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90

한·중 수교 20년 - 사대주의 산맥을 넘어 ② 익재 이제현

‘팍스 몽골리카’시대, 그의 시는 고려를 지키려는 절규였다. [중앙일보]입력 2012.09.29 00:46 / 수정 2012.09.29 00:46 한·중 수교 20년 - 사대주의 산맥을 넘어 ② 익재 이제현 ▲중국 삼국시대 유비와 제갈량이 넘나들었던 험준한 관문인 쓰촨성 검문각(劍門閣). 여기서 당 수도가 있던 장안(지금은 시안)으로 이어지는 길이 ‘촉도’다.절벽에 구멍을 내 나무를 박은뒤 그 위에 길을 낸잔도(棧道)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현이 충선왕의 명령을 따라 오간 길이다.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북경·北京)에 가는 데 한 시간 남짓이 걸릴 뿐이다. 그러나 육로를 따라 개성에서 베이징으로 1600여㎞의 길을 가야 했던 고려와 조선 때는 무려 50일 정도 걸렸다. 길의 험난함을 별도로 계산..

원나라 수도에 세운 만권당은 고려 자주를 위한 외교사령탑.

원나라 수도에 세운 만권당은 고려 자주를 위한 외교사령탑 [중앙일보] 입력 2012.09.15 00:14 / 수정 2012.09.15 00:34 한·중 수교 20년 - 사대주의 산맥을 넘어 ① 고려 충선왕 ↑700여 년 전 고려 26대 충선왕은 원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만권당을 세워 놓고 쓰러져 가는 고려를 살리기 위한 힘겨운 외교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만권당이 있 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베이징 위위 안탄(玉淵潭) 공원의 전경. 사대(事大)의 겉뜻은 ‘큰 나라 섬김’이지만 그 속내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행하는 외교적 교섭이다. 한반도는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에 있다. 따라서 사대는 역사 속의 우리에게 늘 따르는 외교적 형식일 수도 있었다. 중국과의 수교 20주년 특집으로 그 사대의 고달픔 속..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瑩源寺地寶鑑國師妙應塔碑)

■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 (瑩源寺地寶鑑國師妙應塔碑) [수량] 1 [소재지] 경남 밀양시 황성동 112번지 [문화재지정번호] 경남 지방문화재 제13호 [문화재지정일자] 1972년 02월 12일 [소유자] 경남 밀양시 ↑영원사지보감국사부도(瑩源寺址寶鑑國師浮屠.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 ■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瑩源寺地寶鑑國師妙應塔碑) 보감국사(寶鑑國師)는 고려 말기 충숙왕(忠肅王)때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지낸 고승(高僧) 혼구(混丘: 1251~1322)의 시호(諡號)인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조계종자씨산영원사보감국사비명병서(曹溪宗慈氏山瑩源寺寶鑑國寺碑銘竝書)"라는 비문(碑文)을 지었다, 이때 세운 비석(碑石)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나 밀주구지(密州舊誌) 등에도..

익재문집 발(三간본) - 유성룡

익재문집 발(益齋文集 跋) 류성룡 찬(柳成龍 撰) 1542년 11월 7일 ~ 1607년 5월 31일 경자년(1600, 선조 33) 가을 내가 하촌[河村-오늘날 안동 하회(河回) 마을의 옛지명]에 있을 적에 동도윤(東都尹-동도는 경주) 이공 시발(李公時發)이 새로 판각(板刻)한 《익재선생문집》 인본(印本)을 보내오고, 또 말하기를, “익재 선생은 나의 선조(先祖)입니다. 왜란(倭亂)을 겪은 뒤 내외(內外)의 문적(文籍)이 거의 없어졌는데, 오직 이 책만이 간신히 불타 없어짐을 면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없어져 전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편질(篇帙)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이제야 일을 마쳤습니다. 이를 명산(名山)에 보관하여 영구히 전해지기를 도모하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발(跋)을 지어..

익재선생 연보 후서(益齋先生 年譜 後敍)

익재집 부록 ■ 익재선생 연보 후서(益齋先生 年譜 後敍) 김노응(金魯應) 찬 1757년(영조 33)∼1824년(순조 24) 아, 선생(先生)의 문장 덕업과 성대한 공렬(功烈) 가운데 유구(悠久)히 전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은 동사(東史)에 실려 있다. 하지만 전하여오는 선생의 유집(遺集)도 참으로 소략(疏略)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이 문집(文集)에 기록된 것은 소략한 점이 많을뿐더러, 또 간행(刊行)된 지가 이미 오래어서 판본(板本)이 이즈러져 판별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내가 전에 월성(月城)의 수재(守宰)로 있을 적에 보익(補益)하여 다시 판각할 것을 도모하였었으나 곧바로 직차(職次)가 옮겨졌으므로 착수하지 못하였었는데, 근래 경주(慶州)에 사는 선생의 후손들이 이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동사(..

