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90

益齋集 七刊本 木板刻(익재집칠간본목판각)

■ 익재문집 제七간본 목판각(益齋文集弟七刊本 木板刻) 익재집 《칠간본》.은 병인(丙寅) 1926년에 저자의 19대손 이규석(李圭錫)이 하겸진(河謙鎭)의 서(序)를 받아 연활자(鉛活字)로 경북 안동(安東) 노림재(魯林齋)에서 6책으로 간행하였다. ↓아래 목판각은 1926년 안동 노림재에서 6책으로 간행된 익재집 목판각 이다. ↑역옹패설 목판각(櫟翁稗說 木板刻) ↑익재난고 목판각(益齋亂藁 木板刻) ↑발(跋) * 지(誌) * 습유(拾遺) ↑효행록 목판각(孝行錄木板刻) ------------------------------------------------------------------------------------------------------------------------------------- ■ 역..

익재 시에 차운하여 - 이달충

동문선 제5권≪오언고시(五言古詩)≫ 익재 시에 차운하여[次益齋詩韻] 이달충(李達衷) 지음 거닐며 창랑수를 노래하고 / 行歌滄浪水。 악목 그늘에서 쉬기를 부끄러워하네 / 恥憇惡木陰。 온 세상이 그 까닭 알지 못하니 / 擧世不知故。 어느 사람이 지금을 풍자하리 / 何人能刺今。 때와 운명은 일정하지 않거니 / 時命難可常。 공명인들 또한 무엇이 유익하리 / 功名亦何益。 어떻게 이 마음 편안히 하여 / 若爲安此心。 피곤하면 잠자고 배고프면 먹으리 / 困眠且飢喫。 토끼 굴(보신책(保身策))을 만들 뜻이 없어 / 無心作兔窟。 일에 부닥치면 울타리에 달라붙는 파리(남을 참소하는 자)가 무서워라 / 觸事畏蠅樊。 한갓 수고로이 연참(먹과 종이 즉 문필)만 일삼았고 / 徒勞事鉛槧。 족히 가문을 일으킬 수 없구나 / 未足興家..

익재(益齋) 이 학사(李學士)의 영친연(榮親宴)에서 - 권보(權溥)

동문선 제14권 익재(益齋) 이학사(李學士)의 영친연(榮親宴)에서 존공(尊公) 동암(東菴)의 시를 차운하며[益齋李學士榮親宴次尊公東菴韻] 지은이 : 권부(權溥 : 1262(원종 3)∼1346(충목왕 2).) 유림의 이런 일을 옛날에도 들었으되 / 儒林此事古曾聞(유림차사고증문) 우리 일문 오늘 성사만이야 했을런가 / 盛事無如我一門(성사무여아일문) 계수를 나누어 부모에게 효도하니 지금 가장 귀하구나 / 分桂孝親今最貴(분계효친금최귀) 홍정띠 전하며 경사 잇기야 요새도 있지만 / 傳鞓襲慶近猶存(전정습경근유존) 새로 지은 큰 집에 경치도 좋거니 / 新廳披豁天慳露(신청피활천간로) 내탕에서 연거푸 사하물이 푸짐하네 / 内帑聯翩上賜繁(내탕연편상사번) 영공의 시를 가져 국사에 엮으려노니 / 欲把公詩編國史(욕파공시편국사) ..

죽림당 익재 유허비 탁본문(개성)

■ 개성 죽림당의 익재 유허비 탁본문 ↑죽림당 유허비(전면) ↑앞면에 고려 시중 익재 이선생유지(高麗侍中益齋李先生遺址) 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면 비문내용/ 이 탁본문은 2007 봄 북측으로 부터 받은 탁본문이다./ 필자 소장본 ● 유허비 탈고 문 先生諱齊賢字中思仕高麗歷事五朝 선생휘제현자중사사고려역사오조 官至門下侍中鷄林府院君諡文忠公 관지문하시중계림부원군시문충공 嗚呼先生德業文章煊炳一世而八年攝國 오호선생덕업문장훤병일세이팔년섭국 上下賴安昭載國乘播人耳目宜其百世之下人之不能忘也 상하뢰안소재국승파인이목의기백세지하인지불능망야 遺址在松京子男山東世所稱竹林堂舊基是也 유지재송경자남산동세소칭죽림당구기시야 迄今四百餘年村人野老猶爲指點況在後昆安得無桑梓之感乎 흘금사백여년촌인야노유위지점황재후곤안득무상재지감호 不肖適尹玆士謹竪石以標之府南..

익재선생 유거지 죽림당 그림 1점(2007) - 최경숙(개성 화가)

↑개성의 익재선생 유거지(遺居地)인 죽림당 후원쪽의 그림(이곳은 북측에서 보존유적 제1541호로 지정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개성시 자남동에 소재하는 익재 이제현선생 유거지(遺居地)의 후원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북한의 화가 최경숙 선생이 2007년에 한지에 그린 작품인데, 필자가 소장한 그림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오른쪽 석비가 익재공의 유거지를 알리는 유허비이고, 좌측 석물은 이곳은 익재선생의 유거지로서 보존 유적지임을 알리는 북한 당국이 세운 표석입니다. 이곳은 포은 정몽주선생의 생거지인 숭양서원 입구 우측에 소재합니다. 2008년 1월 24일 및 2월 13일 현지 답사 결과로 보면 이 그림의 아래 산기슭에 넓은 평지에 유거지가 있고, 앞에는 아름다운 작은 연못이 있었으며, 옆으로는 시냇..

