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 선생 화상기(益齋先生畫像記) - 夏坤 再拜 書

야촌(1) 2010. 8. 27. 00:39

■ 익재선생화상기(益齋先生畫像記)

 

    十五世孫 夏坤 再拜 書

 

惟我先祖益齋文忠公。事高麗忠宣忠肅諸王。官至三重大匡門下侍中。年八十一而卒。自公之歿。至今四百餘年。公之聲名文章。學士大夫誦之不衰。元延祐間。公從忠宣王在燕都。王搆萬卷堂。招延一時文學之士。如姚公端甫,閻公子靜,趙公子昂,元公複初,張公養浩。皆出入王門下。公相與周旋於翰墨尊俎之間。其文雅風流。亟爲諸公所穪賞。又嘗西至巴蜀。南抵吳會。覽其山川之奇秀。民物之殷富。城郭樓臺之瓌瑋巨麗。登臨俯仰。筆墨淋漓。奇辭傑句。膾炙人口。雖窮徼遐裔之人。莫不知東國有益齋先生。可謂盛矣。然此未足以盡公之平生。而爲公之奇節也。余嘗讀公遺集及牧隱李公所撰公墓誌。槩得公之本末。當忠宣之被讒西遷也。麗之群臣無一人爲其主抗言卞誣者。獨公沬血飮泣。奔走叫號於當時執政貴近者。而其與元郞中書則論列歷朝事大之禮。上王翊戴之功。辭意尤剴切懇惻。故見者莫不憐公之忠感公之誠。竟白王無罪。得量移內地。及夫曺頔之亂。其黨之在元者。將欲甘心于忠惠。禍機不測。人心危惧。公又奮然不顧曰。吾知吾君之子而已。遂從王如元。一一辨析王受誣狀。卒獲無事。夫公値國危主辱之日。能以忠義感服豺狼之心。有大功於社稷者再。此豈全軀命保妻子之所可辦哉。由是觀之。雖古之寗兪貫高輩。何以過此。然而今之穪公者。徒以文章之美。游覽之富。名位之赫舃而已。至於公之忠義功烈。可以炳日星而軒天地者。世又不穪何也。惜乎。勝國文献。殘缺散佚。獨有鄭麟趾高麗史一書。又極口訿毁。不少假借。至曰心術不端。處事不合理。雖其書踈謬舛駁。無可取信者。然世之學者以蹸趾去公近。不復爲疑。不深考公事實。又焉知其言之爲誣也。且好議人長短。不樂表章先輩行節。又孰肎爲公辨也。嗚呼。忠宣忠惠之際。讒人交亂。國主被執。王氏之祚不絶僅如一綫。當此之際。麗之爲麗。未可知矣。能視死如歸。脫其君於乕口。使五百年血食之祀。得以復續者。伊誰之力歟。假令公眞有如麟趾言者。不過爲長河之一曲。白玉之微瑕。於公固無毫髮所損。而况其精忠大節奇偉卓犖者旣如彼。則又何心術行事之可論乎。此似出於當時不悅者之口。麟趾遂筆之信史。以斷公平生。徒見其妄也。當公之時。賢而有識者莫如牧隱。而其穪公之辭曰天資重厚。輔以學問。高明正大。故其發於議論。措諸事業者。燁然可觀也。又曰道德之首。文章之宗。功在社稷。澤流生民。其所以尊穪者。若是其至矣。而牧隱之不信。信其不悅公者。其無知識如此。若麟趾者。烏足以知公也。彼徒讀麟趾之書。而不知公者。又何怪乎。余尙論麗之人物。前公而得姜公邯贊。後公而得鄭公夢周。夫姜公以功。鄭公以節義。而使公生乎二公者之世。則獨不足以奏龜州之捷。辦竹橋之死也哉。士各隨遭遇之不同。而所樹立亦有彼此之殊庸。衆人不察其所存。不考其所就。徒欲詆毁之。悲夫。公舊有畫像。藏于十四世孫報恩李覃慶家(장우14세손보은이담경가)。卽古杭陳鑑如筆。湯北村炳龍爲之贊。公嘗失之復得。作詩以識之。公集中所謂此物非他物。前身定後身者是也。歲戊戌(1658 효종 9)。余大父華谷公持湖節。始建廟奉安。覃慶又以十月上旬。歲一祭云。余嘗過覃慶家。得瞻拜庙下。則廣顙隆準。儀像凜然。一見可知其爲間世之傑也。畫亦中間閱兵燹之禍者不知其幾何。猶完好可復百年。意者公之忠義之氣。固不腐朽磨㓕。而得有鬼神者爲之陰護耶。四方之士過是庙者。亦必摩挲太息而不忍去。况爲公後孫乎。其景仰愛慕之心。又何如哉。余與再從兄某。方謀倩工摹寫數本。以廣其傳。遂叙其所嘗慨然者。以爲公畫像記。<끝>

 

崇禎紀元後六十三年丙戌(1706년 숙종 32)正月日。

 

두타초(頭陀草) > 頭陀草冊十二>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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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화상기 요점내용

 

담헌선생께서 ‘익재선생화상기’를 기록 할 당시에 원(元)나라의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화상을 보고 수본의 이모본(移摹本)을 그렸다는 내용인즉 그럼 보은의 청호공 문중 30世 담경(覃慶) 공이 소장한 진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왜정 시 일본에 유출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앞으로 많은 제현들의 고정 있기를 바랍니다.