효행록서(孝行錄序) - 이제현(李齊賢)

익재집 습유 ■ 효행록서(孝行錄序) 지은이 : 이제현(李齊賢)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공[權公-이름은 준(準)]이 일찍이 공인(工人)을 시켜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를 그리게 하였는데, 내가 그 그림에 찬(贊)을 썼으며 사람들이 자못 널리 전하였다. 이윽고 부원군이 그림과 찬(撰)을 국재국로[菊齋國老-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에게 바치니, 국재가 또 손수 서른 여덟 가지 일을 초(抄)하여 나에게 그 찬을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전후로 지은 찬이 모두 예순 네가지 일이었는데, 우구자(虞丘子)에다가 자로(子路)의 효행을 붙이고왕연(王延)에다가 황향(黃香)의 일을 붙였으므로 장(章)으로는 62장이 된다. 그 사어(辭語)가 저속함을 면하지 못한 것은, 대개 전야(田野)의 백성들도 모두 쉽게 읽어 다 알기를 바라서..

금천 도산서원 복설협찬회 발문외 4점

■ 익재선생 도산서원 복설협찬회 발문외 4 점 (益齋先生 道山書院 復設協讚會 發文外 四點) ◈판종 : 금속활자 인쇄 ◈시대 : 1939년(소화 14)/일제 강점기 ◈지질 : 미색 모조지 ◈소장자 : 이재훈 ↑익재선생 도산서원 복설협찬회 발문 ㅣ 크기 : 가로 25.8Cm x 세로 17.7Cm ↑도산서원 복설 파보간행 미납단 종중에 고함과 선조 제행일 참배 종중과 대종회 사항보고 통문. / 크기 : 가로 20.5Cm x 세로 19.3Cm ↑익재선조 도산서원 복설 혈보 간행 파보 법규를 이사회에서 결정한 공지문./ 크기 : 가로 33.1Cm x 세로 19.3Cm ↑익재선생 도산서원 복설 협찬회 임원명단(가로 40Cm x 세로 19.3Cm) ↑개성 도산서원 복설 참여 호소문 한점(가로 55.2Cm x 세로 3..

익재 이제현선생 신도비

익재 이제현선생 신도비 ↑소재지 :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 / 촬영일자 : 2008년 2월 13일(수요일)/ 답사 현지에서 ■ 신도비 건립을 도모한 사람 ◇건립연대 : 무진(戊辰) 1868년 봄에 건립하였음 ◇국당공파(菊堂公波) : 판서 이현직(判書 李顯稷), 승지 이학영(承旨 李鶴榮), 부총관 이용상(副總管 李容象), ◇상서공파(尙書公派) : 좌의정 이유원(左議政 李裕元), 참판 이유응(參判 李裕應), 응교 이유승(應敎 李裕承), 이상 6명이 감독하였고... ◇익재공파(益齋公派) : 익재(益齋) 후손 정언 이용우(正言 李龍雨)는 맏파로서 실상 주관 하였다. 무진(戊辰) 1868년 봄 후손(後孫) 유원(裕元)이 묘단 비(墓壇碑)에 기록하였다.

역옹 이제현(櫟翁 李齊賢)과 상수리나무.

■ 역옹 이제현(櫟翁 李齊賢)과 상수리나무 이색(李穡) 지음 기유년에 과거에 장원한 문생(門生) 유백유(柳伯濡)가 그가 사는 집에 제명(題名)하기를, ‘저정(樗亭)'이라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해 왔다. 그 뜻을 물으니 백유는 말하기를, “가죽나무[樗]와 상수리나무[櫟]는 쓸데가 없는 목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천연의 수명을 다해 자란 것인데, 우리 동방의 학자들이 우러러보기를 태산과 북두성같이 하는 자가 바로 시중(侍中) 익재(益齋 이제현)이다. 익재가 스스로 역옹(櫟翁)이라 일컬었음은 아마도 반드시 연유한 바가 있을 것이다. 백유(白曘)가 선생의 문하에서 익재를 보기를 할아버지같이 하였다.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는 《중용(中庸)》을 저술함에 있어 자주 중니(仲尼: 공자의 자)를 일컬었으니 중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