益齋先生壽親詩卷序 - 박팽년(朴彭年)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 익재 선생(益齋先生) 수친 시권(壽親詩卷)의 서문 사람은 천 년 세월이 흘러도 죽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일에는 백 년이 지난 후에도 감동을 주는 일이 있다. 하지만 탁월하고 위대한 재주를 지녀 한 시대를 주름잡고 후세에까지 영향을 주는 자가 아니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익재 선생의 문장과 사업이 혁혁 광광(赫赫洸洸) 함을 사모하였거니와, 동방(東方)에서는 지금까지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르고 있다. 따라서 매번 전배(前輩)들의 유문(遺文)에서 선생의 사적을 보게 되면 일찍이 경의를 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년 봄에 상(上)이, 《고려사(高麗史)》에 사적(事蹟)이 누락된 것이 있고 또 체례(體例)도 어긋난 것이 있다 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

李文忠公古梅記 - 뇌연 남유용(雷淵 南有容)

[뇌연집(雷淵集卷之十四 >記] ■ 李 文忠公 고매기(古梅記) 熊御史旣以天子所賜宋元書歸李文忠。又輟卧內一古梅以副之。其種大播于湖西。至于今不絶。崇禎後再丙辰。有好事者爲致一本於文忠嗣孫判院公家。於是書與梅。離二百年而復合矣。余乃拜手而爲之記曰。嗚呼。江南草澤之中。庶幾有顯皇帝雲孫也不乎。 丁巳三月二十五日書(1737년 영조 14) ------------------------------------------------------------------------------------------------------------------------------------- ● 뇌연 남유용(雷淵 南有容) [생졸년] 1698년(숙종 24)∼1773년(영조 49). [문과] 영조(英祖) 16년 (1740) 경신(庚申) 알성시(謁聖試) 병과(..

익재 선생 화상기(益齋先生畫像記) - 夏坤 再拜 書

■ 익재선생화상기(益齋先生畫像記) 十五世孫 夏坤 再拜 書 惟我先祖益齋文忠公。事高麗忠宣忠肅諸王。官至三重大匡門下侍中。年八十一而卒。自公之歿。至今四百餘年。公之聲名文章。學士大夫誦之不衰。元延祐間。公從忠宣王在燕都。王搆萬卷堂。招延一時文學之士。如姚公端甫,閻公子靜,趙公子昂,元公複初,張公養浩。皆出入王門下。公相與周旋於翰墨尊俎之間。其文雅風流。亟爲諸公所穪賞。又嘗西至巴蜀。南抵吳會。覽其山川之奇秀。民物之殷富。城郭樓臺之瓌瑋巨麗。登臨俯仰。筆墨淋漓。奇辭傑句。膾炙人口。雖窮徼遐裔之人。莫不知東國有益齋先生。可謂盛矣。然此未足以盡公之平生。而爲公之奇節也。余嘗讀公遺集及牧隱李公所撰公墓誌。槩得公之本末。當忠宣之被讒西遷也。麗之群臣無一人爲其主抗言卞誣者。獨公沬血飮泣。奔走叫號於當時執政貴近者。而其與元郞中書則論列歷朝事大之禮。上王翊戴之功。辭意尤剴切懇惻。故見者莫不憐公之忠感..

익재 선생 난고(益齋先生亂藁) 서문 - 목은 이색 서(李穡 序)

■ 익재선생 난고(益齋先生亂藁) 서문 목은 이색 서(牧隱 李穡 序) 원(元)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사해(四海)가 일단 하나의 세계가 된 뒤로, 삼광(三光 해ㆍ달ㆍ별)과 오악(五嶽)의 웅혼한 기운이 한데 어울려 충만해진 가운데 사방으로 고동(鼓動)을 치며 급속도로 퍼져 나간 결과 중화(中華)나 먼 변방의 지역이나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한 세상을 울릴 만한 걸출한 인재들이 이 세계 어디에서나 뒤섞여 배출되어, 농익은 향기에 흠뻑 몸을 적시고 그 정수(精粹)를 채취하여 몸에 두른 채, 이를 문장으로 펼쳐 내어 당대의 치세(治世)를 아름답게 장식하였으니, 참으로 성대했다고 말할 만하다. 고려(高麗)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도 바로 이런 때에 태어나서,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

우봉 도리촌 선영 묘단(牛峰挑李村先塋墓壇) - 이유원

■ 우봉 도리촌 선영묘단(牛峰挑李村先塋墓壇) 후손 유원 찬(後孫 有元 撰) 이씨 옛 족보에 경주 이씨의 선영이 우봉 도리촌(牛峰挑李村)에 있다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데 우봉은 서해안 금천군(金川郡)이니 숭양(崧陽 : 개성)에서 三十리도 안되는 가까운 지점이다. 우리 이씨의 세묘(世墓)가 처음부터 그자리를 얻어서 익재 선생 제현(益齋先生 齊賢)의 묘소와 그의 자제 밀직사(密直使) 창로(彰路)의 묘소가 현재 마을 가운데 있어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왔다 그 위에 선조의 묘소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틀림었다. 경주부 금오산(金鰲山)의 시조의 산소라고 하는 것이 징빙할 수 없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족보에 태복야(太僕射) 열헌 핵(悅軒 翮)과 그의 자제 검교 정승 (檢校政丞) 진(瑱)과 둘째 자제 대제학 송암 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