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益齋集 七刊本 木板刻(익재집칠간본목판각)

야촌(1) 2010. 10. 2. 22:09

■ 익재문집 제七간본 목판각(益齋文集弟七刊本 木板刻)  

 

익재집 《칠간본》.은  병인(丙寅) 1926년에 저자의 19대손 이규석(李圭錫)이 하겸진(河謙鎭)의 서(序)를 받아 연활자(鉛活字)로 경북 안동(安東) 노림재(魯林齋)에서 6책으로 간행하였다. 

 

↓아래 목판각은 1926년 안동 노림재에서 6책으로 간행된 익재집 목판각 이다. 

 

 

 

 

 

↑역옹패설 목판각(櫟翁稗說 木板刻)

 

 

 

 

 

 

 

 

 

 

 

 

↑익재난고 목판각(益齋亂藁 木板刻)

 ↑발(跋) * 지(誌) * 습유(拾遺)

 

 

효행록 목판각(孝行錄木板刻)

-------------------------------------------------------------------------------------------------------------------------------------

■ 역옹패설(櫟翁稗說)


 이 책은 1342년(충혜왕 복위3년) 역옹(櫟翁) 이제현이 저술한 시화집(詩話集)이다.
 
서문에 밝혀 둔 저자의 뜻에 따라 책명을 ‘낙옹비설’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늑옹패설’이라고 읽는 이도 있으나, 현재 ‘역옹패설’로 읽는 것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체제는 전집·후집으로 나누어 각 집이 다시 1·2권으로 되어 있어, 전체 4권이다.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최자의 《보한집(補閑集)》과 아울러 고려시대의 3대 비평문학서로 꼽힌다.
 
●작품소개 


《역옹패설》은 이제현이 56세(忠惠王 3년, 1342년)되던 해 은퇴하여 시문(詩文)·사록(史錄)에 걸친 각종의 고사(故事) 등을 만록체(漫錄體)로 엮은 것이다. 그 후 초간은 익재선생이 살아 계실때 막내 아들 창로와 손자 보림 등이 1363년 4권 1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고, 그 후 1432년(세종 14) 세종(世宗)의 명(命)에 의하여 나라에서 <익재난고(益齋亂藁)>와 함께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중간본》을 간행하였다.
 
당시 김빈(金鑌)의 발문에 의하면 '간행기구 미면결오(刊行旣久 未免缺誤)' 라고 하여 초간 사실을 추인(追認)하고 있는데, 이때, 아울러 초간본에 빠지고 잘못된 부분의 일부를 바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
이 중간본은 국내에는 전하는 것이 없고 현재 일본봉좌문고 조선목록(日本 蓬左文庫 朝鮮目錄)에 보이는 10행 17자의(四周雙邊, 匡郭 17.5~18.7×13.5㎝) 板本이 아닌가 여겨진다.[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
 
다만 국내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은 萬曆庚子(1600) 鷄林府刊(後孫 慶州府尹李時發)이 조선중기 학자 五友堂 金近(1579-1656)의 장서인이 있는 한권이. 화봉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814년(순조 4년) 후손들에 의하여 《익재난고(益齋亂藁)》와 함께 간행된 목판본 4권 1책 외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양장본으로 출판된 바 있고,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영인되기도 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역옹패설》은 전2권, 후2권으로 나뉘어 있고 전집과 후집에 각각 간단한 자서(自序)가 있다. 전집 서에서는 책 제목에 대한 해석을 하였고, 후집 서에서는 시문(詩文)에 관한 설화를 다룬 것을 밝히고 있다.

전집 2권에는 고려 왕실의 조종(祖宗) 세계(世系)부터 학사(學士)·대부(大夫)들의 언행 등 역사·인물일화(人物逸話)·골계(滑稽)가 실려 있다. 후집은 시화(詩話)인데, 제1권은 대체로 중국의 것을, 제2권은 고려의 시인 또는 그들의 시에 관한 것을 주로 다루었다.


●작품내용

 

① 고려가 몽고, 즉 원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한 방법으로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하고 있다. 전집 권1에서 조정의 중신이 몽고어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역관 출신이라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合坐所)에서 역관의 통역도 없이 직접 몽고어로 원나라의 사신과 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자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그의 주체적 자세를 반영한 것이다.
 
② 전통성, 즉 민심의 기반이 없는 위조(僞朝)에서의 영화로운 생활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이 책에서 삼별초(三別抄)정권을 부정적 입장으로 보아 위조라고 생각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이제현은 정문감(鄭文鑑)이 삼별초정부에서 승선이 되어 국정을 맡게 되자, 위조에서의 부귀보다 죽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지키고자 하였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③ 무신정권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이제현은 오언절구와 시를 인용하여 주먹바람(拳風), 즉 무신의 완력이 의정부를 장악하는 공포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이제현은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필적할 만큼 융성하였으나 근래에 산중에 가서 장구(章句)나 익히는 조충전각(雕蟲篆刻: 수식을 일삼는 것)의 무리가 많은 반면 경명행수(經明行修: 경전공부와 심신수련)를 하는 사람의 수요가 적게 된 이유를 바로 무신의 난에서 찾고 있다.


