女. 公生而俶儻有大志, 少而文藝知名, 而舍文就武, 第選備郞. 歷兵曹正左郞 司憲府監察, 出而典結城蔚珍价川三邑, 皆有去思碑. 萬曆壬辰夏, 倭酋平行長等 四萬兵, 入寇釜山東萊, 相繼而汲. 及鳥嶺官軍敗報聞, 上決意去邠. 四月晦夜半, 奉廟社, 率諸官, 出門, 臣僚衛卒皆潰, 從者才數十人. 五月駕向龍灣, 到淸天江, 江無船, 船泊越岸, 而船工怯倭不肯艤. 公憤然解衣, 啣劍亂遊而濟, 卽一揮斬工, 佩其首, 刺船而還, 左右從臣 莫不灑然動色. 於是 奉御利涉, 得低灣館. 未幾 從白沙李相公 乞靈天朝, 終始周旋, 得允竣事而歸. 蓋宣廟中興, 公實有力焉. 亂定, 錄公原從一等勳, 授公忠武衛, 公固辭不受. 請推恩, 贈先君職, 上允之. 特贈護軍公 兵曹參判. 公以退老于春川治之西以終, 葬于北內松岩 枕酉之原. 嗚呼 人之大節, 莫善於忠孝, 而當兵燹搶攘之際, 人莫不全躬顧望, 而屢日羈勒, 不避跋涉, 萬里行李, 不憚苦勞, 則忠何如也. 及其丹書勘勳而貧天 爲功規圖資級者, 亦或有之, 而視若脫屣. 固請推恩, 孝何如也. 宜其名垂竹帛, 功勒彛鼎, 而不幸 後承竊微, 國乘殘缺, 嘗未得後進揄揚. 吁 可惜也已. 公娶豊壤趙司直思訥之女, 擧二男. 長宣傳官榮門, 次宣敎郞興門, 其後內外雲仍, 迨二百人. 今不能盡錄, 而八世
<3면>
孫 文郁文八. 九世孫 在璿在珪在華在玉在洙. 十一世孫 永觀 皆聰明俊秀, 文藝顯著, 豈公之潛光幽德, 蔚未彰, 而將大其後者耶. 雖然世榮於是, 狀公忠節之臣, 萬曆壬辰 當島夷之難, 扈駕向龍灣 抵薩水(卽平安南道 安州淸州江) 船泊越岸, 而舟工怯於賊威, 不肯護蹕. 公乃憤義, 啣劒憑流而渡, 斬工回舟, 奉駕護濟. 及請救皇朝, 時佐幕白沙李公恒福 事旣蒙允而還, 蓋宣廟中興 終始周旋, 公實有力也. 難定後, 萬曆三十三年四月初五日, 特命都承旨. 象村申欽 錄公扈聖原從一等勳 加通政 賜功臣錄一卷. 護軍公之贈秩依一等勳 父母封爵之敎書故也. 配淑夫人 豊壤趙氏, 考司直思訥 參議開平之后. 生二男. 長榮門 娶副正 平海黃應曇女, 有二男四女. 長赫, 次宣敎郞朋, 女適參奉李翊 士人朴文晶 崔泰貞 鄭宗周. 次興門 娶淸州慶說女, 有三男四女. 長珏, 次工曹參議喆三兢, 女適士人朴而栗
<4면>
李元卨 金禹鼎 縣令李烴. 內外曾玄, 多不盡錄. 嗚呼 公之貞忠偉蹟, 如是卓越也, 而未試大用, 官止郡守, 抑何歟. 竊嘗聞之, 成功之下 其實難居. 當時如李白沙李忠武諸公, 竄逐相繼, 而公獨退老于春川, 明哲以之. 蓋有先見之明, 而勇退歟. 然而未蒙朝家之褒揚, 傳來之文獻不多, 而世代寢遠, 爲子孫慕先之誠, 未有述焉, 則可承歎哉. 玆用摭旣往行遺蹟. 列右以俟立言之君子云告
生員 朴世榮 謹狀 十代孫 翊鉉 謹識
檀紀四千三百十五年(1972) 壬戌 九月 日
鎭川宋氏 春川地區大宗會 會長 庭植 謹書
6. 鄭雲湖 神道碑
[소재지] 사북면 송암리 버들 골
[인 물] 정운호『1563년(명종 18)~1639년(인조 17)』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 檢閱, 典翰, 待敎, 敎理 등의 청
직을 두루 역임하고 司諫院 大司諫, 司憲府 大司成에까지 올랐다. 溪谷 張維가, 鄭雲湖와 그의 조카가
중국에 사행으로 다녀온 일을 칭찬한 것으로 보면, 그는 선조~인조 년간에 활약하던 인물이다.
병자호란 후에 일시 春川에 은거하였으나 이내 다시 상경하여 漢城府 右尹을 맡아 전후 복구에 진력하였
다. 그는 매일 밤 出師表나 正氣歌를 낭송하며 청나라에 대한 분함을 토로하다가 이것이 병이 되어 죽었
다.
○현 황 : 신도비는 후손 鄭圭綜이 쓴 것을 1981년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신도비가 있는 산 언 덕에 있다.
光州鄭氏[1면] 臥濱[2면] 公雲湖神[3면] 道碑[4면](篆額)
<1면>
贈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經筵春秋館事 弘文館大提學 世子貳師 行嘉善大夫 刑曹參判 兼 同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 五衛都總府副總管 臥濱鄭先生 神道碑銘 幷序.
呂東萊曰 登唐虞之廷者, 擧目皆德政, 陪洙泗之席者, 入耳皆德音. 維我從先祖臥濱先生, 以昭陽處士醒齋先生爲祖若考, 以和谷忠敏公正字贈贊成公 爲伯仲氏. 以天縱之資稟, 兼有染乎庭訓, 就塾受學, 孜孜讀誦, 至忘寢食. 成童前後, 學已頭腦, 而長益講究性理諸書, 自天人性命之奧, 至陰陽淑慝之微, 罔不精通, 兼善功令, 檀譽詞壇, 穆陵戊子中生員, 以蔭補翊衛司洗馬. 先生曰不若決大科, 以通仕路光海. 辛亥一擧, 闡巍科, 分隸槐院以正字 歷數淸顯, 司諫院則正言司諫大司諫, 司憲府則持平掌令執義, 吏刑曺則司藝司成大司成, 藝文官則檢閱待敎, 弘文館則應敎敎理典翰, 承政院則同副承旨都承旨, 以謝恩使航海朝天, 特蒙禮遇, 竣事東還. 先生之姪子壺亭先生, 踵先生而行. 張谿谷極讚之曰, 滄海萬里, 颶風鯨鱷, 人皆視之以萬死一生, 而公之兄弟叔姪, 一往再往, 坦然若就康莊. 了無幾微賢勞之色, 便作一家事. 陽侯風伯感其忠而助之云云. 丙丁亂後, 無意仕進, 屛居于春川庄舍, 輒有召命, 暫進復退, 漢城亂後疲弊, 特除左尹, 不得已出肅, 去弊興化, 民生樂業. 急流勇退, 每於中夜 朗誦出師表正氣歌等篇, 以瀉壹鬱之懷, 憂憤成疾, 己卯五月十二日卒. 享年七十七. 訃聞, 自上輟朝三日, 遣禮曺正
<2면>
郞李惟達致祭. 略曰, 世綠之家, 有父有兄, 飭躬砥行, 不墜家聲. 早從蔭補, 晩有科進, 凡所敭歷, 以勤以愼. 及予嗣服, 倉卒執酌, 前後酬勞, 秩之亞卿. 遂副京尹, 以肅淸白. 請退屬耳, 夜訃有盡云云. 葬于舍北面古呑後山庚原. 先生諱雲湖而臥濱是自號也. 光州之鄭, 以高麗贊成事諱臣扈爲上祖. 開城尹諱允孚, 以體察使留鎭羅州, 設倉榮山以便轉漕. 東伯諱龜晉文科, 入我祖歷踐華要, 聲望鬱蔚, 贈禮曺判書. 掌令諱之夏, 以學行薦, 累徵不起, 贈吏曺參議, 於先生五世以上 高祖諱讚禹, 郡守贈左贊成. 贈祖諱純仁, 縣監贈左承旨. 祖諱褧, 進士贈吏曺參判. 考醒齋諱以周, 文科掌令, 贈領議政, 策勳光山府院君. 妣東萊鄭氏副司猛應瑞女. 配慶州李氏副司果純仁女. 墓芳洞後山卯園, 繼配載寧姜氏允
<3면>
女. 墓祔左. 男井源同中樞. 圭源通德郞. 女適內禁衛將李暹, 府使洪錫禹. 長房男瑜生員, 琦璜 瑞. 女適李誾 李興遠 李汝楨 權載萬 李澤. 次房男璘. 內外曾玄, 蕃不盡錄. 蓋先生誠孝根天, 事父母盡志物, 夏日扇枕, 冬夜燃突. 醒齋先生有疾不解帶. 不交睫, 嘗糞驗症, 禱天願代, 靡誠不遠. 竟遭艱, 擗踊號哭, 屢絶而甦, 啜粥行素, 幾乎傷生. 事伯氏禾谷先生, 如事父. 晨夕候問, 凡事必稟而行. 仲氏贊成公天逝, 淚不乾於挽席之間. 壬辰奉母夫人, 避倭于湖西溫陽娣婿鄭晦家, 而甲午夏丁母夫人憂, 攀號屢絶. 襄奉于淸州梧邱臺, 日夜望南而哭, 如不欲生. 亂已出仕, 所在盡職, 而時當昏朝, 奸兇用事, 彛倫斁絶, 退歸鄕第, 與世不關, 悠自適. 仁廟改王, 托契昭融, 歷踐中外, 聲望靄蔚. 丙丁亂後, 無意仕進, 歸臥田園. 召命屢至, 詣闕何敢爲. 其在從裔, 又向敢不委, 謹察平日言行之槪要, 撰次如右, 揭之以銘曰,
竊惟我鄭, 系緖燀爀, 光山鉅閥, 靑丘名族, 越自勝國, 我朝初服. 名碩繼承, 根基確立. 積慶累仁, 先生鐘毓, 忠敏爲兄, 敏忠爲姪. 早從蔭補, 晩闡科甲, 歷踐華要, 所在盡職. 時當昏朝, 彛倫斁絶, 歸臥鄕園, 悠然自適. 反正之初, 魚水歡得, 航海朝天, 冒險盡絶. 丙丁亂後, 恨讐未復, 仍而成疾, 遽然易簀, 訃聞輟朝, 賜祭贈秩. 綠水洋洋, 靑山屹屹, 山寧可夷, 水寧可涸. 先生之風, 永世不沫.
歲己酉 十月晦日 從後孫 圭綜 謹撰
7. 柳夢彪 神道碑
[소재지] 남면 가정2리
[인 물] 유몽표(1543년[중종 38]~1616년[광해군 8])는 主簿를 역임한 樘의 仲子이자 於于堂 夢寅의 형이다.
그의 자는 應炳이다. 天文, 卜筮, 詩學, 道家 등 諸子百家에 두루 능통하였다. 임진왜란 때 楊州로 피난
갔다가 왜을 만나 왜병이 찌르려 하자 자신과 동생 夢熊의 몸으로 어머니를 덮어 모친을 구하였으나 동
생은 죽고 蒙彪는 거의 죽었다가 소생하였다. 60세 이후에 童蒙敎官, 典獄署 主簿, 免山縣監, 振威縣
監 등을 역임하다가 나이 70이 되어 중앙에 들어와 典籍, 繕工監 僉正, 司贍寺 正이 되었다.
