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재선생 난고(益齋先生亂藁) 서문
목은 이색 서(牧隱 李穡 序)
원(元)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사해(四海)가 일단 하나의 세계가 된 뒤로, 삼광(三光 해ㆍ달ㆍ별)과 오악(五嶽)의 웅혼한 기운이 한데 어울려 충만해진 가운데 사방으로 고동(鼓動)을 치며 급속도로 퍼져 나간 결과 중화(中華)나 먼 변방의 지역이나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한 세상을 울릴 만한 걸출한 인재들이 이 세계 어디에서나 뒤섞여 배출되어, 농익은 향기에 흠뻑 몸을 적시고 그 정수(精粹)를 채취하여 몸에 두른 채, 이를 문장으로 펼쳐 내어 당대의 치세(治世)를 아름답게 장식하였으니, 참으로 성대했다고 말할 만하다.
고려(高麗)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도 바로 이런 때에 태어나서,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벌써 당세(當世)에 문명(文名)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충선왕(忠宣王)의 지우(知遇)를 크게 받고 황성(皇城)에 따라가서 거하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 조정의 대유(大儒)요.
진신 선생(搢紳先生)인 목암(牧菴) 요수(姚燧). 요공(姚公)과 염공자정(閻公子靜) 염복(閻復)과 조공 자앙(趙公子昻) 조맹부(趙孟頫)와 원공 복초(元公復初) 원명선(元明善)과 장공 양호(張公養浩)와 같은 분들이 모두 충선왕을 찾아와서 노닐었으므로, 선생도 이들과 모두 교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보는 것이 바뀌고 듣는 것이 새로워지는 가운데 자신을 절차탁마하면서 계속 변화시켜 나갔으니, 이때에 벌써 정대(正大)하고 고명(高明)한 학문의 절정에 이르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또 천촉(川蜀)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고, 충선왕을 따라 오회(吳會)를 다녀오면서 무려 1만여 리를 왕래하는 동안, 웅장한 산하(山河)와 색다른 풍속과 옛 성현의 유적(遺跡) 등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구경거리를 모두 남김없이 가슴속에 담았을 것이니, 툭 트여서 막힘이 없는 그 기걸찬 기상이야말로 자장(子長)에 비교해 보아도 거의 뒤지지 않았으리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선생이 중국 조정의 관직에 이름을 올리고 황제의 제고(制誥) 조서(詔書) 등의 글을 관장하면서 대각(臺閣)에서 여유 있게 노닐었더라면, 공업(功業)을 성취한 면에서 앞에 말한 몇 분의 군자들에게 결코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동쪽으로 돌아와서 다섯 임금을 보좌하며 총재(冢宰)를 네 번이나 역임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백성으로서야 행운이라고 해야겠지만 사문(斯文)의 입장에서는 어떠했다고 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우리 동방의 사람들이 선생을 태산(泰山)처럼 우러러보게 되었음은 물론이요, 학문하는 선비들도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나 점차 정아(正雅)하게 바뀌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선생의 교화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옛사람들을 살펴보건대, 비록 그 이름을 중국 조정의 관직에 올리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각자 자기 나라에서 교화를 행한 결과 후세에까지 그 풍도(風度)를 드날린 예가 있으니, 가령 숙향(叔向)이나 자산(子産)과 같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천자를 보좌하면서 천하에 호령을 하는 일이야 어떤 사람인들 원하지 않겠는가마는,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느냐의 여부는 중국 조정의 관직에 있지 않고 교화(敎化)에 있다고 할 것이니, 이렇게 본다면 또 무슨 유감이 있다고 하겠는가.
선생은 저술을 매우 많이 하였다. 그러면서도 늘상 “선친인 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의 문집도 아직 세상에 행해지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소자(少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시문을 한 편 지으면 곧장 버리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그 글을 간수하여 보관하곤 하였다.