곧 학자들이 거의 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깊은 산으로 찾아들어 중이 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문풍(文風)이 진작되는 시점에 오게 되어도 학생들이 글을 배울만한 스승이 없어 도피한 학자였던 중들을 찾아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무신집권기가 초래한 반문화적 폐해를 단적으로 밝히고 있는 예이다.


④ 이 책에는 고려 말기 문학론에 있어서 용사론(用事論)과 신의론(新意論)의 현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현은 한유(韓愈)·이백(李白) 등의 당대(唐代) 시인들을 비롯한 유명한 중국 문인들의 시를 거론하기도 하고 정지상(鄭知常)을 비롯한 우리나라 시인들도 거의 망라해서 그들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배척이나 악평은 삼갔다. 용사에 있어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단어의 사용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명의 사용도 실제정황과 일치하지 못할 경우에는 호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평태도는 시어의 현실성을 강조하였다는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역옹패설》은 저자가 스스로 ‘박잡한 글로 열매 없는 피 같은 잡물’이라 말하였지만 실제 후대인들에게 작자 당대의 현실과 문학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남겨준 요긴한 책이다. 또한 《파한집》이나 《보한집》의 성격을 계승하였으면서도 그 외의 다양한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어 흥미롭다.


●해설


통유의 첫 번째 상, 이제현(李齊賢)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이 지향했던 문학과 정치, 철학에 통한 선비, 통유(通儒). 고려를 대표하는 지성 이제현은 가히 통유라 할 만하여 이색(李穡)은 “도덕의 으뜸이며 문장의 본원”이라고 기리기도 했다. 이색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학풍이 이색을 거친 이제현의 학풍에서 연원한다고 생각했다.
 
이제현에 대한 존숭 역시 이들과 함께 지속되었다. 그가 우리 문학사에 기여한 업적은 고문 창도(古文唱導)와 악부 제작(樂府製作)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역옹패설≫의 곳곳에서 그는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脩) 등 당송(唐宋)시대의 문인들을 존숭하고 본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의 산문은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주제를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어서 읽고 이해하기 쉬운데 이는 고문 학습의 결과로 보인다. 또한 그는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이라는 장단구의 악부를 지었고, <소악부(小樂府)>에 우리 민요를 악부 형식으로 옮겨놓기도 했다.
 
◇종합적 성격의 문헌,《역옹패설》
시에 관한 이야기, 역사적 고증에 관한 견해, 경전에 적힌 어구나 사건에 대한 변증뿐만 아니라 작자 자신의 경험이나 주변 인물의 일화도 담긴 ≪역옹패설≫은 저작의 성격이 단일하지 않고 종합적이다.

이런 성격은 후대의 저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서거정(徐居正)의 저술 중에서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등 세 편은 모두 이제현의 ≪역옹패설≫을 염두에 둔 저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립적인 저술의 모본이 되었건, 종합적 저술의 비조가 되었건 ≪역옹패설≫은 뒤로 이러한 유형의 소재와 글쓰기의 모범이 된다.
 
◇올바른 인사(人士)가 걸어야 할 진리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제현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칩거하며 ≪역옹패설≫을 저술한다. 덕분에 이 책을 통해 잡다한 경사 고증(經史考證)과 사실 핵론(事實劾論), 문예 비평(文藝批評) 등 이제현의 박학다식을 볼 수 있지만, 또한 올바른 인사(人士)가 걸어야 할 마땅한 진리의 길에 대한 그의 고민과 확신을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그는 고려가 원 제국의 질서 아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바탕에서 정치의 가치를 찾고 있다. 동일 문명권 아래 개별 민족이나 국가 공동체의 이질성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게 될 우리의 한 모델이 될 수 있겠다.
출처 :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익재난고(益齋亂藁)는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시문집이다.


10권 4책. 목판본. 초간본은 막내아들 창로(彰路)와 장손(長孫) 보림(寶林)이 수집하여 1363년(공민왕 12)에 간행했다. 서문은 이색이 썼다. 원고가 완전하지 않아 '난고'라는 제목을 붙였다.

1431년(세종 13) 왕명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중간했는데, 이때 〈익재난고〉 10권, 〈역옹패설〉 4권을 합본하여 〈익재집〉으로 간행했다. 임진왜란 후인 1600년(선조 33) 후손 시발(時發)이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판본을 발견하여 직접 교정하고 중간했다. 이때 권말에 시문 수편을 추가했다.