○현 황 : 凜然室 옆 柳潚의 신도비 우측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柳夢寅이 썼다. 묘소는 柯亭里 壽樂
山 중턱에있다. 묘소에는「司贍寺 副正 贈領議政 高興柳公 諱夢彪之墓, 配貞敬夫人 固城李氏之
墓, 十二代孫 濟元 謹刻丙申仲春」이라는 묘표가 있다. 신도비는 원래 가정리 수락산 묘소 아래에
있었던 것을 이곳에다 옮겨 놓은 것이다. 通訓大夫司[1면] 贍寺副[2면] 正柳公神道[3면] 碑銘[4면]
(篆額)
<1면>
贈純忠補祚積德功臣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監事世子師 興城府院君 行通訓大夫 司贍寺副正 柳公神道碑銘 幷書.
弟 嘉義大夫吏曹參判 兼 藝文館提學 夢寅 撰
維我高興柳氏, 自高麗忠烈王時顯, 未究其派源何所也. 始興陽有五部曲, 高興其一也. 高興有楊柳洞, 柳氏舊址也. 聞之古老, 以所居多柳, 故因姓焉. 又曰柳氏居是地, 欲繁其姓, 多種之柳也, 未知是否. 始祖諱庇, 爲麗朝丞相, 佐瀋王, 入中國, 元世祖改賜名淸臣, 命詞臣詩之. 淸臣在瀋, 不復還本國, 本國諡之曰 英密公. 其遺像二, 來東, 皆趙松雪孟頫所撰而書之者. 其在中國 有二子, 今瀋陽有碑, 悉記其時從王諸臣, 東寧衛多柳姓人, 豈其裔耶. 始在東國, 有一子諱有奇, 高麗史稱攸基. 有奇攸基 方音同, 亦未知孰是. 是生侍中諱濯, 麗季名臣也. 其鎭全羅, 有威惠. 倭寇順天長生浦, 濯赴援, 倭望風潰, 軍士悅之, 作動動曲以美之, 語在高麗樂誌. 恭愍王 爲魯國大長公主, 大起影殿, 民苦之, 濯諫而死, 語在高麗史 及陽村權近碑文. 入我朝, 康獻大王夢, 濯爲其子求官, 覺而悲之, 追贈濯忠正公. 求其子濕官之, 濕十五用文中第, 官至典書. 以中軍摠制 鏖對馬島 有佐命勳, 不愜, 乃老退興陽別墅, 口不言朝廷事, 餘二十年卒. 葬高山縣月老谷, 諡襄靖公. 是生諱漬, 漬生諱好池, 幼時與飛將南怡, 角勇力, 互勝負. 漬預知怡不令, 終引好池, 歸高興, 卒葬菜谷. 好池還京師, 再中武第, 官至珍島郡守. 郡有妖病民,
好池塑石立山, 楸妖遂遁, 後有文人李胃謬, 比之金同者流, 文載續東文選. 好池異人也, 郡有馳毬場, 在絶壁, 人馬所不着, 邑民逮今異之, 彼竪儒 何足以知之. 葬在摠制墓下. 好池生諱依 儒士也. 嘗犯夜如李廣辱廢亭, 遂發憤, 棄文捷武科, 官至判官. 依善草隸, 有傳家墨跡. 楊逢萊士彦 錿錿稱賞謂得羲之正宗, 弁東國, 葬在摠制墓上. 生司諫諱忠寬, 卽公大王父也. 富氣槪結髮 爲申判書公濟娚, 衣冠華靚, 判書柳公辰仝, 亦弱冠好任俠, 熟視司諫, 推之潢汚中. 司諫笑而易服, 不示色. 辰仝握其手曰 : 始吾視子貌, 嘗子意氣, 子可交也. 遂與爲莫逆交. 及金安老專國, 張深勢焰, 無不焦灼, 司諫於公濟喪, 對弔客, 奮臂數安老, 滿座稍稍引去. 司諫文武材, 腹藁大庭策, 捷文科, 又善射, 先中命處, 世皆服. 由基飛衛不多也, 爲養出牧錦山, 大夫人年已耋, 百味俱爽, 箸不下珍羞. 司諫請所欲, 大夫人曰 向見耘者在野, 夫炊黃梁, 婦洗蘿蔔, 欲是之嘗. 司諫與內下庭, 手自炊黃梁, 擇蘿蔔 進之. 邑民聞之 咸熏其孝. 卒贈都承旨. 生諱樘 寔公考也, 官至主簿, 贈吏曹判書興瀛君. 子夢寅推榮之, 以也. 考有詩名, 洪相國暹騷家哲匠, 誠推之 善學社. 又工書, 楷草俱絶倫, 繼家風. 孝友出天, 父母別與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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獲田土饒甚, 可以不待祿, 周一生, 悉破券分同腹. 居喪不口菜果, 哀禮兩盡. 每月朔十五日 備酒食, 參家廟如禮, 一生不替. 不幸不第, 補蔭, 嘗督忠淸道時 興郵吏 卒安之, 有遺愛, 至涕涕者. 葬楊州洪福山筆峰之麓, 司諫墓趾. 妣祔其左, 妣慶基殿參奉閔褘之女, 其系驪興也. 亦夢寅追榮, 由淑人, 奉貞夫人諱文宰孝悅之孫, 任宰泮之子也. 泮能文章, 中進士魁, 有名. 妻朴氏元勳朴元宗之弟, 有閨則. 妣之容貌行誼, 皆類朴氏, 儀範整肅, 非禮不行. 家有祀事, 親操刀几, 雖祁寒達署不倦, 抵八十猶然. 子婦請止之, 不從曰 吾心安焉. 早寡, 誨男子殫義方, 資衣糧, 遊學四方, 不使家中錢穀布帛, 掛齒牙. 敎一女 洪夫人, 學邃博盡百家書, 家國有大事, 一門就咨決焉. 時人譬之曹大家. 兄弟凡五. 公卽第二也. 諱夢彪 字應炳, 嘉靖癸卯年生. 生聰敏, 學早詣, 始受業於宋瓊兪任所, 皆碩士聞人也. 及長 博無不徹, 諸子百氏 天文卜筮 詩學道家 蒐獵殆盡, 非獨四書六經諸聖賢書, 而已覽一過, 平生貯腹臆不忘也. 萬歷壬辰, 倭寇犯長安, 公奉老母, 避寇楊州墓山. 寇卒至, 挺劍枝母. 公與弟夢熊, 以身翼母, 俱受鋒, 夢熊死之. 刃公脅創, 深見腑, 死而甦, 母得全. 難定, 朝家旌孝烈, 以夢熊死. 故旌其閭. 公活, 故旌不及, 孝則一也. 薄命不成名. 六十後, 以童蒙敎官, 訓誨精至, 當世稱得其人. 陞拜典獄
主簿, 轉司諫, 未幾濟用監 災延厥司下吏罷, 人多寃之. 逮今上朝 復官, 監免山縣, 因平山山城繕築, 勞陞令振威懸. 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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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密邇上都, 南甸通衢. 公年臨七十, 常苦折腰. 行官符吏部曰 國典七十, 例不許리民, 遂解印歸. 當時冒法者 多嫌之. 入朝爲典簿, 俄陞繕工僉正 司贍副正, 兩司權革 正僉副 寔長官也. 萬曆四十四年丙辰 十一月 以壽終于家. 得年七十四. 因弈活爲原從一等 推勳 及潚錄享難公信 推封至領議政 純忠補祚功臣 興城府院君, 加封夫人貞敬夫人. 越明年丁巳. 葬之春川南山外寺谷, 壬座丙向之原. 公慈詳仁愛, 人有饑寒, 愁然凜然, 如己凍餒之. 煦煦護養若不及. 不以己貧葖嗇之. 從弟李君錫 窮而死, 其孤歲三十無室. 公之爲寃, 出其財婚, 其地士族人, 遠近欽其仁. 夫人李氏出鐵城遠祖嵒, 以書隸入妙, 鳴一國, 國多遺蹟. 其後有參判李陸者, 號靑坡居士. 文章高一世, 有文集 行于世. 至參判澤 夫人之考也. 栗谷李珥銘其碑, 其世系子孫 俱在其文集. 夫人明達 猶善男子, 辦家事 皆得宜, 國事得失 俱合於理, 御群下猶子女, 郡下亦父母視. 壬辰之亂 流轉西塞, 擧家寒餓, 夫人孼族柳師從之女, 喪二親, 行乞到門, 夫人畜於家, 衣食之. 及可笄, 具資財嫁之. 夢見師從衣紫長衣, 百拜于庭以謝之 覺而說其夢曰, 昨夢師從來, 謝以我活其女也. 但身着紫長衣, 長衣女服也. 何其異也. 其女在傍, 放聲哭曰, 吾父死亂離, 斂無衣, 吾母脫其衣衣之, 冥中所着 必其衣也. 聞之者 皆下涕曰, 公與夫人仁愛 俱出性, 能宇人之孤, 而嫁聚之, 使門中怨曠者, 有歸宜. 夫積善餘慶, 致三子二女之俱榮貴 享天綠也. 及公卒, 夫人執喪如禮, 不以老少懈. 旣服闋, 時年七十六. 長子拜大司諫, 次子拜承旨, 季子爲弘文校理. 夫人謂其侄曰 時事多虞, 人各有是非, 三子俱忝右職非願也. 老婦旣終喪制, 欲從此逝矣. 是歲萬曆四十七年二月 夫人卒, 四月祔葬領相墓. 長男潚 嘉善大夫副提學, 其次男弈 再中文科及第, 階通政爲承旨. 其次女 適文科正郞 尹昈, 其次男活 文科吏曹正郞, 其次女 適大司諫柳慶宗. 潚有一女三男, 女適察訪宋榮業. 男一曰于墷 平陵察訪, 二曰于垾 進士, 三曰于垶 幼. 側室有女, 適士人崔衍. 弈生一男 幼, 生四五歲 能屬文. 餘女幼. 尹昈生二男一女, 長曰振海 幼學, 次曰收海 進士, 皆夭, 女幼. 活生數子女, 皆幼. 欹歟嘉哉. 潚弈活兄弟三人, 悉以一世名臣, 文章冠時. 三家接藟而居, 奉兩親各磬誠孝, 每日吉辰, 良盛盤羞. 開壽宴, 張優樂以饗之, 都城大夫士俱慶者. 罕有與倫, 一國榮之. 吁 凡人有才, 有不得自其身施, 必發之於子孫, 大闡其慶福, 天之報之, 雖似不速而遲, 身與子孫, 奚擇焉. 況假之壽, 於其身親見之哉. 獨恨夫一生貧悴, 未展其所學, 受諸子榮饗, 曾未滿周星, 吾一家父子兄弟之痛, 曷有其已, 嗚呼痛哉. 淑弈活要夢寅銘神道, 文者 公物也, 其何以一家私焉. 古人爲文, 識父母兄
弟之榮者, 何限, 謹拭淚而爲之銘曰 :
中世之士 勡掠經史, 書不盈箱 靑雲萬里. 公破萬券 悉藏皮裡, 纖巨羅穿 是非義理. 商確千古 懇懇詢詢, 多士側耳 滿廳皆新. 向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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兼愛 於我何惡. 言無悖出 縳市何怒. 所畜者閱 所施何約. 十室三品 名位何薄. 於身雖晩 于後則速. 一家五人 簪笏如簇. 歲時伏臘 百牢以榮, 華筵秩秩 滿座公卿. 一朝永辭 位冠百辟, 人濡染 曰莫如學. 觀我領相 惟德是食, 春之山高 江水鏡淨. 卜葬新兆, 萬年維永.謹按公之碑銘, 出於弟手. 而當國朝更化之辰, 其弟死於非命, 竟不得鑴主者也. 夫世有汚隆, 物有豊悴, 而有長存而不死者, 銘也. 第人有可紀之蹟, 而不傳爲仁人所惻慘, 況吾先祖偉跡之可以閱千秋而不磨者, 收藏其文, 而不顯揚于世, 豈非後昆之罪也哉. 濟卨等, 庸是之懼, 乃出宗財, 刻而竪之, 以宣其臺鬱於數百載之下, 儻使觀者, 知公之爲春柳中興之祖也云爾.公歿後, 三百有四十年己亥十月 日 十二代孫 濟卨 追識, 濟觀 敬書.