이제 막내아들인 대부 소경(大府少卿) 창로(彰路)와 맏손자인 내서 사인(內書舍人) 보림(寶林)이 서로 더불어 몇 권 분량의 글을 모은 다음에 간행할 계획을 세우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말한다. 선생이 수찬(修撰)한 국사(國史)도 병화(兵火)로 인해 없어지는 일을 면하지 못했으니, 남의 책 상자에 들어 있는 단편적인 문자들이야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몇 권의 책자만이라도 속히 간행해야 하겠으니, 두 분은 더욱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아, 내가 어찌 말할 줄 아는 사람이겠는가. 그저 우리 부자(父子)가 선생의 문생(門生)이었기 때문에,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우선 이렇게 소견을 적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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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천촉(川蜀)으로 …… 동안 : 충숙왕(忠肅王) 3년(1316)에 상왕(上王)으로 연경(燕京)에 가 있던 충선왕 대신에 촉 땅의 아미산(峨嵋山)에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3개월 동안 다녀온 것과, 충숙왕 6년(1319)에 충선왕이 중국에 있으면서 티베트 승려를 불러다가 계(戒)를 받고 절강(浙江)의 보타산(寶陀山)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 따라간 것을 말한다. 오회(吳會)는 회계군(會稽郡) 오현(吳縣)의 약칭으로, 절강 지역에 속한다.
[주02]자장(子長) : 사마천(司馬遷)의 자(字)이다. 그가 20세 때부터 남쪽의 회계(會稽)와 우혈(禹穴)과 구의(九疑)로부터 북쪽의 문수(汶水)와 사수(泗水)에 이르기까지 중국 각지를 거의 빠짐없이 종횡무진 유력(遊歷)하면서 비범한 기상을 길러 두었기 때문에, 마침내 《사기(史記)》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太史公自序》
[주03]숙향(叔向)이나 자산(子産) : 모두 춘추 시대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명신(名臣)으로, 숙향은 진(晉)나라 양설힐(羊舌肸)의 자(字)이고, 자산은 정(鄭)나라 공손교(公孫僑)의 자인데, 공자가 이들에 대해서 각각 옛날의 유직(遺直)이요 유애(遺愛)라고 칭찬하였다.
[참고문헌]
◇목은 집 : 목은문고(牧隱文藁) 제7권 > 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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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元有天下。四海旣一。三光五嶽之氣。渾淪磅礴。動盪發越。無中華邊遠之異。故有命世之才。雜出乎其間。沉浸醲郁。攬結粹精。敷爲文章。以賁飾一代之理。可謂盛矣。高麗益齋先生。生是時。年未冠。文已有名當世。大爲忠宣王器重。從居輦轂下。朝之大儒搢紳先生。若牧菴姚公,閻公子靜,趙公子昂,元公復初,張公養浩。咸游王門。先生皆得與之交際。視易聽新。摩厲變化。固已極其正大高明之學。而又奉使川蜀。從王吳會。往返萬餘里。山河之壯。風俗之異。古聖賢之遺迹。凡所爲閎博絶特之觀。旣已包括而無餘。則其踈蕩奇氣。殆不在子長下矣。使先生登名王官。掌帝制。優游臺閣。則功業成就。决不讓向之數君子者。斂而東歸。相五朝。四爲冢宰。東民則幸矣。其如斯文何。雖然。東人仰之如泰山。學文之士。去其靡陋而稍尒雅。皆先生化之也。古之人雖不登名王官。而化各行於其國。餘風振於後世。如叔向,子産。何可少哉。佐天子。號令天下。人孰不慕之。而名之傳否。有不在彼而在此。尙何恨哉。先生著述甚多。甞曰。先東菴。尙未有文集行於世。况少子乎。故於詩文。旋作旋棄。人輒藏之。季子大府少卿彰路。長孫內書舍人寶林。相與裒集爲若干卷。謀所以壽之梓。命予序。余曰。先生所撰國史。尙不免散逸于兵。矧片言隻字。爲人笥篋者。煨燼何疑。則若干卷。不可不亟刊行也。二君其勉之。嗚呼。余豈知言者哉。仍父子爲門生。不敢讓。姑志所見云。 <끝>
동문선 > 東文選卷之八十六 /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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