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益齋先生壽親詩卷序 - 박팽년(朴彭年)

야촌(1) 2010. 9. 1. 03:47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 익재 선생(益齋先生) 수친 시권(壽親詩卷)의 서문 

 

사람은 천 년 세월이 흘러도 죽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일에는 백 년이 지난 후에도 감동을 주는 일이 있다. 

하지만 탁월하고 위대한 재주를 지녀 한 시대를 주름잡고 후세에까지 영향을 주는 자가 아니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익재 선생의 문장과 사업이 혁혁 광광(赫赫洸洸) 함을 사모하였거니와, 동방(東方)에서는 지금까지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르고 있다. 따라서 매번 전배(前輩)들의 유문(遺文)에서 선생의 사적을 보게 되면 일찍이 경의를 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년 봄에 상(上)이, 《고려사(高麗史)》에 사적(事蹟)이 누락된 것이 있고 또 체례(體例)도 어긋난 것이 있다 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사국(史局)을 설치하고 추출하여 기록하되 과목(科目)을 분담하여 책임지고 일을 마무리하게 하였다. 

 

하루는 내가 해진 서적 중에서 초고(草稿) 하나를 얻었는데, 선생의 수친 사적(壽親事跡)이 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또 선생의 부친인 동암공(東菴公) 및 그의 장인인 국재(菊齋) 권공(權公), 열헌(悅軒), 운암(雲菴) 세 분 좌주(座主)와 묵헌(默軒), 저헌(樗軒) 두 노인의 시도 함께 들어 있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삼관(三館)의 제유(諸儒)들이 당시에 모두 화답(和答)한 시를 지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점이었다. 사관(史官)의 성은 오씨(吳氏)이고 이름은 자순(子淳)이었으며, 그 시기는 연우(延祐) 7년(1320, 고려 충숙왕 7)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돌려 보면서 감탄하고 칭찬하지 않은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예문관 봉교 이후 문형(李侯文炯)은 선생의 몇 대 손자이다. 비록 이 일에 대해서 들어 온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렇다고 상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 와서 보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알 만하다. 

 

곧바로 동 암(東菴) 이하의 모든 시(詩)를 그 시권에 기록하여 뒤에도 계속 이어 읊을 수 있게 함으로써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그 사실을 발견하였다 하여 그 연유를 갖추어 써 줄 것을 청하였다. 

 

대개 과거를 맡은 시관(試官)이 잔치를 벌이는 것은 고례(古例)이다. 당나라 때에 양사복(楊嗣復)이 그 어버이에게 칭수(稱壽)한 예(例)가 있고, 오대(五代)에 이르러 마예손(馬裔孫)이 그 좌주(座主)에게 잔치를 열어 위로한 예(例)가 있다. 

 

고려 때는 광종(光宗)이 과거를 설치한 이래로 문생(門生)과 좌주(座主)의 예가 극도로 갖추어졌다.과거를 맡은 시관을 학사(學士)라고도 칭하는데, 학사는 방방(放榜)을 하고 나면 공복(公服)을 갖추고 문생을 거느리고 자기의 어버이를 배알하는데 집에서 잔치를 베풀면 왕이 특별히 음악을 하사하여 문풍(文風)을 성대하게 하였다. 

 

그 명칭을 학사연(學士宴)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양씨(楊氏)와 마씨(馬氏)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선생은 약관(弱冠)의 나이 때부터 충선왕(忠宣王)에게 인정을 받아 연경(燕京)에 있을 적에 항상 곁에서 모셨었다. 

 

이해에 지공거(知貢擧)로 임명되어 역마를 타고 본국에 돌아오자, 충선왕이 많은 하사품을 내려 학사연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으니, 은총이 지극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연회하던 날 밤에 부모님과 세 분의 좌주가 함께 한집에 모이니, 손님들이 문에 가득하고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가 어우러졌다. 

 

남녀노소가 다투어 구경하며 입을 모아 감탄하기를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성대한 일이라고 하였으니, 그 영광이 지극하다 하겠다. 옛날의 양사복은 그 어버이에게 헌수했을 뿐이고, 마예손은 좌주를 위로했을 뿐인데도 사람들이 미담으로 전해 왔는데, 더구나 선생은 어떠하였겠는가. 

 

당시에 성대하게 노래하고 시를 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지금 연우(延祐) 시절이 먼 옛날인데도 사람들이 흠모하여 마지않기를 마치 하루 전에 있었던 일처럼 여기니, 어찌 천 년이 흘러도 죽지 않는 사람이 있고, 백 년이 지난 후에도 감동을 주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감탄하는 것은 일 만들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자손 된 자는 어떠하겠는가.이후(李侯)는 온화하면서 평이한 성품과 고고하면서 단아한 재주를 가진 자로, 금규(金閨)에 출사하여 명성이 자자하니, 능히 세업을 이은 사람이라 하겠다. 내가 듣건대, 대현(大賢)은 반드시 세업을 이을 만한 후손이 있다 하였으니, 태사(太史)의 기록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장차 대서특필(大書特筆)하기를 한두 번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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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益齋先生壽親詩卷序

 

[지은이] 박팽년『朴彭年, 1417년(태종 17) ~ 1456년(세조 2)』

 

人有歷千載而不亡。事有曠百祀而相感者。自非卓犖環偉之材。鳴一代而光後世者。何能爾耶。余嘗慕益齋先生文章事業。赫赫洸洸。東方至今仰之如山斗。每於前輩遺文。至觀先生事。未嘗不擧手加額也。今年春。上以高麗史事有脫逸。且違體例。命改繤修。乃開局抽書。分科責成。一日。僕於爛簡中。得一稿。記先生壽親事頗詳。先生之父東菴公及其舅菊齋權公,悅軒,雲菴三座主。默軒,樗軒兩老詩具在。第恨三館諸儒時皆和之而今亡也。史官姓吳。子淳其名。時延祐七年也。一座莫不傳觀歎賞。藝文奉敎李侯文炯。先生幾世孫也。雖耳聞是事且久。而其詳則未也。逮今見之。喜可知已。卽將東菴以下諸詩。錄其卷。欲聯詠於後。以圖不朽。謂僕實得之。請備書其由。蓋典試者有宴。古也。在唐。有楊嗣復稱壽於其親。至五代。馬裔孫宴慰其座主。高麗自光廟設科以來。門生座主之禮極備。典試者稱學士。學士旣放榜。具公服。領門生。謁其親若座主。邀宴于家。王特賜樂。以賁文風。名曰學士宴。蓋因楊,馬故事也。先生自弱冠。遇知忠宣。常侍燕邸。是年。以知貢擧。馳傳還國。忠宣賚與便蕃。以資燕費。寵已極矣。及燕夕。父母與三座主。俱會一堂。冠蓋雜還。歌吹紛蒙。垂髫戴白。拭目聳觀。萬口咨嗟。以爲前古所未有也。嗚呼。其榮矣哉。楊也壽其親而已矣。馬也慰其座主而已矣。人猶傳誦。以爲美談。況先生乎。是宜一時歌詠之盛也。今去延祐幾許年矣。而人之欽慕不置者如一日。是豈非千載有不亡之人。而百祀有相感之事乎。人之歎之也非好事。固其所也。況爲其子孫者乎。李侯性溫而昜。才高而雅。入金閨。聲名籍籍。可謂能業其家者矣。吾聞大賢必有後。太史之書。何止此哉。將大書特書。不一再而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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