8. 柳潚 神道碑
[소재지] 남면 가정2리
[인 물] 유숙(1564년[명종 19]~1636년[인조 14])은 柳夢彪의 아들이다.
자는 英叔, 호는 醉吃. 1597년 문과에 급제하여 承文院 正字를 역임하고 湖堂에 뽑혔다. 이후 修撰, 校
理, 典翰, 正言, 執義 등직을 역임하고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후 成均館 大司成, 副提學에까지
올랐다.
그는 동생들과 함께 부모를 극진히 모셔 당시에 효자로 명성이 높았다. 1613년 桐溪 鄭瑾이 영창대군을
죽인 江華府事 鄭沆을 베자는 상소문의 초본을 그에게 보이자 그는 일부분을 고쳐주면서 그대로 상소하
였다. 이 일로 그는 집권 당로자인 大北派의 영수 李爾瞻의 미움을 샀다.
1621년에 아우 柳活, 李明漢 등과 더불어 이이첨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되었
는데 영남 선비 700여명이 궐기하여 후원하였으므로 멸족의 화는 면하고 귀양을 가는데 그쳤다.
1635년에 兵曹參判에 제수되었으나 老病을 칭탁하고 春川郡 柯亭里에 은거하였다.
○현 황 : 凜然室 옆 柳夢彪의 신도비 좌측에 세워져 있다. 묘소는 壽樂山 중턱에 있다.
嘉善大夫弘文館[1면] 副提學[2면] 柳公神道碑銘[3면](篆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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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五衛都摠府副摠管 弘文館大提學 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醉吃柳公神道碑銘 幷序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春秋館事 原任奎章閣提學 李徽之 撰
十代孫 心錫 敬書
十一代孫 濟東 謹箋
公諱潚, 字淵叔, 興陽人. 興陽之柳, 出自高麗左政丞英密公諱淸臣. 世有名公, 克紹厥美. 入我朝 諱濕, 吏曹典書, 佐太宗策勳 諡襄靖, 於公爲七代祖也. 曾祖諱忠寬, 司諫院司諫, 贈承政院都承旨. 祖諱樘 濟用監主簿, 贈吏曹判書. 考諱夢彪 司瞻寺副正 贈議政府領議政. 壬辰之亂, 奉母避寇楊州, 賊至以劍枝母, 身以翼母, 死而復蘇, 母亦得全, 人以爲誠孝所感. 配固城李氏 禮曹參判 諱澤之女, 以嘉靖甲子六月二十日生. 公天姿端凝, 自幼力學不怠, 未弱冠, 已成大儒. 戊子中生員, 丁酉捷庭試, 補承文院. 己亥薦授藝文館, 尋賜暇湖堂, 參下參是選 極望也. 與淸陰金公尙憲 鶴谷洪公端鳳 與焉, 時論翕然. 歷弘文館修撰校理典翰, 除司諫院正言, 陞獻納, 遷司憲府執義. 外爲長興府使 海美縣監. 長以乞養 海以左遷, 以正見忤於當路也. 左海三年, 棄歸礪山. 有明農之意. 戊申除江原道都事, 遞拜校理, 以儐使書狀官, 如灣上, 淸陰同膺, 亦淸選也. 庚戌遷侍講院弼善, 兼三字啣, 以繡衣按廉畿甸, 復拜校理. 辛亥魁文臣庭試, 轉應敎. 壬子陞通政, 拜承政院同副承旨, 序陞左承旨. 癸丑拜禮曹參議, 遞拜司諫院大司諫, 俄復入承政院, 公與桐溪鄭公蘊友善, 時永昌幽在江華, 府使鄭沆 希光海旨殺之, 桐溪陳疏, 欲伸永昌之寃, 仍請斬鄭沆, 袖疏草示. 公稱其直, 而又曰 假手二字太甚, 改以見欺, 何如? 桐溪從之. 爾瞻聞此, 嗾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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諫院劾公. 公作詩, 謝人曰 ; 袖裏彈文借我閑, 閉門深卷伴春山. 鑪烟散盡蒲團靜, 滿壑松聲午夢間. 爾瞻自號曰觀松, 松聲指爾瞻. 由是爾瞻之嫉公益深. 乙卯由承旨, 轉成均館大司成, 陞嘉善, 弘文館副提學 兼 同知經筵春秋館事. 丙辰冬 丁外艱, 居廬終制, 除大司諫, 遞拜五衛都摠府副摠管. 己未春, 又丁內艱, 時公年迫六旬, 而自病時, 親執湯藥, 衣不解帶. 及喪哀毁如前, 復廬墓, 辛酉制終, 付軍啣, 以製述官隨天使, 遊濟天亭. 天使愛公文雅, 敬禮之, 尋以諫長陪祭宗廟. 歸路光海, 設雜戱以導, 公抗爭再啓, 光海不省. 公謂弟承旨弈曰 : 疇昔二親在堂, 此身不可危, 今則喪制已畢, 又當言官素志可暴, 豈忍坐視宗國之淪亡, 而任被賊臣之跳踉耶. 遂上箚矑列, 爾瞻專權植黨, 誣君誤國之罪惡, 仍與白洲李公明漢 讓西李公光胤, 合辭連啓. 幷論偉卿認纘男鼎吉四凶同惡之狀. 時諸賊陷諛, 光海 幽閉母后. 公之意雖不能明斥, 而其忠憤蓋在是矣. 爾瞻構執公仇仇, 幾陷罔測, 而適有嶺儒七百餘人, 繼以懲討爾瞻, 未遑逞毒, 公幸而免焉. 自此杜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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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 不語時事, 時時仰屋欷欷而已. 及仁廟改玉, 坐其季父罪死謫淸河. 乙亥上思公直聲, 特放 除同知中樞府事, 遷兵曹參判, 公已老矣, 上章乞免, 僑居湖上. 丙子六月二十一日, 以暑疾卒, 享年七十三. 朝廷賻弔如儀, 八月葬于春川寺洞子坐之原. 夫人仁川蔡氏 獻納無逸之曾孫, 忠義衛天經之女, 甚有婦德, 後公十五年卒, 祔葬焉. 三男一女. 曰于墷 司僕寺主簿, 曰于垾 進士, 曰于垶 生員, 女適察訪宋榮業. 子孫在別錄. 公偉人也, 以端雅之性, 兼凝重之質, 以剛直之氣, 資明透之識, 平居言笑不苟, 端坐披閱書史. 待子弟, 嚴而有禮, 家法穆如朝廷, 少與月沙李公廷龜, 余先祖東皐, 作甲契稧同參者, 皆一代士流也. 金景瑞願追入, 公曰 觀此子, 後必爲逆臣, 不可同稧, 諸公固之, 終不許. 後景瑞以副元帥降虜, 人始眼公之先見. 嗚呼 公之忠憤氣節, 槪見於請誅爾瞻之箚, 而月沙讀而歎曰 此頹波之砥柱也. 方其時賊瞻擅恣凶臆, 滔滔之浸 焰焰之熾, 擧一國 入其掌握, 人或一言觸鋒, 靡粉立判, 擧朝畏其蛇毒狼蝑, 仄目惴惴. 獨公奮然而起, 首倡正論, 不顧死生. 非發於忠肚義腸而然之乎. 世或比之於胡澹庵之請斬秦檜, 而月沙所稱許者, 豈其偶然, 倘使此論 抗辭於西宮危迫之初, 可使賊臣知畏, 彛倫攸敍, 而惜乎 公方居憂, 復誰能之. 公文章贍麗典雅, 知者以爲忠厚者言, 而散逸有若干編. 公於酒無
量, 而飮必口吃, 故自以醉吃爲號. 公卒百有餘年, 幽墟未有顯刻. 五世孫寅漢甫, 鳩工伐石, 以余先誼, 委來屬銘. 噫 公之高名直節, 不待貞珉之揭, 已赫然在人耳目, 何用掘蕪之筆, 以圖不朽之業哉. 然 後孫之欲發揚先烈, 以賁阡麓, 固無其極, 不敢孤其誠, 謹摭其家狀, 而序次之, 仍寓執鞭之願. 銘曰 :
公昔蜚英 克趾世德, 本諸忠孝 展也正直. 處乎亂邦 端笏肅肅, 誰誤彼昏 國有巨慝. 握柄肆凶 彛斁緖覆, 豈無忠贍 親在忍黙. 身今自有 可洩素蓄, 叫號閶闔 滿腔忠赤. 義筆斯凜 曰剮五賊, 遑恤吾身 祗有宗國. 烈哉百年 公名赫赫, 維春之原 衣冠之托. 高四尺邱 可無顯刻, 雲仍胥謀 爰伐山石. 余銘不愧 俾人敬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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竊惟我先祖隧門尙開顯刻實 前輩有志 未遑底事也. 今乃伐石以就刻 豈志事之椹述 亦有時也歟. 謹取後孫之尤著者 若干玆錄于碑陰文. 左尹謇文 參議諫文 參判榮五榮河 文承旨榮輔 蔭都事重權 卽宗孫之祖 文校理輝錫 筵持平重敎 及重岳麟錫 從師華西李先生恒老者也. 而餘不能盡記焉. 九代孫 重龍謹追識
公之生六周甲甲子春立.
都有司 重洛, 宗孫 濟鱗, 常務 鼎錫 恒錫 履錫 斗錫, 有司 台錫 鎬錫 濟榮 濟善 濟悳 義相 稷相 漢相.
9. 金佑明 神道碑
[소재지] 서면 안보2리
[인 물] 김우명(1619년[광해군 11]~1675년[숙종 1])은 조선 중기 인조 때 西人의 일파인 漢黨의 영수였던 金堉의 아들이자 현종의 장인이다. 자는 以定이다. 인조때 진사에 급제하여 參奉과 洗馬를 역임하였다.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인 현종이 1659년에 즉위하자 그는 淸風府院君에 봉해지고 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이후 國舅로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같은 서인인 山黨 계열의 宋時烈과는 반목하는 사이였으며, 閔愼의 代父服喪 문제로 남인들을 귀양보내고, 숙종 초년에 福昌君과 福平君 형제의 행패를 논핵하였다. 그 후 반대파들의 시기가 더욱 심해지자 두문불출하고 국정을 근심 하다가 졸하였다.
○현 황 : 강촌에서 가평쪽으로 가다가 88휴게소를 지나자마자 길가 좌측에「淸風府院君墓域」표시판이 서 있다. 여기에서 산쪽으로 보면 신도비가 있고, 골짜기로 들어가면 상여집이 있으며, 다시 산 언덕으로 올라가면 묘소가 있다.
묘비는 현종의 어필을 새겨 세운 것으로 현재의 것은 1747년(영조 2)에 改立한 것이다. 신도비는 李敏敍가 짓고, 尹深이 썼으며, 金萬中이 篆하여 1687년(숙종 13) 11월에 세운 것이다. 묘역은 강원도 지정기념물 제20호이다.
10. 趙萬永 神道碑
[소재지] 신북읍 지내3리
[인 물] 조만영(1776년[영조 52]~1846년[헌종 12])의 본관은 豊壤이다.