 

◇화곡 이경억 선생께서 무술년(1658년)에 보은(長山影堂)에 영당을 건립 영정을 봉안하다.

◇담헌 이하곤 선생께서 본 화상기를 기록한 연대는 1706년(숙종 32) 1월 달이다.

 

◇보은의 30世 이담경(李覃慶)공 세계도

17世 익재공 제현(齊賢) →18世 운와공 달존(達尊)→19世 소부윤공 학림(學林)→20世 대언공 담(擔)→21世 청호공 희(暿)→22世 참판공 계반(繼潘)→23世 판관공 식(埴)→24世 눌헌공 사균(思均)→25世 현감공 건(健 : 생부 사권)→26世 생원공 정종(貞宗)→27世 윤(胤)→28世 승의랑공 복익(復益)→29世 오(墺)→30世 담경(覃慶).

 

◇1641년(인조 19)~1708년(숙종 35) 壽 67歲

◇오늘날의 국보 110호 익재화상 당시소장함.

◇2000년 도난당해 2010년 봄에 찾은 가산사(佳山詞) 소장본(所藏本 : 전남 문화재자료 164호)은 1706년에 그

   린 국보 110호 이모본임을 알수있다(소재지 : 전남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4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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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世 화곡 이경억(華谷 李慶億)

   벽오 이시발 아들

 

◇1620년(광해군 12) - 1673년(현종 14)

◇문과 : 인조(仁祖) 22년(1644) 갑신(甲申) 정시(庭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25歲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이(錫而), 호는 화곡(華谷). 서울 출생. 아버지는 판서 시발(時發)이며, 어머니는 승지 신응거(申應榘)의 딸이다.

 

7세에 아버지가 죽고 편모슬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재지가 출중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수재였다.

1644년(인조 22) 25세의 젊은 나이로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사서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귀인 조씨(貴人趙氏)와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된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을 구하려고 간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경성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돌아왔다.

 

1653년 순안어사(巡按御史)가 되어 영남 지방의 민정을 시찰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였다.

이듬해 정언이 되어 수천언의 봉사(封事)로 시폐를 진언하였고, 수찬· 사인 등을 지냈다.

 

1659년 대사간을 지내고 이어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61년(현종 2) 좌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고, 1664년 부제학을 지낸 뒤 한성우윤·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68년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어서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뒤 이조와 호조· 예조· 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1672년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천성이 밖으로는 엄격하였으나 내부로는 따스한 인정이 넘쳤다. 수염이 길고 풍채가 아름다워 일견 미남자였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명백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사의가 간여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화곡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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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곤(李夏坤)

 

◇1677년(숙종 3)∼1724년(영조 즉위).

◇생원진사시 : 숙종(肅宗) 34년(170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4위

◇생원진사시 : 숙종(肅宗) 34년(170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1등(一等) 1[장원(壯元)]위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재대(載大), 호(號)는 담헌(澹軒) 또는 계림(鷄林). 좌의정 경억(慶億)의 손자이며, 당시 문형(文衡)이었던 인엽(寅燁)의 맏아들이다.

 

1708년(숙종 34) 진사에 올라 정7품직인 세마부수(洗馬副率)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인 진천에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 힘썼으며 장서가 1만권을 헤아렸다.

 

성격이 곧아 아첨하기 싫어하고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여행하였고,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각 사찰과 암자를 찾아다녔다. 그의 교유관계 중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이병연(李秉淵)과 서예· 문장으로 유명한 윤순(尹淳), 화가였던 정선(鄭歚) 윤두서(尹斗緖)와의 교유는 특히 주목된다.

 

특히 그의 문집 중에 윤두서의 〈자화상〉과 《공재화첩》에 대한 기록, 정선의 여러 그림에 대한 화평, 당대 및 중국의 화가들에 대한 평 등이 있어 평론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유작 중 〈춘경산수도〉(간송미술관 소장)는 복사꽃이 핀 봄풍경을 연두와 분홍의 담채를 써서 묘사한 것으로, 필치는 세련되지 않으나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보이며 정선의 초기작품과 연관을 보여준다. 이밖에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전한다.

 

문집으로는 《두타초 頭陀草》 18권이 있다.

 

[참고문헌]

◇頭陀草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澗松文華 25―朝鮮南宗畵―(韓國民族美術硏究所,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