서문은 임상원, 발문은 유성룡이 썼다. 1693년(숙종 19) 허경이 경주부윤이 되어 판각을 수정하고 연보와 습유를 추가했다. 마지막 본은 1921년 경주에 사는 후손들이 편집하여 상주에서 간행한 것으로 노림재본(魯林齋本)이라고 한다. 여러 번 중간하여 판본마다 목차가 약간씩 다르지만 본문의 내용은 같다.

권1~4는 시, 권5는 서(序), 권6은 서(書)·기(記)·비(碑), 권7은 비명(碑銘), 권8은 표(表), 권9는 세가(世家)·사찬(史讚)·책문, 권10은 장단구(長短句), 이하는 〈역옹패설〉과 부록이다.
 
그는 시와 산문 모두에 뛰어났는데 특히 시에 관해서는 서거정·김택영이 모두 제일의 시인이라 평했다. 권4에 수록한 소악부 11수는 〈처용가〉·〈서경별곡〉·〈정과정곡〉 등 고려시대에 유행한 한글 고려가요를 악부시로 번역한 것이다.


〈장암가 長巖歌〉·〈거사련 居士戀〉·〈제위보 濟危寶〉·〈사리화 沙里花〉·〈도근천 都近川〉·〈오관산 五冠山〉 등은 직역은 아니지만 모두 가사가 전하지 않는 작품들이므로 원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의 문들은 〈고려사〉 편찬 때 자료로 이용되었는데, 편수는 많지 않지만 여러 사서를 편찬한 사학자답게 사실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한 점이 특징이다. 

 

서(書)는 원나라에서 중서도당(中書都堂)과 승상(丞相) 등에게 올린 글들로 원나라가 우리나라의 국호를 없애고 행성(行省)으로 삼으려는 데 대해 반대한 글과 토번(吐蕃)으로 귀양간 충선왕의 구호를 요청하는 글이다.


기(記) 가운데 〈김공행군기(金公行軍記)〉는 김취려와 조충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몽골군과 연합하여 강동성의 거란군을 토벌하기까지의 거란과의 전쟁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으로, 출병부터 세세한 전투까지 생생하게 기록했다.


나머지 기, 비, 비명들은 중수 관련 기록과 개인의 묘지명들이다. 조선시대의 것들이 간략하고 형식적인 데 비해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하여 개인의 전기로서도 가치가 높고, 당시의 정치·사회 동향을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권9의 상(上)은 세가(世家)로 고려 태조부터 충선왕까지 각 왕의 행적을 기록하고 평가했다. 희종까지는 간단하게 왕의 약전(略傳)을 소개했으나 고종 이후는 중요 사건의 내막도 적었다. 하(下)는 사찬(史讚)으로 태조부터 숙종까지 왕의 공과를 평가한 것이다.

내용은 짧으나 우리나라에 신유학이 도입되던 시기에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저자의 사관(史觀)을 보여주는 자료로 사적으로 중요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책문은 토지·인사 제도와 개혁에 관한 것들로 개혁이 절박했던 고려 후기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여기 언급된 토지제도 논의는 고려시대 토지제도 연구에 중요한 사료이다. 권10에 실린 장단구(長短句)는 사(詞)인데, 본격적인 사는 이때 처음 시도된 것으로 이후의 작품과 비교해도 그만이 사다운 사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마지막에 〈동문선〉·〈동국통감〉 등에서 뽑은 습유와 연보를 추가했다. 규장각·성균관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역옹패설, 이제현
출처 : 다음백과사전


●효행록은 고려 후기에 중국 역대의 효행고사를 모아 만든 책.


1책. 목판본. 1346년(충목왕 2) 권준(權準)이 그의 아버지 보(溥)와 함께 중국의 효행설 62장을 선정하고 이제현(李齊賢)의 찬(贊)을 얻어서 엮었다. 1405년(태종 5) 권준의 현손(玄孫)인 근(近)이 주석을 가하여 처음 간행했다. 이후 1600년(선조 33)에 중간했다.

 

책머리에는 1346년에 쓴 이제현의 서문이 있고, 책끝에는 간행 경위를 적은 권근의 후서(後序)가 있다. 본문은 전찬(前贊)·후찬(後贊)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찬에는 순(舜) 임금의 효행 고사인 대순상경(大舜常耕)을 비롯, 24찬의 효행 고사가 실려 있다.


후 찬에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효행 고사를 담은 주후문안장(周后問安章) 등 38찬을 수록했다. 각 장에는 권근의 주해(註解)가 상세히 실려 있다. 권준과 권보 부자는 고려말 주자학 수용에 공이 많았던 인물들이며, 이 책을 통해 당시 효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도덕 규범에 대한 이해 수준을 살필 수 있다. 규장각·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