이조판서 鎭寬의 아들로서 영의정 寅永의 형이다. 자는 胤卿이고 호는 石厓이다.
1813년 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다음에 檢閱, 持平, 正言 등의 직을 역임하였고, 1816년에 전라도 암행어사, 1819년에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자 이조참의, 대사성, 금위대장을 거쳐 1826년에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27년에 이조판서로서 어영대장을 겸한 실력자로 부상함으로써 풍양조씨 세도의 기초를 닦았다. 순조가 죽고 그의 외손인 헌종이 즉위하자 호위대장,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역임하면서 왕실을 보호하는 한편, 동생 寅永과 조카 秉鉉, 그리고 洪奭周, 李止淵 등을 요직에 앉혀 세력을 부식하고자 하였다.
1839년에는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하자 천주교 탄압에 미온적인 안동김씨 세력을 타도할 호기로 판단하고, 일대 종교탄압을 전개하고 寅永으로 하여금「斥邪倫音」을 반포케 하여 풍양조씨 세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5~6년간 정권을 독점하였다. 그는 풍양조씨 세력의 좌장이며 핵심인물이었지만, 자신은 顯職을 사양하고 뒤에서 왕세자나 어린 임금의 신변보호와 왕실의 안전을 명분으로 각 군영의 대장직을 차례로 역임하며 오랫동안 군사권을 장악하여 풍양조씨 세도의 군사적 방패막이가 되었다.
그는 혁신정치를 할 수 있는 지위와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동김씨와의 정권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문제와 사회문제를 등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삼정문란을 초래케 하였다.
○현 황 : 신북면 지내리 저수지 북쪽 길가에 남향으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가 벌통에 가려 제2면이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관리가 허술하다. 비석에 총알 맞은 자욱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여러 곳이다. 金興根이 지었고 金世均이 썼으며 1856년에 세웠다. 묘비는 최근에 중수한 御書閣 안에 보존되어 있다. 동생 조인영이 짓고, 아들 조병기가 써서 세웠다.
有明朝鮮領敦金府事豊[1면] 恩府院君贈議[2면] 政府領議政諡忠敬趙公[3면] 石厓神道碑銘[4면](篆額)
<1면>
有明朝鮮 輔國崇綠大夫 領敦寧府事 兼 吏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事 世子左副賓客 五衛都摠府都摠管 豊恩府院君 贈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 觀象監事 諡忠敬 趙公 神道碑銘 竝書.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 觀象監事 原任奎章閣提學 致仕奉朝賀 安東 金興根 撰.
甥姪 崇綠大夫 行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事 同知成均館事 弘文館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經筵日講官 侍講院左賓客 金世均 謹書.
國舅石厓公 旣葬之三年 戊申, 憲宗大王 書下朝鮮領敦寧府事 豊恩府院君 贈議政府領議政 諡忠敬趙公萬永之墓. 配贈德安府夫人 恩津宋氏 祔左. 四十一字 命刻而表之. 弟文忠公寅永 記其陰, 越二十年 丁卯, 孫成夏 將樹神道之碑, 寧夏 持大冢宰洪公在喆所爲狀, 屬銘於興根. 惟余受知於公, 覿公者久, 慕公者深, 其可以老病無文辭, 乃次第歷官行事, 謹述公所以勤勞王家, 聖朝所以崇報功宗者, 書之于石. 公字胤卿, 石厓 其號也. 系出豊壤, 祖高麗開國功臣 諱孟, 入本朝 珪組相繼, 代有進德. 曾祖諱尙絅, 行吏曹判書 贈領議政, 諱景獻 辛丑 建儲密贊大策. 今上 丙寅, 命世祀以酬忠勳. 祖諱曮, 吏曹判書 贈左贊成 諡文翼, 秉直道, 忤權凶, 流竄以卒. 考諱鎭寬, 行判敦寧府事, 兼吏曹判書 贈領議政 諡孝文, 積誠十九年, 伸白父寃, 正廟稱孝子. 妣贈貞敬夫人 南陽洪氏, 府使贈吏曹參判益彬女. 公以英宗五十二年 丙申 五月五日生. 中純祖元年辛酉進士試. 癸酉春 拜顯隆園參奉, 冬擢增廣文科. 明年 陞六品, 除宗簿寺主簿 兵曹左郞文臣 兼 宣傳官 司諫院正言 侍講院司書. 後於諫院則陞獻納司諫, 講院則歷兼司書 兼文學弼善 兼弼善 至兼輔德. 又明年 入弘文館爲副修撰. 時有投匭言瀛錄不協, 公以雖非著己, 人言不可不引. 校理副校理修撰應敎副應敎 誥命過十度, 而一不膺. 冬以暗行御史 按廉湖南, 七閱朔而至翌夏竣事, 黜貧殘, 剔耗蠹, 發潛善, 申積枉, 南民到于今稱之 明年 拜東學敎授 司憲府掌令. 又明年 拜掌樂院司僕寺正, 瀋陽使書狀官, 專理行事, 風裁整勅. 己卯秋 今大王大妃膺世子嬪三揀, 陞通政大夫 承政院同副承旨, 遞爲禮曹參議, 嘉禮成 除右副承旨. 明季 拜分兵曹參議 敦寧府都正, 秋命授吏曹參議, 公以所處不宜, 冒銓任 力辭之, 除刑曹參議 成均館大司成. 辛巳 正月 上以公地望, 可托干城, 擢拜嘉善大夫 禁衛大將. 公悚然曰 與衆平進, 庶或寡過. 且書生何以將兵, 陳懇不許, 連除漢城府右尹 禮曹參判 同知義禁府 春秋館 經筵事. 明年 拜刑曹參判, 十月 世子嬪紅疹 別入直. 十二月 王世子紅疹 又別入直, 加嘉義. 乙酉 除同知成均館事 都摠府副總管 道承旨 拜吏曹參判, 又辭而不居, 移戶曹. 十月 有旨進秩資憲大夫, 拜刑曹判書 都摠管 知經筵, 旋判禮曹. 明年 特除吏曹判書 兼知春秋. 公於先部素自劃, 屢陳章 乞免. 上敦迫隆摯, 黽勉肅命, 大小閑劇, 擧當其材, 獎勵後進, 收拾遠人, 物論洽然謂平允. 拜御營大將 知中樞府事. 丁亥春 王世子代理庶政, 遷訓練大將 除世子右副賓客 陞左副. 七月 元孫誕生, 産室別入直 陞正憲. 戊子 拜判尹, 三月 陞崇綠大夫 判義禁府 敦寧府事. 明年 拜戶曹判書. 庚寅 五月, 王世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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賓天. 公痛殞欲絶, 嬪宮封墓, 不忍躬親其事. □□□辭 兼 世孫右副賓客 冊儲副使. 明年 文祐廟營建, 加崇綠. 又明季秋 王世孫開講, 文忠公入內授書. 公亦□□□導. 又明年夏 典秋宗援, 宋文正追配故事 奏以忠文金公祖淳 從享于正宗大王. 甲午昌 □□改建 進輔國階, 拜判中樞府事. 十月彰德宮訖役 命子堶中 初仕調用. 十日月 純祖禮□, 憲宗卽祚, 追尊孝明世子爲翼宗. 世子嬪進號□□大妃 公以國典例, 授寧敦寧府事 封豊恩府院君. 公上疏請大行王廟 預定世室, 其略曰: 洪維我大行大王, 克類, 全保我世臣 導率我士, 趨兆庶□ 定□□寧用能克享天心, 垂裕後昆. 誕啓萬億年無疆之基. □今後嗣王覲光陽烈之道, 其在於亟擧 不□之儀 干□□ 先王之美 效先王之 □□□□□議 僉同戴戴盛典神人無憾. 時憲宗寶齡 僅八歲, 純元大妃垂簾 同聽政, 自□□之初 先王任公輔養 至是 東□□□ 處禁中朝 □□□□ 三年 而始退 明季 差知實錄事, 此公歷官也. 再三授者不書. 兼銜 則訓練都監 從事□□師 護衛大將 觀象監□□□ 內醫 □□□ 樂三院 司僕軍□□寺 宗廟署 □□ 宣惠廳 舟橋司 京畿勾管堂上 吉凶都□ 則提調 王世子嬪宮入廟 王世孫冊封 冊□□ 使迫接文祜廟營建 慶福昌德昌慶三闕 □□□□ 董貞陵章陵改莎 與濬川之役, 監造進爵. 時樂器書寫 則永興聖祖記績碑 仁陵表石隆記王世子下□堂 □□□□□□□禮□□□□ 寶養隆福殿 景黃閣扁額, 前後以勞錫馬者十, 鷄文皮者九, 給奴婢田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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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二. 辛丑 解兵柄, 自是 閑居不問戶外事. 時與命 □□□□□□□□□□□□□□ 調者 思議所及. 癸卯 十月 上有痘候, 別入直. 旣平復, 命子壻弟姪中 初仕調用. 明年冬 赴賀班 脚忽痿痺 愆於步, 久而未效. 乙巳 公壽躋七十八耆社, 上特賜几杖, 遣承旨宣醞 九卿以上 皆赴宴, 宴需令戶部郞 輸送以梨圖一等樂侑之, 親製壽序, 手書屛風以賜之. 公進箋謝異數, 自聖痘時, 公積久勞心, 已有眼眚. 至冬 長子以暴疾卒, 慟切逆理益昏, 醫殆不能辨物, 時或自力修起居禮, 命以便輿至陛, 扶而上殿詢寢, 啖節甚殷. 丙午夏 綒陵緬奉, 尙能迎哭於郊坰. 秋冬之交 疾劇沈綿, 自大內勞問相續, 日遣太醫診視, 竟以十月十四日捐館舍. 訃聞 上震悼, 擧哀于闕庭, 將臨弔于私第, 文忠公上箚得寢 下敎庀喪 賜東園 副器綿緞麻錦布錢米, 卽日 贈議政府領議政. 不待狀 賜諡忠敬, 至誠服 親綴文 遣閣臣替告之, 及靷 使中貴人護行 御製文以酹之. 及期 又如之. 所以痛□ 而揄揚之者, 愈往愈至. 十二月 九日. 克襄于春川府北開陽洞 艮坐原. 公配府夫人 始葬坡州基谷, 是年 八月 移窆于此, 及公之喪而合祔. 至哲宗 辛酉 十月 十四日, 遷奉于右岡 而向庚焉. 今上 二年 乙丑, 池事金公炳學 歷陳公忠勤勳勣, 絶心茂績, 宜配食純祖廟庭. 上詢于在朝 而可之, 崇德報功 於是至矣. 夫人牧使 贈左贊成 時淵女, 生於儒門, 淑愼 有規度, 先公十三年 甲午卒, 壽五十九. 有二男四女. 南秉龜 吏曹判書 贈諡文肅, 秉夔 兵曹判書 贈諡孝獻 出後季父 文忠公. 女長 卽我孝裕大王大妃, 配我翼宗, 篤生我憲宗. 今上殿下 入嗣寶位, 以倫序考翼宗而母大妃. 次適前承旨李寅卨, 次適今判書兪致善, 次適前郡守金奭鉉. 文肅以從父弟判書秉駿子成夏爲嗣, 蓋公遺志也. 前副提學孝獻繼子寧夏 今吏曹參判 兪之繼子 鎭學公, 方面豊頤 資性敦厚, 視瞻必端 進止有常. 望之儼然, 威可畏 而儀可象. 一團和氣, 見於顔色 發於言笑. 融融若春風萬座, 見確以守己, 寬恕以待人, 周愼以處事, 慈惠以濟物, 少日己望 中士友及隆顯, 朝野推服爲大人長德 己未 丁內憂. 祖妣洪夫人 年踰八耋, 孝文公摠劇務, 少在第時, 公竭誠養奉, 食飮寒煖適宜而進, 家事小大 □綒 纖悉. 戊辰夏 孝文公捐背, 冬祖妣下世. 公特斬衰 而服承重, 含禭靷窆 饋奠之儀 必誠必信, 始終無違禮. 及孤露 事兩姉氏 如母奉邀, 湛樂 未嘗踰□月. 凡事爲多咨稟而行, 務睦婣 喜施與, 親戚義舊之貧窮者, 周其衣食 助其婚喪, 振拔其淪落. 値癸巳大歉 以月俸計口給糧, 麥登而止. 所全活 不知爲幾家. 立朝當官 夙夜匪懈, 綜理事務 率由典式, 度支宣惠 三營諸司 所莉之處 節制度 謹出納. 府庫皆充物. 其於董役 用工少 而成之速, 無不完緻, 自以戚妧□. 當預朝廷事, 進退可否 絶不參聞, 小心謹約 四十年如一日. 惟保聖躬 勉聖學爲分內職, 丹衷炳然 可質神天. 憲廟御撰侑文有曰 : 恢銓注 而榮廟務, 掌□兵而管金穀. 功業不爲不多, 在公特餘事也. 又有曰 公惟導予 一是悃愊, 公惟導予 久矣正直, 汗竹有光金石可勒. 其予私公 鞠瘁盡職, 而今成就 伊誰之力. 百世之下 讀此聖諭, 想見公平生, 而必感泣於當日君臣之際矣. 銘曰
翼翼純廟 世獻祖功, 侯誰配之 忠敬趙公. 懿哉忠敬 鍾靈星嶽, 匪直所立 俊偉卓榮. 維塗維萃 積慶發祥, 乃降文母 陰化善彰. 越稽純祖 曁純元后, 屬以大事 知公重厚. 厚日我沖 子將就在, 卿公拜稽首庶竭忱誠. 外親之尊 嗣王是輔, 若周成時 太師尙父, 師而兼保 啓沃節宣. 疊疊今聞 作我恭先. 克效託付 寔由明命, 淸廟 升歌 頌烈祖聖. 洋洋左右同德元臣, 於千萬年 從與精禋. 有始有終 有年有位. 紀功昭忠 我銘無愧
崇禎紀元後五戊辰月 日立
11. 趙寅永 神道碑
[소재지] 신북면 지내3리
[인 물] 조인영『 1782년(정조 6)~1850년(철종 1)』은 본관이 豊壤이다.
이조판서 鎭寬의 아들이며 임금의 장인인 萬永의 동생이다. 자는 羲卿이고 호는 雲石이다. 1819년 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형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부터 1822년에 대사헌, 1826년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다음 이조참의, 대사성, 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34년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왕의 外祖로서 이조판서에 기용되고, 이어 대제학, 호조, 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그의 형 萬永과 함께 헌종대 풍양조씨 세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839년 천주교 탄압을 주도하였고, 1841년 안동김씨를 압도하였으나 1846년 형이 죽자 실세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10여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가재정의 확보와 민생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자주 건의하였고, 異端이 성행하는 것은 正學이 천명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하여 陶山, 華陽 서원 등에 대해 특전을 부여하고, 충신과 의사를 포상하고, 經明行修한 선비를 발탁하였다. 金正喜와 함께 우리나라 금석문을 수집, 금석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문집으로는『雲石遺稿』20권이 전한다.
○현 황 : 신도비는 신북면 지내리 저수지 趙萬永 신도비에서 북쪽으로 500m 지점에 전면이 西向으로 세워져 있다.
신도비의 비문내용은 趙斗淳이 짓고 글씨는 趙寧夏가 써서 1870년에 세웠다. 묘비는 신도비에서 북쪽으로 200m 지점의 야산에 있다. 묘비의 전면이 東向으로 세워져 있고, 비문의 내용은 아들 조병기가 짓고 金世均과 金學性이 글씨를 써서 1858년에 세웠다. 묘비 전면에는「朝鮮議政府領議政 增諡文忠豊壤趙公 諱寅永之墓, 贈貞敬夫人安東金氏祔左」라고 새겨 있다.
有明朝鮮國議政府[1면] 領議政贈[2면] 諡文忠雲石趙公神[3명] 道碑銘[4면](篆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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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朝鮮國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 觀象監事 原任 奎章閣提學 贈諡文忠 趙公 神道碑銘 幷序.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 觀象監事 原任 奎章閣提學 致任奉朝賀 趙斗淳 撰.
孫 賀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 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弘文官副提學 五衛都摠府副摠管 奎章閣檢校 直提學 知製敎 寧夏 謹篆 幷書.
宰相而能畜德容衆, 法守而道揆, 調娛維匡偕底靖共, 雖無迹可尋. 於是 而闇然日章, 爲後人所未可諼之人也, 必讀書人也. 由余輓近所覩記, 公其庶幾無怍於此也. 公諱寅永, 字義卿, 號雲石, 籍豊壤趙氏. 趙氏之先, 自高麗開國功臣, 諱孟始顯 入本朝 益昌而大. 高組 諱道輔 敦寧府都正 曾祖 諱尙絅 吏曹判書 贈上相 諡景獻 申丑 大榮有密勿功. 今上 丙寅 命世祀于宗組 諱曮 吏曹判書 贈貳相 諡文翼. 考諱鎭寬 判敦寧 兼 吏曹判書 贈上相 諡孝文. 妣贈貞敬婦人 南陽洪氏 府使 贈吏曹參判 益彬女. 公以正宗 壬寅 生于楊根寓第, 有虎守娩室 三夜乃居, 甫九朔, 辨天大日月字. 五歲 授曾氏史略. 八九歲通左氏春秋及諸史 尙書朞三百註. 孝文公 承命編次 惠政年表, 公代勞條分類彙居多, 是年十三也. 孝文公 分司開城, 謀修善竹橋, 有議移用萬月臺舊砌者. 公曰: 圃老有知, 得安諸心乎, 遂亟止之. 己未丁丙憂. 純組 乙丑 中生員試. 戊辰 丁孝文公憂. 丙子 除西部都事, 尋移翊衛司侍直. 戊寅 擢到記直赴 乙卯 魁殿試, 例付典籍, 移持平文 兼秋翼宗冊嬪. 今我孝裕聖母膺德選, 伯氏 忠敬公 諱萬永長女也. 辛巳 文學. 壬午 持斧關北, 歸入玉暑, 拜副修撰 修撰 校理 及 獻納司書. 綏嬪朴氏喪制, 連竄兩儒臣, 公匡救之 又以園官魂宮事, 聯疏屢爭, 而明嫌微, 嚴禮妨, 經據史質 皆出自公手. 癸未 明溫公主吉禮, 用都廳勞 陞通政, 拜敦寧府都正 刑曹參議 同副承旨. 甲申 出爲寧邊府使. 乙酉 內移 轉大司成, 旋授慶尙道觀察使. 公於是藩三世四按三漕倉, 文益公所創也. 公修擧舊制 而矯捄之, 有白土 利於燔造. 館倭欲以歲輸蔘銀易之, 象譯爲之言. 公毅然曰: 國家一拘土, 其易之以利乎. 爾有頸, 獨不畏刃乎. 丁亥疏遞 嶺人祠以享之, 歷吏曹參義, 由副提學, 遷內閣直提學, 特除兼輔德 行首宣傳官. 冬輔德翼廟 攝社稷臘享 以禮貌官 陞嘉善 除同義禁 右尹 禮曹參判 副摠管 同知經筵春秋. 己丑 爲全羅道觀察使, 時湖南饑, 經判賑恤 無損瘠者. 冬內移講書院右諭善. 庚寅 差備局有司關北勾管堂上 拜弘文提學. 五月 翼墓上賓 差宗戚執事 觀象監提調 貢市堂上 辛卯 吏曹參判 典設司提調 都承旨 以小宗伯 奉審忠州貽峰, 還請本州三營保納 以錢代米, 後倂施于湖西海西, 皆公所籌成也. 仍差承文院提調. 壬辰擢資憲 工曹判書 都摠管 同成均判尹 內醫院提調 世孫右賓客, 時洋舶泊洪州 投其國書禮物于島民而去. 公言于朝曰: 中國禁阿片烟, 幷逐洋夷之留廣東者, 我有此事, 不宜不之聞也. 議不咸, 力爭三日, 太臣竟從之. 及有北來褒諭 衆始服公先見 秋世孫將開講, 上特敎公勉以盡心 敎養成就 自是 卯入申出, 日以爲常, 非深病, 雖風雨寒暑 必進焉. 拜右參贊. 時朝議欲通用銀幣, 公以無關於足民裕國, 適以洪奸行王下敎 明公輔導聖學, 公感泣守命, 差翼宗追崇玉冊文製述官, 特除吏吏曹判書 陞正憲 拜內閣提學. 大僚以中考人陞擬府 使請問備 公不自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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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疏遞, 除水原府留守. 時三數卿宰被薄警引入, 大僚又提飭. 公曰 事異而跡同, 遂辭不赴, 除嘗苑暑提調 知實錄事. 丙申 拜禮曹判書 承崇政 判義禁府事 拜大提學 差實錄校正堂上 丁酉 陞崇祿 差嘉禮都監提調 及 敎命文製述官, 特授戶曹判書 差太組御眞移摹都監提調. 戊戌 實錄成, 疏遞 文衡閣學 仍差檢校, 秋復拜大提學 行都堂錄, 旋遞. 己亥 差宣惠堂上, 又拜吏曹判書, 引前事, 奉牌聖母, 敦飭屢下, 遂勉膺, 尋遞. 時邪學熾蔓, 大行誅討, 承命撰斥邪綸音 首尾數千言, 反復明正, 上令印布中外. 冬特旨拜右議政, 屢疏辭, 上連下別諭曰: 東朝則哲之明察, 卿甚賢. 每敎曰: 惟卿可以濟難匡危. 聖母下諺敎曰: 惟我先大王 念五百年宗社之重在於沖孫一人, 其輔導訓迪, 得卿而喜之 而卿貞姿忠心 純行淹識, 謂足以當是任也. 主上叨承艱大, 予以測怛之懇, 書以諭卿, 使主上一聽於卿. 講學焉聽之, 言行焉聽之, 委毘於卿者, 不特古人所謂擧國而聽之. 特授卿輔相之任, 使卿展布積蘊, 報答殊遇也. 遣大宗伯偕來, 公遂出膺, 以明正學 爲闢異端之本, 表獎先賢 風勵人士, 探訪巖穴 揀庸學行爲先務. 復因登對, 陳愛親法祖, 敬天恤民之說. 上令玉堂, 書入備觀. 省飭財賦, 諸衙節冗濫, 峙封椿 以待不虞. 庚子 拜內醫院都提調. 秋有尹尙度 許晟獄, 時株連태繫者 證援多中絶. 公曰: 獄者 天下平也, 上剳請欽恤從疑. 拜宗廟署 禁衛營都提調. 聖母撤簾後 辛丑, 朝參 進袖剳陳勉. 以是年爲英宗建儲再回甲, 請尹志述加贈正卿 施節惠, 幷李忠愍健命 李忠肅晩成 趙忠簡聖復 李忠獻廷橚 子孫錄用. 夏又奏尹忠貞集 祀孫落仕者收用, 陞授領議政, 選洪公直弼爲經筵官, 建都元帥權慄祠 宣額. 文忠公金壽恒不祧, 旣而疏遞 兼 司譯院都提調. 壬寅 復拜元輔, 尋遞, 除奉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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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軍資監都提調. 癸卯秋 孝顯王后昇遐, 差摠護使行狀製述官. 九月 上患痘, 特命入直內閣, 調護醫劑, 盡誠竭慮, 食息不遑自恤 甲辰 特授護衛大將, 秋有鞠獄, 復授元輔, 獄竟遞. 乙巳 乞骸不許. 公於休退有苦心, 自是章凡六上, 輒優批勉留, 拜司甕院 景慕宮都提調. 丙午 綏陵遷, 奉差摠護使誌文製述官. 冬忠敬公捐館舍, 上將臨弔, 公上剳止之. 丁未 差正宗純組翼宗寶鑑纂輯摠裁官, 時揀嬪御, 公與諸大臣入對, 請於坤殿保護加意. 前臺臣李承憲論朝臣不爲議藥之非, 公上剳曰: 其言皆眞切正當, 其事皆的確鄭重, 臣何敢以前席一奏自煩以盡分乎. 願勘臣之罪, 以光萬世使冊焉. 差純朝翼宗純元聖母王大妃 殿尊號都監都提調. 戊申 拜禦營廳都提調. 己酉 六月 憲宗昇遐, 差摠護使. 哲宗自沁邸入承大統, 聖母權同聽政, 公請送軍校, 陪衛本第. 嗣位之前 宜先封爵及官, 公爲賓 次對日 特賜對. 公奏曰: 永平益平懿親也, 必閉門斂跡, 韜晦固所, 以全其家也. 議定中宮殿爲大妃殿, 釐宗廟魂殿徵定殿祝式, 於純祖室引明嘉靖考孝宗之文, 於翼宗室 引英廟, 於景廟祝式, 若魂殿徽定殿, 以爲唐宣宗於敬文武, 以叔繼姪, 而只稱嗣皇帝臣某, 則直書廟號, 可推也. 我朝太廟 高曾以上, 不書屬稱, 或可以旁照矣. 凡所援據, 皆不可易也. 而始用儒賢言, 於魂殿稱皇姪, 於徽定殿稱皇姪妣矣. 儒賢覺其非是, 上章自引, 遂一從公所獻之義. 庚戌 差實錄摠裁官, 乞解, 仍辭兼官諸任. 冬復授元輔, 時公已憊矣, 慈諭隆摯, 必致乃已. 公重追報鞠瘁之義, 乃輿疾而出. 上聞公脚疾, 下錦茵一具, 令近侍口上殿. 旣而有事 赴朝堂, 患猝發, 不克對. 以是年十二月六日, 卒于正寢, 壽六十有九. 赴聞, 上震悼隱, 卒庇終視, 常典有加. 聖母命, 不待狀議, 諡曰文忠, 特旨也. 遺孤體遺意, 不敢受禮葬, 翌年 二月 合封于春川北面三台洞夫人墓, 九月 移奉于稍左 子坐原, 七月 配享于憲宗大王廟庭. 配贈貞敬夫人 安東金氏 郡守世淳女, 端莊有法度, 先公十九年終, 三窆而爲今兆 無男, 取忠敬公第二子秉夔爲嗣, 判書. 三女適金學性 今判書, 李寅禹 進士, 徐翼輔 承旨. 秉夔又無男, 取族兄縣令秉錫第二子寧夏爲后, 今參判. 女殤. 金學性子奎弘 今承旨, 女李鎬命 進士, 李寅禹系子乾夏, 今承旨. 徐翼輔子冑淳 今注書, 女李膺植 公長身秀容, 目彩耀人, 聲出丹田. 孝文公愛重之, 有事 必詢而後行. 事親孝, 疾革 斫指灌血, 居憂 衰麻不去身, 助祭號哭 如始喪父. 事忠敬公, 若君實之於伯康. 御子姪, 篤於隱 而訓必以義方. 姻鄙朋知吉凶, 及門生義舊窮無歸者, 欽恤若不及. 安於儉塵, 可韋編儒, 素如也. 垣屋之不治, 腹飾琓好之不經心, 在公猶疏節耳. 門戶赫寫, 競業畏抑, 若先君子臨之在上 凡有寄遺, 稍涉泉布, 倂謝還. 文章不有師承, 聰明悟詣節絶倫, 硏覈究賾, 不極其至不止. 是故 發而爲用者, 明切精當, 贍博紆餘, 大小考始 必取其所當取, 而曰橫選, 蕪집(示+集)坐邀, 恢公之名. 是自欺吾心也. 嘗不喜更張曰: 古人計慮, 豈不及今人哉. 改絃易轍, 非造次事也. 及登庸, 專務匡君德 勉聖學, 循舊典 率彛章. 若其條奏建白之近於通變, 皆事到手頭不容已也, 而俱可以行之久遠而不替也. 侍憲廟, 內講八年, 而免冠露, 伏必開感聖心, 往往焉. 戊申春燕見, 極言袞闕及時政得失, 繼以涕泣 及大漸, 上執公手歔欷曰: 予病之至此, 實由不見公之久也. 善食酒, 公而剖判, 私而對人話語, 醒後不錯一辭. 每微醺 論古今理亂, 風流溢發 而裁持峻整, 人亦不敢以押也. 民國憂虞 發於至心, 中夜蹶起 或至漣沔. 刑家至說 象數之奧, 以至棋奕小技, 靡不曲暢, 而不自居也. 竊嘗論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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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之猷, 爲憲憲健中而植於外, 旣塗民耳目, 固不待一二論說, 而所自期. 而不及求諸事功者, 其爲處地所掩識者 有餘恨焉. 然述作之有典有則, 爲時軌範, 近世所罕有也. 余以文墨事公 知獎雅矣 而實有所未堪勘當者. 嗚呼, 銘曰:
士所自信 亦厥自期, 公無不備 而莫不宜 耈造在書 世顯於詩, 劬積發揮 彰爲聲施. 大策高文 揚厲盛時, 사詣聰性 裨普公私 地親績茂 欽承疇洛, 曰我百僚 罔或詭隨. 凡所注措 咸中機矩, 可久可大 有守有爲. 先民有程 我儀圖之, 言副其行 尺寸弗差 安危進退 識公者誰, 有鞫其躬 有粉其發 沈思黙念 有酒盈危, 當世之用 後人之怒. 江漢云邈 日月載馳, 苟欲知德 讀此銘詞.
崇禎紀元後五庚午孟夏
12. 趙秉龜 神道碑
[소재지] 신북면 지내3리
[인 물] 조병구『1801년(순조 1)~1845년{헌종 11)』의 자는 敬寶이고 風恩府院君 萬永의 아들이다.
조부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鎭寬이다. 神貞王后의 오라비이다.
1822년 司馬試에 합격하여 蔭補로 世子翊衛使 副率이 되었으며 1827년 문과에 급제하여 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2년 左副承旨를 거쳐 大司成에 승진하였고, 1836년 吏曹參議, 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1840년 副提學, 奎章閣 直提學이 되었고, 1842년에 禁衛大將, 摠戎使, 訓練大將을 역임하였으며, 1844년에 漢城府 判尹, 工曹判書 등을 맡았다. 그는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세도 다툼에서 부친 萬永과 숙부 寅永과 함께 풍양조씨 세도의 핵심을 이루었다.
○현 황 : 신도비는 신북면 지내리 춘천농고 농장(춘천시 쓰레기 매립장) 가는 길에서 북쪽으로 500m 쯤의 밭 옆에 위
치하고 있다. 신도비 前面이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洪淳穆이 지었고 아들 趙成夏가 써서 1877년에 비를 세
웠다. 묘비는 신도비 윗쪽 언덕에 있다.
有明朝鮮兵曹判書[1면] 贈諡文肅[2면] 趙公口荷神道碑銘[3면](篆刻)
<1면>
有明朝鮮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 春秋館事 弘文館提學 同知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奎章閣檢校 直提學 贈諡文肅 趙公 神道碑銘 幷序.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原奎章閣提學 南陽 洪淳穆 撰.
男 資憲大夫 禮曹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 春秋館事 侍講院左副賓客 同知成均館事 奎章閣檢校 直提學 成夏 謹篆 竝書.
奧我憲廟在宥, 文肅趙公 託肺腑懿親, 輔導聖躬, 忠勤著於王家. 將以大展厥蘊, 澤施溥博, 其未克中身而止者, 于今數三十載, 輿人尙誦. 公爲國忱誠, 莫不歎惜, 其九原難作, 公議之彌久不可揜, 蓋如是矣. 公諱秉龜, 字景寶, 系出豊壤, 上祖 諱孟, 佐麗朝 官侍中, 圭組相襲, 入本朝 益大而顯. 高祖 諱尙絅, 吏曹判書, 贈領議政, 諡敬獻, 密贊. 辛丑 建儲大策當宁, 命世祀. 曾祖 諱曮, 吏曹判書, 贈左贊成, 諡文翼, 忤權凶, 流竄而卒. 祖諱鎭寬, 吏曹判書 贈領議政, 諡孝文, 以文翼公幽寃積誠伸雪, 丁卯 稱孝子. 考諱萬永, 翼宗國舅, 領敦寧 豊恩府院君, 贈領議政 諡忠敬, 勳業茂著, 配食純祖廟庭, 妣恩津宋氏 贈德安府夫人, 牧師 贈左贊成, 諱時淵女, 左參贊 贈領議政 文正公 諱浚吉後 以純祖辛酉七月二日生, 公幼而儁口, 不妄言動, 見解敏達 甫始學 已自鉤賾旨義, 季父文忠公 甚器重之. 己卯 今大王大妃 冊膺世子嬪, 公胞兄也. 以戚聯王室, 律身競畏, 惟專意儒者業, 若寒素焉. 壬午 中生員試 丁亥 筮仕南部都事, 轉童夢敎官, 選翊衛司副率, 魁到記賜第. 以元孫誕生時別入直, 陞六品. 旣唱名, 除兵曹左郞文臣 兼 宣傳官 侍講院司書. 戊子 選入弘文館 爲副修撰兼司書 司憲府掌令 副應敎 司僕寺正. 以歲弊使書 狀官赴燕, 裁特淸嚴, 彼中人亦敬歎. 購皇明實錄, 歸獻春邸, 尊亦于皇壇敬奉閣. 庚寅 鶴馭上賓, 差宗戚執事. 籠斂腹用, 載錄無遺, 逮丙午 綬陵遷奉, 憲宗進覽是錄曰: 微我元舅誠謹, 那由以知. 以世孫陞儲陳賀時宣敎官 進通政, 拜承政院同副承旨 刑曹參議. 辛卯 僉知中樞府事. 癸巳 成均館大司成. 甲午 出爲成川副使, 丁內憂. 憲宗 丙申 拜吏曹參議, 丁酉 擢授好調參判 兼 同知義禁春秋館事 都摠府副摠管. 戊戌 漢城府左尹 都承旨, 自是多居此職, 蒐輯院中掌故, 彙爲一書, 名曰: 銀臺便覽. 更子 弘文館 副提學 吏曹參判 奎章閣直提學 工曹參判 同知成均館事. 辛丑 同知中樞院事 禮
<2면>
曹參判. 壬寅 禁衛大將 摠戎使 訓練大將, 三將戎務 紀律嚴明, 部伍整肅. 訓局舊無馬兵試規, 倣禁禦兩營例, 筵稟說. 始以校卒饑料之苟艱, 移惠局, 貿蔘穀萬石, 逐年換貿, 營儲有裕. 嚴松禁 遍植都城內外山, 蒼鬱改觀, 陰雨之備, 亦多刱置. 癸卯 弘文館提學, 憲宗 痘候平復, 特陞嘉義 藝文館提學. 甲辰 宣惠提調, 制節謹度, 一準恒式. 蓄積瀛穀, 充溢厥庾, 露積不垣 廩俸另儲, 爲不恒需者萬計. 內局所貢, 關東蔘未十六萬, 舊逋建白촉蕩 而措劃排供自如, 進擢刑曹判書 兼 知春秋中樞府事 漢城府判尹. 乙巳 特拜吏曹判書, 五世冢宰, 國朝所未有, 而又以處地之異, 屢疏辭不就, 遞移工曹判書, 兼官 則司譯 承文 尙衣 司宰 內醫 孝顯王后殯殿都監 提調 關北勾管 文獻備考纂輯廳 舟橋司 備局有司 貢市堂上, 此公歷官始終也. 是歲 十一月十一日, 忽遘無妄考終, 享年四十有五 赴聞, 上震悼下隱, 卒敎賜東園副器, 仍令不待狀議諡. 至成服 遣近侍宣侑. 翌年 正月 合封于原州爵臺洞李夫人墓. 丁未 八月 改前後葬, 同窆于春川府北銅峴負亥之原, 忠敬公墓 隔一岡. 令內閣撰文, 賜祭哀榮備摯. 今上 丙子 特旨宣侑. 乙亥 翼廟世室, 命以庭享, 皆曠感異數也. 元配贈貞夫人 延安李氏, 觀察使在秀女, 孝順柔嘉有女士則. 先公二十年卒, 繼配貞夫人 安東金氏, 同敦寧 贈吏曹判書 喬根女. 端莊貞一
<3면>
壺範克備, 後公二十一年卒, 墓楊州加佐洞. 取從父弟判書孝貞公秉駿子成夏爲嗣, 忠敬公遺志也. 今判書有一男幼. 公廣顙方面, 器量沈厚, 毅然有不可犯之色, 而其接於人也, 言笑可樂 事親忠養肫至, 毋論公私, 事爲必稟而行, 未敢自專. 忠敬公患 視官務, 盡悅豫之方, 睦婣賑恤 而嘗喜也. 故同屬於先意承奉宰成都時, 聞母夫人疾, 谻星夜歸侍. 竟遭艱, 攀號幾絶, 以未得竭誠於始癠 爲至痛. 且謂崇 在甛瓜, 不復近口. 季氏孝獻公少弱, 從氏孝正公早孤, 友之篤而敎之嚴, 一視無間也. 通才達識 擩染有素, 秉執之牢確, 可以託六尺寄百里 記性過人 博涉群書, 嘗曰: 士大夫進身事君, 要當誦鍊典故 尤着力於東國文獻, 所以事或疑難, 援引若講究, 日親簿書 剖判如流. 而延覽四方人士, 一識名面, 久而不錯. 有誠心質疑者, 隨機指畵, 若己所當矣. 援人才, 雖曲藝小能, 期於成就. 見其有不是處, 面折無少饒. 或干以躁競之習, 輒黙然使其人愧服 自少時 出入禁闥, 一規謹嚴. 每春秋節, 只進文房之具曰: 華麗供翫, 有違導沖辟之道. 對講官語必問筵中酬酌, 以聖學將就, 懃懇溢於色辭. 及告謨猷于內, 非聖賢格言 朝宗良法, 未嘗陳之. 爲國家事, 單心竭力, 摠不出遠圖. 故管金穀 掌甲兵, 倚畀旣重. 所歷諸司著績, 永有賴焉. 爲文馴雅有典則, 詩亦淸警可誦, 膾炙於人者 多矣 公每赴闕, 婦寺之屬 咸震肅屛息. 後因掖隸起闕, 至以趙文肅不在 爲中朝之所發歎, 而嘗語及公曰: 元舅剛毅堅確, 守正不撓, 人莫不畏憚. 常人之情 過於畏憚, 則亦不能無厭苦, 然凡擔當國事者, 苟不如是 其何以有成乎. 忠敬公泣曰: 吾兒平日 雖無事功, 以國耳公耳 矢心可質神明, 公之受知於君父者如此. 以忠敬公厚德, 抱玆譭痛, 以公豊賦, 嗇於其壽, 理乎命乎, 吁 亦悲哉. 盖其質行淳謹, 似石丞相, 力辭銓衡, 似司馬涑水. 斷斷衷赤 直前無隱, 寇菜公之朴忠, 其近之歟. 嗣子判書君謂淳穆, 以早辱公知, 持狀問銘, 而文忠公旣表其墓, 可作百世徵信, 何庸贅爲. 顧無文而不辭者, 義不敢也. 遂爲之銘曰:
詩讚嶽降 王舅維申, 作楨于周 公乃其人. 忠貞奕閥 懿玆藎臣, 惟孝惟友 天植惇親. 導迪沖辟 非道不陳, 謂道斯何 尊主庇民. 滿腔血忱 而質諸神, 確乎有守 莫或緇磷. 容衆包細 儼然垂紳, 苟利於國 誠홀肫肫. 全鼎一臠 壯壘峙囷, 五葉握銓 謙畏逡巡 天若假年 功業莫倫, 未究厥施 胡不中身. 撫昔恩言 屢發重宸, 留有餘庥 必後者仁. 墓木雖拱 覩記隔晨, 忠敬幽宅 山麓相隣. 名德趾美 共齊嶙峋, 悠久不泐
<4면>
視此貞珉.
崇楨紀元後五丁丑 八月 日 立
13. 趙秉夔 神道碑
[소재지] 신북면 지내3리
[인 물] 조병기(1821년[순조 21]~1858년[철종 9])의 자는 景冑이고 호는 小石이다.
조부는 鎭寬이며, 부친은 寅永이다.
1845년 문과에 급제하여 正言, 掌令, 吏曹參議 등의 직을 거쳐 開城府 留守가 되었다. 1855년에 황해도 관찰사에 이어 五衛都摠府 都摠官, 司憲府 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1857년에 右參贊으로 純元王后가 죽자 殯殿都監堂上을 겸직하다가 殯殿都監 幕舍에 화재가 일어나 파직당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복직되어 兵曹判書를 거쳐 摠戎使 직을 겸하였다. 그는 사촌형 秉龜와 함께 豊壤趙氏 세도정치의 전위 역할을 수행하였던 인물이다.
○현 황 : 신도비는 신북면 지내리 조인영 신도비가 있는 맞은 편 서쪽 언덕에 있으며 전면이 서향으로 세워져 있다.
그 내용은 金炳國이 짓고, 아들 趙寧夏가 글씨를 써서 1884년에 세웠다. 묘비는 신도비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있으며 묘비 전면에「朝鮮 正憲大夫 兵曹判書 豊壤趙公諱秉夔之墓, 贈貞夫人安東金氏祔右」라고 표시
되어 있다.
大朝鮮國兵曹判書贈[1면] 議政府右[2면] 議政諡孝獻小石趙公[3면] 神道碑銘[4면](篆額)
<전면>
大朝鮮國 贈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侍講院傳 行正憲大夫 兵曹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 春秋館事 同知成均館事 經筵日講官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孝獻 趙公 神道碑銘 幷序.
大匡輔國崇綠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經筵官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侍講院事 原任奎章閣提學 安東 金炳國 撰.
不肖 男 輔國崇綠大夫 行判敦寧府事 兼 吏曹判書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 訓練院事 奎章閣提學 侍講院左賓客 寧夏 謹篆 幷書.
嗚呼 孝獻趙公之爲千古人, 於焉二十有七祀矣. 倘公雖今在世, 去中壽且餘多年. 苟能丕享引考, 自以王室肺腑, 必有所卓然事功, 名聲之垂於後, 殊未可涯量, 而天不假年, 使其平生志業, 蓼蓼無可見處, 豈非命耶, 悲夫. 公諱秉夔, 字景冑, 號小石, 豊壤人. 上組高麗開國功臣 諱孟, 入本朝, 珪組奕世, 名德相望. 至□□□ 號鶴塘, 吏曹判書 贈領議政 景獻公, 密贊. 辛丑 建儲 秉執堅確, 當宁命世祀, 寔公高祖也. 曾祖諱曮 號永湖, 吏曹判書 贈左贊成 文翼公, 悟權凶 流竄而卒. 祖諱鎭寬, 號柯汀, 吏曹判書 贈領議政 孝文公, 伸雪文翼公幽寃, 正廟稱孝子. 考諱寅永, 號雲石, 領議政 文忠公, 配享憲宗廟庭 妣贈貞敬夫人 安東金氏, 郡守 贈吏曹判書 諱世淳女. 右議政 文忠公 諱尙容後也. 本生考 諱萬永, 號石厓, 翼宗國舅, 領敦寧府事, 豊恩府院君 贈領議政 忠敬公, 配享純祖廟庭, 是爲文忠公伯兄也. 妣贈德安府夫人 恩津宋氏, 牧使 贈左贊成 諱時淵女. 左參贊 贈領議政 文正公 諱浚吉後也. 純祖 辛巳 正月二十五日 公生, 以忠敬公第二子 出爲文忠公後. 弱不好弄, 擧止凝重. 且聰悟潁發, 就傳受學, 往往有質問之難對者. 忠敬文忠兩公 甚器愛之. 及長謹飭淬礪, 自持如韋布, 絶祛紈味, 人咸以遠大期焉. 庚子 特除童蒙敎官, 爲孝裕大妃承候也. 辛丑 特授果川縣監, 以文忠公晬甲在明年爲榮養也. 甲辰 擢柑製, 第二名賜第. 翌年 唱名, 特授弘文館修撰, 連拜副應敎 應敎文臣 兼 宣傳官 西學敎授 司僕寺正 司憲府執義 成均館司成 議政府檢詳 舍人 兵曹正郞. 丙午 特授戶曹參議 陞通政 拜承政院同副承旨. 丁忠敬公憂 服闋拜大司成 吏曹工曹參議 曹司 五衛將 敦寧府都正. 庚戌 都承旨 以孝定殿享官勞, 陞嘉善, 漢城府右尹 戶曹參判 都摠府副摠管 同知春秋館 義禁府 中樞府 經筵 實錄事. 丁文忠公憂 服闋, 拜吏曹刑曹參判 副提學 經筵日講官 特陞嘉義. 甲寅 出爲開城府留守, 翌年 移拜黃海道觀察使. 又翌年 特授都摠管 陞□□ 刑曹兵曹判書 大司憲 左參贊 知敦寧 春秋 經筵 義禁府事 同知成均館事. 丁巳 以嬪殿都監提調, 勞陞正憲. 戊午 特除摠戎使, 提擧 則掌苑 司譯 雲監 備局 造紙 內醫院, 此乃公歷官大略也. 其在秋判, 有獄案疏決之命, 審奏多平反 其在兵判, 再經大政 而甄拔淹滯 物情稱允. 其在開留 是府桐鄕也. 勵精圖理 大修學宮, 都試沒技 狀請爲式, 儒武蔚然興起 又捐八千金, 散給各廳各
<후면>
面, 以爲蘇捄之資, 士民頌惠. 其在海西, 察列郡糴弊, 宮庄民戶之漏免者, 啓稟査括而均分, 全省賴焉. 公以宿疾彌篤, 無以受摠使符, 上章乞解, 竟於三月一日 考終于正寢, 享年僅三十八. 葬于春川三台洞 先兆乾坐原後, 賜諡孝獻. 慈惠愛親曰孝, 嚮忠內德曰獻. 以子貴 贈右議政 配贈貞敬夫人 安東金氏 判敦寧 文貞公 逌根女, 先公十五年卒, 移窆合祔. 配貞敬夫人 全州李氏, 縣令 承沼女, 俱無育. 以三從兄縣令贈吏曹判書秉錫第二子寧夏爲後, 今判敦寧. 有一男, 東澗公 容儀儁朗. 宇量宏深 偉然有宰相器. 而內行淳備 以孝友爲本, 日侍兩庭 忠養盹至, 左右供歡 粥粥若無能焉. 伯氏文肅公 忽遘無妄而見背. 公以棟梁之折 痛割靡定. 時忠敬公患視官 扶護同屬, 晝夜不離側. 六七年間 喪威震剝 門祚零替, 公煢孑銜恤 如不欲生, 而仰慰邱嫂, 務盡誠意. 與諸姊共其憂樂, 以至親戚之困窮者, 克體先範, 急難賙救, 惟恐或忽 凡應事接物, 沛然曲當, 縝密而無滯, 牢確而不擾. 溫和著於外, 而內守固自如. 性分通明, 兼以家庭聞見, 一切需世應用之具, 無不包括於胸中, 而其所展施 纔一二. 留臺安瀋而止, 此可以嘗臠, 而知鼎耶. 自夫勝冠 出入禁������, 小心謹愼, 宦妾輩莫或干以私 平居不喜徵逐於芬華, 泊如也. 方其疾革, 戀結起居, 以貽㡱慈聖, 屢發於臨均, 甚可哀也. 公之諱音 一番行路, 駐足曰 此家此人豈至斯乎, 得於人可見. 憲廟嘗稱, 而自公之沒, 不能無疑於福善之天 今其嗣胤, 克紹其美, 文學績庸 爲世所重. 詩云 孝子不匱 永錫爾類者, 其斯之謂歟. 銘曰:
天稟非偶 庭訓是資, 孝友與政 志行于玆. 周通淵博 緊無不宜, 觀厥薄試 庶推而知. 假以年壽 爲國체蓍, 桑莫究展 理難諶斯. 善人受報 多在後時, 嗣有趾美 門戶如之 夫奚憾焉 存沒可悲, 百世靦想 視此銘辭.
開國後四百九十三年甲申 三月 日 立
14. 閔泳徽 神道碑
[소재지] 동면 장학1리
[인 물] 민영휘(1852년[철종 3]~1935년)의 초명은 泳駿, 자는 君八, 호는 荷汀, 春川留守 斗鎬의 아들이다.
1877년 庭試文科에 급제하여 민씨 척족세도의 지원을 업어 注書, 說書, 正言, 副修撰, 同知經筵事 등을 거쳤다. 1884년에 金玉均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을 진압하였고, 1886년에 參議, 內務府事, 都承旨, 그 이듬해에 駐剳日本辨理公使를 역임하고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어 1889년에 江華府 留守, 協辦內務府事 등을 거쳐 1891년 이후 민씨 척족정권의 세도가로서 經理使, 吏曹判書 등을 거쳐 1893년에는 內務府 督辦, 通營使, 經理使, 宣惠廳 堂上을 겸직하면서 군사권 및 경제권을 장악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 의거가 일어나자 청의 원세개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동학군 토벌을 기도하였으며, 갑오경장으로 민씨 척족과 함께 실각하여 任子島 귀양형에 처해졌으나 도중에 탈출하여 평양으로 잠입하여 청나라 군에 생포되어 중국으로 압송되었다. 이듬해 대사면령으로 귀국하여 中樞院 議長, 憲兵隊 司令官, 侍從院 卿, 表勳院 總裁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정부로부터 子爵의 작위와 함께 은사금까지 받았다.
○현 황 : 신도비는 동면 장학1리 마을 뒤 야산 밑에 있다. 현재 신도비 위로 소나무가 기울어져 이를 전신주로 떠받쳐
놓고 있는 실정이다. 신도비의 내용은 아들 閔衡植이 짓고, 글씨는 아들 閔大植이 썼으며, 아들 閔奎植이 篆
額을 서서 1942년에 세웠다.
신도비의 내용 중 제4면 庚戌年 記事의 부분은 再刻한 흔적이 역력하고, 年月日 부분도 다시 새겨 놓았다. 묘는 신도비 바로 뒤의 야산 언덕에 있고 묘비는 민영휘 자신이 그 내용을 써 놓은「壽藏碑銘」을 1905년에 세운 것이다. 민영휘 묘역은 石物 등이 상당히 아름답게 치장된 곳으로 춘천지방에서는「민씨묘」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소풍처로 유명한 곳이다.
사호하[1면] 정여흥[2면] 민공신[3면] 신도[4면](전액)
<1면>
皇考 賜號 荷汀府君 神道碑
不肖 衡植 泣血 謹撰
不肖 大植 泣血 謹書
不肖 奎植 泣血 謹篆
嗚呼, 我皇考 至性卓行, 有可以垂示來後者, 固非不肖輩之所可私也, 亦非不肖之所敢陳也. 而先君嘗自述壽碑銘, 仍戒毋求人, 文字則將湮而無徵, 謹綴其事行之著且大者, 與夫踐歷浚承之前逸者, 追補壽碑闕略, 實不肖之所不得已也. 公姓閔, 諱泳徽, 字君八, 賜號荷汀, 本貫驪興. 尙衣奉御 諱稱道, 寔公初祖. 二十世有諱蓍重, 訒齋 大司憲, 寔公七代祖 六傳諱斗鎬, 判敦寧 贈議政 諡孝獻 贈貞敬夫人 靑松沈氏, 贈協辦 諱愚永女, 寔公考妣. 以哲宗 壬子 五月十五日 生公于廣州古邑里第. 公偉軀粹面, 晳兩盼, 髥鬢疏而長, 聲音若出金石, 性度仁而剛. 聰明特達, 一見一聞, 未或遺忘. 遇事謹愼好問也. 先妣平山申氏, 考諱命奭, 監役 誥封. 貞敬夫人儀範具在府君撰追記中. 己酉四月五日生, 以乙卯正月二十九日卒. 後二十又一年 乙亥十二月五日庚辰, 公考終于京城寬勳洞竹東館舍, 壽八十四. 十三日戊子, 合封于春川獐項里癸坐原先妣竁
<2면>
右. 孤子衡植 卽不肖, 男丙疇 典衛, 丙吉. 女 安東金舜漢 前典衛. 仲子大植, 男丙壽 前監造官, 丙玉 丙燾父季父, 丙玩 丙瑄 丙玿 丙珷 四女, 長適仁同張智煥. 叔子奎植 前秘書院丞, 男丙瑞 丙瑜. 女一. 季子天植 參奉, 繼男丙燾, 婿李裕翼, 男 弘宰 達宰, 女 安東金虎圭. 丙玉 男 旺基 承基 孝基, 女三. 丙吉 男 虎基. 丙壽 男 德基 獻基 公基 奭基, 女六, 長適金海金寬羽. 丙玉 男 旺基, 女三. 丙玩 男 興基 豊基, 女一. 丙瑄 女三. 丙燾 女二 男 庚輔, 女一. 德基 男 庚玄 庚白 庚穆 庚和., 女一. 張智煥 男正基, 金寬羽 男 光世 光集. 公 甲午 官至輔國崇綠大夫 左贊成貳師, 擬請奉朝賀致仕治疏 値亂未入徹. 基後 宮內特進, 中樞議長 掌禮傾 奎章學士 太醫卿 陸軍副將 憲兵司令官 扈衛摠管 侍從卿 表勳摠裁 奎章提學 祗候官, 多疊不書. 日講官 親任內大臣 尙方提調 兼銜也. 山陵, 景孝殿上號遷陵都監 敎坊司 提擧也. 校典副摠裁, 進饌進宴堂上, 及儀軌英王冠賓, 慶禮也. 冊諡副使 山陵石物 都提調 石儀提調, 敦役也. 勳一等 特敍大勳, 品秩也. 而光武隆熙間, 閒司漫職 以供候班, 不入中書, 一步定爲艮限, 是公所執有存焉. 少時渡漢江, 有詩云: “十里南來芳艸色, 一人中坐大江聲.” 金相國炳學聞而大許曰: 此君國器, 後必據吾座 及登第, 以假注書召對, 記注詳敏. 上喜曰: 今榜得一良臣. 天褒甚重. 出治寧邊, 恤民興學 修行鄕約. 駐剳東京, 則刱開公館, 應機辦理. 按擦西蕃. 則請設試窠, 振起文學, 尊箕子墓爲陵, 敎民慕聖. 及遞歸, 宣惠廳枵然空虛. 公爲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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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案簿行移 親自判押, 水不停筆, 一夜之間 右袂弊穿. 閱屢月 財穀流通, 倉廩充盈 積久 未頒之軍需官料 莫不支給. 時値國恤, 一應儀軌, 無少苟簡. 次管貢市, 整理嚴明, 邪僞自消, 貢政復新. 重修北漢山城, 堅緻完固. 又修蕩春新營, 規模嚴整, 城池糧餉 甲兵演操, 陰雨之備 莫不盡力焉. 以賓客侍講 离筵釋義詳明. 上亟稱曰: 是文武全材. 至甲午春 匪撓猖獗, 上欲請援淸國, 公進曰: 何忍借人之手, 殘我赤子乎. 哀彼愚氓, 迫於失所 致此紛紜. 宜宣德化 示以惻怛, 使之革心安業. 而若終不悛, 則討以王師. 誅止渠魁 民心自定 脫有緩急, 臣請以兩營死當之 言未行. 而竟値動亂 公則終有天津之行, 奉上密諭也. 遊歷湘滬間. 乙未 承命還國. 是歲冬, 上播遷于俄館, 公陳安民定國之策. 上欲任以軍政, 公備陳不可之義, 辭不承命. 時俄譯金鴻陸, 依俄使幻弄多端, 公正色折之曰: 外使何關我內政 且鴻陸一舌人, 通譯而已, 焉敢乃爾. 遂引退郊外, 無何逆陸因進茶毒. 上及東宮 猝致患候, 東宮尤危重, 中外惶懼, 急召公以太醫卿. 公率醫官 基昌, 入診進凉劑, 竟得平復. 人比老峰, 文忠公之用柳瑺也. 丙午 徽文學校成. 嘗設塾于家, 學徒雲集, 舍不能容. 至是, 上聞之, 賜觀象監司䆃寺基址. 公又買府地及民家屢區, 合建校舍. 旣竣工, 上命其額曰: 徽文. 盖取諸公名而褒之也. 後投百萬, 而爲財團法人, 則其始終所資經用, 悉舍家産以完之 於是 敎徒立銅像於校中, 以識不忘. 是校之設 最爲吾東楛矢, 其於一般實業, 亦以務圖振興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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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 公察時早而見事明, 何莫非爲大衆導掖厚生者也. 未幾而爲庚戌, 忍辱含羞, 專爲王室而應變. 未幾而爲己未丙寅矣. 兩聖相繼陟方, 公痛不欲生, 靡所逮及, 則惟鞠躬盡瘁於大葬. 排淸凉龍馬諸議, 而各合祔于金谷洪陵裕陵, 是也, 而寔遵兩聖遺志也. 公至性根天, 太夫人不安節十年, 邀醫求藥, 風雨不擇. 及丁憂, 行十里, 日必拜墓. 壬寅 孝獻公寢疾, 時公位尊年高, 且子孫僮僕甚衆, 而手自扇爐嘗藥. 居喪如禮, 雖卑幼來弔, 亦必哭泣答之 若乃奉先尊賢, 褒賞孝烈, 賙窮恤災, 日用常行也. 嗚呼 以公遭際, 事功之著 宜不止於此, 而竟至於此者, 噫 其時歟天歟. 立校一事, 是公三十年費心用慮, 矻矻乎育英者 而啓發旣衆矣. 從以成就事功, 亦將不可量焉. 則是殆非公之所造也歟. 嗚呼 盛德, 不肖何足以知之, 亦何敢贅 以溢辭哉. 惟摭其塗人耳目 乘史所載者. 敢告于萬世檀紀 四千二百七十五年 壬午 八月 日 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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